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2)
[에피소드4]
보병학교 입교하고 첫 주말에 타병과 장교들은 광주시내로 외출을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막사 내무반별로 관물정돈 상태와 청소상태에 대한 철저한 내무사열을 받았다. 그 때 우리는 집에서 가져온 더블백안에 있었던 개인 사물들을 전부 압수당했다. 나는 책 두 권과 겨울용 방한내의 한 벌을 넣어 왔는데, 구대장에게 모두 뺏겼다. 책은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의 원작인 “부베의 연인”(영화 주제가로 유명했음)과 제목미상의 책 한권이었다. 압수당한 물품은 나중 졸업할 때 돌려준다고 했지만, 돌려받지 못했다.
병 식사를 하기 때문에 입맛이 없었던 일부 동기생들은 PX에서 고추장을 사서 밥에 비벼 먹었다. 식사가 부실한 관계로, 매점에서 당시 풍광빵이라 불리는 단팥빵을 사 먹는 장교들이 많았다. 그래서 학군단 장교들은 풍광빵 소위라는 별칭이 붙었다.
4개월 훈련 중에 가장 힘들었던 때가 2주간의 유격훈련이었다. 유격훈련 첫 날 5개 중대 중 5중대가 제일 선두로, 동양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동복 유격장을 향하여 급속행군(急速行軍)을 실시하였다. 말이 급속행군이지 실제로는 거의 완전군장과 M1소총을 어깨에 걸머지고 구보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의 1. 21 청와대 습격사건이후 군 당국은 유격훈련을 신설하고 훈련 강도 및 행군속도를 급격히 높였기 때문이었다. 유격장에 도착해서 탈진한 전남대를 나온 한 동기생이 헬기로 의무대로 수송되던 중 절명(絶命)한 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유격장 도착 한 시간 전 강을 건너 중간 휴식을 취했던 “이서”라는 곳에서 신체의 이상을 호소하였으나, 포악한 인솔 장교는 꾀병이라고 무시 하면서 그의 가슴팍에 앞차기까지 가해서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거의 기진맥진했던 그 동기는 다른 두 사람의 동료가 양쪽 팔을 부축 하여 산을 하나 넘었고, 동복유격장에 마침내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완전히 기절하여 거의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유격훈련 중이었지만, 인솔 장교의 인간의 도를 넘은 이 같은 잔인한 행동으로 인해서 이 사건은 엄청난 인화력(引火力)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 밤을 자고 난 다음 날 학과출장 전에 5중대 동기생들은 향후 유격훈련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교육생들이 유격훈련을 거부하고 내무반에서 농성하자, 유격훈련을 독려하려 유격교관들과 조교들이 각 내무반에 와서 몽둥이를 들고 위협했고, 마침내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잠시 후 흥분한 5중대 교육생들은 도망간 교관들이 있는 유격장 행정반을 향하여 투석까지 하였고, 이어 제지하는 정문 보초를 제압한 다음 행군대열로 보병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듣고 학교에서 학생 연대장 장종원대령이 헬리콥터로 사고현장에 급파되었다. 그는 별별 방법을 동원하여 교육생들을 설득하고 겨우 무마하기에 이르렀다. 유격은 우여곡절 끝에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이 소식은 빠르게 우리들에게 퍼졌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은 후유증은 컸다. 스트라이커 주동자 몇 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았다. 죽은 동기생을 체벌한 인솔 장교도 처벌을 받았다.
며칠 후 유격훈련 중이었던 5중대를 제외한 나머지 동기생들은 상무대 대강당에 모여 죽은 동기생의 장례 추모예배를 학생자치회 주관으로 거행하였다. 학군초군반 학생장은 동국대를 졸업한 이장춘 소위였다. 그 때 기도순서가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차출되어 추모식 대표기도를 하게 되었다. 내가 기도를 맡게 된 것은 아마도 이장춘과 같은 중대에 있었던 신학과 졸업 동기인 허필호가 나를 이장춘에게 추천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도 내용 중 일부는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에서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내용으로, 죽은 동기생에 대한 추모기도를 드렸다. 장례식이 끝난 후 참석하였던 동기생들이 기도에 깊이 감명 받아, 내가 혹시 “한경직 목사 아들이 아니냐?”고 까지 하였다.
이장춘은 사망사건이 일어난 직후 보병학교장 정득만소장과 같이 학교장 헬기에 탑승하여 사고가 난 동복유격장을 현장 답사했다고 금년 초 나에게 술회한 적이 있다.
이장춘소위는 군에 장기복무를 지원했는데, 보병장교에서 육군항공대가 창설된 후 전투 헬리콥터 조종사로 선발되었다. 그는 항공대 중령으로 전역한 후 지금은 미국 시민이 되어 시카고에서 목회자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일 년에 여러 차례 중남미 지역 등에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2001년 경 시카고로 유학중인 딸을 만나러 한 달간 머물고 있을 때, 딸이 있었던 네이퍼빌로 찾아온 이장춘을 만났다. 그는 그 때 베테랑 헬기조종사 출신답게 그가 타던 승용차를 엔진은 벤츠엔진, 몸체는 캐딜락, 그 밖의 부품도 최고품질의 맞춤형 사양으로 개조하여 운행하고 있었다. 그는 속도위반 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차량에 경찰 감지장비인 레이더 디텍터도 장착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그만큼 승용차를 능숙하고 자유자재로 운전하는 친구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그의 운전 서비스로 시카고 다운타운, 바다같이 넓은 미시간 호수와 호반주변의 대 저택 단지 등을 관광했다. 그 저택 중에는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의 저택도 있었다. 마이클 조던은 시카고 불스 농구팀 선수였다.
마침 당시는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집집마다 형형색색의 불빛을 발산하는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DECORATION)으로 인해 시카고는 그야말로 거대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에피소드4]
보병학교에 입교한지 한 달 만에 육사 초군 반 장교들이 입교하였다. 그러자 학교 내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육사출신 장교들은 3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학교 곳곳에서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 평생 직업군인의 길을 가는 그들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달랐다. 아직 장교가 되지 못하고 보병위탁 교육을 받고 있는 타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그들은 가혹하게 대했다. 아마 잠재적인 경쟁상대에게 처음부터 기를 꺾어 놓을 작정인 것 같았다. 식사도 타 사관학교 생도들과 우리는 사병 식사를 한 반면, 그들은 화학학교 장교식당에서 장교식사를 했다. 학교에 있는 육사선배들이 그들에게 육사출신이라는 자부심을 심어 주는 것 같았다. 어쨌든 육사장교들 때문에 우리는 군기가 잡힌 타 사관생도들에게서, 갑자기 경례를 받는 등 지위가 향상되었다.
첫 면회가 2주 만에 허용되었는데, 동기생 중에 여자 친구가 있는 경우에는 여자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나는 부모님이 승용차를 가지고 내려 오셨다.
첫 외출은 한 달 만에 실시되었다. 시내로 가자마자 교육생들이 첫 번째로 한 일은 신기하게도 목욕탕을 찾는 것이었다. 군대 내에서 하는 샤워는 불과 5분정도 밖에 안 되었다. 따라서 모두가 실컷 제대로 된 목욕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목욕탕에서 보니 동기생들의 몸은 대부분 뻘겋고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훈련의 강도가 얼마나 힘들었다는 것을 몸으로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코스는 대부분 통닭집이나 중국집을 찾아 식욕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교육생들은 중국요리를 안주로 배갈을 마시면서 육두문자로 중대장이나 구대장 욕을 실컷 하고나면 속이 좀 풀렸다.
첫 외출에서 나는 같은 학교 동기생인 4중대 차명진군, 박명운군과 함께 행동했다. 광주시내 번화가인 충장로, 금남로를 구경하고 대중목욕탕에서 실컷 목욕을 했다. 그 후 중화요리집에서 요리 두 접시, 짬뽕, 자장면을 시키고 배갈을 마셨다. 이어 다방에서 고생담을 나누며 신세한탄을 했다.
차명진군은 그 후 45년 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오다가 수년 전부터 ROTC 13기 기독포럼에 나와 같이 참여했다. 그 이후 우리는 아주 가까워 졌다. 차명진은 제대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고 정년을 마쳤다. 그는 대한항공 재직 시 꽃보직이라는 워싱턴 지사장을 거쳐 국제담당 임원을 지내다가 퇴직했다. 그런데 인성이 더없이 온화하고 너무나 성실한 자세로 살아온 차명진 동기는 대한항공 퇴직 후에도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항공업계에 발탁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16년 동안 외국항공사인 pacific air agency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박명운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사업차 한국도 종종 방문하고 있다.
그런데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기갑병과를 비롯하여, 화학병과, 포병병과 장교들의 가슴을 쫙 편 당당한 모습과 주름 하나 없는 단정한 옷차림이 눈에 띠었다. 그에 비해서 어깨가 축 구부러지고, 고된 훈련으로 닳아빠진 전투복을 입은 우리들 보병의 모습은 누가 봐도 구별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목욕탕에서 보였던 멍이 시퍼렇게 들은 모습은 우리들에게 열등감까지 가지게 했다. 어느덧 귀대시간이 다가왔다. 훈련시간은 길기만 한데, 외출 시간은 기가 막히게 빨리 지나갔다.
귀대해서 인원점호를 취한다음, 외출 시 먹은 음식의 사제(私製)기름을 뺀다고, 비무장 4~5km의 구보를 실시했다. 타병과 장교들은 매 주말마다 자유롭게 외출을 나갔다. 그렇지만 한 달에 한번 실시한 우리들의 첫 외출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내무반에서 일석점호를 받으면서 우리는 첫 외출에서 각자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는지 화제의 꽃을 피웠다. 그 중에는 기상천외한 얘기도 나왔다.
(강광우 자서전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