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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고분을 닮은 국립나주박물관
1.전라도의 대표 고을 나주
‘전라도(全羅道)’는 전주와 나주에서 한 글자씩 빌려온 지명이다. 그만큼 나주는 전주와 함께 전라도를 대표했다. 나주는 예로부터 해상세력의 근거지였다. 고대부터 영산포 일대를 장악한 해상세력들은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다.
나주가 전라도의 중심고을로 부상한 것은 후삼국시대 왕건의 나주정벌과 관련 있다. 당시 나주는 후백제의 가장 중요한 배후였고 해상교류의 통로였다. 무모했던 나주정벌을 가능케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나주의 해상호족들이었다. 왕건도 해상호족 출신이었으므로 진즉부터 나주호족들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왕건은 나주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나주점령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이 다련군(多憐君) 오씨와 그의 딸 장화왕후다. 장화왕후는 고려 2대 황제 혜종을 낳았다. 성종 때는 목(牧)이 설치되어 지방통치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나주시청 뒤쪽에는 ‘완사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완사천에는 왕건과 장화왕후가 만났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내용은 이렇다.
‘왕건이 금성산(錦城山) 남쪽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달려갔다. 그곳에는 열일곱 살쯤 되는 처녀가 완사천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마시기를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 왕건이 이유를 묻자 처녀는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염려되어 그랬다’고 대답했다. 처녀의 지혜로움에 감동한 왕건은 그를 아내로 맞았다.’
위 설화는 부여 고란사의 ‘고란초’ 설화와 닮았다. 설화에는 나주호족과 왕건이 맺어지는 과정, 후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알게 한다. 고려시대 나주 오씨와 장화왕후를 통해 중앙과 강하게 연결되었던 나주는 고려부터 약 1천 년 동안 전라도의 대표 고을로 역할 했다. 특별한 역사 때문인지 나주지역에는 이름난 유적과 유물이 많다. 발끝에 체이는 것마다 국보(國寶)와 보물(寶物)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나주읍성도 장대하려니와 성내의 나주객사 금성관, 나주관아의 내아, 나주향교, 성문 안과 밖의 석당간, 삼층석탑, 석등도 모두 보물급 문화재다. 명문가문의 고택들도 많다. 그것이 나주다.
2.고대(古代) 영산강문화권을 상징하는 반남고분군
나주시내에서 13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면 반남면이다. 반남면에는 유명한 ‘반남고분군’이 있다. 반남고분군은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대안리(사적 제76호), 신촌리(사적 제77호), 덕산리(사적 제78호) 일대에 30여기가 분포한다. 고분은 다양한 형태지만 가장 주목받는 것은 신촌리 6호분과 덕산리 2호분과 같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전방후원분은 형태가 장고와 비슷하다고 해서 장고분(長鼓墳)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3세기에서 7세기 사이 일본 간사이(近畿)지방이나 규슈지역에서 축조된 일본 고유의 고분양식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1917~18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가 신촌리 9호분, 덕산리 1호분과 4호분, 대안리 8호분과 9호분을 발굴하면서 한반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때 수 십 개의 대형 옹관(甕棺)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 봉황무늬의 환두대도, 도끼, 화살, 톱, 귀고리, 곡옥, 유리구슬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일제가 후속조처를 하지 않는 바람에 수많은 유물들이 도굴 당했고, 유적도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됐다. 이후 1938년에도 발굴되었고 해방 후에도 수차례 발굴되었지만 수습된 유물은 1차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빈약했다.
반남고분군은 고대(古代) 영산강유역의 역사적 위상을 증명하는 유적이다. 영산강 유역은 5세기 말까지 마한(馬韓)의 영역이었다. 사실 백제가 전라도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4세기 후반이고 5세기 말에서야 확실한 지배가 이뤄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반남고분군은 마한 지배층의 무덤이다. 이들은 금관(金冠)을 부장품으로 넣었을 만큼 강력한 세력이었고, 삼국이 돌무지무덤이나 석실분을 만들 때 전방후원분을 사용했을 만큼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
3.반남고분을 닮은 나주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은 2013년 11월에 영산강유역의 고고자료를 보존 전시하고 호남지역에서 출토되는 매장문화재의 수장고 역할을 위해 건립됐다. 일반적으로 국립박물관들이 도심 속에 건립되는데 비해 나주시에서도 자동차로 20여 분 거리인 반남면 신촌리에 건립한 것은 영산강문화권에서 반남고분군의 역사적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74,272㎡ 부지에 건축면적 11,086.34㎡이며 지하1층 지상2층 형태다.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은 진즉부터 있었지만 본격화한 것은 2007년부터다. 그 해 1월 부지확정을 했고 같은 해 9월부터 이듬 해 2월까지 건축설계 공모를 했으며 약 3년이 지난 2010년 12월에 기공식을 했다. 건축에는 반남고분군의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다. 건물의 높이도 지하1층에 지상 2층으로 절제했고 옥상정원을 조성하여 신촌리 고분군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그래서 옥상정원에서 바라보면 박물관이 고분군의 일부이며 고분군이 박물관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국립나주박물관은 2층 로비로 들어가 1층과 지하층으로 내려가면서 전시실과 수장고, 교육실을 배치했다. 또 1층과 지하층의 채광을 고려해서 뒷면에 중정(中庭)을 만들었다. 박물관은 전체적으로 전시보다 수장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전시 공간(3,223.05㎡) 못지않게 수장 공간(2,517.67㎡)이 넓다. 반면 교육공간은 1층의 체험학습실과 작은 강당뿐이었다. 박물관 측은 부족한 교육공간은 넉넉한 공용 공간(1,823.95㎡)으로 보완한다고 했다. 공용 공간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곳은 1층 로비다. 나주박물관은 종종 로비를 활용하여 공연이나 음악회를 개최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인형극 공연을 했는데 관람객이 많았다.
가장 볼만한 것은 1층의 제1전시실에 몰려 있다. 제1전시실은 ‘마한의 형성’, ‘영산강의 고분문화’ 등 네 개의 소주제로 구분하여 영산강문화권의 역사와 문화적 특징을 설명했다. 지하의 제2전시실에는 발굴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국립나주박물관 답사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탁월한 전시기법이었다. 고분의 모형을 만들어 관람객이 직접 내부를 체험하게 한다든지, 유물과 관련된 그림이나 조형물을 만들어 이해를 돕는 방식, 디지털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관람객의 눈높이에서 전시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지하1층의 개방형 수장고도 인상적이었다. 개방형수장고는 전시유물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스토리를 이야기하는데 매우 유용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나주박물관은 ‘느림의 미학(美學)’을 즐겨야 제 맛
국립나주박물관은 ‘느림의 미학’을 내세운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반남고분군 사이에 박물관을 건립한 지리적 이점을 살리겠다는 의도다. 박물관에서 자랑하는 대표적인 교육프로그램도 개관 2014년부터 시작한 ‘1박 2일, 달빛역사여행’이다. ‘1박 2일, 달빛역사여행’은 참가자들이 박물관 마당의 캐러반에서 숙식하며 1박 2일로 박물관 교육과 답사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관람객들의 호응도가 매우 높아서 개최 공고가 나면 순식간에 신청 마감된다고 한다. 국내 박물관 최초로 실시한 NFC기술(접촉식 무선통신)을 활용한 전시안내시스템도 각광을 받고 있다.
필자는 나주덕산리고분군이 있는 반남고분전시관 주차장에 주차하고 답사를 시작한다. 반남고분을 먼저 이해하고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이 답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덕산리고분군은 넓다. 신촌리 고분군도 만만찮다. 그래서 서두르면 안 된다. ‘천천히’ 유적 뿐 아니라 주변경관도 가슴에 품으며 걸어야 한다. 덕산리고분군을 답사한 뒤 박물관을 관람하고 옥상정원을 거쳐 신촌리 고분군을 한 바퀴 돌면 답사가 끝난다. 코스가 너무 길고 지겨우면 ‘1박 2일, 달빛역사여행’을 권한다. 수 천 년 나주 역사가 가슴을 촉촉이 적실 것이다.
나주는 맛의 고장이다. 맛은 자연환경이 주는 선물이지만 권력이나 재물과도 관계가 있다. 나주평야는 농축산물이 풍부하다. 영산강유역은 예로부터 해상무역의 중심이었으며 서남해안의 풍부한 어족자원의 보고(寶庫)였다. 그래서 부자들도 많고 권력자들도 출현했다. 음식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이름난 나주 음식으로는 ‘나주곰탕’과 ‘영산강 홍어’가 있다. 나주곰탕은 100년 역사의 금성관 앞 하얀집을 제일로 꼽는다. 지난 번 나주답사 때도 하얀집에서 곰탕을 먹었다. 곰탕과 설렁탕은 사촌 간이지만 설렁탕이 소의 잡뼈와 양지, 내장을 넣어 푹 고아낸 것이라면, 곰탕은 소의 고기부위를 넣어 끊인 음식이다. 나주가 곰탕으로 유명해진 것은 장시(場市)발달과 관련 있다. 나주는 전국 최초로 장시(場市)가 발달했던 고장이다. 세종 때부터 시작됐다고 하니 연원이 만만찮다. 나주장에는 영산강의 풍부한 어염(魚鹽)과 나주평야의 농축산물이 집산되었다. 농우(農牛) 거래도 빈번했다. 1916년에는 일본인 다케나카 신타로라는 사람이 나주에 다케나카 소고기통조림공장을 세웠다. 통조림공장은 일제 말 전시체제기를 거치며 번창했다. 금성관 앞 도축장에서는 하루 300~400마리의 소들이 도축되었다. 조선인들은 장날이면 일본인들이 남긴 소머리와 뼈, 내장, 부속고기를 싼값에 가져와 가마솥에 넣고 6시간쯤 푹 끊인 뒤 밥을 말고 몇 번의 토렴을 하여 장꾼들에게 팔았다. 이것이 나주곰탕이다. 나주 하얀집은 4대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6시간을 고아 나주곰탕 특유의 맑고 고소한 맛을 낸다.
나주답사에서 곰탕만 먹고 홍어를 빼면 무척 서운하다. 전라도에서 홍어하면 흑산도 홍어와 영산포 홍어를 꼽는다. 흑산도 홍어가 바다에서 갓 잡아온 신선하고 상큼한 맛을 무기로 한다면 영산포 홍어는 코끝을 톡 쏘고 눈물이 찔끔 나게 하는 특유의 강력한 암모니아 냄새를 무기로 한다. 영산포 홍어가 삭힌 홍어의 대명사가 된 것은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흑산도에서 잡아 올린 홍어를 영산포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발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은 영산포 홍어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이제는 으레 영산포 홍어하면 구리하고 톡 쏘는 맛을 떠올린다. 영산포에서 홍어 요리로 이름을 얻은 집은 ‘영산포 홍어1번지’ 집이다. 우리가 찾았을 때는 마침 한가한 시간이어서 여유 있게 맛을 봤지만 아쉽게도 국내산은 비싸서 손도 못 대고 홍애보리국에 칠레산 홍어만 맛봤다.(2020.09)
관람안내 1.관람시간 : 09:00~18:00(평일), 09:00~19:00(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09:00~18:00(어린이체험놀이터) 2.휴관일 : 1월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 3.관람료 : 무료(기획전시는 유료 가능) 4.전시안내서비스 : NFC(근거리무선통신) 단말기 사용(안내데스크에서 무료 대여) 5.주차장 :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