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향기끼리 모여 무욕의 밭을 갈다
- 백이운 시조집 <무명차를 마시다> 동방기획 -
정 용 국
1. 차를 고르다
작년 가을 수원대 오형엽 교수는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 라는 평론서를 통해 한국 현대 시인들의 작품과 사회적 배경의 단면을 분석하였다. 기존에 사용되었던 문학의 공시적 탐구(수평적 연구) 와 통시적 탐구(수직적 연구) 라는 용어에 구조적 고찰과 계보적 고찰이라는 용어를 더불어 제시하였다. 서문을 통하여 그가 제시한 내용을 살펴보자
그 동안 전개해온 현대문학사 연구의 방법론을 공통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작품 자체를 존중하고 그 내부에서 텍스트의 비밀을 밝히려는 내재비평의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작품 자체만을 탐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작품을 통해서만 작품 외적인 요소들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텍스트 내부의 구성요소인 운율과 비유와 어조, 구성과 문체 등을 면밀히 정독함으로써만 작품이 작가와 사회 및 역사의 차원과 만나고 엇갈리는 교차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중략) 텍스트를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와 상호 비교하는 공시적(수평적) 고찰과, 텍스트를 문학사의 유동적 좌표 위에 놓인 열린 체계로 설정하고 그 계보적 관계망을 규명하는 통시적(수직적) 고찰을 상호 긴밀히 결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서평을 쓰면서 주제넘게 오형엽 교수의 글을 인용한 것은 우리 시조단에도 이제는 이런 체계적인 생각이 적용되어 현대시조 100년사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06년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한국시조시학회가 발행한 한국시조시학 창간호에 게재된 김제현, 유성호, 이지엽 교수의 세미나 발제문에서는 위의 문제들이 심도 있게 다루어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창간호 이후 학회나 잡지의 소식은 오리무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글을 인용한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비록 간단한 서평을 쓰는 입장이지만 필자는 백이운 시인과 오랜 교분을 가지고 문단의 길을 가고 있다. 20대 초반에 동문수학한 인연에서 시조를 공부한 사제의 인연, 그리고 문단에서의 활동한 시간까지 합하면 꽤나 긴 세월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집 하나만 덜렁 놓고 글을 쓰는 것이 웬지 허전하여 고민하다가 오협엽 교수의 글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할애된 지면이나 글의 성격으로 오교수의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은 차후로 미루되 그래도 조금이나마 전기주의적 비평방식을 빌어 작가의 삶과 연결된 작품의 주변이나마 더듬어보고자 함이었다.
등단 후 시조에 매달린 시간에 비해 느렸던 작품집이 2000년 「왕십리」 2002년 「그리운 히말라야」 2006년 「꽃들은 하고 있네」 2011년 「무명차를 마시다」로 이어지는 4~5년 터울의 시집들은 그 기간으로 보나 작품의 밀도로 보아 괄목할 만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2. 차를 우리다
새 시집을 들추기 전에 2006년 「꽃들은 하고 있네」를 보면 주목할 구절이 두 군데 있다. 먼저 서문에서 (시인으로 살기 30년 / 시가 나를 키우는 동안 / 나를 낳은 어버이는 탯줄을 끊어버렸다) 라는 말과 ‘밥’ 이라는 시에서 (부처님은 내 밥이다 / 제일 만만하니까) 라는 구절이다. 특히 어버이가 나란히 별세했던 기억들로 가득했었다. 등단 35년의 시인이 오롯이 시조에 매진하고 있는 모습과 부처님을 밥으로 알고 정진하는 수행자의 두 의미가 백이운 시인에게는 뚜렷하다. 내가 시를 써왔다 대신에 ‘시가 나를 키우는 동안’이라는 표현을 쓴 것과 ‘부처님은 내 밥이다’ 라는 말은 ‘나는 부처님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라는 반어적 표현이므로 당사자에겐 가장 중요한 ‘대상‘이라는 암시가 깔려있다.
이 짧은 문장은 백이운 시인의 작품을 꿰뚫고 있는 강력한 메시지다. 常 樂 我 淨을 삶과 시조의 화두로 세우고 용맹정진하는 모습을 전편의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며 시퍼렇게 살아 꿈틀대는 느리지만 강력한 힘을 느끼게 된다.
둥글게 다듬는다 다듬어 온 서른 해를
常 樂 我 淨 네 글자가 일거에 허무느니
아무리 숨기려 해도 날아가는 뾰족함
해진 무릎 꿇고 두 팔 들어올려
자신을 지우겠노라 무장해제 했던 것
삐치고 그은 획들에 시퍼렇게 살아있네
굳은 손목 움켜쥐고 다시 붓을 들지만
攝愛의 자비로움은 어디서 구할까
단번에 죽죽 그어서 지우지도 못하네
- ‘날아가는 글씨‘ 전문 -
안거에 든 수행자는 자신의 모든 언행에 의미를 두고 화두에 다가서려 노력한다. 그야말로 용맹정진이다. 눈을 뜨면서부터 새벽의 도량석, 공양, 옷매무새, 걸음걸이 하나하나까지 온 마음을 바치려고 집중한다. 그러한 수도자의 모습이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새해 아침 마음을 다잡고 붓을 들어 네 글자를 둥글게 써 놓고는 ‘날아가는 뾰족함’ 에 실망한다 ‘자신을 지우겠노라 무장해제 했던 것’ 이 글씨를 통해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네’ 라며 아쉬워한다. 그러게 욕심 밭은 날마다 깍아도 치솟아 오르는 밭이라 하지 않았을까.
불교의 지향점을 얼핏 보면 ‘무상’ ‘허무’ 쯤으로 파악하기 쉽다. 반야심경의 전편에 흐르는 ‘諸法空相’의 의미가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色卽是空 空卽是色‘ 을 자세히 되어보면 空은 空이 아니고 결국 색과 공은 일체가 되고 마는 것이니 무상과 허무를 깨고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의미가 결국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침 이슬 마르는 사이처럼 짧은 생은 소중히 살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뒤돌아보고 욕심을 누르며 放下着 하며 살아가는 길이 외롭고 쓸쓸한 길이다.
하늘이 길러낸 나뭇잎들 바스라져
고단히 길을 덮고
길 아닌 길마저 덮어
우리가 함께한 길이
지상에서 문득,
외롭다
- ‘지상에서, 문득’ 둘째 수 -
등 굽은 소나무가 宗山을 지키듯이
사람의 일도 마치 저와 같아서
외로운 향기끼리 모여 무명차를 마신다
- ‘無名茶를 마시다‘ 셋째 수 -
어찌 삶의 길이, 수행의 길이, 시인의 길이 이쯤 외롭지 않고 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을까만 욕심은 끝도 없이 자라나 한 시각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니 때론 시름겹고 주저앉고 싶은 것이다. ‘외로운 향기’ 는 수행자가 걷어내야 할 작은 그늘이리라. 그 고단한 삶을 차로 시로 음악으로 영화로 도닥이며 건너는 길이 외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용감한 발걸음이다.
3. 차를 맛보다
백이운 시인의 동선은 아주 단출할 것으로 생각된다. 집과 출판사 절이 주요행로일 것이고 그 외로 시조단의 행사나 시인들과의 만남이 부차적으로 생길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음악과 영화와 도자기 등 미술품과의 조우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이렇게 단출한 동선 안에서 시인은 아주 작은 일에서 무진장 깊은 사색에 이르기까지 늘 담담하다.
두 평 반 도심산중 이 귀여운 토굴에서
다람쥐 밤알 까먹듯 하루 하루 까먹는 날
- ‘음악처럼’ 첫 수 중에서 -
오붓이 둘러앉아 소박한 밥상에 땀 흘리고
까페라떼 한 잔에 마음이 녹아들 무렵
어렵고 멀기만 했던 한 세계가 밝았습니다
- ‘불가사의한 세계‘ 마지막 수 -
월급도 보너스도 퇴직금도 없는 일
고료를 못 주어서 處染한 잡지를
常淨인 시의 제단에 경전처럼 모셔놓고
- ‘狼狽‘ 셋째 수 -
아주 사소한 일상이 海印과도 같이 물속에 잠잠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더도 아닐 것 없는 소박한 일상에서도 시인은 ‘한 세계’가 밝아오고 ‘팔만 사천 모공으로’ ‘진실 적시는 시보다’ 위대한 ‘범사‘를 감사하게 받아든다. 현실의 문제가 나직하고 살갑다가도 돈의 문제에는 ’낭패‘ 가 아닐 수 없는 잡지사의 경영이 눈물겹다. ’벽돌 하나 뽑아다 오늘은 쌀을 팔고 // 또 한 장 내일은 / 종이를 구하는‘ 일이 시인의 경제현실인 것이다. 이렇게 작은 일상 속에 있던 시인이 붓을 들고 시를 가다듬는 모습은 돌변하리만큼 냉혹하다.
뭉개지 마 지우지 마
목숨을 갖게 해줘
詩語들이 매달린다
羽化ml 꿈을 벗고
무수히 삭제되고 날조되는
네가 있다 내가 있다
- ‘詩法‘ 전문 -
광을 죽이고 윤내는 법 터득한
청자 도공 삼십 년쯤
바지런 떨지 않아도
이 빠져
대접 못 받는
국 대접은 안 되었길
- ‘詩法‘ 전문
시마와 싸우는 길이 험하고도 고단하며 대접받지 못하는 일이라니 서글프다. 그래도 시어가 살아 ‘목숨을 갖게 해’ 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창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채찍을 가할 뿐이다. ‘삭제되고 날조되는’ 일이 없도록 시어들에 매달리고 혈투를 벌이는 것이다. 또한 삼십 년 시업이 ‘대접 못 받는 / 국 대접은 안 되었길’ 소망한다. 이쯤이면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르겠다.
4. 찻잔을 거두다
차를 고르며 망설였던 길이 걸음을 내딛으며 힘도 나고 길도 보였다. 백이운 시인의 시를 달랑 들어다가 떼어놓고 보면 한가하고 여유 있는 중년여류 시인의 한담 같고 고승의 선시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료부수도 얼마 되지 않는 시조전문잡지를 십 년 넘게 꾸려오고 있는 여성의 어깨는 아마 ‘잘못 들앉은 살 속의 뼈 혹은 뼛속의 살 // 허방 디뎌 비명지르’ 는 오십견으로 뭉쳐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찌 시인이 ‘부처님을 밥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벽돌을 뽑아다 이리저리 괴어도 ‘들고 난 흔적이 없어 어리둥절 하다‘ 는 말이 실감이 날 뿐이다. 또한 잡지사의 뭇 경영자처럼 행사를 도모하고 문단을 오르내리며 경영에 보탬이 되는 사업을 벌이지 않으며 잡지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물을 쳐놓고 걸려들길 기다린다
너그러움이란 미끼를 쓰지도 않지만
자비를 베푼다 함도 단칼에 내리친다
흐르는 물길에 기대 공수하며 앉은 자리
대어가 잡혀들길 딱히 기다리지도 않으며
그물이 그득해지기도 기대하지 않는다
무엇이 두려운가 예측불허 인생에
피라미 몇 마리 잡다 놓친 한나절
넉넉히 제풀에 걸린 노을빛도 있는 것을
- ‘흐르는 물살에 기대‘ 전문 -
마지막으로 읽는 시가 그래도 큰 위안이다. 이 시가 잡지사를 경영하는 백이운 사장의 경영지침서로 보여 진다면 잡지사가 살아남아 있는 것은 늘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부처님이 하시는 일’ 일지도 모른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넉넉히 제풀에 걸린 노을빛’ 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시인, 수행자, 경영자로서의 역할이 그의 시에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듯이 그는 현실의 험악한 ‘낭패’ 도 ‘타박하고 짜증내고 인정머리 없던 날들’ 도 ‘꽃잎 하르르 날아와 봄을 키우’ 듯 이제는 꽃들이 전해주는 사랑의 말씀쯤은 거뜬히 알아듣는 푸근하고 큰 귀가 열려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외로운 향기들 오붓이 모여 하루도 빠짐없이 무욕의 밭을 갈고 있는 뒷모습 둥그런 시인을 오래도록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백이운 시조의 전진기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