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영] 미스 코리아 살인사건 9-10.
살인은 마슬이었을까? 3
"의외로 수다장이군요.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면 입에 병이 날 성격이군요. 거기다가 윗사람의 특별한 배려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물고가가 제 세상을 만난 격이네요."
"저 여비서는 금변호사에게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금변호사에 대한 얘기가 진실이든 헛소문이든 말이야."
장과장은 생각에 잠겨 있는 두 형사를 보며 말했다.
별장의 테라스에는 태양을 잉태한 새벽이 찾아들고 있었다.
"자, 이제 우리가 처음 얘기했던 대로 볼 수 없는 인간들의 마음을 정리해보기로 하지. 남형사는 이번 독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
남형사는 약의 보호 속에 있는지 여전히 총명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앞으로의 수사 방향을 잡아보면, 일차적으로 미스코리아 진의 과거를 추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보혜양이기에 찬사와 질투를 온몸에 동시에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캠코더 기사를 빠른 시일내에 찾아내야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기사가 갖고 있을,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자료가 될 비디오 테이프를 압수해야만 합니다."
"음...... 그래, 피해자의 과거 조사와 캠코더 기사의 행방을 남형사가 맡기로 하지. 인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보강해 줄테니까."
"윤형사, 어때?"
"저는 이곳에서의 독살이 남형사의 지적처럼 마술식 살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립스킥이나 악수 또는 기타 방법에 착안한 독살일 가능성도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별장에 모였던 초대객들의 심리가 진실을 밝히는데 최선책이라고 생각돼요. 마술이라는 것도 눈 뜬 사람들에게 통하지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즉, 사건현장의 움직임들보다는 범인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동기를 찾는데 주안점을 둘까 해요. 미스코리아 진을 둘러싼 여성들의 심리와 남성들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운명과도 같은 살인동기를 찾아내겠어요. 심리에도 마술과 같은 트릭이 얼마든지 교묘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법이거든요."
"심리가 곧 진실이다. 아주 좋은 말이군. 명언이야. 어차피 인간이란 동물은 유형과 무형으로 이루어진 존재니까." 장과장은 엉덩이가 아픈듯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운동을 하고는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사실, 나는 남형사의 그럴듯한 추리를 듣기 전까지는 여기서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이 범인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네. 소음권총이나 석궁, 독침 또는 시한폭탄 같은 걸로 살인이 시도되었다면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용의자로 간주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이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미스코리아 진을 독살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네. 이곳과 그곳의 거리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거리만큼 멀다고 느꼈었는데, 나와는 달리 범인은 자신의 육체와 마음만큼 가깝다고 확신한 모양이야. 그래, 맞아. 나는 남형사의 추리가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네. 어쩌면 범인은 여기서 춤을 추고 있었을지도 몰라. 마술을 부렸을지도 몰라.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기 위해서 말이야. 이제부터 나는 여기서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범인에게 수갑을 채울 수 있는 반격의 마술을 부려볼까 해.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속임수가 분명히 있을 거야.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장과장은 홀 전체를 한번 둘러보고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과장님, 이 독살이 단독이냐 아니면 공범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지고 있습니다. 공범이 있을 경우 마술은 더욱 용이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형사는 홀 중앙에서 쌍쌍이 춤을 추었을 초대객들을 생각하면서 의혹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공범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점에 대해서 생각 안해본 건 아닌데, 이 독살은 공범이 존재할 수 없는 살인이야."
"어째서지요?"
남형사와 윤형사가 홀 중앙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독살에 자신이 없었다면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미스코리아 진을 살해하지는 않았을거야. 혼자서 감쪽같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을 거야. 범인은 이 홀에서 빛나는 살인을 발견해냈을거야. 그리고 독살 상황이 공범이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단순해. 한 사람이 아닌 두세 명이 한꺼번에 움직일 시간적인 여유가 거의 없었어. 진이 칵테일을 받아서 마시기까지, 불과 3분도 안 되는 시간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봐. 여비서가 쟁반을 들고 주방을 나오는 것을 동시에 목격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마술을 폈다고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독살은 단독으로 이루어졌어."
장과장은 단언했다.
"저도 과장님 생각과 같아요. 범인은 그 한정된 시간에 우리가 모르는 살인준비를 끝마치고 홀 중앙으로 걸어나갔다고 생각해요."
윤형사가 장과장의 의견에 공감을 나타냈다.
장과장과 두 형사는 원형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초대객들 중에 한 사람을 나름대로 범인으로 떠올려보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도록 하지. 이제 곧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올거야. 별장을 떠난 사람들의 입이 자물쇠로 잠겨져 있지 않는 한 영원한 비밀은 불가능할테니까 말이야."
세 수사관은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신선한 새벽 공기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어, 저 불빛들이 뭐지? 이런, 자동차 행렬 아니야. 빠르기도 하군."
보약 같은 새벽공기를 페부 깊숙이 들여마시던 장과장은 동산 아래의 소로로 꺽어들어오는 자동차의 희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겁나게 달려오네요. 과장님, 윤형사와 저는 서울로 가겠습니다."
"알았네. 나는 여기서 마술 연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 아마 수사본부는 이곳 경찰서에 설치될 거야. 그렇지만 별로 할 일이 없을 거야. 초대객들이 모두 이 지방 사람들이 아니니까. 서울에서 수사하기가 수월할거야."
두 형사는 사진기와 카메라 멘 기자들이 별장으로 돌아오기 전에 샛길로 빠져서 국도로 진입했다. 장과장은 남형사가 운전하는 경찰 승용차가 사라질 때까지 보약 마시듯 공기를 들여마시다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홀에 혼자 선 그는 테이블로 걸어와 앉으며 다시 중앙 홀을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보았다.
"여기에 앉아서 저 중앙 홀에 있는 범인에게 수갑을 채우려면 어떤 마술을 펼쳐야 될까?"
장과장은 무심코 테이블 위의 홀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혹시? ......"
범인은 없다 1.
서울로 돌아온 남형사가 특수수사과 낡은 소파에 모로 누워서 간밤의 수면부족을 채우고 있을 때, 윤형사가 청바지 차림으로 특수수사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빵과 우유가 든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남형사, 그만 일어나."
힘겹게 눈을 뜬 남형사는 태극기 반대편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보고는 기겁을 해서 일어났다.
"이런, 벌써 12시가 넘었네. 과장님한테서는 연락이 없었어?"
"기자들한테 포위되어서 대변인 노릇을 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시고 있나 봐."
"신경안정제나 갖고 계신지 모르겠네. 허긴, 미스코리아 진의 시신을 발바닥에 무좀이 나도록 달려온 기자들이 허탕치게끔 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놨으니 곱게 넘어가 주지는 않을 거야. 사진 한장 못 찍었으니 좋게 볼 리는 없을 거야."
"불쌍한 우리 과장님. 남형사, 이거 먹어."
윤형사가 스트로우를 우유곽에 꽂아주면서 빵과 함께 주었다.
"고마워."
남형사는 우유를 힘껏 두 번 빨아 목을 축이고는 탁자 위에 놓인 수화기를 한 손에 집어들었다. 인천 지역번호를 누른 다음 114로 전화를 걸었다.
"네, 수고하십니다. 동오기획 전호번호 좀 부탁합니다."
남형사는 볼펜 꼭지를 누르고는 메모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4, 2, 3에 ......, 네, 감사합니다."
남형사는 후크를 누르고 다시 숫자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동오기획이지요? 그곳 위치가 어떻게 되지요? ......네, 주안 사거리에서 ......네, 수고하십시오."
남형사는 수화기를 힘있게 내려놓으며 동시에 소파에서 일어났다. 윤형사에게 빗을 빌려서 헝클어진 머리를 빗고는 빵과 우유를 양손에 들고 특수수사과 문을 나섰다. 특수수사과에 혼자 남게 된 윤형사는 금지선 변호사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