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보는 프로에 강성용 교수의 불교 스토리가 있다.
강 교수님은 불교의 핵심을 '집착'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강 교수의 말을 듣고 있으면 새삼 새로운 것처럼 느껴진다.
왜이지?.
집착이 괴로움을 낳는 것이니[고집]..
집착을 멸하면 괴로움은 사라진다[멸집].
수행은 집착멸이니 이것이나 저것에 집착하지 않는 중도를 닦아야 한다.
해서 4성제와 팔정도가 나오는데..
강 교수는 12연기법은 후대인 상좌부 부파불교 시대에 정리되었다고 할 뿐이다.
그 말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강 교수에게 묻고 싶은 말.. 집착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12연기법은 후대에 정리되었다 해도 집착이 시작되는 법을 알아야 집착을 완전히 멸할 수 있지 않을까?.
자이나교나 우파니샤드인 한두교도 집착을 멸하자는 가르침이요, 종교가 아니냐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교가 그것들과 다를까..
석가모니의 뛰어난 점은 자이나교나 힌두교는 집착의 시작을 존재로 보는 데 반해..
집착의 시작을 12연기법 시작인 무명[마음]으로 보는 게 차이다.
석가모니 6년 고행을 혹독한 과정으로 여기는데 평생 고행하는 자이나 수행은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
그럼에도 자이나교를 삿된 목표를 갖고 수행하는 것으로 허망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석가모니의 지적은 무엇인가..
지난 시간 공부한 '무명'을 <잡. 298. 법설의설경>에서 보면..
무엇이 연기법의 뜻에 대한 설명인가?
이른바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것을 무명(無明)이라 하는가? 만일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며,
안을 알지 못하고 밖을 알지 못하고 안팎을 알지 못하며,
업(業)을 알지 못하고 과보(果報)를 알지 못하고 업과 과보를 알지 못하며,
부처님을 알지 못하고 법을 알지 못하고 승가를 알지 못하며,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발생을 알지 못하며, 소멸을 알지 못하고 길을 알지 못하며,
인(因)을 알지 못하고 인이 일으키는 법을 알지 못하며,
착함과 착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죄가 있고 죄가 없음과
익히고 익히지 않음과 못나고 뛰어남과 더럽고 깨끗함과
연기에 대한 분별을 모두 알지 못하며,
6촉입처를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빈틈없고 한결같음[無間等]이 없어 어리석고 컴컴하며,
밝음이 없고 크게 어두우면 이것을 무명이라고 하느니라.
그것은 우리가 잘 모르는 것 가운데.. 불교를 공부할 때 잘 모르는 대표적인 것을 올려놓은 것으로
불교 수행자라면 적어도 그것은 잘 알아야한다는 의미로 새기면 좋을듯 하다.
12연기법 하면 크게 생문과 멸문으로 설명된다.
생문이란 유전문이라 하여 우리가 세상에 나와 윤회하는 세계를 설명하고,
멸문은 환멸문이라 하여 윤회 세계에서 멸하는 길을 보여준다.
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관심이 쏠리듯.. 유전문에 관심이 많다.
삼세양중인과설은 12인연법과 같은 것으로.. 12연기법에서 유전문에 해당한다.
흔히 연기는 인연과 같은 의미로 아는데.. 분명히 말하면 뜻이 아주 다르다.
인연에서 인은 주체이고, 연은 조건으로 주체와 조건이 만나 업을 짓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연기에는 주체인 인은 없고 오직 조건인 연만 나온다.
그런데 12연기법의 유전문은 주체가 본래 없지만 연기하는 동안 주체가 집기하여 존재하는 것이 된다.
집착이란 주체가 생긴 후에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듯..
집착이 생기기 전인 연기에서는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지 않는다.
'무명'을 설명하는 <잡. 298. 법설의설경>은 후대에 수집정리한 것은 틀림없어 보이지만..
석가세존은 어떤 방법으로든 제자들에게 무명을 포함한 12연기법을 전한 게 틀림없고,
집착이 생기는 근본 원인을 찾아가보면 무명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게 된다.
하여 무명을 멸하려면 집착을 멸할 수 있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