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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만주 점령에 이어 1932년 1월 중국 항일운동의 중심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를 침공했다. 이 시기 철기와 항일 중국군은 일본군과 싸우다 쫓겨 러시아로 탈출했다. 사진=필자 제공 |
무장 해제된 채 북시베리아 강제 이송
실내 영하 30도의 통나무 수용소 생활
러 보급창과의 사무 연락 대표로 뽑혀
오가며 자유 억압 공산주의 실상 목격
철기는 러시아 톰스크에서 8개월간 억류생활을 했다. 이 기간에 철기는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을 겪으면서 공산 러시아 혁명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철기는 민족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다. 철기가 활동하던 시절의 공산주의는 지금과 다소 차이는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는 공산주의의 실상에 대해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역사가 보여준 공산국가의 종착지는 소련처럼 붕괴하거나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이 개혁·개방을 표방한 변신이다. 그러나 그 변신도 본질은 공산주의일 뿐이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톰스크 시내에 있는 ‘부활’교회. 톨스토이의 명작 『부활』을 기념해 만든 교회다. 톰스크는 사방이 눈으로 쌓인 눈의 도시다. 사진=필자 제공 |
영하 40도 속 10여 일 만에 도착
철기는 일제 관동군에 쫓겨 가까스로 러시아령에 들어섰다. 그리고 따로 민간인 마차 대열 속에서 이동했던 마리아도 일본군의 공격에 죽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마리아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경을 헤맸다. 철기는 오랫동안 생사를 같이하던 동지이자 아내인 마리아를 잃지 않으려고 온갖 정성으로 간호했다. 그 결과 마리아는 가까스로 회복됐다.
수만 명의 항일 중국군대는 무장이 해제되자마자 행선지 통보 없이 강제로 열차에 태워졌다. 이동 중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길림·요령·흑룡강성 등에서 온 중국 정규군 및 의용군과 합류하기도 했다. 이들은 영하 40도의 추위를 헤치고 10여 일 만에 목적지인 북시베리아의 톰스크에 도착했다.
톰스크는 사방 천지가 눈이 쌓인 눈의 도시다. 주위에는 원시림이 병풍처럼 서 있는 시베리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철기 일행은 톰스크 중심에서 약 40리 떨어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통나무 수용소에 수용됐다. 1개 대대 병력을 수용하는 통나무집에는 엉성한 생철난로 2개가 난방기구의 전부였다. 실내 온도가 영하 30도일 만큼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러시아의 적군(공산군)은 주식으로 빵을 공급했다. 억류된 장교에겐 하루 450g, 사병에게는 700g이었다. 채소는 건조 상태로 한 사람당 하루 200g이고, 육류는 폐마를 죽인 말고기를 제공했다. 빵 급식량의 차이를 통해 내부의 계급갈등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억류된 일행은 내부 분열을 막기 위해 자체 모순을 최소화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위계는 지키되 땔나무를 하거나 눈을 치우는 등의 육체노동은 장교나 사병 할 것 없이 모두 동등하게 했다.
낮의 추위도 문제였으나 밤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북시베리아의 기나긴 겨울밤은 추위와 굶주림이 뒤엉킨 죽음의 밤이었다.
중국 치치하얼 강교항전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철기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북극풍정화’의 포스터와 소개 자료. 사진=필자 제공 |
공산 러시아의 민낯 들여다봐
당시 7만여 명의 억류자에는 군인뿐만 아니라 지역유지 등 민간인들도 많았다. 그 때문에 자체 질서유지를 위해 자치회가 필요했다.
30대 초반의, 중국인도 아닌 한국인 철기가 뜻밖에도 자치회에서 러시아 보급창과 사무 연락을 맡는 대표로 뽑혔다. 철기의 중국군 대좌 계급과 러시아어 실력, 그리고 공정한 일 처리가 모두의 신임을 얻은 것이다.
철기는 톰스크 시내를 드나들면서 공산주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철기가 공산 러시아를 본 첫인상은 자유의 억압이었다. 거주지를 떠나려면 우선 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동 즉시 비밀경찰 게페우(GPU)의 감시가 따랐다. 화폐는 돈이 아니라 소속 직장의 꼬뻬라치프(소비 합작사)에서의 물건 교환권이었다.
주택은 러시아 정부가 민간의 가옥을 모두 접수해 국가 소유 가옥과 합쳐 직장별로 다시 할당했다. 두 식구에 방 하나 정도다. 주민들은 모두 직장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직장이 없으면 배급도 없었다.
지독한 감시와 조사, 통제로 전통적 가정관념이 무너졌다. 부자 형제 사이에도 터놓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남편과 아내의 직장이 다르고, 근무시간도 맞지 않았다. 내외가 집에서 만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탁아소에서 국가가 충실한 공산당원으로 키웠다.
사방 천지가 공포와 불안의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끊임없이 숙청은 계속됐다. 밤에 발소리에 잠을 깨서 밖을 내다보면 누군가가 끌려가고 있었다.
나라 전체가 병영이었다. ‘노동자 조국을 수호하는 방위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군사교육이 사회를 지배했다. 여자 직공까지 소총과 기관단총을 다뤘다. 초등학생은 비오네르(소년 돌격대), 청년들은 콤소몰(청년단)에서 조직생활과 의무부터 가르쳤다.
공산주의는 사회의 모순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가족주의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이 파괴됐다. 공산주의와 다른 모든 사상과 관습은 탄압의 대상이었다.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는 인간의 경제적 동기를 무시했다.
배울 점도 있었다. 군대와 당원은 똑같이 최고의 대우 대상이나 사치나 허영 생활은 할 수 없었다. 나이가 60이나 되는 장군도 공무 외에는 꼭 걸었고, 물건도 스스로 들고 다녔다. 독일이나 일본의 군국주의 겉껍데기 같은 위엄과 허영적 프라이드는 철저히 배척됐다.
이 대목에서 지금부터 90여 년 전 철기의 관찰은 놀랄 만큼 예리하다. 철기는 군국주의 군대의 과도한 권위의식과 허영을 지적했다. 공산주의가 말하는 평등의 관점이 아니라 소통과 본연의 역할에 주목한 접근이었다. 한국에 미군이 주둔한 지 70여 년 가까이 되지만, 아직 한국군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분이다.
갈 수 없는 조국… 그리움은 더욱 커지고
톰스크의 겨울은 몸에서 나오는 소변이 땅에 떨어질 때 그대로 얼어버린다. 배고픔과 추위가 뒤엉킨 길고 긴 밤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돌아갈 조국과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철기는 나라 잃은 망명객 신분이었다.
시간이 흘러 톰스크의 하늘에도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봄이 오면서 억류가 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톰스크는 톨스토이의 명작 『부활』에 나오는 도시다. 대만의 유명작가 푸나이푸(卜乃夫)가 쓴 ‘북극풍정화’(한국어 ‘톰스크의 하늘 아래서’)는 30대 초반의 철기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톰스크 시내 학교 교사인 폴란드 여성과 나라 잃은 조선인이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사랑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중화권에서 크게 히트했던 이 소설은 대만에서 영화화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요즘 시베리아를 여행하는 한국 젊은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톰스크도 가볼 만한 곳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90년 전 나라를 잃고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억류됐던 한 망명객의 아픔을 떠올려 본다면 어떨까 싶다.
<28> 충칭 임시정부 합류
1940년 9월 17일 충칭시 가릉빈관에서 거행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
1940년 초 김구 등 임정요인과 재회
1941년 中 군사위, 광복군 성립 인준
오는 8월 4일은 78년 전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된 날이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정식 창설식을 열지만, 총사령부는 앞서 8월 4일에 창설됐다.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에는 지청천, 참모장에는 철기가 임명돼 본격적인 광복군 창설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철기는 이제 임시정부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앙무대에서 그동안 닦아온 최고위급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 주석 장개석과 부인 송미령. 장개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창설에 우호적이었다. 사진=필자 제공 |
세계대전 소용돌이 속으로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뚜렷한 대일투쟁의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독자 무력에 의한 국토회복이나 외교적 노력을 통한 국권회복은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유일한 길은 일제가 무너지는 시기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벌어졌다. 이어 1939년에는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 세계는 바야흐로 세계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러한 격변기는 임시정부에 호기였다.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우리 군대를 한시바삐 만들어 연합군의 일원이 되려는 전략을 세웠다.
임시정부가 군대를 창설하려는 여건도 좋았다. 당시 대부분의 한인 무장세력이 중국 내륙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2년 만주국의 건설로 만주지역에서의 조직적인 투쟁이 어려워지자 대부분의 독립군이 중국 내륙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김원봉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한다는 명목 아래 화북지역의 조선혁명군을 바탕으로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 통제 조건 아래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김원봉은 중국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는 인맥을 바탕으로 임시정부보다 한발 빠르게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의 공격 때문에 서쪽으로 계속 이동하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군대 창설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창설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임에도 무장단체 결성에서는 조선혁명당에 뒤지게 된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의 시발이 된 노구교 전경. 사진=필자 제공 |
임정과 광복군 창설 뜻 같이해
1940년 초, 중국 국민당 중앙훈련단 중대장이었던 철기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충칭으로 이동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재회했다. 중국 군부와의 접촉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임시정부에 철기는 천군만마였다.
1940년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와 교섭을 진행하면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의 명의로 ‘한국광복군 편찬 대강’이라는 광복군 편성계획서가 장개석에게 전달됐다.
최초 철기는 광복군이 한국독립당 군대로 창설되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파벌 가능성의 우려로 특정 정당의 군대로 군대가 창설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사실 이후 광복군에는 김구 직속파, 지청천의 만주 한국독립당파, 김원봉의 조선혁명당파 등이 서로 얽혀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장준하와 김준엽 같은 일제 학도병 출신들이 임시정부로 탈출한 뒤 파벌 싸움을 보고 분개했을까.
철기는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와 내무총장이던 이시영 등과 조속히 광복군을 만들어 세계대전 발발 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가담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기꺼이 동참했다. 광복군 창설 준비기구로 ‘광복군 창설 7인 위원회’가 조직됐다. 임시정부와 무장독립투쟁 지도자를 대표해 김구, 박찬익, 지청천, 유동렬, 김학규, 조경한, 그리고 중국군 고위직을 사임한 철기가 바로 7인의 위원이었다.
광복군 창설을 위한 중국 국민당과의 교섭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그러자 철기가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보자”며 조기 창설을 강력히 주장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하려면 시간이 없으므로 여건은 불비하지만, 만들어 놓고 중국 측과 계속 협상해 나가자는 논리를 폈다. 김구가 여기에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광복군 창설 후 1년이 지나서야 중국 측의 승인을 받았던 것을 보면 철기의 주장이 광복군 창설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셈이다.
중국 측의 광복군 승인 지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장개석과 중국 국민당 지도자들은 1927년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 봉기 시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많은 한인이 가담했던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일부 중국 지도부는 한국인의 투쟁목표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또한 국민당 내부에서는 수백 명밖에 안 되는 한국의 광복군 인준이 그리 서두를 만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중국 상층부의 인식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지만, 아직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장개석은 동의했으나 광복군 인준은 군사 실무적인 일인 만큼 중국군 참모총장 소관사항이었다.
바로 이때, 임시정부에 합류한 철기는 능숙한 중국어와 자신의 인맥을 바탕으로 중국군의 여러 인사를 상대로 군사외교활동을 폈다. 여러 불신 요인을 해명하면서 한국인이 중국과 동맹이 되면 발생하는 국제정치적·군사전략적으로 유리한 점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철기는 한편으론 중국군사위원회 실력자인 후성 장군을 찾아가 따지기도 했고, 김구도 장개석과 직접 면담해 설득했다.
임시정부는 중국 측의 인준과 별개로 우선 군대를 창설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강행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드디어 광복군 창설식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했다.
충칭 가릉강가에 위치한 가릉빈관에서 열린 전례식에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외국인 귀빈 200여 명이 참석했다. 중국 중앙정부의 요인들과 주요 군 지휘관, 각 사회단체의 간부, 각국 대사 등 외교사절들과 신문기자들도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초창기 광복군의 임무는 중국에 분산된 한인 무장력을 총집합시켜 중국군과 연합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일제를 격멸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러나 광복군은 창설됐지만, 중국 측의 승인과 원조는 여전히 부진하고 미온적이었다. 중국군은 광복군을 동맹군이 아닌 자신들의 지원군 내지 보조군으로 예속시키고자 했다.
광복군은 그 위상이 양적 규모에 좌우된다고 판단하고 인적 기반 확대를 최우선 사업으로 삼았다. 이에 화북지방의 20여만 동포를 대상으로 초모(招募)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위해 사령부를 섬서성 시안으로 이동시켰다. 철기는 충칭에 잔류해 중국 군사위원회와 군사협정과 지원문제 등을 계속 협의했다.
1941년 드디어 중국 군사위원회는 중국군 예속을 전제로 광복군 성립을 인준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정부가 광복군 성립을 인준한 것은 철기의 노력과 함께 김원봉 휘하의 조선의용대가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의용대가 대거 화북으로 진출해 중국 공산당 산하로 들어가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중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수중에 장악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1941년 10월 31일 중국 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중국군 참모총장이 직접 통제한다’라고 지시를 하달했다. <박남수 철기 이범석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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