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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 받은 메시지
윤석열의 '무지한'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1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과 우리가 건설할 코뮤니즘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탄생한 노동자국가는 1920년대 후반까지는 노동자 권력 아래 사회주의로 이행을 위한 시도들이 수행되었지만, 스탈린주의 반혁명 이후 1930년대부터는 노동계급에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러시아혁명 이후 몇 달 안에 이루어진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 제도적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1917년 신분제 폐지, 철도노동자 노동시간 1일 8시간 실시, 군대 계급 폐지, 1,886개 전략회사 몰수, 종교의식을 하지 않는 결혼제도 실시, 낙태법 제정, 모자보호 연구소 개소, 1918년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공화국 선포, 사회주의 적군 창설을 위한 법령 선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법적, 제도적인 혁명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노동계급은 소비에트 생산 주체, 권력 주체가 되지 못했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인 러시아 10월 혁명이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계급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사회주의로 이행이 실패하게 된 것이다. 1918년 봄 테일러주의 재도입과 1인 경영 강제 그리고 혁명 성과를 방어하려는 임시조치들, 즉 정치반대 분쇄, 차르 관료 재고용,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인센티브 재부과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실질적 권력을 깨뜨리고 ‘노동자정부’와 노동자 사이 틈새를 벌려놓고 말았다. 이 과정은 3년간의 내전 동안 혁명적 노동계급의 죽음으로 더욱 굳어졌고, 세계혁명의 연이은 실패는 볼셰비키를 고립시켰다.
결과적으로, 당시 러시아는 1차 대전 패배와 내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세계분업 내 후진적이고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 자본주의적 이행 형식을 들여와 이행을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어받은 스탈린은 5개년 계획 도입과 농업 집산화로 소련이 사회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지만, 오히려 일국사회주의와 반(反)노동자적인 당 독재 강화를 가져왔다. 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판단 속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레닌 죽음과 세계혁명의 명백한 침체에 힘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선언은 국제주의와의 공개적 단절이었으며 세계 제국주의 권력으로 러시아를 건설하는 약속이었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승리한 세계혁명 열매임을 주장한 1917년의 볼셰비즘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러시아 국가와 경제ㆍ경영에서 엉키면 엉킬수록 고립되고 낙후한 상황에서라도 성취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향한 단계를 더욱더 이론화하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인 원시적 사회주의 축적이론은 산업 성장을 노동계급 이해와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실제로 러시아의 산업 성장은 노동계급 착취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원시적 사회주의 축적은 본질에서 자본축적을 의미했다. 유럽 혁명운동 패배와 러시아에서 반혁명 과정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구성하는 당들에 러시아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을 부과하고, 동시에 그 당들이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도록 하면서 코민테른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일국사회주의는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법률상의 소유형식만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들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진정한 성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 소유의 법률상 측면만을 폐지한다. 노동자는 생산수단 사용에 있어서 어떤 진정한 통제력도 소유하지 않으며, 생산수단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결국, 생산수단은, 그것을 소유하고 공동으로 담당하는 관료 조직을 위해 단지 집산화되었을 뿐이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일반화된 상품생산 체제이며, 자본주의 생산 목적은 잉여가치 획득과 축적이다. 여기서 자본주의가 단순히 상품생산과 시장의 무정부성에 기반을 둔 이윤추구 체제라는 기본인식을 넘어, 자본주의 핵심이 자본의 사회적 관계 지배이며, 자본은 본질에서 소외된 노동의 자기 확장임을 인식해야 한다. 소련 노동자들은 임금을 위한 교환을 위해 일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소외시켰고 자본을 생산했다. 소련에서 잉여가치는 사적 자본주의와 같이 새로운 잉여가치를 추출하기 위하여 생산과정에 재투자되었다. 소련은 이러한 자본과 임노동의 사회관계가 생산수단과 생존수단의 국가 소유 제도로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으며, 스탈린주의 옹호자들의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국유화)가 전체인구에 의한 소유를 의미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허위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단지 소유형태의 법적인 형식이었을 뿐 전혀 노동계급 소유가 아니었다. 결국, 국가와 그 관료 조직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중화와 계획화는 소유 폐지를 향한 한 걸음 진전이 아니라, 단지 이것을 더 효과적으로 성형하기 위한, 착취강화를 위한 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지만, 사적 소유의 부재(사회주의 경제 창조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임에도)는 그것 자체로 사회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반혁명은 국가가 주도하고 명령하는 특수한 형식을 취했고, 이것은 10월 혁명 이행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핑계로 민족경제 재조직화로 나타났다. 이 과정은 그 후 중국, 동유럽, 쿠바, 북한 등등에서 추진되었고, 이들 모든 국가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평의회 권력의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를 참칭하며 타도해야 할 대상인 자본과 관료 독재가 가장 쇠퇴한 형식으로 지배할 뿐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제국주의 동맹체제 안에서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와 다르게 프롤레타리아혁명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단 한 번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가진 적이 없어 현재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과거의 마오주의 이데올로기 모두 자국 자본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희생시키면서,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데에 사용되었음을 되새겨야 한다.
소련 경험은 첫째, 일국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소련에서의 국가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일국사회주의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주의 이론 및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나 노동자국가에 대한 환상은 이러한 은폐에 모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둘째, 명령경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며, 사적 소유 철폐와 국가 소유로 전환만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국가 권력이 노동계급의 지배 아래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 체제이어야 한다. 셋째, 러시아혁명의 교훈은 국가기구가 반혁명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며, 이행기에 계급과 국가 사이 관계 문제의 복잡성과 난해성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가들은 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으며, 이것을 해결해야만 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넷째, 노동자국가, 코뮤니스트 사회와 전혀 관련이 없는 중국, 쿠바, 북한과 같은 부르주아 착취체제는 계급투쟁과 세계혁명을 통해 전복하고 진정한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코뮤니즘은 노동계급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 노동자평의회 권력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 코뮤니스트혁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당 역할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당이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의 집단적 권력을 당이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건설할 코뮤니즘은 혁명의 시작과 함께 사회 모든 권력을 노동계급이 집단으로 행사하는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을 수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노동자평의회가 모든 정치와 경제와 산업을 장악하고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에 걸쳐 모든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코뮤니즘 생산 관계는 생산수단 국유화와 사적 소유 철폐를 넘는 ‘생산수단 사회화’이며, 생산수단 사회화는 ‘노동자평의회의 전 사회적 권력’이라는 전제가 실현되어야 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코뮤니스트 사회
노동계급은 혁명계급이면서 낡은 체제에서의 피착취계급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경제적 해방을 위해서 의존할 수 있는 특권이나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부르주아 국가기구나 제도에 의존해서는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 노동계급은 다수의 집단적 힘과 의지를 관철해낼 수 있는 권력을 새롭게 창출하지 않고서는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루어낼 수 없다. 부르주아지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 앞에는, 낡은 생산관계의 지배가 새로운 것의 이해관계를 위해 파괴되는 과도기, 곧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불가피하게 선행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걸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새로운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계급적인 목적을 정치적으로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체제이며, 경제적 변혁을 수행하기 위해 착취계급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사회화 부문을 점진적으로 전체 생산부문으로 넓혀 나가는 사회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총회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 전체를 망라하여 조직될 것이고, 계급 안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 가능한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평의회 체제에 의해 중앙화(집중)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기간을 포함한 코뮤니스트혁명 과정에서 코뮤니스트와 혁명당은 평의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 그들이 노동계급 전체의 조직인 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다. 혁명당은 코뮤니즘의 필요성을 깨달은 가장 의식적인 노동계급을 재구성하고 전체 계급의식을 코뮤니스트 강령에 가깝도록 일반화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혁명당은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로 거짓 선전되었던 국가의 당 독재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혁명당의 명령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노동자평의회, 프롤레타리아 총회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정치권력을 가진다.
이러한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기간에도 비(非)착취계급과 계층은 여전히 존재하며, 아직 해소되지 않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내부적인 계급투쟁이 계속 존재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아직, 생산수단은 전체로서 사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국가체제인 노동자평의회에 속할 수밖에 없다. 계급이 폐지되기 전까지 생산수단은 사회의 절대다수인 노동계급이 독점할 것이다. 따라서 아직까지 전면적인 코뮤니스트 생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사회는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이며, 부르주아지를 대신한 지배계급인 노동계급이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의 정치권력을 창출하고 그것을 부르주아 반혁명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자, 코뮤니즘을 향한 경제적 변혁을 위한 수단이다. 소수 부르주아가 독점한 생산수단의 박탈은 고립된 개인집단이 아닌 노동계급의 조직된 힘인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전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렇게 조직된 힘이 노동자 반(半)국가의 기초를 형성할 것이다. 이렇듯 이행기동안 노동계급은 사회의 유일한 혁명계급이기 때문에, 사회 계급이 노동계급의 사회화된 부문으로 통합되어 점진적으로 소멸하면서 모든 사회계급이 폐지되고 국가 자체도 소멸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계급내부에서의 특정한 부문이나 그룹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배제한다. 혁명의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손에 있는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자본주의와 그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그리고 내전 동안의 반혁명적 계급의 저항과 폭력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승리를 보증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이것과 상관없는 노동계급 내부의 폭력은, 코뮤니즘을 건설하는 데 어떤 건설적인 과업의 일부도 담당할 수 없다. 이러한 폭력은 노동계급의 활동을 일탈시키고, 다른 노동 계층과의 관계를 왜곡시킨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대체한 사회다. 평의회 체제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최고로 꽃피어 언론, 회합, 집단 의사결정의 자유가 최대로 이루어진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참여만이 코뮤니스트 강령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기반과 원동력을 줄 수 있다. 누구도 전체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 없이 코뮤니즘을 만들 수 없고, 누구도 코뮤니즘을 미리 준비해서 노동계급에게 넘겨줄 수 없다. 서로에 맞서 분열되지 않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실천과 의식만이 수많은 오류를 정정하면서 코뮤니즘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노동계급의 혁명과 권력 장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생겨난 보다 낮은 단계의 사회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 단계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가 부여되는, 즉 “각자의 노동에 따라 각자에게 분배하는 사회”이다. 이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적 자본가를 소멸시킨 사회이며, 평등한 권리란 이런 사회와 노동자 사이에 적용되는 권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낮은 단계를 경과한 다음 단계는 코뮤니즘의 고유한 토대에만 의존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제로 하여 코뮤니즘으로 지향하는 보다 높은 단계이다. 이 단계는 개인의 분업에 근거한 노예적 종속이 소멸하고, 이와 함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이 소멸해야 가능하다. 이 단계는 노동이 단지 생존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 생명적 욕구가 되는 때이다. 모든 개인의 다면적 발전과 함께 생산력 발전이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하는 때이다. 즉,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분배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보다 높은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에, 노동자평의회의 의식이 코뮤니스트 강령에 가깝게 발전해야 하며, 동시에 혁명당도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화 되어 국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
원시 공산제를 제외하고 모든 초기 사회는 계급으로 분화된 계급사회였다. 또한 다른 모든 사회는 재산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 했다. 하지만 코뮤니즘 사회는 계급 없는 사회이다. 역사에서 코뮤니즘 이전 사회는 인간의 필요에 따른 생산력의 불충분한 발전에 기초해 있었다. 그것은 결핍의 사회였다. 또한 과거의 모든 사회는 과거의 경제체제, 사회관계, 사상과 편견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 사회가 사유재산과 다른 사람의 노동 착취에 기반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예제나 봉건사회가 남겨 놓은 사회관계와 사상과 편견들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코뮤니즘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낡은 유산을 전혀 갖지 않은 사회이다.
사유재산과 착취, 계급분열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은 가치법칙 및 시장과 화폐를 통한 분배와 소비에 종속됨으로써 경쟁과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코뮤니즘에서는 가치법칙이 사라지며, 생산은 평의회 체제에 의해 사회화된다. 코뮤니즘은 전 지구적 사회이다. 국가적 경계와 분할은 사라지고 인간의 보편적 정체성과 창조성이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 코뮤니즘은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낡은 전통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이다. 계급과 계급 적대가 사라지면 국가는 필요 없게 된다. 코뮤니즘에서 국가는 소멸된다. 코뮤니즘은 국가 없는 사회다. 사회의 행정적 업무는 모든 구성원의 협력, 합의, 집단적 의사 결정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즘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이상이 처음으로 실현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중에서)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1&document_srl=341730
윤석열의 '무지한'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2 코뮤니즘(공산주의)이란 무엇인가?
많은 노동자들에게 코뮤니즘은 그래서 러시아, 중국, 쿠바 등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었던 (국가)자본주의와 군사화된 노동의 ‘천국’으로 비친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코뮤니즘의 본질 자체로 인해서 코뮤니즘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코뮤니즘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코뮤니즘을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맑스,『독일 이데올로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은 코뮤니스트 사회가 소수의 ‘계몽된’ 사람들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로 맑스는 그에게서 변증법을 도출했다)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역사는 관념(인간의 관념, 코뮤니즘의 관념)의 진보적 실현이 아니다. 코뮤니즘은 인류의 목표로서 기능하는 정신적인 창조물이나 환상이 아니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실재적이고 인간적이며,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신기원이다. 이것은 구(舊)사회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 발전의 필수적인 귀결의 하나로서 출현한다.
그러나 코뮤니즘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코뮤니스트 사회가 자본주의에 내재된 경제적, 사회적 모순의 결과이자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천적이고 집단적이며, 의식적인 창조물이다. 역사상 최초로 하나의 사회 계급이 그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조직화되고 의식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코뮤니즘이 지적인 ‘계획’도 아니며,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도 아닌 이유다. 코뮤니즘은 인류 공동체가 이전 사회관계의 폭력적 파괴에 뒤이어 구세계를 의식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혁시킨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코뮤니즘을 향한 현실의 운동을 지배하는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은, 오늘날 존재하는 조건의 산물이다. 일단 코뮤니즘이 역사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되고 나면, 그것의 실현은 주체적 발전, 다시 말해 현 시대의 의식 발전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혁명 그 자체도 코뮤니즘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의식적인 정치 행동의 형식을 취해야 하고, 그 성공 여부가 프롤레타리아트가 획득한 의식과 조직화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인류 공동체는 단지 객관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코뮤니스트 사회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코뮤니스트 혁명의 주요 국면과 혁명이 지향해야 하는 최종 목표를 정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코뮤니스트 혁명은 오직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코뮤니즘에 의해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관계의 특징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조직양식이 발전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코뮤니즘의 본질
코뮤니즘은 유토피아라든가, 추상적인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 뿌리를 이전 사회에 두고 있다. 코뮤니즘의 가능성과 코뮤니즘을 이루기 위한 객관적인 조건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계급의 정치적 역량, 이 두 가지로부터 나온다. 미래 사회의 자양이 되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구체화된 사회관계의 본질, 두 가지 모두이다. 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객관적 필요성이 되는 시기는 오직, 생산력의 발전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생산력의 계속된 발전과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 사회가 더는 발전할 가능성이 없을 때이다.
이러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과 임금 체계, 상품 생산, 그리고 모든 민족적이며 계급적인 분리를 철폐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관계만이, 생산력의 진보적 발전을 허용하고 인류의 현재 필요에 대응하게 될 사회관계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코뮤니즘은 계급,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어떤 종류의 개인적, 집단적 소유도 없는 사회여야만 한다. 자본주의가 이뤄놓은 생산의 사회화의 유일한 최절정은 사회 전체에 의한, 생산수단의 사회적인 몰수이다. 오직 계급 특권과 사적인 몰수의 철폐만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회관계의 자본주의적 성격 사이의 현존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모든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사회적 몰수는 오직, 경제적으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생산적인 집단으로서만 기능하는 피착취 계급,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수행할 수 있다.
· 코뮤니스트 사회는 그러므로 결핍의 철폐와 인류의 필요를 위한 생산에 근거한다. 코뮤니즘은 풍요의 사회이며, 이 사회는 인류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줄 것이다. 생산력, 인문학, 기술과 지식의 수준을 통해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경제적 힘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의 삶과 재생산을 결정짓는 조건에 대한 통제력을 의식적으로 획득함으로써, “필요가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자유가 넘치는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은, 인류의 해방은 오직 세계적 규모로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코뮤니즘은 가치 법칙을 철폐한다. 모든 인간에 의해 모든 수준에서 사회화되고 계획되는 코뮤니스트 생산은 오로지 사용가치의 생산에만 기반하며, 그 사용가치의 사회화된 직접적 분배는 교환, 시장, 화폐(…) 등을 배제한다.
·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 경제적 경쟁과 경제적 무질서의 사회, 그러므로 개개인과 계급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사회로부터, 인류는 코뮤니즘 아래에서 인류 공동체가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권력의 모든 형식(정부, 국가, 경찰 등)은 착취와 계급 분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통치권들의 존재는, 다시 말해 인간성과 인간의 창조성을 억압하는 모든 방식의 존재는 사물의 단순한 관리,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코뮤니즘의 이러한 특징은 최소한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넘어서, 더 서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광범위한 일반화에 국한된다. 더구나, 이러한 간단한 묘사 속에는 인간관계와 관련된 새로운 삶의 방식의 결과들이 다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사회 내부의 분리와 차별, 소외, 인간 사이의 세력 관계 등을 철폐가 담고 있는 의미도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이렇게 대략적인 개괄을 통해서도 자본주의 사회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사회들과 미래 세계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다.
착취가 없는 사회!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살 수 있는 곳!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분리가 없는 곳! 자유의 의미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자유 이상을 의미하는 곳! 놀랄만하지 않은가!
이런 종류의 도약은 오직 한 사회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 수준을 성취할 수 있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은 가장 극단적인 박탈, 가장 사나운 착취, 영속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는 바로 그 계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이전의 모든 사회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코뮤니즘의 모든 특징 그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트 존재의 취약함, 궁핍, 그리고 비인간성에 달려있다.
착취당하는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바로 그 입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사회를 해방시키고, 또한 계급이나 착취 없는 사회를 만들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사회 내부에서 어떤 경제적 권력도 소유하지 않고, 생산의 지점에서 착취 받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오직 스스로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연대와, 자신의 의식으로써만 자본주의에 반대할 수 있다. 이 두 무기는 그 자체가 미래 사회의 특징적인 원칙의 체화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반대가 매우 취약하고 깨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지 사회와 대결할 때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경제적 특권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해방을 위한 최종적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계속적인 압력에 극단적으로 취약하다.
이것이 코뮤니즘을 향한 길이 필연적이지 못한 이유이다. 코뮤니즘은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열매다. 이것이 어째서, 잃을 것은 그 쇠사슬뿐이며 쟁취할 것은 세계라는 프롤레타리아의 특별한 혁명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없는지, 그 발전에 대한 결정론적인 전망이 있을 수 없는지 이유다. 그러나 만약 이 새로운 역사적 신기원이 쟁취되지 못한다면, 인간성은 이름 없는 야만으로 전락하고, 아마도 그 최종적 파멸에까지 이를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즘을 향한 길, 계급투쟁은, 일련의 승리와 패배로서, 일보 후퇴와 그에 뒤이은 새로운 승리라는 패턴의 연속으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의지와 의식 사이의 긴장, 끊임없는 재평가와 자기비판 사이의 긴장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소유형식에 기반 하지 않는 만큼, 새로운 종류의 착취 사회를 만드는 것 따위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착취 받는 계급으로서, “잃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 족쇄뿐”인 바로 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객관적으로 착취가 없는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의 건설로 나아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후에도,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후에도 착취 받는 계급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권력 쟁취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 - 와 코뮤니즘 사이에서는 일종의 이행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전 사회를 통해 다른 사회 계급을 생산적 노동에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조건을 일반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혁 없이, 계급의 이러한 점진적인 해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심지어 세계적으로 정치적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착취받는’ 계급 (다른 사회 계층들의 기생적 소비를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매우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이 코뮤니스트 혁명과 관련하여 제기된다 : “일단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으면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사회 계급을 착취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 또는 “아무리 최선의 의도를 지녔다 해도 권력은 부패 한다” 등등.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는 그 방식은 그들의 잘못된 추론을 드러낸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 받는 계급이자 혁명적인 계급이라는 본질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다음을 설명할 수 없다 :
· 계급 억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인 경제적 권력을 위한 어떤 물질적 토대도 노동자계급에게는 없다는 점
· 생산력의 계속적인 발전의 유일한 기초로서 계급 없는 사회가 이뤄질 필요성과 객관적 가능성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매우 쉽게 그러한 진부한 의문에 빠지는데, 그것은 사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유지를 위한 변명과 자기합리화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특징적인 이러한 근시안은, 혁명이 일어난 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이 나머지를 착취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노동계급이 그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우스꽝스런 일이 될 것이다), 이는 혁명의 후퇴를 의미하고 자본주의의 재등장을 의미할 뿐임을 보지 못한다. “착취하는 노동자”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으로 되어버린 것에 불과할 터이다. 혁명과 자본주의의 파괴는 오직 지연될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코뮤니스트 혁명의 승리는 그 자체로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코뮤니즘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 이행기 동안, 자본주의 사회로의 후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한 후퇴 가능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엄청난 노력을 다해 그 자신의 의식과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기 때문에, 이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제한된 수의 무기만이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옛 부르주아 권력의 어떤 잔재도 용인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오히려 옛 부르주아 권력의 잔재들은 이행기동안 점진적으로 분해되고 파괴되어 사라져야 할 것이다.
<전문 읽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7554
윤석열의 '무지한'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3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평화 세상을 쟁취하자!
-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선언 -
혁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렇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이는 1848년 혁명, 1871년 파리 코뮨, 1905년 러시아혁명의 사상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투쟁경험에 기반을 둔 노동계급의 세계적 투쟁이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낸 세계혁명의 출발점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공산주의(코뮤니즘)에 대한 전략〮〮⦁전술⦁강령 그리고 목표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봉기하여 혁명하지 않는다. 더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가난과 굶주림, 전쟁과 착취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 정치적인 위기가 전반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움직인다. 바로 이러한 결정적인 물질적 조건의 압력 아래에서 현존하는 체제를 끝장내려는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한다. 또한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싸워온 코뮤니스트들, 그들의 조직인 혁명당과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었을 때 혁명으로 나아간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이러한 전형을 보여준 인류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러시아 혁명은 1905년 ~ 1917년 소비에트 역사의 지속 과정에서 권력 주체는 노동계급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지배계급에는 혼란과 문명의 붕괴였고, 노동계급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속이었다. 노동계급은 과거 인류가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통합시켜 낼 역량 있는 계급임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내적 모순으로 사멸할 운명을 가진 자본주의를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복하지 않는다면,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욱 파괴적인 제국주의 전쟁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일깨워주었다. 이는 그 이후 세계혁명 물결의 패배,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퇴행 그리고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로 증명되었다.
우리는 10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어떠한 교훈을 얻을 것인가?
첫째, 가장 큰 교훈은 파리 코뮨 이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전복과 코뮤니스트 혁명의 당위와 가능성을 주체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이다.
둘째, 일국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시켜 주었다. 스탈린주의와 평의회주의는 서로 적대적이지만, 일국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들 모두 전 지구적 사회주의와 세계혁명이라는 국제주의 원칙을 벗어났음을 입증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혁명의 실패가 러시아 혁명을 일국사회주의에 갇히게 만들었고, 결국 스탈린주의라는 반혁명으로 퇴행했기 때문이다.
셋째, 노동자평의회가 노동계급 미래 혁명투쟁의 기본적 형태임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혁명당을 통한 대리주의를 거부하고 비판하게 만든 근거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체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권력이라는 교훈이었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적 관계에 반대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넷째, 스탈린주의는 혁명의 산물이 아닌 고립과 패배의 산물이다. 스탈린주의와 공산주의(코뮤니즘)를 동일시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술책임을 인식시켜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오류는 소련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미국의 뉴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케인지언(Keynesian) 복지국가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전쟁과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패 이후, 소련은 (국가) 자본주의였음이 증명되었다.
2017년 지금,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더욱더 인류를 착취, 가난, 기근, 황폐, 전쟁의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 모든 정치·경제·문화·사회·성적 소수자에 대한 폭력, 모든 수준의 사회생활의 무의미함, 인간관계의 퇴행, 환경파괴, 인종주의, 포퓰리즘, 그리고 남성 쇼비니즘이 심화되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더 많은 국가들이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테러리즘이 급증하고 있다. 중동⦁아프리카에서는 전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난민들이 넘쳐나고 있다. 동북아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의 핵무장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파시즘과 민족주의가 세계전쟁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을 끝장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전쟁을 반대하고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세력은 여전히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가 지켜내야 할 원칙은 바로 1848년, 1871년, 1905년의 맑스, 엥겔스, 레닌의 교훈인 혁명적 패배주의, 곧 국제주의뿐이다. 자본주의는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참상과 재난의 원천이다. 인류 생존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가능성이며 물질적 필요성이다.
1917년,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이냐, 문명의 파괴와 야만이냐 라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 엄청난 경험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미래의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2017년, 우리는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이 교훈들을 가능한 한 깊이, 그리고 폭넓게 공부하고, 정교히 하며, 널리 퍼뜨리는 것이 혁명적 소수의 책무이자 책임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주의 철폐!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코뮤니스트 평화 세상 쟁취!
<전문 읽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1&document_srl=288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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