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1. 무한과 유한의 심연, 그리고 철학적 절망
인간의 실존을 가장 깊이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유한성’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을 가리켜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Sein-zum-Tode)’라고 명명했습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패와 소멸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철저한 무력감 속에 살아갑니다. 질병, 이별, 상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는 인간 내면의 심연에 거대한 허무의 블랙홀을 만들어 냅니다. 아무리 위대한 권력을 쥐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쾌락의 정점에 선다 할지라도, 죽음이라는 절대적 한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집니다.
이러한 인간의 절망적인 부르짖음 앞에서, 세상의 종교와 철학이 제시하는 신(神)의 모습은 한없이 차갑고 무기력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상상했던 완벽한 신격은 '아파테이아(Apatheia)', 즉 어떤 감정적 동요나 고통도 느끼지 않는 절대적 무감각의 상태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는 세상을 움직이게는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인간의 고통, 슬픔, 눈물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채 저 높은 하늘 위에서 홀로 완벽을 누리는 이기적인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이신론(Deism)의 신 역시 세상을 시계처럼 만들어 놓고 뒤로 물러나 관망할 뿐입니다.
그 차가운 우주의 침묵 속에서,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피 흘리고 찢기며 우주적 고독에 몸부림쳐 왔습니다. "신이 계시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참혹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시는가?"라는 질문은 욥의 잿더미 위에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그리고 오늘날 허무주의에 병들어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의 텅 빈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무한과 유한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심연 한가운데로, 우주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선언이 요한복음 1장 14절을 통해 벼락처럼 내리꽂힙니다.
2. 사르크스(Sarx)와 스케노오(Skenoo) : 진흙탕 속에 쳐진 영광의 장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헬라 철학에 깊이 빠져 있던 당시 세계관 속에서 이 한 문장은 정신병자의 헛소리이거나 신성모독의 극치였습니다. 영원하고 완벽하며 형태가 없는 우주의 이성, 곧 ‘로고스(Logos, 말씀)’가 썩어 없어질 비천한 물질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모순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인간의 몸을 지칭할 때 아름답고 고상한 단어인 '소마(Soma)'를 쓰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선택한 단어는 ‘사르크스(Sarx)’, 즉 찢어지고, 병들고, 피 흘리며, 결국 썩어서 악취를 풍기며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짐승과도 같은 ‘살덩어리’를 의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온 우주를 품고도 남으시는 무한의 하나님이 바로 그 부패하고 연약한 ‘사르크스’를 뒤집어쓰셨습니다. 멀리서 구명줄을 던져주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타락한 피조물들에게 적당한 은혜를 제한적으로 나누어주는 방식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적 생명과 사랑을 우리 영혼의 굶주림 한가운데로 완전히 쏟아부어 주시는 **'공급과 충만'**의 방식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말씀합니다. 그 육신이 된 로고스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Skenoo, 스케노오)’.
이 ‘스케노오’라는 단어는 '장막을 치다, 텐트를 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할 때 그들의 진흙탕 같고 먼지 나는 진영 한가운데 세워졌던 ‘성막(Tabernacle)’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대리석 궁전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질병, 배신, 눈물, 가난, 그리고 죽음의 악취가 진동하는 갈릴리의 흙먼지 나는 길바닥 위에, 세리의 식탁 위에, 창기들의 눈물 곁에 친히 자신의 장막을 치셨습니다. 무한이 유한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피조물의 비참한 역사 한가운데로 뛰어드신 것입니다.
3. 케노시스(Kenosis) : 우주적 영광의 처절한 하강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 경이로운 성육신의 신비를 **‘자기를 비움(Kenosis, 케노시스)’**이라는 찬란하고도 처절한 언어로 노래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우리는 종종 높은 자리에 있는 인간이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육신은 그런 알량한 도덕적 선행이나 동정심의 발로가 아닙니다. C.S. 루이스(C.S. Lewis)는 성육신을 가리켜 "영원한 존재가 시간 속으로 깊이 다이빙한, 우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기적의 본질은 창조주가 피조물이 된 비하(卑下)에 있습니다. 인간이 벌레나 달팽이가 되어, 그들의 언어와 감각의 한계 속에 갇힌 채 살아가는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것은 그보다 수만 배 더 끔찍하고 질식할 것 같은 우주적 제약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으신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피곤하여 우물가에 주저앉으셨고(요 4:6), 배 위에서 깊은 잠에 빠지실 만큼 육신의 한계에 시달리셨으며(마 8:24), 십자가 위에서는 극심한 갈증을 느끼셨습니다(요 19:28). 인간 내면의 허무와 배신의 쓴맛을 누구보다 깊이 체휼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입맞춤에 담긴 위선,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에 담긴 비겁함,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조롱하는 무리들의 지독한 악의를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동정하다(Sympathize)'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느끼다, 그 고통의 자리로 직접 들어가 체휼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존적 절망을 밖에서 관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간의 죽음을 마주하시며 비통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던(요 11:35) 그 예수님의 눈물 속에, 인간의 모든 허무를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시는 창조주의 찢어진 심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4. 임마누엘(Immanuel) : 실존적 허무를 삼키는 영원한 현존
이 무한한 성육신의 사랑 앞에서, 인간의 알량한 이성과 철학적 교만은 철저히 붕괴되어야 마땅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뼈를 깎는 수행과 도덕적 고행을 통해 신에게로 기어 올라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향합니다. 우리가 무한을 향해 다가갈 수 없기에, 무한이 유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로 철저하게 하강하셨습니다.
인간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깊고 어두운 허무함은 결코 이 세상의 철학적 사유나 인문학적 위로, 혹은 종교적 수양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존재론적인 빈 공간은 오직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우리 역사 한가운데 장막을 치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영광이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한 해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처절하게 망가진 우리의 '사르크스(육신)'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우리를 다시 거룩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끌어올리시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혹여 철저한 고독 속에서, 아무도 내 고통과 절망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탄식하는 영혼이 있습니까? 질병의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존재의 무의미함을 느끼며 떨고 있는 영혼이 있습니까?
골고다 언덕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신 그 분의 피 묻은 발자국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모든 비참함과 유한성, 인간 내면의 그 더럽고 악취 나는 죄의 진흙탕 속으로 가장 깊이 다이빙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유한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기어이 우리의 죽음과 허무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켜버리신 이 맹렬하고도 무한한 성육신의 사랑이, 오늘 이 진리의 말씀 앞에 선 모든 이들의 심령 가운데 폭포수와 같은 공급과 충만으로 부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빈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이 증명해 낸, 세상을 이기는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