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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새로 부는 바람
임만수가 자칭한 "총지휘관" 노릇은 나흘로 끝이 났다. 후임 계엄사령관은 오후 네시 기차로 도착했다. 그는 이미 두 시간 전에 순천에서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경찰서장을 확인한 그는, "나 새로 부임하는 계엄사령관이오. 십육시에 도착이니까 역에 전군병력을 도열시켜주시오. 이따 만납시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권서장은 손에 들린 수화기를 멍하니 바라본 채 한참이나 서 있었다. 거기에서는 쇳소리를 내는 목소리가 계속 튕겨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권 서장은 까닭없이 침침해지는 마음으로 읍장과 임만수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강 상사를 불러 병력 도열을 일렀다. "역전 마당에다 할까요, 역 안에다 할까요." 작별인사도 없이 심재모와 헤어지게 된 후로 계속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던 강 상사는 더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그거야 강 상사가 알아서 하시오." 이개 소대병력은 노천 플랫폼에 기차 쪽을 향하여 네줄로 서 있었다. 기차가 멈추고, 큰 가방을 든 군인 하나가 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홀몸인 군인이 내려섰다. 허리의 권총과 손에 들린 지휘봉이 그가 계엄사령관임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강 상사가 그쪽으로 뛰어갔고, 기관장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렸다. "강명호 상삽니다. 어서오십시요, 사령관님." 강 상사가 경례를 붙였다. 중위는 경례를 받으며 눈은 군인들 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강 상사, 병력을 도열시키란 말 못들었나." "들었읍니다. 그래서…" "강 상산 정렬과 도열도 모르는가. 저건 정렬대형이지 도열대형이 아냐. 가운데 통행로를 만들고, 두 줄로 서로 맞바라 보게 도열대형을 만들어. 빨리!" "옛 , 알겠읍니다." 강 상사는 황급히 돌아서서 뛰었다. 병신, 그 가운데로 제놈이 지나가겠다 그것이지.
내 참 드러워서. 강 상사는 뛰면서 중위의 의도를 알아채고 있었다. 강상사가 지시대로 "도열대형"을 허겁지겁 만들고 돌아섰을 때 중위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강 상사는 다시 중위를 향해 뛰어갔다.
"도열대형 완료시켰읍니다." "좋아. 내가 부대 앞에 서면, 강 상사는 받들어 총 구령을 한다. 나는 받들어 총을 받으며 가운데를 지나 반대편에 도착해 경례를 받는다. 그런 다음 부대 세워 총, 나를 향해 좌향좌, 우향우다. 차질 없도록. 기관장들과는 내 말이 끝난 다음 인사한다." "알겠읍니다." 강 상사는 부대원들에게 요령을 빠른 말로 설명하고, 기관장들에게 설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고 돌아서니 중위는 바로 앞에와 있었다. "부대 , 열주웅쉬엇 , 차리이엇. 사령관님을 향하여 받들어이총!" 구령에 맞추어 병사들이 절도 있게 움직였다. 양쪽으로 늘어선 병사들이 받들어 총을 하고 있는 가운데를 지휘봉을 든 중위는똑바른 자세로, 그러나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보통키인 그의 몸에는 군살이라고는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 얼굴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폭이 좁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좁은것처럼 어깨도 좁은 데다가 몸에는 군살이 전혀 없었으므로 키나 체구가 실제 크기보다 작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얼굴이 볼품없거나,체구가 왜소해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좁으면서 가무잡잡한 얼굴이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야무져 보이는 것처럼 몸도 무슨 운동으로 다져진 듯 짱짱한 탄력이 느껴졌다. 예사롭지 않은 냉기가 흐르고 있는 그의 얼굴을 야무져 보이게 하는 건 눈과 입이었다. 눈은 작은 편이면서 웃꺼풀은 각이 져 있는데다, 눈동자는 위로 치우쳐 있었다.
그리고 입도 작았는데, 그 꼭 다물린 작은 입 언저리에는 묘한 힘이 모아져 있었다. 반대편에 도착한 중위는 일단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를 한 다음 경례를 받았다. "부대, 세우워총!" 개머리판이 일제히 땅을 치는 소리가 플랫폼을 울렸다. "일이 소대, 좌우향우!" "본관은 계엄사령관 백남식이다. 장병 제군들, 그 동안 근무에 수고가 많았다. 그러나, 전지휘관이 사상이 불온했음을 생각하면 나로서는 제군들의 군기 및 사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내세우는 복무정신, 복무태도,복무목적은 하나서부터 열까지 멸공, 멸공이다. 그 목적달성을 위해 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그 어떤 희생도 불사한다. 장병 제군들은 이런 나의 방침에 맞춰 앞으로 재무장시킬 것이다. 오늘은 이만." 받들어 총의 경례를 받은 백남식은 기관장들 쪽으로 돌아섰다. "읍장 이병줍니다. 우리읍에 부임하신 걸 환영합니다. 마음 든든합니다." "고맙습니다." 읍장은 희멀건하게 웃었고, 그는 냉기 흐르는 딱딱한 얼굴 그대로였다. 토벌대장, 경찰서장을 지나 최 익달에 이르렀다. "좌익척결위원회 위원장 최익달이라고 헙니다. 연설이 아조 심지고 근사허구만이요." "아, 최 익달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백남식은 비로소 웃음지으며 최익달을 아는체했다. "워쩌크름 나럴 아신당가요?" 최 익달은 당황한 기색과 함께 의아해했다. "나를 불러주셨으니 알지요." 최익달은 그때서야 고발장을 생각해냈다. 그는 기분이 아주 그럴 듯해졌다. 금융조합장, 세무서장순으로 인사가 이어졌다. "워쩌신가요, 오늘밤에 환영식을 겸해 우리가 모시고 잡은디요." 최익달이 은근하게 말했다. "글쎄요, 첫날이라 어떨란지…" 의외로 부드러운 반응에 최익달은 금방 그 심중을 꿰뚫었다.
"사령관 오셨응께 더 정신덜 바짝 채려 근무 잘헐 것이고, 환영식이야 날 지내갈수록 맥빠지는 법이제라. 쓸 만헌 집이 있응께 객고도 풀어야 쓰고, 오늘 당장 허도록 헙씨다." "그래 볼까요, 그렴." 백남식은 마지못한 듯 대꾸했다. 기관장들에게 에워싸이듯 해서 대합실을 나오고 있는 백남식을 나무 뒤에서 염상구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살피고 있었다. 비록 말석일망정 저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떨어져 나와 있는 그의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저들의 사이에 끼였던 날이 꿈만 같았고, 감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또다시 느끼고 있었고, 그럴수록 유주상이에 대해서 속깊은 이빨을 갈았다. 와따, 저것이 요상시럽게 생게묵었네. 싸납기도 허겄고, 독허기도 허겄고, 쩌 자석이 저것, 몸 움직기리는 것 봉께 운동도 한 가락 허는 갑는디. 워쨌거나 심재모허고는 영판 달븐디. 염상구는 어떤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둠살이 다 차기도. 전에 남원장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다른 손님은 일체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진 속에 술상은 어느 때 없이 걸게 차려졌고, 기생들도 유난스레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거 심재모라는 자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일을 혀서 빨갱이 기는 기대로 세와 놓고, 아랫것덜 버르장머리는 버르장머리대로 베레놓고, 우리 유지고 지주덜 체면이고 안전이고 다 망쳐뿌러 이 바닥이 시방 쥔이 누군지 몰라보게 뒤죽박죽이 되야뿌렀소, 우리야 인자 백 사령관만 믿응께 단단허게 채럴 잡아줏씨요. 믿어도 되겄소?" 최익달이 백남식에게 술잔을 내 밀었다. "공산당에 대한 내 생각은 아까 말한 대로고, 지금 큰소리치지 않겠읍니다. 행동으로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백남식은 눈을 더 각지게 뜨며 말하고는, 잔까지 입에 던져 넣는 것처럼 한 동작으로 술을비웠다. "예에, 말씀 한번 시원하게 해주셨읍니다. 그런데에, 존함을 무슨자, 무슨 자를 쓰시는지요?" 유주상은 더할 수 없도록 정중함을 꾸며내며 술잔을 권했다. "예, 남녘 남에, 심을 식잡니다." "역시 그럴 줄알았읍니다!" 유주상은 신바람 나는 소리를 터뜨리며 무릎을 쳤고, 그 갑작스러움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코에게 모아졌는데, "남쪽에 남아의 뜻을 심어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 군으로 오신 게 그냥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그는 태도를 바꿔 마치 점괘라도 풀듯 무게 실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하, 그러고 봉께 그렇구만. 은제 봐도 유조합장은 아는 것이 많히여." 최익달이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좋아라했고, 사람들은 짧은 한마디씩으로 호의를 표했으며, 백남식은, 원별말씀을, 어쩌고 하면서도 기분이 나쁠 것 없어 그저 허허거렸다. 권서장은 스스로가 민망해서 차마 유주상도 백남식도 쳐다볼 수가 없어 술을마시는 척하고 있었다. 그는 술집으로 오기 전에 이미 기분이 상해 있었다.
"이걸 어디 사령관 숙소라고 할 수 있겠소. 당장 넓고 큰 것으로구하시오." 심재모가 썼던 방을 보자마자 백남식이 내쏜 말이었다. 그들이술에 젖어들며 허물어져가고 있는 시간에 서민영은 등잔불 빛 아래서 심재모의 무고를 주장하는 긴 탄원서의 글 손질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권서장의 조사결과를 보고서야 심재모가 두 가지 일로 모략당한 것을 알았고, 거기에 맞설 수 있는 탄원서의 내용을 꾸미느라고 꽤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오늘밤으로 탄원서를 끝내놓고 내일부터는 전체 읍민을 상대로 도장을 받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효과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모략을 한 상대는 유지에 지주세력인 데다가 친정부적 단체들을 앞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탄원서에 도장을 찍을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읍민들로서 탄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무시하고 묵살해버릴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용공"이었다. 거기에 맞서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가능한 대로 많은사람들의 도장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탄원서가 어떤 결과를 나타내든 간에 일차로 서둘러야 할 일이었다. 서민영은 이미 김범우에게 편지를 보내놓고있었다. 손이 닿는 데까지 도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한편, 손숭호는 서민영 선생을 통해서 심재모가 당한 사건전말을 알게 되었다.
심재모가 떠난 다음날이었다. 손승호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무색무취한 일이 정치조작으로 뒤집어진 것이 충격이었고, 자신이 시작한 일로 엉뚱하게 심재모가 피해자가 된 것이 충격이었다. "자네 탓이라고 괴로워하거나 고민할 것 없네. 자네나 범우, 심 사령관이 판단하고 행한 그 일은 내 생각으로도 옳아. 사상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걸 제아무리 거창하게 확대해석하고 미화시키고 해도 결국은 인간 이상일 수는 없어.
그러니까, 그 여잘 받아들인 염상진이도 옳아. 옳지 않은 건, 그런 순수한 일을 자기네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부류들이야. 이런 현상은 왈, 이데올로기의 정치종속이고 수단화지.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그것과의 싸움에 맞닥뜨려 있다는 사실이네. 이런 싸움은 진작부터 이 나라 도처에서 일어났고, 앞으로는 더 심해질 거라는 사실이지. 그 결과는 이성적이거나 양심적인 비판세력의 말살로 나타날 것이고, 모든 국민은 정치지배의 수단이 된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안에 갇혀 순종하는 가축이 돼야 하겠지. 하여튼 그 결과야 나중 문제고,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벌어진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네. 심 사령관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야 한단 말일세.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행동이네. 적극적으로말야." 그러면서 서민영 선생은 탄원서 제출을 첫번째 방법으로 꼽았다.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손승호는 다음날부터 일과가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의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 자신이 심재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고, 일의 효과를 살리려고 그는 학부모들부터 찾아다녔다.
오늘밤에도 통금 직전까지 쏘다니다가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은 손승호는온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피곤에 눌려 벽에 몸을 부린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끌려가며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 것인가… 손승호는 또 그 생각에 붙들려 일었다. 그리고, 신학기를 앞두고 사표를 내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라 싶었다. 현직을 떠났더라면 도장 받기가 그렇게 수월하게 진척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손승호는 헤설픈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사표를 내지 않은 의미를 그런 데서 찾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고도 가소로왔던 것이다. 망설임 끝에 결국 사표를 내지 못했던 것은 막상 다른 생활방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표를 낼 이유보다는 부양가족 많은 생활현실이 더 무거운 비중으로 그를 눌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서 사표는 당분간 보류된 것일 뿐 안이한 생활의 수단으로 교직을 이용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정치색으로 오염되기 시작하고 있는 학교는그렇게 편안한 일자리일 수 없었고, 그것을 편안한 일자리로 만들려면 일하는 자가 솔선해서 스스로의 의식을 오염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그 짓만은 할 수가 없었다 심재모는 잡혀가면서 나와 범우를 원망했을까. 아니면,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자기 책임으로 받아 들였을까. 그리고, 그는 군인의 입장에서 그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예측하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자각으로 행동을 일으킨 것일까.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었다면, 후회할것이다. 원망할 것이다. 내가 예측하지 못했듯 그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정치의식은 간교하다, 상상이나 예측하지 비웃을 만큼 그것은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적이다. 아니다, 이미 적수의 상태를 넘어서버린 폭력인지 모른다.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무법자, 그리고 그 집단. 그 폭력 앞에서 심재모는 무엇인가. 일개 육군 중위- 체포 상태-수레바퀴아래 깔리는 한 마리의 개미. 손승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디선가 심재모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를 그렇게 망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손승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잡았다.
남원장에서 경찰서로 출근한 백남식은 책상에 앉자마자 지시했다. "빨갱이 명단을 전부 가져오시오. 가족현황까지 포함해서." 이어서 두번째 지시를 했다.
"애 배러 들어간 그 집 것은 따로 뽑으시오." 그리고 세번째 지시가 떨어졌다. "빨리 가서 그 집 식구들을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잡아오시오." 그 지시는 임만수를 거쳐 권 서장에게 재 지시되었다.
백남식이 고발장을 통해서 최익달을 기억하는 것처럼 임만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지난 밤 술자리를 거치게 되면서 그 예비된 호감은 동지애로 둔갑하고 말았다. 숨가쁘게 지시를 내린 백남식은 임만수가 자리를 뜨자 느긋한 기분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그는 몸을 뒤로 지그시 밀치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런 구석에 그리좋은 술집이 있을 줄이야… 그는 눈을 사르르 내려 감았다. 지가 지대로 뫼셨는지 걱정스럽구만요. 시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다 했으면서도 그렇게 아양을 떨던 눈 서글서글하고 입술 달던 계집애의 얼굴이 환하게 떠올랐다. 전라도, 살아볼수록 살맛이 나는 땅이었다. 처음에는 고향 경상도와는 말부터 생판 달라 살아질 것 같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몇 개월보내다 보니 정 붙는 데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첫째는 가짓수 많고 맛이 좋은 음식상이었고, 둘째는 묘하게 감기고 이상하게 정겨운 여자였고, 세째는 돈 잘 쓰고 기분 잘 내는 지주들이었고, 넷째는, 넷째는… 빨갱이가 득실득실 많다는 생각이 떠올라 백남식은 그만 눈을 떠버렸다. 그건 정붙는 항목 네번째가 아니라 정떨어지는 항목 첫 번째였던 것이다.
"제기럴, 대구 빨갱이도 유명하지만 전라도하고도 이 지방 빨갱이도 그만 못하라면 서러워하겠지? 하긴, 경상도 전라도 빨갱이 빼면 남한 빨갱이 뭐 있나. 무슨 팔자가 빨갱이 굴에서 태어나서 빨갱이 굴로만 굴러다니나. 그래도 빨갱이한테 감사해얄 팔자기도 하지. 그놈들 덕에 다 권세 누리고 호강하고 있는 거 아닌가. 아버지는 남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남들이 다 부러워할 만큼 돈을 벌었으면서도 항시 출세와 권세를 부러워하셨지. 장사로 돈을 벌었으면서도 정작 아버지가 싫어하신 건 장사였으니까. 장사를 천하게 여기는 세상 풍습 때문이었겠지. 아버지 소원을 쉽게 풀어드릴 수 있게 군인이 내 기질에 딱 맞았던 것은 참 다행한 일이었지. 육사생활, 아주 근사했었어, 일본놈들의 차별만 빼면 말야. 그래도 난 기계체조 실력으로 차별이 아니라 우대를 받았지만 말야. 중학교때부터 도대표였으니 육사내에서야 날 당할 일본놈들이 있을 수가 없었지. 난 천상일급 황국신민이었는지도 몰라. 육사교복을 입은 내 생김만 보고는일본년들도 순종인 줄 알았으니까 말야. 그 빌어먹을 놈의 말을 하게 되면 들통이 나지만. 육사생에, 기계체조 선수에, 일본놈 같은 생김에, 어쨌든 그 덕에 반닥하게 생긴 일본년들, 떡은 쉽게 칠 수 있었지. 그 다음, 해방이 될 때까지 관동군 시절, 고생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기도 했어.관동군 앞에서는 만주벌판이고 중국대륙이고 무법천지였으니까.
물건도, 여자도 맘만 먹으면 내 것이었으니까. 상부에서야 금하는 일이었지만. 그 넓은 천지에서 그런 맛없으면 무슨 재미로 고생하고, 무슨 재주로 부하들보고 싸우라고 하나. 그러고 보니 나는 서양년만 빼놓고는중국년 일본년 조선년을 골고루 다 잡숫지 않았나. 흐, 흐, 흐, 그게 다 능력인 거라, 능력. 그런데, 그 만주벌판에 산적떼처럼 쫓겨다니며 독립운동을 한다는 놈들, 그것들 참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었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더구나 무기도 제대로 없는 것들이 대일본제국을 상대로 싸워 독립을 하겠다니, 그 멍청한 것들이 그래도 동족이라서 가만히만 있으면 이쪽에서도 모른 척할텐데 하, 이것들이 겁도 없이 기습을 가해 피해를 입히고 하니 가만 둘 수가 있나. 그 독종들, 죽어가면서도 대한독립만세였지. 눈앞에 대일본제국이 버티고있는데 어찌그리 가망 없는 생각을 찰떡같이 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돼.
근데 말씀야, 독립운동 한다는 것들의 거의가 소련 앞잡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했거든. 그것들이 그리 독했던 건 공산주의를 해서 그런 것 아닌가. 어쨌든 빨갱이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말썽이라니까.
뭐니뭐니 해도 제일 간 떨어진 일은 대일본제국의 패망이었지. 아이고, 그때 그 막막하고 암담함이란, 평생에 두 번 겪을까 겁나는 일이었지. 한마디로, 일장기 찢어지면서 해도 없어진 캄캄한 세상이었으니까.
일본으로 갈 수도, 만주에 남을 수도 없는 그 앞뒤가 콱콱 막힌 속에서도 살아날 구멍이 있었으니, 역시 세상살이는 그때그때 머리를 잘 돌려야 해.
어느 놈이 알게 뭐냐, 독립군으로 입국하자! 이 얼마나 멋들어지고 기막힌 생각이었던가. 독립군 행세로 서울 까진 거칠 것 없이 왔지만, 고향까지는갈 수 없었지. 친일 전력을 가진 사람들은 고향을 도망 나오는 실정이었으니까. 그 시절, 얼마 동안 사람대접 받으며 기세 올린 자들은 독립운동으로 감옥살이 하다가 풀려나 고향 찾아간 것들뿐이었지. 고향에도 못 가고 서울에서 세상 돌아가는 눈치보며 빈둥거린 서너 달이 두 번째로 막막한 기간이었어. 그런데, 다시 때는 오고야 말았지. 고맙고 고맙게도 미군정은 모든 사람들의 친일전력을 깨끗이 덮어준 거야. 배운 도둑질이니 당연히 군대에 들어갔고, 거기서는 관동군 출신이란 게 하나도 죄스러울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지. 그저 드글드글했으니까. 오히려 우리의 전투경력은 우댈 받지 않았던가. 결국은 일본이 미국으로 바뀐 것뿐이었어.
하는 일이야 총질하는 것이니 마찬가지고. 서른두 살에 중위, 곧 진급이 되도록 돼있으니까 그리 늦은 건 아니지. 아니야, 스물두 살짜리중위가 있는 판에 난 중령은 돼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빌어먹을, 다나까 그놈의 새끼 땜에 인생을 망쳤지. 쫄병 새끼가 감히 장교 애인을 덮쳐 정을 통하다니. 두 연놈을 쏴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지 . 연놈을 첩자로 몰아 간신히 발뺌은 했지만, 소문 때문에 계속 의심을 받아 진급할 수가 없는 꼴이 되고 말았지. 소위로 해방이 되고, 다시 군대에 들어가면서 대위쯤으로 슬쩍 속이려 했는데 관동군 출신들이 드글드글하는 판에 족보가 다 드러나게 되지 않던가. 그놈의 사건을 생각하면 뭘 해. 다 죽은자식 불알 만지기지. 삼 년에 두 계급 진급이면 괜찮은 편이야. 앞만 보고 뛰는 것이다. 앞만 보고, 장군을 향해, 번쩍거리는 별을 단 장군을 향해 뛰는 것이다. 거기에 빨리 도달하는 길은 남보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일이다. 빨갱이를 때려잡아야 한다, 남보다 많이 때려잡아야 한다."
백남식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작은 입은 더작게 오므라지고, 입술 가장자리에는 질긴 힘이 모아져 있었다. 사령관실 앞에서 쭈뼛거리던 염상구는 입맛을 다시며 서장실로 걸음을 돌렸다. 어제 눈여겨보았던 그 차고 독한 인상이 신경에 걸렸던 것이다. "밤새안녕허신게라, 서장님. 엊저녁 술언 맛있었고라?" 실내에서는 어울리지않는 염상구의 목소리가 서장실의 잠잠한 분위기를 흔들어놓았다.
"어서 오시오." 권 서장은 염상구를 힐끗 보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와따, 사령관이 바꽈져서 그런가 영 바쁜개비요이." 염상구는 의자에 털퍽 앉으며 말했고, 권 서장은 아무 반응이 없이서류 정리만 하고 있었다.
저 짜석이 저거, 사람 말얼 멀로 알고… 역에도, 술자리에도 끼지 못해 심사가 상할 대로 상해 있는 판에 권서장의 태도는 그의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저걸 그냥 카악 받아뿌러! 뜨거운 감정의 덩어리가 목을 치받고 올랐다. 그러나, 염상구는 감정을 터뜨리는 대신 담뱃갑을 거칠게 꺼냈다.
식은밥인 저까짓 서장을 상대로 신세에 금가게 할 필요는 없었다. 저것을 이용해 원하는 목적만 달성시키면 될 일이었다. "읍내 뒤집어질 사건이 생겼든디요!" 염상구의 목소리는 컸고, 권 서장은 반사적인 반응을나타냈다. "사건?" "워째, 인자 사람이 눈에 띠이요?" 염상구는시비조였고, 권 서장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가 곧 알았다는 표정으로바뀌었다. "아, 미안하게 됐소. 백 사령관이 급히 봐야 할 서류가 있어서 정신이 없었소. 근데 , 또 무슨 사건이오?" "중대헌 사건인디, 똑같은 말두 차례썩 허기 입 아픈께로 사령관 앞에서 항군에 해뿔게 서장님이 앞장스씨요." 염상구는 담배를 짓눌러 끄고는 일어섰다. "그럽시다, 인사도 할겸 잘됐소." 권 서장이 서류를 챙겨 가지고 일어섰다. 하먼, 요리 돼야일이 순조롭제. 무담씨 나 혼자서 들어가, 나가 누군디 어쩌고 해쌓다 보먼 사람 가치 떨어지고 근천시러바지고 그렇제. 서장이 소개럴 혀서 당당허게 인사럴 허고, 그 담에 사건을 보고허먼 첫 대면으로 사람 값얼 톡톡허니쳐 받을 수 있을 것잉께. 생각대로 일이 풀려 염상구는 기분이 알큰하게좋았다. "사령관님, 청년단 감찰부장 염상구씹니다. 인사도 드릴 겸, 새로 발생한 사건보고도 드릴 겸해서 찾아왔읍니다 " 권 서장이 인사를 시켰다. "아, 그래요? 나 백남식이요." 백남식은 쏘듯 하는 눈길로 염상구를 쳐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감찰부장 염상굽니다." 염상구는 군대식 신고를 하듯 힘찬 소리를 지르며 번개 치듯 거수경례를 하고는 백남식의 손을 맞잡았다. "염 부장은 무슨 운동했소?" 백남식은 땅군이 땅군 알아보고, 백정이 백정 알아본다는 식으로 염상구의 손을 놓으며물었다. "머 특별허니 헌 것언 읎고, 그냥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너무 갑작스럽고 의외의 물음이라 염상구는 얼버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중에서 특히 잘하는 게 있을 거 아뇨. 앉읍시다, 앉어 얘기하쇼." 염상구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생각했다. 초면인 사람에게 칼 던지기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운동이라고 말할 성질이아니었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그건 엄연히 도였다. "예, 뽁씽이구만요." 대답을 안 할 수는 없고, 염상구는 나오는 대로 내 뱉아 버렸다. "아,나도 그럴 줄 알았소. 그 체형에 딱 어울리는 운동이오." 백남식은 호감이 담긴 웃음을 짓고는, "새로 발생한 사건이라니, 뭐요?" 그는 금방 표정을 바꾸며 권 서장을 쳐다보았다. "염 부장, 말씀드리시오." "예, 긍께 고것이 다른 거이 아니라," 염상구는 엉덩이를 들먹하고는, "머시냐 심재모럴 구해내자는 탄원서를 맹글어 갖고 시방 동네방네 도장을 받고 댕기는 판이구만요." 그는 한달음에 말을 해치웠다. 권 서장의 가슴이 쿵울렸다. "뭐가 어쩌고 어째! 그 새끼가 도대체 어떤 새끼야." 백남식이 사무실이 깨지도록 악을 썼다. 권 서장의 가슴은 또 쿵 울렸다. "저어 서민영이라고…" "그놈이 누군지는 이따 알아도 돼고, 당장 잡아들여. 체포해!"
권 서장의 가슴은 이제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인디요." "글쎄, 깡그리 잡아들이라니까. "알겄읍니다." 염상구가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권 서장님, 경찰병력도 출동시키시오." "예…" 힘없는 대답을 하고 일어서는 권 서장의 눈앞에 서민영과 손승호의 얼굴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 일이 어찌 될 것인가…솟기는 한숨을 누르며 권 서장은 백남식의 방을 나왔다. 임만수는 며느리를 율어로 들여보낸 노인네 일가족 다섯을 잡아왔다. 자식 넷이 딸이라서 잡혀온 것은 모두 여자였다. "저것들 사상 조살 철저히 해야니까 모두 가두시오." 겁에 질려 서로 엉겨붙고 있는 그들을, 됫짐을 지고 멀리 바라보고 선 백남식이 명령했다. "저어, 미성년자는 제외하는게 어떨까요?" 권 서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막내로 보이는 아이는열서너 살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르는 소리 마시오, 빨갱이물이 성년, 미성년 가리는 줄 아시오? 그리고, 수사 효과는 미성년자한테서 나타난다는 걸 잊지 마시오." 백남식이 싸늘하게 내치는 말이었다.
"맞습니다. 어른들이 감추는 말을 애들은 털어놓거든요." 옆에 선 임만수가 잽싸게 귀에 단 말을 발라 맞췄다. "두 분,똑똑히 들어두시오. 이건 앞으로 우리가 해얄 일인데, 일단계로 입산자 가족 전원의 사상재검토 실시오. 이 단계로는 읍민 전체에 대한 사상 검토 실시오. 지금 읍내서는 분명 세포활동이 진행 중에 있을 것이며, 세포부식이 이뤄지고 있을 거요. 그것을 근절하지 못하고서는 입산 빨갱이를 소탕할 수 없소.
그리 되면 우리 목표인 멸공은 도로아미타불이요. 일 단계부터, 내일부터 실시하겠소. 보조를 맞추기 바라오." 말을 마친 백남식은 홱 돌아서더니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몸짓에서 찬바람이 일어났다. 권 서장은 그의 동작에서 전형적인 일본군인의 냄새를 물큰 맡았다. "어떴소, 심재모하고 비교할 때." 임만수가 턱짓을 하며 물었다. "뭐가요?" 권 서장은 딴전을 피우며, 목에 걸리는 신트림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앗싸리한 게 진짜 군인 맛이 나지 않소?" "그렇지요, 예에…" 권 서장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쓸었다. "왜, 어디 아프오?" "체를 한 모양이요." 권서장은 자기 방 쪽으로 돌아섰다. 간밤의 술이 제대로 풀리지 일았는지 속이 거북하더니만 시간이 갈수록 위로 치밀고 있었다. 염상구와 형사부장에게 잡혀온 것은 서민영만이 아니었다. 손승호, 이지숙, 또 한남자까지 모두 넷이었다. 손승호는 오전반 수업을 마치고 일을 시작하다가 잡혔고, 이지숙은 서민영의 부탁을 받고 약간은 미묘한 감정인 채 도장을받고 다니다가 붙들렸다. 낯선 남자는 서민영이 농장에서 불러낸 노서방이었다. "요것이 압수헌 도장 받은 종인디요. 염상구가 몰아쥔 종이말이를 백남식 앞으로 기세 좋게 내밀었다. 권서장은 차마 서민영을 바라볼 수가 없어 허공에 망연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수고했소. 저것들 앉히고, 염 부장과 형사부장은 나가 쉬시오." 종이말이의 글을 잡고 털어 펼치며 백남식이 말했다. "일로 앉으씨요, 일로." 염상구가 빠른 몸놀림으로 의자 넷을 백남식의 책상을 향해 줄세웠다. 벽을 등지고 무표정하게 서 있던 서민영이 먼저 자리를 잡자 손승호·이지숙·노 서방순서로 의자에 가 앉았다. "흥, 용공분자를 구해낼 탄원서를 만들었다아." 백남식은 코웃음을 치고는, "그럼 이것들도 용공분자 아닌가! 당장 처넣어버려."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말씀을 삼가시오. 심 사령관은 용공분자가 아니오. 모략을 당한 것이오." 서민영의 말이었다. "뭐,뭐라구. 어디서 함부로 지껄여!" 백남식의 감정은 순간적으로 폭발하고있었다. 그런 대꾸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던 그는서민영의 태도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에 대한 말투도 고치시오.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말할 이유가없소." "아니, 저 짜식이저게!" 백남식은 의자를 뒷발질하며 앞으로 튕겨나왔다. 그를 권 서장이 붙들었다. "왜 이러십니까, 사령관의 체면이 있지요." 권 서장은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서민영을 두둔하는 눈치를 보여서는 안된다는사실만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말은 효과를 나타냈다. 그가 붙들고있는 백남식의 두 팔에서 힘이 풀려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권서장도 생각해보시오, 내가 열 안 받치게 생겼나. 죄짓고 잡혀 온 작자가 따따부따 아가릴 놀려대니 말이오."
"그렇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사령관으로서 위신도 있고, 이게 또 부임하시고 첫 사건이고 하니까말입니다." 권 서장은 유리그릇 다루듯 하고 있었다. "좋소, 권 서장 말대로 내가 한 번 참도록 하겠소. 허나, 내 성질에 두 번은 참지 않소.""그리 하십시요." 권 서장은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까지 끄덕이고는, "여러분은 지금 조사 받는 입장에 있읍니다. 앞으로는 묻는 말에만 답해야 합니다." 네 사람 쪽으로 돌아서서 말했다. 그는 일부러 서민영을 쳐다보았고, 서민영의 눈은 곤궁한 입장 다 안다는 뜻을 담고있었다. "탄원서를 만든 이유가 뭐요." 백남식이 물었다. "심 사령관이 억울하게 모략을 당했기 때문이오" 서민영이 대답했다. "그 근거를대시오." "이미 소문이 다 퍼져 있소." "소문이라니, 소문이 무슨 근거요." "그 모략에 누가누가 가담했는지 이름까지 다 알려져 있으니 당사자들을 불러다가 조사해보시오." 백남식의 뇌리에는 고발장을 낸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들을 조사대상으로 삼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심재모의 행위는 자신으로서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건 조사하나마나 한 일이요. 심재모란 자가 한 행위는 직업상, 직책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요. 그자의 용공행위 여부는 수사기관에서 밝혀낼 문제지, 당신네들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두겠는데, 현재는 계엄상황으로서 당신네들의 이런 집단행위는 엄연히 범법행위요. 계엄사령관의 직권으로써 이 범법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명령하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백남식은 들고 있던 종이다발을 북찢었다. "안돼, 찢지 마!" 소리치며 앞으로 뛰쳐나간 것은 손승호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손승호는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백남식이 내뻗은 주먹에 정통으로 얼굴을 얻어맞은 것이었다. "이 새끼가 어디로 덤벼들어, 덤벼들길. 어디 또 덤벼봐라. 대갈통을 박살내놓고 말 테니까." 질긴 힘이 모아진 작은 입으로 느릿느릿 말을 하며 백남식은 많은 사람들의 도장이 찍힌 여러 장의 종이를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종이쪽들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삐라들처럼 아래로 흩어져 날리고 있었다. 코피를 흘리는 손승호를 서민영과 이지숙이 부축해 일으켰다. 코피는 심하게 흘렀다.
이지숙이 저고리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승호의 코에 갖다댔다.
서민영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백남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걸 찢어도 아무 소용없소. 우리는 또 만들 것이오." 서민영의 목소리는담담했다. "명령이오. 명령을 어기겠다는 게요!" "우리가 하는 일이 옳기 때문이오." "옳긴 뭐가 옳아. 명령이야." "명령도 통하지 않는 데가있소." "뭣이 어쩌고 어째. 안 통하는가 볼까 네가 지금 명령을 거부하는, 그것부터가 죄야. 거기다가 계엄하의 집단행위, 민심선동, 유언비어 날조,이상 죄목으로 너희들을 체포한다! 권 서장, 이것들을 끌고 나가가두시오." "아니, 사령관님…" "내 말 들리지 않소!" 백남식은 권서장을 향해 각진 눈을 부릅떴다. 서민영 일행은 이미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권 서장은 그들의 뒤를 따라 사령관실을 나왔다. "권 서장, 우리농장 사람들을 여기로 다 모이라고 연락 좀 취해주시오." 서민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쩌실려고…" "정말 집단행위가 뭔지 보여주고, 세상 무서운 걸 가르쳐 저자의 버릇을 고쳐놔야 되지 않겠소?" "예에…알겠읍니다." 권 서장은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은 착잡하게 가라앉고있었다. 서민영의 공동농장 사람들 사십여 가구 백육십 명 남짓이 경찰서 앞에 진을 친 것은 해가 진광산 마루에 한 뼘쯤 남은 무렵이었다.
정연하게 줄을 선 그들은 경찰서를 향해 힘차게 구호를 외쳐댔다.
"서민영 선생을 석방하라!" 그들을 선도하고 있는 건 스물 네댓 나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저건 또 뭐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잡아들여." 열이 받친 백남식은 이렇게 소리질렀다. 그러나 정면으로 나서는 권서장의 반대에 부딪쳤다. "안됩니다. 잡아들이는 게 능사가아닙니다. 저 사람들을 잡아들이면 그때는 전읍민이 들고일어납니다. 이 상태에서 수습해얍니다." "그게 무슨 병신 같은 소리요. 시범쪼로 강력하게 몰아쳐요. 강하게 몰아칠수록 약해지는 법이니까." "아닙니다,그건 좀 곤란합니다. 저 서민영이란 사람 문제는 그렇게 해서는 더복잡해집니다. 권 서장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임만수의 말이었다. "아니, 그런 다리병신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게요." 백남식이 임만수를 노려보았다. "그 병신 다리가 예삿것이 아니라 ,일정 때 고문당한 거랍니다. 어쨌든 한마디로, 그 사람을 잘못 건드려선 안됩니다." "아주 재수 없는 새끼로군. 일정 때부터 나대다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백남식은 상대방을 더 강하게 몰아치고 싶은 적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경찰서 앞길은 몰려든 사람들로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불어나고 있었다. "서민영 선생을 석방하라!" 공동농장 사람들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수록 기세를 올리며 구호를 외쳐댔다. 이미 농장 사람들과 구경꾼들은 구분이 안되도록 뒤섞였고, 구경꾼들 중의 상당수는 구호를 따라 외치고 있었다. "도장 받은 거이죄란당마." "허먼 도장 눌른 사람도 죄 아니라고. 글먼 나도 죄인이시." "긍께로 말이시. 경찰서도 불타고 웂는디 그 많은 죄인 워디다가 다가둘랑고." 이런 말이 오가는가 하면, "지길, 씨 받게 혀준 그존 일이 워찌죄여, 인간만사 중에 지고선행이제." "누가 아니라등가. 용공이란 것이 만병통치 다이야찡 가리시. 워디다 때레붙여도 다 제까닥제까닥 죄가된께." "근디 그 일얼 용공으로 몰아때린 잡녀러 새끼덜이 있담시로?" "글타는디, 고런 인종지말덜이 누구까?" "고것이야 금세 알게 될 일이고, 고런 싹수머리웂는 인종덜언 가쟁이럴 찢어뿌러야 허네." 이런 말을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새로 온 물건이 누군디 서 선생얼 가두고난리가? 고 사람 뱃보가 영 씬갑네이." "뱃보가 씨서 그런당가, 여그 물정은 몰르고 지 권세 씬 줄만 알고 설레발치는 것이제." "하먼, 늘어진 말자지에 회초리질 헌 격이제. 썽난 말굽에 볿혀 뒤지는 건 바로 지눔잉께." "해필허고 워째 늘어진 말자지여, 쌍시럽게. 따른 존 말 다두고." "어이, 나야 무식헌게로 그러시. 워디 자네가 존 말 골라서 혀보소.""벌집 쑤셨다고 허등가, 자는 호랭이 수염 뽑았다고 허등가, 깨금헌 말이 을매나 많은가." "워따 공자님 아덜이 여그 있는지 몰랐네. 나가 고런 말몰라서 말자지라고 헌줄 아는가. 깨금허고 지랄이고, 고런 말언 기분이 지대로 안 나고, 심도 지대로 안 받친다 그것이여." "자네 말도 알아묵겄는디, 허먼, 자지 닐이고 있는 말은 누구란 심판이제?" "워메 ,워쩌그나!" 말들은 빠르게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며 구경꾼들을 차츰차츰 서민영의 동조자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사태를 전해들은 유주상은 좌익척결위원회 간부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그건 바로 자신들의 문제였던것이다 "서민영이 허는 짓거리럴 막는 것이야 잘허는 일인디, 가두기꺼지헌 것은 낭패로시." 최익달이 방정맞을 정도로 빠르게 혀를탔다 "사령관이 우리 편에서 야물딱지게 허는 것이야 존디, 물정 몰르고 몰아치먼 문제요. 서민영이야 읍내 두통꺼리고, 그 물건이 독부렸다허먼 읍내가 시끌시끌해저뿌요." 윤삼걸이도 고개를 내저었다. "서민영이럴 그리 건디리는 것은 긁어 부시럼이요. 고 물건이야 죽으나사나 아랫것덜 편이고, 우리 지주덜 알기럴 순전헌 도적눔으로 아는 눔잉께로. 아랫것들도 묵고 살기는 우리덜 전답에 붙어 묵고 삼스로 정작 맘이 가 있는 것은 그눔헌테여. 쭉쟁이 하나 못 얻어묵음시롱도 말이요. 똥이 무서바피허간디." 최익달의 얼굴은 쓰디쓰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눔이 예수쟁이라서 그렇제 속이야 수박 속맹키로 삘건헌 것이 염상진이 눔허고 하나또 달븐 디가 웂는 놈이랑께요. 재작년 그러게 십일월에 아랫것덜 앞장서서 설레발친 것이나, 그 일 뒤로 지 농토 공동농장 맹근 것이나, 다 빨갱이가 헐라는 짓거리 그대로요. 그 물건 땀세 우리덜 위신이고 체면이고 다 깎이고, 하여튼지간에 그 물건은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헐 우리 눈에 백힌 까시요." 윤삼걸이도 못내 마땅찮은 얼굴이었다.
"그럼 일이 더 확대되기 전에 이 상태에서 빨리 대책을 강구해얄 것 아닙니까.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불안한 기색으로 유주상이 말했다.
"방법이고 뭐고 있겠소. 싸게 서민영이럴 내보내는 방도밖에야." 최익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전화로라도 그 뜻을 전하시지요." 유주상이 최익달의 눈치를 살폈다. "에이 빌어묵을, 워떤 주딩이가 방정얼 떨어갖고최익달은 혀를 차대며 전화기로 다가앉았다. 백남식은 처음에는 자신의 위신과 체면을 내세워 최익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글씨, 그리 휘일 줄 몰르고 뻣뻣허게만 나갔다가는 서민영이 버르장머리럴 고치기전에 백 사령관이 해럴 입게 된다 그말이요. 우리가 을매나 잘 알먼 이리 권허겄소." 최익달이 이렇게 말을 해서야 백남식은 기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민영이 유치장 나가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백남식이 찢어버린 도장 받은 종이를 원상복구 해놓지 앉으면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서민영의 말이었다.
백남식으로서는 그 똥배짱에 그만 기가 찼다. 고것이야말로 겁도 없이 덤벼드는 정면도전이었던 것이다. 치솟기는 성질대로 하자면 총 한 방으로 팡 쏴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서민영이란 자는 이미 개인이 아니었다.
백남식은 최익달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고런 죽일 눔 허는짓거리가 똑 물에 빠진 눔 건져주니께 보따리 내노라는 눔 심뽀시. 고것이 죽인 목심 살려내라는 소리허고 똑겉은 억지제. 한 분 찢어내뿐 종우때기럴 워쩌크름 원상복구허란 것이여, 원상복구가. 빙신이 육갑허드라고 택도 웂는 억지쓰는 그 자석얼 죽이든지 말든지 백 사령관맘대로 혀뿌시요." 최익달이 이렇듯 감정을 쏟아놓게 되자 유주상은 더듣고 있을 수가 없어 수화기를 낚아채듯 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바꿨읍니다. 유주상입니다. 예,예, 옆에서 다 들었는데, 그건 서민영이가억지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억지 같은 말 속에 든 저의가 무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한번 찢어버린 종이를 원상복구시킬 수 없다는걸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잖습니까? 그럼 바라는 게 뭐겠어요. 나가서 다시 도장을 받아아 하는데, 그 일을 방해받지 않고 하려는 계산속인 겁니다. 그러니까 백 사령관께서는 그자가 노리고 있는 계산대로, 원상복구는 불가능하니 나가서 다시 만들면 될 게 아니냐, 하는 식으로 유도하세요." "아니 그럼, 도장 받는 걸 승인하란 거요? 날 도대체 뭘로 보고하는 소리요!" 수화기 속에서 백남식은 소리치고 있었다. "아하! 이건 작전이오. 그걸 막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우선 이 일부터 처리하십쇼. 그럼, 그 방법에 대해선 술 한잔하면서 차분히 말씀드리지요." 유주상의 말은 적중했다. 찢은 건 미안하게 됐으니 나가서 다시 만들라는 백남식의 말을 듣고서야 서민영은 뱀이 또아리를 틀듯 했던 가부좌를 천천히 풀었다.
허출세는 무릎이 시도록 이틀 동안 작인들 집을 쏘다녔다. 미리부터 다루기에 만만한 집들을 고른다고 골랐지만 막상 말을 꺼내놓고보면 하나같이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다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계문제였던 것이다. 김복동과 마삼수가 분탕질치듯 하고 가버린 다음 허출세는 분을 못이겨 혼자서 한동안 펄펄 뛰다가 제물에 지쳐 마루에 걸터앉았다. 마삼수놈의 말이 정신을 혼란하게 했고, 그 독기서린 목소리가 귓속을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허위대는 컸어도 양순한 편이었던 마삼수가 그리도 심하게 변해버린 것이 우선 믿을 수 없는일이었다. 그 눔이 강동기의 그 풀믹인 성질머리럴 대신허자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쥐도 다급해지면 고양이를 물고 덤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변한 것은 마삼수만이 아니었다. 마삼수가 그리도 막 나대는데옆에서 말 한마디하지 않고 앉아 있던 김복동이놈도 생판 달라진꼴이었다. 전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김복동이는 우선 말리고 들었을것이 아닌가. 그려, 고것덜이 괭이 물고 뎀비는 쥐새낀 기여. 앞날 캄캄해져뿐께 죽기살기로 뎀비는 것인디… 나가 물리고만 앉어서 생떼겉은 돈얼 띠믹혀? 그것은 안될 말이었다. 돈을 떼먹히지 않을 무슨 방도를 강구해야만 했다. 돈을 떼먹기만 하면 감방에 처넣겠다고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큰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사사로운 돈거래로 감방살이를 시키고 돈을 떼이는 것보다야 감방살이를 시키지 않고 돈을 받아내는 것이 두말할 것 없는 상책이었다. 그러자면 마삼수가 요구한 대로 소작을 주어야 했다. 그러나 소작은 이미 다 주인이 생겨 농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허출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난감해지고말았다.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 허출세는 연방 담배를 곰방대에 몰아넣었다가 반도 다 태우지 않고 놋재떨이를 두들겨대고 하며 하루종일 속을 끓였다. 그러다가 저녁밥상머리에서 아내의 눈치살피는 물음을 받게되었고, 그는 밥 대신 김복동과 마삼수 두 놈을 씹어대는 기분으로 마구 욕질을 해가며 그 이야기를 했다. "음마, 당신은 고까진 일로 왼종일 속낋이고 그랬소?" 그의 아내는 헛김 새는 웃음을 코끝에 달았다. "무신소리여, 시방?" "아, 고까진 것이야 간딴허제라. 한 집서 한 마지기썩만 띠내서, 넉집 잡고 너 마지기먼, 두 집에 두 마지기썩 줘서 급헌 불 끄먼될 일 아니겄소." 그의 아내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말했고, "이, 고런 존 임시변통이 있었구만그랴." 그는 얼결에 무릎까지 치고 나서, 자신의 감정노출이 심했음을 깨닫고는 큼큼 콧소리를 내며 안색을 바꾸었다.
그런데 막상 그 방법을 실현시키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어느 집에서고 실랑이를 벌이듯 많은 말이 오가야 했다. "금메 봇씨요, 우리가 새끼덜만 넷인디, 한 마지기럴 보태도 서러운 판에 한 마지기럴 띠내뿔먼 워쩌크름 살아지겄소. 우리보고 농새 짓지말라는 소리고, 농새짓고도 굶어죽으라는 소리요. 우리보담 식구 적은 집보고 내노라고 혀줏씨요, 존 일 헌다고." "어허, 이 사람 심뽀 한분 고약허시. 글먼 자네 혼자 살자고 복동이고 삼수네넌 다 굶어죽어뿌러도 좋다 그런 말이여,시방? 자네 고런 심뽀 복동이허고 삼수가 알먼 워쩔랑가." "아이고메, 누가 듣겄소. 농새럴 애초에 안 지었으먼 몰라도, 농새럴 질 대로 다 짓고 굶어뿔게 생겼응게 하도 땁땁허고 땁땁혀서 허는 소리제라. 아재도 생각혀봇씨요, 너 마지기 농새 지나 닷 마지기 농새 지나 심들기야 고것이 고것이제만, 첨부텀 묵고살기에 모지랜 논에서 한 마지기럴 띠내뿔먼, 바로 거그서 나는 소출로 목구녕에 풀칠혀얄 판인디, 우리넌 워쩌겄냐 그것이요. 사람이 복통해 죽을 일 아니요."
"어허, 자네가 시방 날 갤치는 것이여, 머여? 만일에 유 조합장 어런이 자네 소작얼 당장 걷어 복동이나 삼수앞으로 넴게저라 허먼, 자네 워쩔랑가? 꼼지락달싹 못허고 소작얼뺏겨야겄제? 근디, 우리 유조합장 어런이 원체로 심덕이 곱고 맴이 넓은 양반이라 골고로 골고로 좋게 허자고 요런 방도럴 취허신 것이여. 복동이고 삼수고 다 그 땅 소작얼 짓든 사람딜인디 워찌 몰른 척헐 수 있겄느냐허는 뜻이란 말이시. 웃사람이 고런 존 뜻을 냈으먼 아랫사람은 고것얼 얼렁 받들어야 도리제, 자네넌 자네 욕심만 채림서 콩이야 퐅이야, 워째 그리 말이 많혀. 그리허고, 조합장 어런이 고런 뜻얼 안 냈다고 허드라도 한 동네 사는 정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자네가 먼첨 내놀 만도 헌일인디, 자네 맘 쓰는 것이 고것이 머시여. 자네 고런 심뽀 니가 조합장 어런헌테 말허먼, 조합장 어런이 자네 에진간히 이뿌다고 허겄네." "아이고, 아재, 다 아재 말대로 허겄소. 아재 맘대로 뜻데로 다 허씨요.""이 사람아, 말 골라감스로 혀. 요것은 나가 자네 못되라고 허는 내 뜻이아니고, 모다 골고로 잘되게 허자는 쥔어런 뜻이다 그것이여. 똑똑허니 알아둬!" "아이고메, 이러나저러나 논 뺏기기는 매일반인디, 고런 것알아 워디 쓰게라." 허출세는 네 집을 돌며 이런 식의 말을 지어붙이고 뜯어붙이고 하면서 진을 빼야 했다. 돈을 모으기도 어렵지만, 빌려준 돈을 받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새롭게 경험하고 있었다. 그가 겪은 어려움과 고생은 김복동과 마삼수를 향한 앙심으로 변했다. 그러나,허출세의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서운상이눔 맹키로아재 눈에도 우리가 벌거지로 뵈요?" 허출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삼수가 대지른 말이었다. "자네, 고것이 먼 소리여?" 허출세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아, 우리가 벌거지가 아니먼 비렁뱅이로 뵌께 고까진 두마지기럴 농새라고 지라고 허제, 지대로 사람으로 봤음사 워디 그럴 수가있겄소?" 허출세는 그때서야 말뜻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그 순간 속이 뒤집어 졌다. "머시가 워쩌고 워째? 다 죽게 된 눔덜 살 질 맹글어준께 고맙다는 절은 안허고 됩데 치고 뎀벼? 요것덜이 보자보자헌께 싹수머리가 하나또 움네." 허출세는 곧 눈을 찌르거나 콧구멍을 낚을 것처럼 삿대질을 해대며 펄펄 뛰었다. 그러면서도, 싫으면 당장 그만두라는 말은 용케도 참아내고 있었다.
"아재, 아재도 너무 그리 지주 티 내지 마씨요. 아재나 우리나 따져놓고 보먼 다 같은 처진께요. 서운상이가 워째 그 꼬라지가 된 줄 아시요? 사람얼 사람대접 안혀서 그리 되얐소. 딴 지주고 마름이고 그 꼬라지 안되란 법 있는 줄 아시오? 동기가 따로 있는 거이 아니다 그말이요." 마삼수는 아주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니가 시방, 니가 시방, 나헌테 협박질허는 것이여? 동기가 서운상이 찍대끼 니가 나럴찍겄다 고것이여!" 허출세는 등줄기에 찬바람이 도는 걸 느끼며, 그 섬뜩한 기분을 이겨내기라도 하려는 듯 소리소리 질렀다.
"기왕지사 찍자먼 큰 괴기럴 찍제 작은 괴기 찍겄소? 나도 동기만헌 좆 달린 사내새낀디." 마삼수는 입에 비웃음을 물었고, 초조한 기색의 김복동은 연상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워따 뱃보 한분 커서 좋다. 사람이 죽을라먼 맘부텀 변허는 것인디, 느그가 지 명대로 다 못 살고 죽을라고 환장덜허능갑다." "바로 뚫린 입 달고 말 바로 허씨요. 환장헌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이눔에 시상이요. 갈수록 살기 에로와지는 이눔에 시상이 다 누구땀세요. 악독헌 지주눔덜이 쥔 행세허니께 그런 것 아니냐 그말이요.
요런시상 바로잡자먼 지주눔덜얼 싹 다 서운상이 꼴로 맹그는 방도밖에 웂소. 우리도 다 생각 있고, 속이 있는 사람인디, 우리가 환장헌 것이 머가있소." "온냐, 니 입이 바로 뚫린 입이라 그런가 말 한분 똑떨어지게 자알헌다. 고 말 나헌테 허덜 말고 염상진이 앞에 가서나 혀라. 아조 이뿌다고 험시로 "동무" 삼자고 보듬아줄 거이다. 폐일언허고, 나가 말헌 두마지기썩얼 받을 챔이여, 안 받을 챔이여. 나도 고상헐 만치 혀서 장만헌것잉께, 딱 뿌러지게 말혀." 김복동은 마삼수를 향해 더 급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근디, 워째 동기 몫아치는 웂소?" 마삼수의 느닷없는말이었다. 김복동은, 쟈가 미쳤다냐, 하고 생각했다. "자네 참말로 정신나간 것 아니여? 죄짓고 쬧기는 눔 몫아치꺼지 챙기게. 그라고, 주자고혀도 농새질 사람이 웂는디, 워쩌라고 줘." "고것이야 걱정 마씨요. 우리가 한 마지기썩 맡어서 농새 지줄 참잉께 동기 몫아치도 두 마지기럴 맹글어내씨요." "못혀 , 고것은 못혀!" 허출세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글먼 우리도 안 받겄소." "머시어! 니 맘대로 혀. 나야 느그 두 놈얼 당장감옥에 처박을 것잉 께." "고것이 그리 뜻대로 맘대로 안될 것인디라.
재판이야 걸리겄지만 사사로이 빌레쓴 돈으로 징역살이허는 법이야 웂은께로오. 아조 자알 되얀네그려. 농새도 웂이 짭짭헐 판인디 재판이나 험시로 소일허고, 빚돈은 홍시감 따묵디끼 똑 띠묵고 말이여. 그 맛 참말로 꼬시고 오지겄다." 마삼수는 느물느물 말하고 있었다. "저, 저, 쳐죽일눔이, 저눔이…" 허출세는 푸들푸들 떨었다. "아재, 삼수 말도 영 틀린것이 아니요. 동기가 죄진 몸이라고 혀도 남은 세 목심언 워쩔 것이요.
셋이 한자리서 일 저질러놓고 우리 둘만이 풀려난 것도 미안시런 일인디, 거그다가 농새할라 우리 둘이만 따묵고 동기네 식구야 몰라라 혀뿔먼 고것이 워디 사람이 할 짓이겄소. 인정상 의리상 그리 못헐 일이고, 동기빚돈도 받어야 허지 않겄소. 애쓴 짐에 아재가 쪼간만 더 애쓰면 서로서로가 그보담 더 존 일이 워딨겄소. 아재, 앉어서 의논헙씨다." 처음으로 입을 연 김복동의 말이었다. 느그 눔덜이 염려 안해도 나가 다 믹여살리고 있는 참이여. 곧 터져나갈 것만 같은 이 말을 허출세는 입안에 가득 물고 있었다. 그런데 허출세는 김복동과 마삼수가 갑자기 풀려나오게 되자 남모르게 가슴이 죄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삼수의 마누라야 더 말할 것 없고, 강동기의 마누라한테도 그 짓을 그만 해야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려, 같은 말얼 혀도 그리 예절 챙겨감서 조단조단 의논지게 혀야제, 삼수 저눔 허는 짓거리는 머여, 보배운 디 웂이." 허출세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그래도 체면은 유지시키려고 했다. "저것이 다 나이 젊어서 그러는 것이제라. 아재, 우리도 하로이틀 얼굴 대허고 산 정리가 아닌디, 서로 가심에 못박어 감시로 살어서 쓰겄는가요. 앉으시씨요, 앉어서 존 맘으로 우리 뜻받아주씨요." 김복동이 허출세의 소매를 끌어당겼고, 허출세는 못 이기는척 주저앉았다. "서로서로 존 일잉께 아재가 한분 더 애 잠 써줏씨요." 김복동이 다시 청하는 자세로 말했다. "근디 말이시, 농새야 자네덜이 지준다고 혀도, 고것이 소문나불먼, 도망가고 웂는 죄인헌테꺼정 소작띠줬다고 소문나불먼 다른 작인덜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고, 고것을 조합장이 알먼 나넌 워찌 되겄냐 그말이시." "아재, 그것이야 우리만 아는 비밀이재라. 겉으로야 으당 우리가 짓는 소작이고라." "단단허게 약조허소." "약조허제라. 나넌 마누래헌테도 말 안헐 작정이요." 마삼수가 불쑥 말했다. "되얐네, 고런 맴이먼. 나가 또 한바탕 일얼 추슬러보제." 허출세가 기세 좋게 말했고, 김복동과 마삼수는 거의 동시에 머리를 숙이며, "아재, 고맙구만이라" 하고 인사했다. "자네 참말로 장허시. 워찌 그리 속 짚은 생각얼 혔등가. 나잇살 더 묵은 나가 체면이 말이 아니시." 허출세와 헤어져 돌아오며 김복동이 말했다. "성님, 그리 생각 허덜마씨요 성님이 웂었음사 요 일이 워찌 성사가 되었겄소. 나야 말만 뱉었제 성사야 다 성님이 시킨 것이제라." 마삼수는 김복동을 보며 정 깊은 웃음을 씨익 웃었다. "워디가, 워디가, 다 자네 공이시. 워쨌거나 동기가 오늘밤 부텀은 잠자리가 편헐 것이네." "그렇겄제라." "하로이틀도아니고 워디로 피해 댕기는고. 빌어묵을 눔에 시상…" 김복동이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쉬었고, 마삼수는 땅을 내려다본 채 묵묵히 걷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