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지상 중계]
시가 뭐길래 / 서정춘 시인
—코엑스 ‘별마당도서관’ 특강(2020.7.31.금.19:00-20:30) +뒤풀이(21:10-22:20)
청승맞게 살아온 얘기를 하겠습니다. 제 무기가 청승떨기, 어렵고 가난하고 슬프고 부끄럽고 천덕스럽게 살았습니다. 78년 전 생후 21일 만에 진행형 늑막염을 앓았어요. 다행히 그때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종합병원인 알렉산드리아병원이 순천에 있어서 살아났어요. 제일 큰 병원은 서울 세브란스였고요.
생후 1년 만에 생모 별세. 2남 2녀의 막내인 젖배곯이, 동냥젖, 미음으로 새엄마가 살렸어요. 새엄마가 고맙고 그리워요.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생모 사진 1장 없어요. 새엄마 은혜 갚겠다고 마음먹었고, 이복형제 3명, 그 중 막내를 초등학생 때부터 고교 졸업까지 집에서 돌보았어요.
아버지는 마부였고 힘이 세고 씨름 장사였어요. 순천여고 뒷산에서 살았어요. 남초등학교, 교회, 성당, 고아원도 있고 조금 떨어져 순천중고도 있었어요. 환경이 아주 좋았지요. 남의 밭 오이를 따먹다가 잡혀 젊은 주인한테 귀싸대기를 맞았는데, 앵~하는 소리가 지금도 들려요. 그걸 시로 쓴 게 <관음觀音>입니다. 학교 유리창을 몰래 빼갖고 엿 바꿔 먹기도 하고 악동 노릇을 많이 했어요.
어려서 배고파서
오이밭 주인에게
얻어맞은 귀싸대기
이제 와서 괜찮다고
허탕 치듯 사라져버린
슬픈 귀울음
아버지 말구루마를 친구랑 둘이 탔는데 말이 꼬리를 추켜들고 방귀를 뀌면서 똥을 싸는데 그 냄새, 볏짚냄새가 좋아 무려 4편이나 시로 썼어요. 그 중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는 이렇지요.
나는 아버지가 이끄는 말구루마 앞자리에 쭈굴쳐 타고 앉아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이 꼬리를 쳐들고 내놓은 푸른 말똥에서 확 풍겨오는 볏짚 삭은 냄새가 좀 좋았다고 말똥이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따뜻한 풀빵 같았다고 1949년 하필이면 어린 나의 일기장에 침 발린 연필 글씨로 씌어 있었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어린 애들을 많이 놀게 해야 해요. 지금 인간(:인간다움)이 없어졌어요. 큰일이지요. ……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말한 시 <꿈속에서>
시인 정지용은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로 말을 달리고 남루도 추울 것도 없는 마흔 몇 살 홀아비는 말구루마를 끌고 구례 장날을 돌아와선 오두막에 딸린 마구간을 들 때면 나는 조랑말의 차디찬 말방울소리에 귀가 시려 잠 못 이룬 겨울밤이 있었다
말이 배가 고프면 발로 바닥을 득득 긁어요. 그 소리도 참 듣기 좋아요. 그러면 나는 “아부지, 빨리 밥 주세요.”하곤 했어요. 한번은 “아부지, 나도 마부 될라요.”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진노해서 나를 마구간에 처넣어 버렸어요. 마부가 되면 안 된다고요. 아버지의 사랑, 엄청난 사랑을 받았어요. 애기 때 아프고 생모 없고 해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원초적 사랑, 짐승 같은 사랑이었어요. 그 시 <동화>
어느 여름 날 밤이었습니다
마부자식의 몸에서는 망아지 냄새가 난다는 내 나이 아홉 살 때 나는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과 그 말머리에 흔들려서 찰랑거린 놋쇠방울소리가 하도나 좋았습니다 그러면 나도 커서 마부가 되겠노라 마굿간에 깃든 조랑말의 똥그랗고 검은 눈동자 속에 얼비친 별 하나 별 둘을 들여다보며 별밤지기로 놀았습니다
이런 날 밤이면 이따금 조랑말의 말머리에서 찰랑거리던 놋쇠방울소리가 밤하늘로 날아올라 별빛에 부딪쳐서 영롱하게 바스라지는 소리들을 눈이 시리도록 우러렀던 나만의 황홀한 밤이 있었습니다
야생마처럼 들로 산으로 헤매 다니다 주일이면 교회 가서 찬송가 배우고 집에 와서 노래하고 했어요. 성당 새벽 미사 종소리에 잠이 깨는데 행복했고, 순천여중고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가곡, 명곡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학교 측백이 있고 개나리, 목련이 피는 좋은 환경에서 자랐어요.
싸리 울타리 너머 이웃집은 딸 부잣집이었는데, 순금이가 있었어요. 술지게미에 사카린을 넣고 끓인 것을 싸리 울타리 양쪽에 서서 숟가락 하나로 한입씩 나눠 먹었어요. 내 첫사랑이었어요. 그 시 <첫사랑>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트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 버린 춘봉이 입 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40대 때 순금이를 찾았는데 암으로 죽었다고 했어요. 생선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는데, 눈물을 흘리고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울었어요.
초등학교 졸업하자 아버지가 지게를 만들어주고는 나무해 오라고 하자 지게를 돌로 부숴버렸어요. 매산중학교 야간부에 들어가 주경야독했어요. 부모는 돈 벌러 다니시고, 두 누나는 남의 아이보개로 갔어요. 나는 이복동생들 보고 신문배달하며 공부했어요.
서점에서 친구 둘을 만나 영랑시집, 소월시집 한 권씩 사 가는 걸 보고는 나도 10편씩 읽었어요. 아예 친구들을 찾아가 그 시집 두 권을 빌려서는 이틀 만에 다 베꼈어요. 그랬더니 시집 베낀 것이 학교에 소문이 났어요. 국어 선생님이 불러서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를 빌려주시기도 했어요. 당시 청소년 잡지 《학원》에 시를 보냈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야간고로 진학하고 아르바이트를 계속했는데, 지겹고 힘들어 때려치우고 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요. 신문 배달하며 수금도 같이 했는데 하루는 수금장부가 없어져 나를 의심했어요. 아니라고 아니라고 얘기하고 그만두었어요. 다음 날 그 집 딸이 집으로 찾아와 자기가 책이랑 수금장부를 가방에 넣고 학교에 갔었다며 사과하고 다시 배달하라고 했지만 안 갔어요.
그러다가 서점에서 일하게 됐어요. 전화위복이지요. 책을 많이 읽었어요. 《현대문학》, 《사상계》도 읽었어요. 한자가 많았지만 공부하며 읽어서 한자 실력이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얼마 뒤 서점 주인이 나더러 그만 나오라고 했어요. 손님을 잘 살펴봐야 하는데 책 읽느라 분실이 많았다고 하면서요. 대신 더 좋은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어요. 시장 청소하는 거였는데, 아침 일찍 청소하고 나면 완전 자유시간이어서 책 보고 공부하기에는 아주 좋았어요.
큰누나는 달비 장사를 했는데, 마을마을 다니다 어느 남자 만나 살아버리게 됐는지 그 뒤 소식을 몰라요. 그 시 <은희>
나에게는 여러 십 년 전전날의
저 빨치산 아낙 같은 누님이 있어
전설처럼 멀고 먼 산골 마을로
달비* 끊어 오겠다며 길 떠난 지 오래
여태도 소식 없어 낮달처럼 희미해진
누님의 이름은 은희였다
(울다가 웃음 반 울음 그친 얼굴의 …)
*한때 여성들의 생머리를 끊어 모아 가발용으로 수출했음.
깡통에 심어진 봉숭아, 둘째 누님에 대한 시가 <봉선화>
너는 가난뱅이 울 아비의 작은딸
나의 배고팠던 누님이
아이보개 떠나면서 보고보고 울던 꽃
석양처럼 남아서 울던 꽃 울던 꽃
시를 공부할 때 산, 구름, 나무, 바다 등 열 가지에 해당하는 시 100편씩을 찾아 베꼈어요. 어떤 것은 50편밖에 못 찾기도 했어요. 그 다음엔 그 시에서 좋은 구절들만 따로 모아 쓰고 그것들로 섞어서 시를 만들어 보기도 했어요. 좋은 시를 남들이 다 써버려서 내가 쓸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나 이 세상에 새 것은 없다라는 말에 힘을 얻기도 했어요.
학교에 교지가 없어서 국어 선생님한테 교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때 국어 선생님은 술‧담배가 금지된 미션스쿨인데, 그걸 들켜 근신 중이라서 교장 선생님한테 말할 수 없다며 나더러 건의하라고 해서 직접 나섰어요. 그때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이 낫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학교에는 교지가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내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담임 선생님한테 시켰어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어요. 성적이 나빴으니까요. 그러나 교회 출석율 100%, 국어와 성경 점수는 아주 좋았어요. 그걸 확인하시고는 다음에 신학대 가서 목회자가 될 것을 약속하고 허락을 받았어요. 야간부 학생이 문예부장이 되어서 교지 편집을 책임지게 된 거지요. 목회자가 되겠다는 약속은 못 지켰고요.
석유 등잔불로 공부했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행 기차를 무임승차했어요. 그때의 시가 <전설>, <30년 전-1959, 겨울>
길고 긴 두 줄의 강철시詩를 남겼으랴
기차는, 고향 역을 떠났습니다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습니다
>>>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남대문시장으로 가서 가난뱅이 그룹 친구를 만나 4명이서 마늘장사를 했어요. 마늘창고에서 마늘 뜨는 독한 냄새를 맡으며 잠을 자고 몇 접씩을 어깨에 걸쳐 메고 떠돌이행상을 했어요. “마늘장사~” 하고 부르는 소리가 하느님 목소리로 들렸어요. 내시걸음으로 다가가 굽실굽실하며 박리다매했어요. 문예서점에서 책을 사서 보고, 본 책은 고향으로 보냈어요. 마늘장사가 잘 됐으나 친구가 가게를 정리하자 귀향해서 책을 챙겨 선암사에 들어가 문학공부에 집중했어요. 그때 종소리 들었던 것이 시 <종소리>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그 뒤 난로 공장 직원도 하고, 다우다 밀수에 이용당하기도 하고, 24살 때 신체검사에서 체중 미달로 군 입대가 보류되자 사정사정해서 자원입대했어요. 다행히 행정병이 돼서 문학공부를 잘 할 수 있었고 3년 뒤 제대하고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용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당선 전보를 받았어요. 황룡이 내려오고 초가가 뻥 터지는 꿈이었어요. 당선 전보를 받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어요.
다시 서울로 갔으나 취직이 안 됐어요. 생선가게 아는 형을 찾고 찾아 일하게 됐어요. 그 형의 무허가 집이 홍제동 화장터 근처여서 화장하는 누린 새가 진동했어요. 술‧담배를 끊을 때까지는 방에서 못 자게 해 창고 시멘트바닥에서 추위를 피하려고 개를 안고 잠을 잤어요. 그러다 결핵을 앓게 됐으나 광주 요한병원에서 한 달 만에 나았어요.
순천 집으로 갔고 지금 부인을 만나 야반도주해 서울로 왔어요. 돈은 이희승 국어사전만 빼고 책을 다 팔아서 마련했어요. 청계천 판자촌에 거처를 정하고 친구이며 소설가인 김승옥 씨를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어요. 좋은 출판사에 취직돼 딸 둘에 아들 하나를 잘 키울 수 있었어요. 사당동 까치산 아래 집도 마련했어요. 김승옥 씨는 잊을 수 없는 은인이지요. 그 시 <기념일>
시 공부 10여 년에 쌓인 책 이희승 국어사전 빼고 나머지 한 도라꾸 판 돈으로 한 여자 꼬셔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세 들어 살면서 나는 모과 할게 너는 능금 해라 언약하며 니뇨 나뇨 살아온 지 오늘로 50년 오메 징한 사랑아!!
외국어, 외래어를 사람들이 너무 많이 써서 우리말이 없어질 것이고, 아이를 낳지 않아 우리나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요즘 생활을 쓴 시는 <11월처럼>
전설 같은 노래라지
딸기 먹고 딸을 낳고
고추 먹고 아들 낳고
희망 일기 쓰면서 흥흥거렸지
시간 농사지으며 흥흥거렸지
바야흐로, 끝물 전에 도둑맞듯
아들 딸 남의 손에 얹혀 주었지
돌아와, 아내와 나
비스듬히 작대기로 남게 되었지
11월처럼
[특강 끝]
그는 이렇게 구체적인 삶을 시로 썼다고 얘기했다. 아래는 뒤풀이나 걸으면서 한 이야기이다.
김남조 시인의 장점들 중 하나는 시인을 아주 아끼는 것이다. 어느 시인 장례 때엔 문상하고 부조하고 밤새우듯 조시를 써서 영결식 때 낭독했다.
순천 집터 10평을 아버지가 쌀 한 가마를 주고 샀는데, 등기 이전을 하지 않아 결국 소유권을 못 갖게 됐다. 아직 사유지 빈 터로 있는 그 10평에 가장 작은 ‘서정춘시문학관’을 세우고 싶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다 있어야 사람이다. 시인은 더 그래야 한다. 좋기만 해서는 시를 못 쓴다.
*시는 제목만 얘기하거나 본문 일부나 전체까지 낭독했는데, 전문을 다 입력했음.
<메모, 정리: 백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