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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금 절망하기>의 줄거리:
절망이 살 길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마귀의 업적 중 최고의 업적이 무엇일까요? 이 땅 위에서의 삶과 관련해서 희망이라는 단어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도록 인류를 설득한 것입니다. 희망을 버리세요! 희망함은 원죄가 가져다 준 악한 체질입니다. 이 체질을 끊고 절망하세요! 절망이 참구원의 시작입니다. 정직하게 절망헤야 참 행복이 찾아 옵니다.
지금 절망하기
(눅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지금 절망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박 노해 시인이 가장 최근에 발간한 시집의 이름을 아십니까?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이게 아마 2010년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시집 중에 나오는 시 가운데 ‘길이 끝나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제가 한번 읽어봅니다.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마지막 구절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도대체 박노해 시인이 말하는 정직한 절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절망하는 것을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참으로 마음을 통쾌하게 해주는 반전이 있습니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요즘 너무나 시끄러워요, 절망하지 말라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이 지구 위에서 너무너무 시끄럽습니다.
아주 듣기 싫어 미칠 지경입니다.
‘희망을 잃지 말아라’
인류의 문제가 뭐냐 하면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게 인류의 문제고, 인간의 문제고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체질적으로 인간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정말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살려주세요!’ 하는 게 인간이고, 개선의 희망 구원의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근데 이게 진짜 문제고, 이게 바로 원죄로부터 표현되는 인간의 가장 극악무도한 체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귀의 업적 중의 업적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련해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체질을 만들어주고, 희망이라는 단어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도록 인간을 설득시킨 것이 마귀의 최고의 업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비유가 나옵니다.
비유에요, 비유.
그런데 이 본문을 해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딪히는 문제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부자가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되는 이유가 그다지 명확하고 설득력이 없다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낙원에 들어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경위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사로는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됐는지에 대한, 이렇게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을 보였다거나 구원의 조건이 될 만한 것을 충족시켰다거나 하는 그런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냥 부자의 대문간에 앉아가지고 부자의 집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빵부스러기로 배를 불리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온 몸에 헌데가 나가지고 북북 긁고 있는데,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는 것 말고는 나사로가 한 일이 없어요.
부자도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날마다 호화롭게 즐긴다는 것은 우리가 순화시켜서 이야기하면, 조금 럭셔리하게 치장하고 다니면서 그걸 좀 기뻐한 겁니다.
이 ‘즐기다’라는 단어 자체가 ‘기뻐한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뭐 그렇게 잘못 되었습니까?
지금 우리 돈 있는 기독교인들, 다 이렇게 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명품 백에 명품 목걸이에, 돈 쓰면서 기쁨을 얻고 살고 있잖아요?
뭐가 그렇게 잘못 되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본문 속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은 25절밖에 없어요.
2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음부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이 부자에게 말합니다.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나사로가 받았다는 이 고난이라는 단어는, 히틀러의 압제 하에서 고난을 받은 것 같은 이런 의로운 고난이 아닙니다.
유관순 누나가 일제하에서 받은 이런 고난이 아니에요, 단어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아요.
앞에서 부자가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사로는 고난이 아니라 나쁜 것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좋은 것을 받았다, 이 땅에서 살 때 좋은 것을 받은 것이 지옥에 갈 이유가 된 겁니다.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나쁜 것을 받은 것이 낙원에 갈 이유가 된 것이라는 거예요.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이 ‘좋은 것’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본문 중에서 풀이하자면 19절에 ‘날마다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들, 즐기더라’ 이 단어가 좋은 것들입니다.
좋은 것이 바로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들, 내 마음이 기뻐질 수 있는 것들, 이게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자기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 상태를 정말 지독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주님께서 표현하신 겁니다.
거지인데, 온 몸에 헌데가 난 병자였고, 그 헌데를 개가 핥고 있었습니다.
주석가들이 자꾸 그 문간에 있는 거지를 부자가 돕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석을 하려고 하는데, 주님의 의도를 너무너무 왜곡하는 겁니다.
지금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비교하시는데, 부자가 나사로를 돕지 않아서 지옥에 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둘 간의 상호관계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웃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둘을 비교해나가시는데,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는 겁니다.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사는 동안에 그 좋은 것으로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었고, 나사로는 자기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을 이 세상 사는 동안에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그 비교는 계속되어서, 둘 다 죽었는데, 이 세상 살 동안에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 마음을 기쁘게 했던 부자는 지옥에 갔고, 이 세상 사는 동안에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좋은 것이 없었던 나사로는 천당 갔다 이겁니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연관시키시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이고 이제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서 하나님나라를 침노한다, 하나님나라를 누가 침노하느냐, 나사로와 같은 사람이 침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좋은 것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들의 마음이 하늘나라를 침입해 들어간다.
그러니까 복음의 시대 아닙니까?
‘죽어서’라고 하는 이 말을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너희도 같이 죽자’고 말씀하시면서 지금 침입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아, 이렇게 말해놓고 나면, 참 기가 막힌 일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내 마음이 기뻐질 수 있는 좋은 것을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가져서는 안 됩니다.
돈 벌어서 기쁘다, 사업이 잘돼서 기쁘다, 낙원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건강해서 기쁘다, 이거 안 된다는 겁니다, 나사로처럼 헌데를 앓아야 된다는 거예요.
홈 스위트 홈이 있어서 기쁘다, 이거 지옥 간다는 겁니다.
나사로처럼 집도 없어야 된다는 얘기에요.
그래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하나님아버지께로 갈 수 있어서 하늘나라를 침입해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애인 때문에 기쁘다고요? 아니요, 거지 나사로처럼 돼야 된다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누가 애인이 되겠습니까?
이러고서야 누가 기독교를 믿겠습니까?
목사님들이 교회부흥 때문에 기뻐하지요? 목사님이 지옥 간다는 얘깁니다.
하여간 이 땅 위에 있는 것들,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중에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들이 지금 있지요?
지옥 간다는 얘기에요.
거지 나사로처럼 돼야 된다는 이야기를 극단적인 모습의 거지를 표현하시면서, 이게 아니면 아무도 천당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논리가 이상한가? 조금만 따져보면 전혀 이상하지가 않아요.
언뜻 들으면 숨이 막히는 일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화를 낼 그런 말씀인 것 같은데, 조금 따져보면 전혀 안 그렇다는 얘기에요.
맞다 이겁니다.
왜 맞습니까?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추방되어서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에덴이 뭡니까? 기쁨의 땅입니다.
기쁨의 땅에서 추방되었으면 19절에 나오는 ‘즐기더라’,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이 말이 불가능해진 것이 현실이라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 땅의 삶의 현장은 에덴 밖이기 때문에, 기쁨이 없어요.
이 상태, 기쁨을 찾을 수 없다는 이 절망에 대해서 정직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절망적인 상태에 대해서.
그런데 마귀가 한 일이 뭐냐 하면, 에덴의 뜻이 기쁨입니다, 기쁨의 땅이에요, 그 기쁨의 땅에서 추방된 인간들에게 여기서도 에덴을,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설득을 시킨 겁니다.
전부 마귀에게 속아가지고 돈 많이 벌면 내 마음이 기뻐지는 거예요, 그거 속은 겁니다, 지금.
홈 스위트 홈이 있다고 내 마음이 기쁜 거예요, 속은 거라는 겁니다.
애인이 생겼다고 내 마음이 기쁜 거예요, 이게 지금 마귀에게 설득되었고 속은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부자가 말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내서 자기 형제 다섯에게 여기 오지 않도록 권고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선지자나 모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이야기해도 안 믿을 거라고.
그런데 문제는, 돈 많이 벌어서 기뻐하면 지옥에 간다는 얘기를 하는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교회가 없어요.
가정이 홈 스위트 홈이 되었다고 기뻐하면 지옥에 간다는 얘기를 하는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에덴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면 에덴 밖에서 벌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기쁨에 대해 절망해야 되는 거예요.
이 정직한 절망이 있어야 구원의 참 희망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세상 안에서 기쁨의 일, 좋은 것, 내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이 언젠가 생길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아, 무서운 거예요, 이 희망, 원죄에 뿌리를 두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희망의 힘.
이걸 끊어내야 됩니다.
에덴 바깥으로 추방을 당했으면 마땅히 정직하게 기쁨이 없음을 고백해야 됩니다.
그래야 참 기쁨의 세계로 길이 열리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가, 하나님이 계셨으므로 기뻤던 에덴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어때? 자식으로 기뻐하면 되잖아? 돈 벌어 기뻐하면 되잖아? 몸이 건강해서 기뻐하면 되잖아? 애인 사귀어 봐, 기쁠 수 있어!’ 다 설득이 돼버렸어요.
다 속아 넘어가버렸어요.
이것을 간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8절에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얘기를 잘못 이해할 때가 있어요.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들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게 간음이다, 이런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 뜻이 아니에요, 육체적으로 탈선을 했기 때문에 간음했다는 뜻이 아니라, 아내를 바꾸어야만 마음이 즐거워진다면 이 마음은 아내라는 존재를 통해서 간음하고 있다, 이 뜻입니다.
무슨 얘긴지 아시겠습니까?
‘왜 네 마음이 아내를 바꿔야만 기쁠 수 있느냐? 아내 때문에 기쁘다면 그게 간음이다’ 이겁니다.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것과 맞물린다고 말했어요, 대칭적으로.
이 돈을 좋아하는 것, 돈에 마음이 닿아야만 기쁘다, 이게 바로 영적인 간음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상하셨어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 대해서 꾸지람을 안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
창녀들을 가까이 부르시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돈을 좋아하지만 율법을 티끌만한 부분까지 다 지켜나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을 향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얘기하십니다.
이들은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간음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그러시고, 창녀들은 데려다 놓고 친구로 삼으시고, 현장에서 잡힌 간음하던 여자는 정죄하지 않으시면서, 왜 이들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정죄해버리십니까?
주님이 보시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에요.
마음의 간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기뻐할 일을 찾아낸 것, 그래서 그 일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게 바로 간음이라는 겁니다.
이 간음을 없애야 돼요.
나락으로 떨어진 이웃집 딸, 그래서 창녀가 된 딸, 그 딸이 범하고 있는 간음과 서울대학에 들어갔다고 마냥 기뻐하고 있는 내 훌륭한 딸과 누가 더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느냐?
창녀로 전락한 이웃집 딸이 그 삶에 마음의 기쁨이 하나도 없다면, 이 창녀는 십자가복음으로 하나님 만나면 고쳐질 수 있는 간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기뻐하는 이 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간음을 하고 있는 겁니다.
창녀들을 부르시고 세리들을 부르신 이유는, 세리 짓하고 창녀 짓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의 마음에 기쁨이 없어요, 이 세상에 기쁨이 없어요.
그런데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하신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차 있지 않는데도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신 겁니다.
왜 독사의 새끼라고 그랬습니까?
사탄이 독사가 무엇을 했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 말고 내 마음이 기쁠 수 있는 이유를 가르쳐준 겁니다.
다 거짓말이고 사기인데, 이 사기에 넘어간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도, 독사의 새끼들이 된 겁니다.
왜? 독사가 가르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도 우리 마음이 기쁠 수 있는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도우는 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도움의 궁극적인 방향성은 행복과 평강과 기쁨입니다.
왜 물에 빠진 자를 도와줍니까?
평강을 향해서 가려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왜 돈으로 도와줍니까?
그가 돈을 많이 벌어야 안정된 마음으로 행복할 수 있으니까 돈으로 도와주는 겁니다.
모든 도움의 궁극적인 지향성은 바로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의 즐거움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돕는 자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만이 기쁨의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거지가 돼서 헌데가 온몸에 나있고, 개가 헌데를 핥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 이겁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도움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는 분이라는 얘깁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원죄의 체질을 받고 난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의 희망을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절망하지 말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자살합니까?
이 세상에서 너무너무 강하게 희망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기쁨의 이유를 하나 찾아내고 거기에 모든 걸 다 걸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살하는 거예요, 절망해서가 아니에요, 희망이 너무나 과해서이지.
그건 절망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자식을 바라보며 절망하세요.
그 자식을 통해서 기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세요.
돈을 버는 사업가라면, 돈을 벌어 사업장에서 기쁠 거라는 희망을 버리세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절망하세요.
왜? 에덴 밖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절망하세요.
안 될 거예요.
이 정직한 절망의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내 죽음으로 내 마음이 먹지 않는 한, 이 세상에 대해 절망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으로 하여금 기쁨을 기대하게 하는 모든 대상에 대하여 죽는 지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지점에서 정직하게 절망하는 자에게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만이 기쁨의 이유가 되면서 에덴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세상을 향해 나가세요, 하나님 때문에 생긴 기쁨을 가지고.
이게 바로 천국백성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정직한 절망이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듣기 싫은 잡음이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인 것을 우리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정직한 절망의 자리를 회복하게 하시고, 그래서 참된 희망을 하나님을 향하여 갖게 하시며, 하나님으로 인해 생긴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기뻐하고 자랑스런 그 모든것이 간음이 된다니
주님만으로 아니면 돈을 사랑하다 간음으로 죄
집도절도 엄서 주님만으로 만족해 천국을 침노
한다는 다행을 십자가 승리로 보려니 여간 힘이
에덴 밖에서야 절망은 회복 하기끼지 나사로가
믿음의스승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