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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당시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Titedios"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Titedios 바울, Titedios 요한"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사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어느 날, "Titedios Amerimnos"라는 아주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를 "매우 신비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숨겨진 하나님의 일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의 뜻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 가운데 헬라어 "아메림노스"(amer'imnos)는 "걱정 없는, 근심 없는, 안전한"등의 뜻으로, "Titedios는 전혀 걱정하거나,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의 이름을 근거로, 예수 믿기 전 그는 걱정과 근심이 아주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거듭난 이후에는 그것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까지 자기들의 이름에 그의 이름을 덧붙여 사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기들 역시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난과 시험을 만났을 때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11:33-38절은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 하나로 모든 환난과 시험과 걱정과 근심과 염려를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가 엘리엇은 현대인들이 5가지의 감옥 곧, "자기 사랑과 근심과 향수(鄕愁)와 선망(羨望 : 부러워하여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람)과 증오(憎惡)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괴테는 자신의 작품 "파우스트"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근심이라는 마귀다"라고 외쳤습니다.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하루 밤 자고 나면 한 뼘이나 자라는 잡초처럼 그냥 내버려두어도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뽑고 또 뽑아도 또 자라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念慮)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천성적으로 걱정과 근심과 염려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걱정과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것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Titedios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 환난과 시험과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없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죽은 믿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의 실재를 돌아보십시오.
문제가 발견된다면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난과 시험과 걱정과 근심과 염려의 현장에 먼저 도착해 계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죠지 뮬러의 말대로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면 믿음이 죽고, 믿음을 가지면 염려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모든 환난과 시험과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그래서 전혀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OOO라고 불리 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부터 16장까지의 말씀은 일명 다락방 강화라고 불리 우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말씀하신 다락방 강화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말씀하신 산상수훈과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3년이라는 공백이 있습니다. 또 산상수훈이 군중들을 대상으로 한 공개적인 가르침이라면, 다락방 강화는 선택된 소수만을 대상으로 실시한 비공개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또 산상수훈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본질과 원리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다락방강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이어질 성령 강림, 그리고 남겨진 제자들 즉 우리가 살아야할 신앙의 원리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산상수훈을 시작하셨던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다락방 강화를 시작하셨습니다. 1a절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여기서 "근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랏소"(taras'so)는 "동요시키다, 괴롭히다, 평정을 방해하다, 불안하게 하다, 휘젓다."는 뜻의 수동태 명령형으로,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근심하는 일을 시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는 것을 그만 두라, 또는 너희들의 마음에 더 이상 근심되게 하지 말라.(Let not your hearts any Longer be troubled)"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다락방 강화를 이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다락방 강화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당신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곧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돌발적인 행동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듣고 본 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인지 모두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가 당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지금은 누구도 당신이 가는 길을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은 수제자 베드로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자, 오히려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이나 당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생각과 감정과 결정과 열정과 헌신만으로는 결코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더욱 제자들의 마음을 심란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어느 정도 명절 분위기가 감돌던 다락방 안은 순식간에 썰렁해지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제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근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주님을 메시아로 아는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수 시간 내에 십자가에 죽어 장사될 것을 아셨고, 그로 인해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약화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비록 자신이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지라도 여전히 예수이시며, 그들의 구주라는 사실은 확신시켜 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근심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향해 근심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영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실 예수께서는, 극도로 이기주의자들이며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킬 바로 그들을 그렇게 위로하시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생은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 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왜 인생은 곤고하게 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보신 하나님은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제까지 반복되어온 감탄사들 보다 한층 더 고조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나 흠도 없이 완벽하고 아름답게 성취되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만족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늘 걱정과 근심과 염려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b절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왜 근심하겠습니까? 왜 밤잠을 설쳐가며 걱정하고 염려하겠습니까? 도대체 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고 왜곡된 가치관과 인생관과 언젠가는 그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유한한 한계 속에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여기며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과 염려도 없습니다. 참된 평안이 충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참된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너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처럼 나도 믿고 신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근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믿으라, 또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나를 믿으라, 또는 계속해서 믿으라.(keep on believing)"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친히 인류의 죄와 허물을 지시고 십자가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뢰하는 것을 계속하라."(keep on trusting)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근심은 신뢰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또 "하나님 안에서(in GOD), 또한 내 안에서(also in ME) 믿으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견해를 취하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당신을 계속해서 믿을 것을 말씀하셨다는 말에는 다른 이견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유다를 설득하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바로 제자들을 모든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해방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주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난과 시험의 문제를 만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저와 여러분을 건지실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고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 설교가 크리소스톰은 바른 설교 때문에 황후의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에 걸쳐 길고 긴 유배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긴 유배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는 날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열렬히 환영하며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때마다 왕후는 그를 불러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왕후가 노발대발하며 "내가 너를 저 바다 가운데로 유배를 보내겠다."고 말하면 그는 "감사합니다. 나를 바다 가운데로 보내시면 내가 사도 요한 같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를 깊은 산중으로 보내버리겠다."라고 말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엘리야 같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내가 너를 죽여버리겠다."라고 말하면 그는 "그것은 내 평생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내가 너를 너의 많은 친구로부터 떼어놓고야 말겠다."는 말에는 조용히 웃으며 "나는 이미 당신 때문에 세상 친구를 다 잃었습니다. 그 덕분에 당신이 아무리 떼어놓으려고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참된 친구를 만났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친구가 되어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폰투스 사막에서 마차가 끄는 노끈에 끌려 다니다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누가 이런 믿음의 사람을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무슨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있겠습니까?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어떻게 절망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 혹시 그가 절망했다면 그것만큼 큰 기적은 세상에 또 없을 것입니다. 평생 천가지 이상의 발명을 하고, 1931년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토마스 에디슨은 "노인이 되어서도 어떻게 그렇게 왕성한 발명활동을 할 수 있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사람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을 소유한 사람이라야 현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영원을 믿는 사람이라야 오늘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걱정도, 근심도, 염려도 없습니다. 조건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과 환경만큼만 최선을 다해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놓고 돌아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히11:1-2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모든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첫 번째 신앙 원리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떠나시는 예수께서 주시는 권면인 동시에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영원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모든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는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또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수께서는 자신을 좇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b)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①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좇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생각과 가치와 습관과 문화를 버려야 합니다. ②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좇는 자들에게도 자신이 반드시 져야할 개인적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본인만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단코 주님을 좇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③ 주님께만 절대 가치를 돌려야 합니다.
주님은 눅14:26절을 통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 가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좇기를 원하는 자들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④ 모든 소유를 버려야합니다. 주님은 눅14:33절을 통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유는 물질입니다. 물질은 땀흘릴 수 있는 현장이 있어야만, 수고를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좇기 위해서는 그것마저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자의 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다 순종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자의 길을 걷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때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또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런 우리를 오늘도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코비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책을 통해 출가한 딸과의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던 딸은, 아이들로 인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고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그는 딸을 향해 아무도 아이를 대신 봐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서 딸이 모든 것을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냥 편한 마음으로 아이를 즐기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네 인생에서 아이가 가장 소중하다는 내면의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시계나 달력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아라. 아이를 돌보는 것을 즐기도록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시계나 달력은 시간을 알려줍니다. 반면 나침반은 방향을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그는 시간 관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보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은 달리는 속도보다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순위를 따르는 인생이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행복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첫 번째 신앙 원리입니다.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권면인 동시에 명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믿음을 삶의 가장 우선 순위로 삼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음을 삶의 첫 번째 우선 순위로 삼고 있습니까? 그것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입니다. 염려하면 믿음이 죽고, 믿으면 염려가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아버지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신뢰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모든 환난과 시험과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Titedios OOO, 곧 결코 걱정하거나,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OOO"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