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복지관 강당을 가득 메운 관중들
많은 관중들 앞에 공연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몸소 알게 됐다. 지난 4월부터 청솔노인복지관의 연극반프로그램에 입문해 지금까지 연습해온 실력을 선보이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14일 오전11시부터 예고된 '굿닥터'연극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매주 2시간의 연습과정을 거치며, 그것도 모자라 별도의 연습시간을 마련해가며 불철주야 노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애 처음으로 연극이라는 연자도 모르는 내가 어찌하다보니 대사도 제일 많고, 맨 앞 순서의 깃발 든 기수나 다름없는 '이반' 역을 맡게 되었다. 동료회원들은 '이반'역이 가장 중요하다며 맨 앞 팀이 잘해주어야 다음부터 다른 팀들도 술술 잘 풀린다며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했다.
미국의 인기 극작가 닐 사이먼이 쓴 '굿닥터'의 여러 작품 중 우리가 그동안 연습해온 것은 재채기, 가정교사, 치과의사, 의지할 곳 없는 신세, 오디션의 다섯 작품이다. 그 중 '재채기'의 줄거리를 보면 주인공인 말단공무원 '이반'이 부인과 함께 연극공연을 보러 극장에 가 좋은 자리를 잡아 앉는다. 그때 앞자리에는 뜻밖에도 직장의 최고 책임자인 장관이 부인과 나란히 들어와 앉는다.
이반은 너무 좋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장관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과 아내를 소개하는 행운을 얻는다. 그러나 너무 좋아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에 갑자기 재채기가 튀어나와 장관 머리에 침을 쏟아 날리고 만다. 그때부터 사태는 급변하여 이반은 장관과 미묘한 갈등을 연출하는,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단막극이다. 여기서 이반이 맡고 있는 대사는 모두 37꼭지로 비교적 많다. 대사의 내용도 비슷비슷 할 뿐만 아니라 그 장면이 그 장면만 같아 여간 헷갈리는 것이 아니다.
공연에 앞서 분장사의 손길이 바쁘다.
연극의 대사라고 하는 것이 자기 것만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앞 사람의 대사가 확실하게 들어와야지만 다음 대사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줄거리 전체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료회원들은 전에 경험들을 말하며 100번까지 읽으니까 되더라고 말하는가 하면, 무조건 많이 읽으라는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무슨 재주로 그렇게 많이 읽을 수가 있단 말인가. 회원들 대부분의 나이가 60-70대 전 후반으로, 앞으로 외우면 뒤로 까먹는다며 대본을 마지막 연습 때까지도 손에서 놓을 줄 모르며 연습했다.
그러나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백 번까지는 아니지만 밤이나 낮이나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대본 읽기를 계속하며, 나는 광교산을 오를 때도 녹음기를 귀에 꽂고 대사를 듣는다든지, 잠자기 전에도 몇 번씩 읽고 대사를 들으며 잠들다보니 어느 정도는 암기가 되는 것이다. 마침내 산에서도 혼자 중얼거리며 가다가 등산객을 만나면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리며, 대사에 미치다보니 자연스럽게 대본이 손에서 멀어진 것이다. 어떻게 하다보면 헷갈릴 때도 있지만 큰 문제는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 되고,
그렇게 공연 날까지 사흘 동안 회원들 모두가 모여 맹연습을 했다. 마침내 공연날, 아침 8시까지 나오기로 했다. 공연장의 조명과 음향설치를 비롯해 개인 마이크 착용, 회원들 저마다 분장사로부터 분장을 받는 것도 필수였다. 연극을 하는 것도 생애 처음이지만 분장을 받아보는 것도 처음이다. 호사를 한다거나 출세했다는 말도 이런 것이 아닐까싶었다. 분장실에는 모두가 그런 표정들이었다. 각자의 마이크 시험도 끝나고 마침내 오전 11시 약속시간, 강당 안은 관객들로 가득했다.
드디어 시그널음악이 흐르고 무대에는 작가의 인사와 해설이 시작된다. 나가라는 신호와 함께 이반과 그 부인이 첫무대의 등장이다. 관객들과 눈부신 조명 앞에 떨리거나 긴장이 되었다고 하면 정말 큰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인지 뭔가를 미련 없이 쏟아내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 발동을 한 것이다. 연습 단계에서는 뭐가 뭔지 모르고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그런 고비를 넘어 이제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오버액션이라고 할까, 쌓였던 스트레스 같은 것을 털어내는 쾌감마저 느껴져 왔다.
팀 마다 1년 동안 쌓은 실력들을 다 쏟아내고 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몰입하다보니 주어진 시간도 그렇게 빨리 끝날 수가 없다. 배당된 시간은 16-17분, 결국 '이반'은 최고 책임자인 장관에게 내뱉는 재채기로 시작하여 재채기로 망치며 절규하고 쓰러지는 것으로 끝난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박수소리를 뒤로 하고 분장실에 들어가니 '이반' 잘했다며 모두가 반기고 좋아 한다. 그렇게 다섯 팀 모두 실수 없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었다. 다들 연습할 때 보다 너무 잘해주었다며 좋아들 했다.
공연시간은 모두 한 시간, 긴 여로에서 돌아와 우리는 복지관 담당자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복지관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마련된 것은 노인들의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출연자들은 처음에 너무 힘들어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지금은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이런 성취감을 맛볼 수 있겠는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과 혼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내년에도 연극반을 계속해보고 싶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면서 건강한 모습으로 내년 봄에 다시 만나자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리도 울었나보다'라는 시 구절이 가슴에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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