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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1장 25-27절
숨기시거나 나타내시는 하나님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모습,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살폈습니다. 그들은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야 하고 슬피 울면 가슴을 쳐야 하지만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이 와서 회개하라고 외쳐도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와서 회개하라고 외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모습으로 회개할 것을 외쳤고 예수님의 경우는 먹고 마시면서 외쳤지만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에 대하여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 때문에 귀신이 들렸다, 예수님에 대하여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비난 일색이었습니다. 동일한 진리가 다른 모습으로서 전해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무감각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자들이었는데, 이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으로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셨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믿지 않는(요4:28 참조) 자들에게 권능을 많이 행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 자로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권능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믿지 않는 자들의 완악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체적인 내용, 마태복음 상에서는 복음의 선포 앞에서 무감각한 자들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기 때문에(눅7:29 참조) 복음 앞에서의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 앞에서의 반응이 믿음으로 혹은 믿지 않음으로 나타난다고 때 오늘 본문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25절을 보시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대답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히브리 어법에 이야기를 시작할 때 이런 말로 표현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강조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데(칼빈),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눅10:21) 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는가? 누가복음의 문맥상으로는 분명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말씀이 21절인데 그 앞에 있는 20절을 읽어드리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는 겁니다. 소위 종교 지도자들의 경우는 믿지 않는 자들로 있었지만, 또한 많은 권능을 행한 고을들조차 믿지 않는 모습으로 있었지만, 그들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자들을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런 내용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 그리고 복음을 거절하는 일이 인간의 어떤 결정에 따라 되는 일처럼 보입니다. 성경이 때로는 그렇게 표현하는 외형을 띄고 있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교리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전 성경을 통해 비춰 볼 때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나타내시기 때문에 때로는 복음을 거절하는 일이 있고 때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어쩌면 신학적인 시각에서의 강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각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 ‘우연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말’과 ‘우연 혹은 피조물에 따라서 말하는 것’과 구별한다고 할 때, 그리고 우연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말에도 ‘실체 혹은 본질 자체에 대한 말’과 ‘관계에 대한 말’로 구별한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 혹은 본질 자체에 대한 말’이기보다는 ‘관계에 대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계시하실 때 전 신성의 근원으로서 성부를 말한다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의미에서 성자가 성부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할 때는 성자께서 성부에 대하여 부르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 주기도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할 때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피조물에 따라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고 할 때 이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고, 이 때 아버지란 모든 피조물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아버지요 성령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 9장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으면서도 어떤 표현까지 하느냐 하면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표현까지 돌리는 것입니다(사9:6). 성부 성자라는 관계 속에서는 성부는 성부요 성자는 성자이지만,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는 성자께서도 아버지라 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자는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신성으로서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지만, 인성으로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 반드시 ‘우연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말’로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취하신 분으로서, 달리 말하면 ‘피조물에 따라서 말하는 것’으로서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으로서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지만, 인성으로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으로 있고 바로 후자의 의미에서 지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분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고백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하는데(매튜 풀),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는 다른 아버지의 뜻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고백과 감사를 올리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이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란 겁니다. 그럼 예수님의 고백과 감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그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 즉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물론 그들만을 의미 하는가 했을 때 복음 앞에서 거절하는 모든 자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외적으로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회개하라는 외침도 들었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메시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께서 말씀 하신 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것을 인정해야 했고, 주께서 오신 목적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형식적으로만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했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해석하신 율법의 내용 앞에 자신을 내 비춰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사상, 그리고 율법이 명하는 바를 잘 지키고 있다는 그런 것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거절도 분명 말씀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숨기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달리 말하면 외적인 복음을 들을 수는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내적으로 역사하신 바가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앞선 본문을 통해서 권능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만, 표적과 기사를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럼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은 다 믿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놀라운 사실을 봤지만 봤다는 것이 언제나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31절이 그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죽은 자가 살아나서 증거 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역사가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9장을 보시면 굉장히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2절부터 보시면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2-4)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았다는 것으로 안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았다, 경험했다 하면 그것이 모든 것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10가지 재앙, 얼마나 분명합니까?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는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권능을 행하시던 것을 볼 수도 있고,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2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할 뿐입니다. 당연하게 결과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주 본문인 20절 이하에 보시면 회개하지 않음으로 심판을 행하시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면 회개함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이것을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의 반대적인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이 들려지되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는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의지하는 자, 그리고 복음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 당연히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어린 아이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은 그들 스스로의 깨달음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으셨는데 나타내지 않은 바를 깨달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말씀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받지 들이지 않고는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슬기에 달려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고, 인간의 의지에 달린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특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내용은 이런 면에서 합당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무지하게 하시고, 또 지혜롭지 못한 것 같고 오히려 더 많이 배워야 할 자들에 대하여 하늘의 신비를 알려주시는 것은 어떤 것도 원인으로 있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자들이 믿음에 이르고 다른 자들이 우둔하고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선택에 의한 것이지(칼빈),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구원 받은 자의 의지가 남달라서도 아니며,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없는 데 실행되는 경우가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죄조차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입니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아닙니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면서도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교리만 나오면 등장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선택은 분명 하나님의 비밀한 의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선택만이 아니라 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말하지만, 누가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유기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함부로 선택과 유기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복음을 전한다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 거기에 선택과 유기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선택과 유기의 원인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 그러면서도 선택과 관련해서는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구원의 원인으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믿음을 말합니다. 반면 유기와 관련하여 저들의 심판을 받게 될 때 정죄의 원인은 어디 있느냐? 성경은 유기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저들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직 성경이라고 말할 때 유지해야 할 자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에 우리의 사고를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이성적으로라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논쟁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아담을 예로 든다면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고 한다면 인간 스스로 타락했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타락이 그의 의지의 활동에서 기인하여 행했다고 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 없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베자의 예정론 제3장).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사고를 따라 유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정죄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 자체이신 분으로서 악을 창조하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게 창조한 자들에 대하여 그 스스로 악을 행하도록 하실 수 있으며, 악한 자를 돌이켜 선을 행하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 선한 자들이 그 스스로 악을 행하도록 하실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악의 저자라 말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로서 있어야 합니다.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복음의 역사에 앞서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든, 아니면 믿지 않든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어떤 자들이 믿음에 이르고 다른 자들이 우둔하고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선택에 의한 것이지,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는 복음에 대하여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에 대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특히 ‘뜻’이라는 단어는 ‘선한’, ‘기뻐하시는’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비록 어떤 자들에게는 숨기시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요, 기뻐하시는 뜻이란 겁니다. 또 어떤 자들에게는 나타내시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선한 뜻이요, 기뻐하시는 뜻이란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 그리고 기뻐하시는 뜻이 최고의 이성이며 의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최고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최고의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하면서 감탄해야지, 우리의 이성과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판단이 지극히 깊다고 극히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판단의 심오함을 난폭하게 공박한다. 그리고 우리를 기쁘게 해주지 않는 어떤 것이 있으면 우리는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수군거린다. 이 불만이 터져 나와 공공연한 모독을 자행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바른 것이라고 우리들이 인정하도록 우리를 위하여 규범을 정해 놓으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만족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어리석은 자들을 구원으로 불러주시고 평범한 무리들로부터 사람들을 뽑으사 자기의 나라를 이루시는 그 이유를 더 이상 따져보지 아니하셨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는 우리의 이성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고 기뻐하심이 있다고 말하는데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이성이라는 논리로, 또 그것을 잣대로 해서 하나님께 따져 물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멈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가 이런 것입니다. 이성의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는 항상 선함이 있고 그분의 기뻐하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의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셨기에 나타낸 것을 알게 된 자들은 그분의 뜻에 항복하고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고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의 이유는 물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그 뜻이 선함이요 그분의 기뻐하심을 따라 나왔다는 것으로 족해야 하고, 그것이 곧 우리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묻는 자리는 오히려 주 앞에서 따져 묻는 방식일 때가 많고 죄를 나타내는 자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가 아니라 “왜?”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뻐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으로 우리의 위로를 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8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형통한 일과 곤고한 일을 병행하사 사람으로 장래의 일을 전혀 알 수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전3:11, 7:14).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목적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일을 통해서 적어도 택자들에게 만큼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전3:14). 뜻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거기에 힘을 쏟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더욱 의뢰하는 데 힘을 쏟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 가운데 혹 답답한 일을 만나더라도 우리가 가야 할 자리는 바로 이런 자리인 것입니다. 전도서 3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겠지만(전3:2-4),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27절도 보시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앞서 복음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과 그 결과란 하나님의 뜻, 그분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7절도 같은 맥락인데, 쉽게 말하면 구원의 은혜가 어떻게 인간에게 오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칼빈). 즉 구원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고 오직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는 말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럼 왜 이런 권세를 주셨는가? 요한복음 17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권능의 원천이신데(시62:11), 자신의 모든 권세, 특히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권세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맡기셨다는 것입니다(매튜 풀).
아버지 외에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은 먼저 아들에 대하여 바르게 알려면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바에 따라야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고자 한다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가를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으신 아버지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마음이 그 유한한 제약 안에서 갖는 이해력으로 그리스도를 상상한다면, 우리는 그의 능력의 큰 부분을 그에게서 벗겨내는 결과를 빚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설명(voce)에 의해서만 바르게 알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 자체만으로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아들에 대하여 알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는 외적인 증거일 뿐입니다. 계시에 대한 조명, 다시 말해 성령의 내적 증거가 없으면 결코 아들에 대하여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안내가 없이 그 설명(vox)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리하자면 아버지는 아들을 알고 아들에 대하여 계시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에게 아버지를 알리십니다. 당연히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고,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계시한, 그리고 실제로 이 땅 가운데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여러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성령으로 우리 마음의 눈을 여기고 다른 방법으로는 숨겨져 있게 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을 통해서가 아니면 아버지를 알 수도 없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바로 이런 내용 때문에 28절 이하로 연결 되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버지께서 알리신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면 구원의 은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은 선택과 유기에 대한 부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된다고 할 때 누가 믿을 수 있느냐? 그리고 누가 믿지 않느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누가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시면 감추신 것을 나타내 보일 자가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시면 감추어진 것처럼 반응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실 때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선택의 열매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 믿을 수 있는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2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서 천국 복음을 알게 하시되 아들을 통해서가 아니면 참되게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계시가 있어야 하고, 그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 아들을 아는 자만이 아버지를 아는 자로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참된 지식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신(골1:1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할 때 믿음에 연유한 것인가? 분명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그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어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믿기로 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은 선물입니다(엡2:8). 선물이기 때문에 내 쪽에 원인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원인이 있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기지 않으시고 나타내셨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자신에게 자랑꺼리를 찾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은혜와 사랑, 긍휼하심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바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