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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3장 12-20절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전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이제 곧 죽으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는 것이요,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 더 이상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결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리시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하시는 바가 무엇을 뜻하는지 제자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거저 발을 씻기시자 자신을 발을 내놓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베드로에게까지 왔을 때 베드로는 만류하게 됩니다.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겨 주어야지만 나와 관계가 있는 자요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이미 목욕한 자로 발 외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들의 죄책을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저들의 죄에 대하여 끝까지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발을 씻는 행위를 통해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내용 가운데 예외인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실 때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10절 중간에 보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지만, 예수님의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죄 사함 자체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듣고, 수없이 많은 이적을 행하면서도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그는 그저 예수님의 유명세에 빌붙어 자기 배만을 채우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면 뭔가 자기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영적인 유익이 아니라 단지 육적인 유익만을 바라면서 따라다녔던 겁니다.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나머지 제자들도 아직까지는 육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은 했지만,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으로 주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이 있다고 해서, 또 연약하여 날마다 죄를 짓는다고 해서 자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가룟 유다는 왜 그 사랑에서 제외 되었는지 물을 수 있겠지만, 사랑하기로 하신 자와 그 사랑에서 제외된 자의 선택 기준은 우리 안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에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리시는 사실은 하나님께 불의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핵심은 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선 12절을 보시면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만류로 인하여 어느 정도 그 의미를 말씀하셨지만 좀 더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자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특히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신 것 안에는 충분한 깨달음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앞서 발을 씻기시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시고 그 물음에 답을 주시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모든 것을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충분한 깨달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설명하시는 모든 것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도록, 오직 들은 것을 말하여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하시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신 것은 지금 당장 깨닫지 못할지라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저들로 하여금 들은 말씀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깨닫지 못하더라도 저들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겁니다.
계속해서 13절을 보시면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는 너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주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는 너희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할 주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이 무엇이냐? 14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그리고 그 사랑은 저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는 사랑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처럼 너희도 형제를 사랑하되 부족하고 연약함을 보더라도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좀 더 효력이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이요 ‘주’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선생으로, 종 된 자들의 주인으로 자신은 섬김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인 것처럼 자신도 섬김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너희를 섬겼다, 본래라면 제자가 선생을 종이 주인을 섬겨야 하지만 선생이요 주인인 내가 너희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제 된 너희는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고 사랑의 표로 용서함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지금 예수님은 발을 씻는 자체를 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서도 나오지만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이 아닙니다. 신약에서 의식으로 명하신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에서는 발 씻는 행위를 하나의 의식으로 보면서 세례와 성찬과 마찬가지로 성례로 이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성례라고까지는 하지 않지만 교회 역사 안에서는 694년 톨레도(Toledo) 회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더 앞서는 교부인 암브로스의 경우는 이 제도를 택하여 밀란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실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이 의식을 의무적으로는 하지 않지만 때를 따라 행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가톨릭만이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도 행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례로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는 사랑과 섬김의 모습으로 행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회에서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발을 씻기시는 것을 통해 너희도 발을 서로 씻기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 씻는 행위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지, 이것을 그대로 행하라는 게 아닙니다.
칼빈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모든 행동을 무분별하게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순절의 단식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행동을 하실 때 그것이 제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는 규범으로서의 본인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행동을 모방하는 것은 하늘에 날아 올라가겠다는 처사와 같이 사악한 짓이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난 뒤 14절의 말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고 할 때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행위 자체를 행하도록 하는 규범을 삼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용서하시면서 그 사랑을 끝까지 나타내고 있는지를 알리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섬긴 것처럼 너희도 그러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을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가 사랑하신 만큼 사랑해야 하고, 그가 용서하신 만큼 용서해야 합니다. 그가 선생이요 주인이시면서도 마치 제자요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낮추셨다면 우리 역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가 처음 개척하는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신 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일치시켜 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데, 6절에서 9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과 동등하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종의 형체로서 사람의 모양으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의 죽으셔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사랑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짐을 대신하여 짊어지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우리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행하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보이신 사랑의 결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사역의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심으로 죄 용서함을 받게 하신 것은 더 이상 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시고 용서를 나타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의 허물조차 용서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통해 어디까지 본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느냐? 베드로전서 2장 21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까지 우리의 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보다는 영광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고 말씀합니다. 즉 고난은 신자에게 있어 필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함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9:30). 그의 고난에 있어 뭔가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가 먼저 가신 고난의 길을 동참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사도 베드로는 이런 고난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고난과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과 20절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러므로 부당한 고난,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하나님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이 그것입니다. 그에게 죄가 있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인 신분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억울한 것을 못 참습니다. 그것도 선을 행하면서 고난 받는 것을 못 참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 받을 수 있습니다. 악이 아닌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 고난에 동참하기까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16절,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오늘 본문에 이어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는데,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성찬에 관한 말씀과 함께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말씀을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은 성찬에 관한 말씀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말씀에 앞서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22:24) 어쩌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전에 이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씻기신 이후에 이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고, 누가 예수님 옆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다툼이 끊임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섬기기보다는 섬김 받기를 원했던 겁니다. 낮아지기보다는 높아지기만을 원했던 겁니다. 그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시지만 친히 섬기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은 그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는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반면 너희는 종이요,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누가 크냐로 다투지만 주인에게 있어 모든 종은 종일뿐입니다. 아니 종들 사이에도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주인이 종을 섬겼다면 종들끼리는 어떠해야 마땅한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7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지금 주께서 말씀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앞에서 로마서 8장을 인용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롬8:17). 그런데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습니다. 낮아지실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낮아진 삶을 통해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본을 보이셨다는 것은 그가 가신 그대로를 본받고 따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알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지식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은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합니다. 알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 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떻게까지 강조하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약2:17). 믿음이 있다는 것은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만 있어서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의 역사로 나타납니다(갈5: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 그가 복된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가룟 유다와 관련해서 말씀하십니다. 18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말씀은 누구를 위한 말씀인가?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는 자로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지식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행하는 자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알고 행하는 자로 있는가? 당장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13장 7절에서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식에 있어서도, 행함에 있어서도 이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당장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따라 알게 될 것이고, 알게 되는 것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하는 자로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서 1장 6절의 말씀처럼 그들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6장은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이미 복된 자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 말씀을 행하도록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부족함이 있지만, 연약함도 있지만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이끌어 가시면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일치되게 하십니다. 여기에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만 말씀의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룟 유다와 관련해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시편 41편 9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 것으로 다윗은 모를 수 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할 만큼 가까이 지낸 자가 자신을 배반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십니다. 아시기에 말씀도 하십니다. 그것도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이 더욱 강퍅해질 뿐입니다. 정확하게 누가복음 22장 22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결국 가룟 유다에게는 핑계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더욱 확고하게 나타낼 뿐입니다.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가룟 유다와 관련된 말씀은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19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가룟 유다가 배신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 자신을 팔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심으로 그 일이 일어나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이 참된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저들의 신앙을 확증하도록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제자들은 참된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주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확증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견고함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다 도망하는 자들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성취를 보면서, 또한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여 저들 안에서 역사하시면서 그들은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설 수 있게 됩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게 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 있고, 복음을 증거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받게 될 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로 저항하는 자로 있게 되는 겁니다(행5:29).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말씀은 가룟 유다 자신에게는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는 동시에,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말씀의 성취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도 이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성취된 말씀도 있고, 성취될 말씀도 있습니다. 많은 부분 성취가 되었습니다. 성취가 되었다는 것은 성취될 말씀 또한 반드시 성취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는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17절에서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외적으로는 분명 우리에게 행하도록 권면하는 말씀이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 마땅한 바는 하나님 지식에 합당하게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 안에서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18절에서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실 때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에게는 17절의 말씀을 성취하도록 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조차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세우신 자라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도록 하는 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 내가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아는 정도만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그런 분이기에 우리에게도 알고 행하라고 권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0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한다고 해서 실족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낼 것이고 그런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비록 가룟 유다와 같은 자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은 참된 주의 종들을 통해 반드시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실 때 그냥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난 뒤 열둘을 택하셨습니다(눅6:12-13). 이때 택하셨다는 것은 영원한 선택이 아니라 사도라는 직분자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세웠지만 배신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수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배신자가 될 것을 아셨지만 세우신 것입니다. 사도라고 해서 택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유기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곡만 있는 게 아니라 가라지도 있습니다. 가라지로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라지만 교회를 어지럽힙니까?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도 예수님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주의 뜻을 깨닫고 섬기는 자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높아지기 위하여 다투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어지럽힌 것입니다. 택자라 할지라도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해를 끼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택하신 모든 백성을 불러 주의 몸 된 교회로 만드십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지식을 허락하시고 지식에 합당하게 행하도록 이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할뿐만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위하는 자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이 그 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말씀만이 아니라 구약을 포함한 성경 66권이 우리를 향한 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구약의 몇몇 예를 들면서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고전10:6). 구약의 모든 사건이 우리의 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주의 모든 말씀이 우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신 것은 그의 모든 말씀에 녹아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가신 그 길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살펴야 하고, 그 말씀의 본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복됨이 있습니다. 우리의 복은 말씀을 따라 가는 데만 있습니다.
세상의 복, 세상의 안위가 진정한 복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가면서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도 우리의 복으로 있습니다. 영광은 장차 있을 것이고, 영광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씀의 성취가 우리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 때문에 인내하는 것도 있습니다. 인내하면서 때로는 위로도 받습니다. 위로가 있다면 감사하지만 때로는 위로가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요, 함께 하시는 것 자체가 형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복이라고 알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임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