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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피영민 목사
서 론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세렛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증거 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설교 본문으로 삼으신 말씀이 바로 이사야 61장 1절로 3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 나오는 ‘내’ 혹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주목하여 볼 때 예수님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1장 1절에 예언된 ‘내’ 혹은 ‘나’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저 사람이 우리 동네 목수인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아니냐?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것을 우리가 다 봤는데 그가 지금 건방지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자신이라 하느냐?”라고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과 복잡한 변론을 하지 않고 그냥 저희를 지나가시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주전 700년경에 예언한 말씀인데 그것이 700년 뒤에 예수님께 정확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언의 실현을 볼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지 않으셨으면 결코 이처럼 정확하게 실현될 수 없는 위대한 말씀이라는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메시야가 가진 권위(authority)는 어디서 오는 것이냐, 메시아가 하는 일(ministry)의 내용은 무엇이냐, 그리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권위를 가지고 이런 사역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purpose)은 무엇이냐는 3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메시야의 권위(Authority)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메시야는 ‘기름붓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maschiach)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는 ‘Χρισο(Christos)’를 쓰는데 우리말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 붓는 의식을 통해 취임하는 직임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닌 분이 메시야입니다.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백성을 가르치는 선지자이기도 하며, 또한 자기 백성의 죄를 해결하는 제사장의 기능을 한 몸에 수행하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바로 메시야입니다.
메시야는 권위를 가진 분입니다.
메시야의 권위는 두 가지에서 옵니다.
첫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데서 옵니다.
61장 1절 전반에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것과 기름부으심을 받았다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야의 권위가 성령의 임재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성령이 임재해 계시므로 메시야에게는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1절로 2절에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새의 아들은 다윗이고 다윗의 후손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여호와의 신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지혜도 없고 총명도 없고 모략도 없고 재능도 없고 지식도 바로 가질 수 없고 여호와를 경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야의 권위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1절에도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예수님에게 성령을 부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성령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으셨고 침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으며 또 성령의 능력을 물 붓듯, 기름 붓듯이 받아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칠 때도 성령으로 가르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때도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성령이 함께 일하신 것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들이 신약에 모두 이루어 진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청교도 목사인 존 오웬(John Owen)은 “사람에게 어떤 면이든지 권위가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직분(position)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unction)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은 그 직분이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회장이든, 대장이든, 무슨 직분이든 간에 직분 자체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임재하심을 통해 권위가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사도바울에게 “네가 12사도도 아닌데 왜 사도라고 돌아다니느냐?”라며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습니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절로 5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며 성령의 임재로부터의 자신의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어떤 면으로든지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에게 성령이 계셔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날마다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게 되면 고귀하고 권위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출세를 가지고 권위 있다고 해봐야 그것은 세상 나라에서는 권위가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Nothing).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성령과 동행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며,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권위가 있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뭔지 모르는 분이 계시다면 한 자리에서 한 시간 이상 성령 충만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내게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달라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그의 인생이 고상하고 권위 있으며 고귀하게 됩니다. 악령을 받아서 악령에 이끌려 살면 그의 인생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메시야의 권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명과 권한을 위임 받은 데서 옵니다.
본문 이사야 61장 1절 중반에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특수한 사명을 위임 받았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그의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 받았기 때문에 권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메시야의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명을 받으신 것임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28절에는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라고 기록되었고, 8장 28절에도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8장 42절에도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고 기록되었고, 14장 10절에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하여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권위(authority)는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파멸이 초래됩니다. 이사야 60장 12절에는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권위자에게 순종하면 축복이고, 불순종하면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을 들으시고 권위에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메시야의 사역(Ministry)은 무엇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두 가지 사역을 말합니다.
첫째,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본문 1절 중반에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라고 기록되었고, 2절 후반으로 3절 전반에는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만 가난한 자(poor)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슬픔대신 희락을, 근심대신 찬송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슬픔이 있는 분은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희락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근심이 있는 분은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찬송을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자족하고 자만하고 자고하면 메시야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주여 내가 곤고한 자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 용서가 필요하고, 마음이 슬퍼 기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근심이 있으니 찬송을 주십시오”라며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메시야 되신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기록되었고, 9장 13절에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9장 12절에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진 사람, 죄를 진 죄인, 그리고 병든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주시고 도와주시며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곤고하고 슬프고 죄를 짓고 마음이 무거우신 분은 메시야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지위가 높아 교만하면 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사안하고,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성질이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며 겸손하고 낮아지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없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냐 본전이지’라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 배고파도 큰일 날 거 없고, 조금 가난해도 별로 슬플 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마음을 낮추면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오고, 메시야의 도우심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올해도 늘 마음을 낮추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시야의 사역은
둘째, 억압에서 해방하는 사역(Ministry of Deliverance)입니다.
본문 1절 후반에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20세기 우리나라에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 혹은 민중신학이라는 잘못된 신학이 들어왔습니다. 해방신학의 기조는 만인구원설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명(Missio Dei, Mission of God)은 온 세상 사람을 다 천국으로 인도하고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진실이 아닌 이단사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인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고, 교회가 할 일은 정치적으로 압박받고 경제적으로 약한 프로레탈리아 계급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해방신학이 남미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개정되어 민중신학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민중과 함께 고난 받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에는 언제나 좌파사상이 득세를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자의 것을 나눠주자는 사상입니다. 마치 있는 닭을 다 잡아먹자는 사상과 같습니다. 그러나 있는 닭을 다 잡아먹으면 안됩니다. 닭이 계란을 낳고 계란으로 또 닭을 만들어 계란도 먹고 닭도 만들어야 됩니다. 닭을 다 잡아 먹으면 계란을 낳을 닭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좌파 사상은 닭을 다 잡아서 나눠먹자는 것과 마찬가지 사상입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기독교와 결합된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근거로 삼았던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이사야 61장 1절로 3절 말씀입니다.
이들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는 것을 정치적인 포로, 사회적인 억압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억압이나 사회적인 억압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억압, 마귀의 억압, 죄의 억압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로 3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은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국이었으므로 남의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거짓말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종이면서도 종인 줄을 모르고 마귀의 노예이면서도 노예인줄을 모르는 것이 불신자들의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직접적으로 노예해방이나 사회해방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처럼 공산혁명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적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AD 60년부터 63년까지 로마 감옥에 1차 투옥 되었을 때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렇게 4권의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그 가운데 빌레몬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바울이 거기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 변화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앞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앞장서라고 선동하지 않고 그의 내면을 변화시켰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너는 어디서 도망쳐 왔느냐? 그리고 너의 주인은 누구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오네시모가 “내 주인은 골로새 교회 목사인 빌레몬입니다. 내가 그 분의 돈을 훔쳐 도망쳐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나도 네 주인, 빌레몬을 잘 아는데 네가 훔친 것을 내가 갚아주겠고 너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으니 빌레몬이 너를 형제로 대우하라고 편지를 써 줄 테니 이 편지를 갖고 그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라고 선동하는 혁명가, 선동가가 아니라 그가 목적으로 한 것은 사람 내면의 변화였습니다. 죄의 종 된 자가 하나님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 된 자가 성령의 종이 되는 내면의 변화를 가르친 것입니다.
기독교는 직접적인 사회변화를 목표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은 내면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많아져 결국 모두 노예를 해방했습니다.
그것도 1세기에 해방한 것이 아니라 19세기에 전쟁을 해서 노예를 해방했습니다. 이처럼 사회의 변화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러므로 사회변화를 급격히 이루려고 하는 자는 실패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변해야 사회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그대로 있는데 제도를 바꿔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은 궁극적으로 죄, 마귀, 저주, 지옥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 모든 해방을 다 합쳐서 구원(Salvation)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 마귀, 저주, 지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메시야의 구원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
본문 3절 후반에는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메시야가 죄인을 구원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Glory of God)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하다 보면 시험과 좌절과 곤고가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면 시험이 오지 않고 좌절감도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기록되었고, 49장 3절에도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이사야 66장 19절에도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든 물건에는 그것을 만든 목적이 있습니다.
시계도 사람이 시간을 본다는 목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시계가 그 시계를 만든 인간을 떠나서는 그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시계가 사람 팔에 있을 때에 사람이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아는 것입니다. 만약 시계가 돼지 발가락에 끼여 있다고 하면 돼지가 시계의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돼지가 시계를 보고 ‘이게 바늘도 있고 번쩍번쩍하고 이상하게 생겼네’라고 생각해서 발로 밟고 굴리고 놀고 ‘맛도 없고 먹어도 소화도 안되니 갖다 버리자’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모든 존재는 만드신 분이 누구냐에 따라서 목적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존재 목적을 생각하면 먹는 것이나 출세하려는 것이 존재 목적이 되고, 진정한 존재 목적은 모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존재의 목적에 대해서 영원히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며 존재 목적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의의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본문 3절 후반에는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푸석푸석하고 썩어 한번만 충격이 와도 넘어가는 약한 나무가 되지 말고, 단단한 의의 상수리 나무(oak of righteousness)가 되어야겠습니다.
시편 1편 3절에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 하나님으로부터 양분을 빨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언제나 말씀의 진리와 성령의 은혜가 임하여야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 인간이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자기능력으로 의롭게 살려고 하면 죄만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자기 능력으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고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 하나님으로부터 자양분을 끊임없이 받게 되면, 우리는 의의 나무가 되어 때를 따라 과실을 맺고 가뭄이 와도 우리의 입사귀가 마르지 않는 청청한 나무가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요 메시야 이십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모두 다 실현하신 유일하고 확실한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권위를 입으시고 지금도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며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이 슬픈 인생이 아니라 권위 있고 의미 있으며 고상한 인생이 되고 싶으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능력 침례를 받으십시오. 주일 낮 예배뿐만 아니라 금요철야에도 나와 1시간 이상 집중해서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받으므로 곤고한 자와 억눌린 자를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일을 우리도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1+3’, 한명이 세 명을 전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열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됩니다. 'Operation 2000', 우리 교회는 2,000명이 선교헌금을 작정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선교를 해야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도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우리 교회도 명성을 얻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