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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6일(일) 거의 날씨는 여름철 무더위를 맞이해야 할 터~ 오늘은 대구 인근 경산시 드라이브를 나선다.
그 중 무더위를 맞딱드려 다소나마 몸 시원스레 마음 힐링 찾아서 산으로~ 따라서 들른 반룡사(경북 경산시 용성면 용전1길 60)
반룡사는 동해의 낙산사, 남해의 보리암, 서해의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4대 관음도량으로, 구룡산 낙조(落照)의 운해(雲海)는 천불관음의 자비의 미소만큼 아름답다.
내가 좋아하는 접시꽃들이 만개하여 반룡사 앞뜰과 뒤뜰에 매운다. 여름의 절정을 시나브로 알리는 접시꽃들을 보아 즐거운 미소가 흐르고 마음 편안해진다!
반룡사는 신라 무열왕 7년(661년)에 경산 출신 성사 원효(元曉)가 창건하였으며, 고려시대 원응국사(圓應國師, 1051~1144)가 중창하면서 신흥사(新興寺)라 하였다.
이로써 전국의 수많은 석학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당대의 석학 이인로(李仁老, 1152~1220) 또한 반룡사에서 낙조(落照)의 아름다움을 산거(山居)라는 시로 산사의 고즈넉함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대웅전 아래 위 석축과 누각은 위엄이 있다. 더불어 오르는 돌계단은 경사도 높다.
반룡사(盤龍寺)는 신라 문무왕(661~681) 때에 이 고장 압량부 출신 원효성사(元曉聖師, 617~686)께서 창건한 신라왕실의 기원 사찰이다. 원효의 본명이 설서당이며, 신라 고승으로 통불교(원효종, 해동종)을 제창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한국의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고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국가의 동량인 설총선생께서 유년을 원효성사와의 깊은 인연 때문에 여기에서 보냈으며, 태종무열왕 내외가 딸인 요석공주와 설총을 만나기 위하여 자주 넘어왔다하여 왕이 넘어온 산고개를 지금도 왕재(王峴)라고 부르고 있다. 반룡사 대웅전 좌측으로 반룡산 언덕 왕재를 오르는 고개마루가 있다. 이곳은 마치 거대한 용의 등을 오른듯 삼라만상의 온갖 시름을 잊게 한다.
원효성사ㆍ요석궁주ㆍ설총의 행적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듯한 구룡산 왕재는 신라천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최대의 걸작, 삼국통일을 일궈낸 성지로 여기에는 신라천년의 미소를 간직한 자비의 관음도량이 있다. 이곳의 낙조는 아름다운 여인 요석궁주 아유다가 백의관음의 화신으로 아 땅에 다시 나타난 듯 운해마저 한가롭다.
왕재 등산은 모두 3시간여 남짓이지만, 오르고 걷는 발자국마다 관음보살의 가피가 가득하니 하산 길을 뒤돌아보면 아침에 지고 온 걸망은 가볍기만 하다.
왕재를 타고 가슴 속에 담았던 정겨웠던 오늘의 이야기들은 또 다른 내일의 역사를 만들 것이다. 왕재는 우리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아름다워하는 그러한 믿음을 배우고, 체험하는 소중한 추억의 장이다.
설총선생(654~)은 원효대사의 아들로 총지, 호는 빙월당, 시호는 홍유후이다.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아 보았으며, 우리 민족의 최초의 글인 이두문자(吏讀文字)를 집대성한 민족 문화의 스승이다.
그야말로 구룡산 줄기 반룡산 중턱에 자라잡아 전망 좋은 곳, 그리고 마을을 앞에 두고 고즈넉한 산야에 위치한 반룡사는 정말 눈과 맘을 즐겁게 만든다.
대웅전 주변 탁 트인 모습이 시원스레 다가선다. 하늘을 맞대고 아래 마을과 들을 굽어내려다보는 모습에 반룡사 대웅전의 위용과 근엄함이 있다.
반룡사지(盤龍寺址) 석조유물(石造遺物)
반룡사는 조선시대 강력한 배불(排佛) 정책 속에서도 조선 인조 14년(1637)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복현되자 초대 현감 임선백(任善伯, 1637~1641)은 이 모두가 선현의 공덕이라 하여, 옛 조사(祖師)와 성사(聖師)의 은덕을 찾아 구룡산 아래 허물어진 사지(寺址)를 일으키는 대 불사로 조선 인조14년(1641)에 계운, 명언으로 하여금 선당을 세우게 하였다. 이로써 이후 60여년에 걸쳐 대광전(大光殿), 가허루(駕虛樓), 관음전(觀音殿), 향적전(香積殿) 등 모두 26동의 대 가람(伽藍)과 무려 5개의 산내 부속암자(內院庵, 碧雲庵, 大寂庵, 隱仙庵, 安寂庵)와 26동의 대 가람을 완성하고 본래의 신흥사(新興寺)를 반룡사라 고쳤다.
이곳의 석조부재(石造部材)는 이로써 조성된 석탑 , 석등, 당간지주, 부도, 사적관련 비 등의 부재이다.
이 석조부재는 반룡사 번창기와 더불어 배불정책의 폐해와 원인모를 화마로 모두 부서지고, 그 일부가 석축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을 2008년 천불전 해체복원과 함께 이를 수습하여 이 자리로 옮긴 것이다. 본 석조물은 화강석을 깍아 만든 조각과 조형으로 석면에 새겨진 연화(蓮花)문양과 금석문(金石文)은 조선중기의 불교미술과 조형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현 : 영남읍지, 자인읍총쇄록, 신증동국여지승람> / 문안 : 김종국(문학박사), 이경숙(조형예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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