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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석의 수필세계
- 토포필리아와 포토필리아의 환상적 교직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문학은 언어를 통해 구축된 삶의 실상이다. 그 안에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강한 의식의 주체들이 있는 힘을 다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몰입시켜 그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강문석도 마찬가지다. 첫 수필집을 내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은 그는 이제 자신만의 독특한 수필세계에 몰입하고자 한다. 몰입해서 하는 일이란 가치 있는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는 인간은 어느 하나에 미쳐야 한다고 했다. 강문석의 수필 안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 물론 그 세계에는 압축된 삶의 진한 영혼이 서려 있다.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강문석은 항상 ‘카메라’를 휴대하고, 삶의 진경을 찾아나선다. 바로 포토필리아와 토포필리아의 환상적 교직이다. 작가는 카메라를 통해 자신만의 인생론을 펼치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영역의 그 순수와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카메라를 둘러매고 방랑자가 되기를 즐긴다.
하버드대학의 쿠퍼랜드 교수는 훌륭한 수필가는 구경꾼이요, 방랑자요, 게으름뱅이여야 한다고 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혼자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인연이라는 끈을 통해 남과 나를 하나로 묶더라도, 열정이 없으면 그것은 애착에 지나지 않는다. 강문석은 카메라 렌즈에 온갖 사물을 담는다. 사물과 일종의 인연맺기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따라서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뜻한 둥지를 찾아 카메라를 메고 끝없는 방황을 계속한다. 그 둥지의 실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열렬히 집착하거나 몰입하는 것은 둥지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강문석에게 그 대상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소박하게 산이 산으로 남고 싶은 만큼 자기 본연의 자세를 다지겠다는 생의 가치다. 작가가 수필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위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튼튼한 삶을 더 튼튼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화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강문석이 문단에 들어온 지 십여 년 만에 세상에 내어 놓는 ‘첫수필집’은 아마도 토포필리아적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집이라는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될 것 같다. 그는 수필과 사진의 교직이라는 나름의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의미 있다고 하겠다. 제한된 지면 안에 주제를 내면화하고, 문장을 형상화하기에는 수필은 고도의 수련이 따른다. 그러다 보니 수필에서 문학성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강문석의 수필은 적절한 변주와 다양한 전개의 표현 기법을 통해 일정한 문학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타 수필집의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제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지는 강문석의 수필세계, ‘토포필리아와 포토필리아의 환상적 교직’으로 빠져보는것이 타당할 것 같다.
II. 삶의 흔적과 그림자
수필은 일상을 보다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업이다. 수필의 윤기는 문학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강문석은 수필가이면서 여행작가이고, 사진작가이면서 비디오작가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든 작가인 셈이다. 강문석에 있어서 수필을 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다. 그는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영원히 기억될 무엇인가를 위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며 열정을 바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무엇인가를 자기 이상으로 사랑한다. 강문석이 문학에 심취하는 것은 토포필리아적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일 것이다.
그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출생하여 경북 김천에서 성장하였다. 초등시절 대구매일신문 ‘아동문화’란에 산문과 동시를 발표하면서 문재를 키웠고, 중학교 시절 김천문화원 주최 한글시백일장에서 차상으로 입상한 바 있다. 한전 재직 시 ‘월간한전’에 수시로 수필 발표하면서 수필가의 꿈을 키우다가, 부산대학교 사회교육원 소설창작과정 수료, 부산교육대학교 사회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료, 동국대학교 평생교육원 여행작가과정 수료, 국제신문사 문예창작교실 수료하고, 2004년 유네스코부산 선정 우수문예지 <계간 에세이문예> 제1회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등단 후 큰 빛을 못 보다가 십여 년이 지난 후 제5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수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부산공업전문학교 특별과정부 전기과를 졸업하였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여 행정학과 학사를 받고, 동아대학교 산업대학원 전기공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의과학대학교 전기과 겸임교수로 11년이나 봉직한 바 있다. 문학활동 외 가톨릭신문사 위촉기자, 실버넷뉴스 사진부 기자를 역임한 바 있고, 2010년부터 현재까지 한전전우회 부산지회장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한전맨으로서 인품과 작가로서의 탁월한 글솜씨는 그에게 제5회 수필문학상 우수상을 안겨 주었다. 그의 첫수필집인 <산으로 남고 싶은 산>에는 70여 편의 수필이 실려 있으며, 각 수필마다 작가의 인생에 대한 지혜와 삶의 의식이 담긴 주옥같은 작품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말과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지성적인 마음이다. 그의 글은 삶에 대해 진정한 가치와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며 깨달음의 느낌표를 찾아온 사람만이 지니는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먼저 내리고 싶다.
수필가 강문석은 포토필리아와 토포필리아적 가치를 추구하는 수필가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면서도 늘 지난 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인생을 산으로 남고 싶은 산의 마음으로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 수필다운 수필쓰기가 어렵다고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고, 수시로 포토에세이를 써서 카톡이나 블로그에 올리기도 하는 부지런한 작가로서 저력을 발휘하여 젊은 작가를 게을러 보이게 한, 그는 청년작가다. 작품집을 탈고하기 전부터 평자를 찾아 점심을 대접하며, 예를 갖출 줄 아는 어른이시다. 산업화의 물결로 인간이 기계화되고 인구급증에 따라 기존의 가치관도 많이 변모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산으로 남고 싶은 산의 의미가 주는 선비 정신이 그리운 시대다. 강문석의 <산으로 남고 싶은 산>에는 포용력을 가지고, 의젓하게, 베풀면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모든 후배 작가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강문석의 수필은 다양한 영역을 두루 포섭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토포필리아와 포토필리아로 대별된다. 이 작품에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작가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강문석은 이런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며 우리 인간들이 각자 자기 본연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성찰하게 한 시도는 이 수필집의 수준을 가늠해 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고 하겠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여러 작품을 통해 자기 성찰과 만족한 삶의 색깔을 드러내었으며, 세태풍자와 현실비판 그리고 교훈을 안겨주었으며, 바른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기지와 유머가 번득이는 수필뿐만 아니라 기행 수필에는 외국에 나가서 느낀 감정이 편린이 지성과 맞물려 감동을 준다.
III. 강문석의 수필세계
1. 토포필리아, 신자유주의에 대한 항거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열등감이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산으로 남고 싶은 산>은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자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적 지성이 담겨 있고,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강문석의 수필을 관통하는 한 사상은 인간의 문화, 신체적 지각, 개체적으로 독특함이 인간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 기반한 지각이 인간의 환경에 대한 선호와 이상향, 더 나아가서는 공간을 조직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바로 환경-인간 사이의 관계와 미학론인 토포필리아다. 서정이 물결치는 초록 이미지의 축제 공간이 베푸는 자연친화적 경향은 강문석 수필의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수필 <산으로 남고 싶은 산>이란 작품은 녹색 대자연이 베푸는 잔치를 인생과 결부시켜 의미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수필의 문학화에 성공했다. 문학은 절실함에서 비롯되고, 그를 자양분으로 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그리움이 있어야 결실의 조건이 충족된다. 이 작품은 생태를 바라보는 작가의 진지한 안목이 ‘신음하는 산’이란 어구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보호방법이라 했다. 산이 산으로 남기를 원하는 그 마음엔 분명 우주만물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우리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도 없지 않을 터이다. 창조주께서 만드신 대자연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마는 나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산에서 날릴 때라도 제발 산에게 스트레스를 안기는 일만은 삼가야 하겠다. 작은 실천이지만 신음하는 산을 살리는 첩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산으로 남고 싶은 산> 중에서 -
이 수필을 통과하는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는 토포필리아로서 신자유주의가 우리 삶과 사람의 감수성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신자유주의 이후 어떤 삶의 전략이 가능한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 따위는 없다. 있는 것은 개인뿐이다’는 슬로건 아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감수성을 통째로 바꾸어 낸 삶의 양식이다. 소위 말하는 ‘인간의 죽음과 속물화/동물화’의 경향이 스펙타클 사회와 맞물려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통째로 우리가 어떻게 ‘일체의 질서 없음’의 상태, 폭력과 야만의 사회로 진입하였으며, 이 이후 삶의 양식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같이 고민해 보려고 하는 데에서 이 수필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for us is for earth란 말을 생각나게 하는 수필이다.
암자 텃밭 옆에서 쑥을 뜯은 아내의 연락을 받고 내가 주차장을 찾아갔을 때 놈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내 바로 앞에서 또 얼쩡댄다. 공작이 나무열매와 벌레로 식사한다는 것만 알았지 나는 빈손이었다. 그래서 투덜대듯 내뱉었다.
“야, 임마! 아무 거나 준다고 덥석덥석 받아먹으면 큰일 난다. 알겠나? 북한산 귀신이 된 화상과 지금 검찰에 불려 다니는 위인들을 함 봐라. 내 말이 틀리는지를……. 대신 아까 찍은 네 얼굴은 나의 카페에 올려서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마라. 그럼 또 보자. 밤중엔 맹금류도 설친다니 절대로 경계를 늦추지 말거라. 오늘 고마웠다”
-<공작과 통하다> 중에서 -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물질을 통해 획득되고 정신에 의해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면목은 자연의 내부에 그 뿌리를 서려 두며, 이를 근간으로 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만들어 내야 한다. 강문석의 문학은 이런 생명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이 작품은 공작과 대화하면서 가슴에 서리는 서정어린 정감을 수필화한 것이다.'야, 임마! 아무 거나 준다고 덥석덥석 받아먹으면 큰일 난다. 알겠나?‘라는 진술은 세상이 본연의 가치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은 본연의 순수성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순수로의 눈뜸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공원의 사진사>란 수필에서 작가의식을 눈뜨게 한다. 그의 지성적 정서는 자연과 밀착되어 있다. 이는 자연과 동화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인 것이다.
그런데도 셀카봉 붐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진사들은 영업이 더욱 힘들어져 그동안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이들도 이젠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다. 어떤 때는 멀찍이 얼쩡대면서 혹시 관광객들 중에서 그들에게 사진을 찍는 손님이 있는가를 살피지만 그러한 장면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오늘도 공원의 포토 존이라 할 수 있는 입구의 간판비석과 꽃시계 근처를 배회하면서 본인들이 직접 찍은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지만 떠난 손님들은 좀처럼 돌아올 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이 완전히 보따리를 싸서 자취를 감추지 않은 걸로 봐서 미련을 버리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 <공원의 사진사> 중에서 -
셀카봉의 등장과 붐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공원의 사진사들을 작가는 안타까움으로 바라본다. 무한경쟁시대로 인해 몰려드는 값싼 중국제 물건, 그리고 과학문명의 발전에 따른 모든 문제, 문제, 문제들에 귀 막고 눈 막으면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될 수 있을까? 고용불안과 실직을 심각한 사회 문제로 꼽지만, 잘나가던 일자리를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고 가장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생계문제가 과연 개인의 잘못인가? 사람들은 뉴스와 신문에서 다루어지는 답답한 현실을 자신과 상관없는 얘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소수만 살아남고 나머지 '대다수를 탈락'시키는 경쟁사회에서, 재벌이나 상위 몇 퍼센트의 부유층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라면, 이러한 '도태되고 탈락한' 부류에 우리 서민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당신은 신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오직 돈이 가치기준이 되는 이 경쟁 사회에서 당신의 삶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포박당하고 맙니다.” 누가 이렇게 외친들 스스로 관심 가지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금융자본주의가 낳은 갖가지 폐해를 경험하며 점차 다른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외국과 달리, 꾸준히 ‘신자유주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아닌가. 강문석은 이런 거대자본의 횡포에 고통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수필을 통해서 드러내지 않은 채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야만적인 신자유주의, 그 맨얼굴을 공원의 사진사를 통해 보여주며, 은근히 이런 경향성에 경고를 보내고자 한다.
하지만 ‘해방’이나 ‘독립’은 올바른 표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해방’이란 말은 타동사로 목적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해방시키다’로 써야 한다. ‘조선이 조선을 해방시키다’란 말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일본이나 미국이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한다면 일본의 압제에 부단히 항거한 우리 선열들의 주체성을 상실한 말이 되고 만다. 그러고 ‘독립’은 예속의 역사가 전제된 말이다. 미국이 영국에 예속된 상태에서 독립하였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 침탈당한 주권을 항거에 의해 되찾았다는 뜻의 ‘광복’을 써야만 맞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나 일정시대 왜정시대 식민지시대 등의 말들도 쓰면 안 되고 항거의 역사에 초점을 둔 ‘항일시대’로 써야만 한다. 이중에서 가장 많이 쓰는 일제강점기도 피침의 역사에 초점을 둔 말이라 피해야 한다.
- <귀국선> 중에서 -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던 작가의 아버지는 사선을 넘나드는 홋카이도와 히로시마 탄광의 막장에서도 조국의 광복을 애타게 기다렸다. 광복이 되어 당시 귀국선에 오른 작가의 가족은 넷이었다. 부모님과 다섯 살인 누나와 생후 1년 3개월이었던 작가였다. 천둥벌거숭이 갓난아기로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은 70년 전 귀국의 생생한 감동을 느껴보고 싶었던 그는, <귀국선>이란 수필을 통해 잘못된 역사관을 따갑게 꼬집는다. 그래서 이 수필에는 지성의 섬광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수필에서의 비판적 사고는 지적 작용의 밑거름이 되어 정서와 신비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그러면서 수필의 고상성과 고결성을 불러일으킨다. 수필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사고다. 익숙한 사물이나 개념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수필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우리는 ‘해방’이라는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작가는 이는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고정관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는 광복 70년을 축복한다면서도 일본만을 온 나라가 나서서 100년 전 침략만행 들춰내기에 광분하고 있다. 대체 그런 짓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반도 통일을 망친 중국의 9월 2일 전승절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축하하러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참으로 개념 없는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은 그저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고, 6.25동란 중 한반도 자유민주주의 통일 기회를 박살내 버린 중국공산당의 만행은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지 묻고 싶은 것이다.
- <귀국선> 중에서 -
<귀국선>이란 이 수필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잉여'가 되어버린 우리 시대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담고 있다. 우리가 결국 중국 공산당에 의해 분단된 결과를 잊어버리고,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는 데 대해 우려를 표한다. 중국의 전승절에 대통령이 축하하러 가는 데 대해 작가는 매우 비판적이다. 물론 이런 현실도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몰고온 유산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아파하는 걸까? 작가는 문화, 경제, 정치, 가족과 연애 등 오늘날 삶의 모습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여러 수필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진단한다. 이 수필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실천이 필요하며,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지 알게 된다. 과거에 대한 보다 냉철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맛뿐이겠는가. 현대적 삶의 폭력성과 일상적 삶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예리한 성찰은 당위적 진실을 발견케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문학이 반 푼어치의 가치로 떨어지는 걸 경계하고 있는 그의 인식은 일단 ‘솔직한 자기 고백’의 언술 전략으로 더욱 빛난다.
강문석의topophilia, 장소에 대한 사랑, 고향, 자연 등에 대한 사랑은 따뜻한 생명자본주의의 한 축이다. 장소애란 특정장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장소애가 특히 잘 나타나 있는 것이 강문석의 수필이다. 제목만 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수필에는 그가 그쳐간 지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묻어 나온다. 제목 속에 나오는 지명을 살펴보자. 거제도, 경목궁, 공원, 범어사, 남산, 남포동, 달맞이고개, 대신공원, 무등산, 배냇골, 법기수원지, 어린이대공원, 부산, 해운대, 설악산 금강굴, 송림공원, 순천문학관, 영도, 이태원, 통영, 지리산, 파독근로자기념관 그리고 하회마을 등이다. 칠십여 편의 수필 가운데, 지명이 표기된 제목만 24개나 된다. 이는 그의 수필세계가 토포필리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하겠다.
엊그젠 토목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영도대교 건설현장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있는데, 지나던 중년의 사내가 눈앞에 위용을 드러낸 최신 도개장치를 보고선 “억쑤로 비쌀끼구만…?” 하면서 나에게 동의라도 구하듯 씽긋 눈웃음을 보내왔다.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역시 하루 빨리 공사가 끝나서 영도대교가 부산의 명물로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세계5대 항구인 부산항이 힘차게 도약하여 명실 공히 동북아 허브항만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부산의 원도심을 대표하는 남포동은 역사와 전통을 살리면서도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쇼핑문화로 이곳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 <남포동> 중에서 -
특히 이 수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한 작가의 성장에 대한 개인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짜 관심 가져야 할 향토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애향적인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소중한 인연의 끈으로 묶고 있는 작가의 아름다운 부산 사랑이 질펀하게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도시 생활을 하고 있는 강문석의 장소를 소재로 하는 이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부산에 대한 자부심이다. 아이들과 아내의 흔적이 있는 땅을 사랑하게 됨으로서 그 기억들이 행복을 환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의 가슴에 살아 있는 마을은 항상 푸른 파도가 넘실된다. 영도다리 밑으로 흐르는 푸른 바닷물은 나날이 작가와 인연된 사람들의 정 줄기와 함께 오늘도 흐르고 있다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애향성은 가정사의 단조로움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은 한다. 남포동과 영도다리는 그러한 의미에서 강문석에게는 그리움의 공간이다. 강문석에게 있어서 남포동은 향수를 넘어 성찰의 시간을 부여하는 매게체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작가에게 유의미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3년 전 여름에도 성당교우들과 거제를 찾았다. 우리가 이용한 차량 운전사가 ‘내도’를 추천했고 일행은 구조라에서 도선에 올랐다. 잘 알려진 외도보다 가까이 있는 섬이어서 내도란다. 왕복 승선요금 만 원에 편도에 15분 걸리는 바닷길. 그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외도만 여러 차례 찾았던 것이 후회될 정도로 ‘자연이 품은 섬’ 내도엔 숨어 있는 비경이 많았다. 이렇게 인간들의 발길이 뜸하다보니 태곳적부터 내려왔을 자연과 식물들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었다. 선착장 들머리의 반대편인 섬의 끝자락에 위치한 신선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쪽빛바다는 더없이 황홀했다. 숲은 산책로를 덮어 터널을 이룬 곳이 많았고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에서 자란 나뭇잎들엔 윤기가 반들반들 흘렀다. 군데군데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 시를 담은 비석이 들어섰고, 바다를 조망하며 명상할 수 있는 쉼터도 마련해 놓았다. 선착장과 가까운 곳에 펜션과 민박집이 마치 알프스처럼 아름답게 들어서 있었다.
- <거제도의 추억> 중에서 -
그에게 있어 ‘거제도의 내도’는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으로 각인되어 있어, 자연친화적이고 향토적인 작가의 마음 속에 지금도 추억으로 우뚝 자리잡고 있다. 이 글은 삶의 지혜와 향토 찬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서, 비인간화된 인간과 순수를 잃어버린 우리네 삶의 지향성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점철된 소망의 결과물로 판단된다. 주제 지향성적인 측면에서 인생론적 또는 생태예찬론적인 관점을 동시에 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작가는 인간의 이상적 삶을 현실과 격리해 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은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집착의 대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무엇을 획득하고 상실했느냐에 따라 삶의 윤기와 습기,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만, 삶 자체가 집착의 결과이듯 문학도 같은 것이다. 그리움의 텃밭은 언제나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무한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되고, 생활의 지혜도 만날 수 있다. 강문석에게 있어서 자연으로 상징되는 거제도는 자연친화적인 작가의 정염과 사상이 녹아 있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겠다.
대구와 김천이 그리 멀지 않은데도 나를 대구로 불러주거나 누나가 김천으로 찾아오지 못한 걸 보면 당시 주경야독의 무게가 그만큼 벅찼을 것 같다. 방천시장 옆에 마련된 김광석길을 돌면서 이제 곧 여든에 이를 복혜 누나를 떠올렸다. 누나가 살았던 집의 번지를 알 수 없으니 지붕이 쇠락한 시장건물만 바라본다. 이럴 때 곱게 늙은 모습의 누나가 내 앞에 나타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기적적으로 누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모진 세월을 이겨낸 공을 새겨 훈장이라도 하나 달아주고 싶었다. 일생에 딱 한 번 만나 연을 맺었던 못난 사람을 누나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는지도 궁금하다.
-<복혜 누나> 중에서 -
중학교때 만난 ‘복혜 누나’와의 인연이 주는 의미를 새겨 보면 우리는 저자의 확실히 남다른 인생관에 수긍하게 된다. 인식의 형상화가 빛나는 부분은 주제를 소망으로 일반화하는 부분인데,“그렇게 기적적으로 누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모진 세월을 이겨낸 공을 새겨 훈장이라도 하나 달아주고 싶었다.”는 표현이다. 대체적으로 좋은 수필들은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화 전략들이 매우 체계적이다. 이 작품의 발단부에는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위한 가수 김광석의 모습이 놓이고, 전개부에는 복혜 누나와의 인연에 얽힌 일화가 삽화로 놓여 있다. 이는 주제의식을 설득적으로 구체화하는 전략이요, 수법이다. 이처럼 소박하고 진실한 경험의 용해와 절제된 감성은 강문석 수필의 품격을 드높인다고 하겠다.
2. 포토필리아, 구겨진 현실의 정화와 세태풍자
문학은 자신도 정화해야 하고 시대도 정화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동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강문석의 작품은 자신을 구원하는 글로써 거울 같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의 수필은 등불 같은 수필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자신의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일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과 동행자가 되어 숨겨진 그들의 아름다운 진실을 캐내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작품들은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잊고 있었던 자기에 대한 응시를 통해 무거운 아집을 버리는 일이나, 카메라를 메고 삶의 진경을 담아내는 것 모두가 수필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일이다.
이럴 때마다 스스로 가슴을 치게 되는 것은 살아오면서 수양을 제대로 쌓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분노가 치솟더라도 냉철하게 다스릴 수 있을 터인데 에세이라고 시작한 글이 저급한 정치칼럼이 되고 만 느낌이 들어 안타깝다. 이제 정치권이 천지개벽하듯 새롭게 바뀌는 날은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그날이 오면 꼭 여든 줄의 선배님을 찾아뵙고 못다 들은 추억 속 이야기들과 그동안 살아온 인생담을 듣고 싶은 것이다. 오랜 세월 적조했던 미안함도 전하면서 선배의 여생이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도 내비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 <금배지> 중에서 -
<금배지>란 수필에서 자신의 글이 저급한 칼럼이 되고만 느낌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강문석의 강점은 한 편의 수필에도 문학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신변적 수필이 난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시대정신을 담고 모든 현실을 비판적으로 주목하면서 작가정신을 수필 속에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가치다. 사건이 보다 구체적이라는 것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지만, 지구력이 부족한 수필 독자들에게는 해독하는 데 힘든 시간의 고통을 안겨 주지 않고 있다. 문학을 미적 구도로 인식하고 있는 한 그의 수필은 언제까지나 독자의 사랑과 관심을 끌 것이다. 그에게는 필마의 기운이 넘쳐난다. 현실의식을 가지고 수필을 연마하여 한 편의 글도 함부로 쓰지 않는다면, 그의 글은 힘의 문학을 지향하면서, 수필문학의 위상도 함께 드높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손에 마이크를 잡은 채로 방송을 하면서도 강변대로를 유턴하기 위해 회전식 좁은 고가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들어서는가 하면 한강대교 방향을 90도로 꺾는 일도 예사로 해댔다. “자~아, 여러분들! 모두 알겠지예? 24일부터 안전띠 매는 것…. 알아서 하이소. 나는 모릅니데이.”
‘아니 승객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수송해야 할 책임을 지고 차량의 핸들을 잡은 사람이 정작 자신은 모른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길 위의 삶, 일 년 365일 눈만 뜨면 도로를 달려야 하는 직업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닷길이나 하늘길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안전한 길이 육로가 아니겠는가.
- <나는 모릅니데이> 중에서
강문석의 수필 < 나는 모릅니데이 >은 자기 관조와 자조가 빛나는 수필이다. 우리가 수필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본래적 자아를 찾는 일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복잡하고도 삭막한 도시 생활과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본래적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수가 많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의 상실은 곧잘 삶에 지친 사람들을 패배주의로 몰아가기 일쑤다. 현실적 자아와 본래적 자아라는 괴리감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을 어떠한 형태로든 극복하기 위한 절박한 노력은 누구에게나 일생 동안 끊임없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글은 그러한 현실을 기술한 글이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작가에게 큰 아픔을 주었으며, 그것의 실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상징과 함축으로 주제의식을 내면화한 점이 강점으로 돋보이는 박영선의 수필 <현무암>은 현실의 온갖 유혹 속에서도 본래적 자아를 지켜 주고 회복시켜 주는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날아갈 듯 펼쳐진 팔작지붕 밑에 2단으로 덧댄 겹처마가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한다. 누마루에 오르면 비단을 풀어놓은 듯 길고 부드럽게 흐르는 남강과 진주교를 비롯하여 진주 시내가 훤히 펼쳐진다. 옛 사람들은 여기서 향시를 열었고 전란 때는 전장을 지휘하는 본부로 사용했다. 그리고 진주를 풍류 도시로 이끈 교방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곳도 이곳 촉석루였다. 이곳에서 갈무리한 사진을 당일 밤 인터넷카페에 게시하자 하루도 지나지 않아 1천명이 넘는 기록적인 조회 수를 보였다. 그만큼 개천예술제와 유등축제에 네티즌들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 <개천예술제> 중에서 -
세상의 모든 것이 수필 안에 놓여져 있는 소도구다. 사랑도 아픔도 이 안에 어우러져 있는 일종의 소품이라고 볼 때, 수필은 하나의 우주다. 수필을 쓸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감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먼저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야 된다. 개천예술제에 대한 묘사와 단상이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매우 구체적이다. 수필을 쓸 때 여러 가지 자연물이 소재가 되는 수가 많다. 그만큼 수필은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자연물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지는 문학이며, 자연물을 문학화하여 표현한 것이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연물을 소재로 수필을 쓰고자 할 때는 우선 자연과의 일체감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 즉 물아일체의 동화 상태에 빠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천예술제 관련 사진을 올렸더니, 하룻밤 사이에 일천 명이나 되는 방문객이 있었다는 건 그의 사진 솜씨와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하겠다. 자신이 수필의 소재로 삼겠다는 자연물에 한 일체감이 없이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중국의 거대도시 베이징을 찾을 때마다 난 관광코스에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쯔진청을 몇 차례나 둘러보면서도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향원정처럼 카메라에 담을 만한 빼어난 풍광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늘 아쉬웠다. 쯔진청의 구심점이라는 타이허뎬太和殿도 다르지 않았다. 향원정과 연못을 배경으로 내가 오늘 경복궁을 찾은 기념을 남기려고 카메라 삼각대 위치를 이리저리 맞추고 있을 때 핸섬한 청년 둘이 다가왔다. 그 중 한 젊은이가 "어르신, 제가 찍어드릴까요?"라며 웃는다. 구도는 이렇게 잡아달라고 주문하려는데 그냥 서시기만 하란다. "파이팅도 한번 하셔야죠!" 불과 이삼 분 만난 그들로 인해서 그때까지 처져있던 기분이 금세 부풀어 오른 듯하다. 하늘은 여전히 무거운 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 <경복궁> 중에서 -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고, 현실의 부조리에 언어로 참여하는 것도 정치적 인간이 하는 일이다. 작가는 현실 정치의 도피자로서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작가란 말과 글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다. 강문석은 비교대조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말하면서 중국의 거대한 문화유산을 냉소적으로 격하하고 있다. 언어의 표현이 억압되는 시대는 풍자가 성행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로 흔히 드는 것이 언어를 쓴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주는 기본권이다. 수필가는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비뚤어진 현실을 분노의 힘으로 정조준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정의롭지 못한 무리들이 현실의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수필가가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는 암흑의 사회다.
문학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이러한 이유와 당위성 때문에 작가는 작가로서의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수필은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급급한 문학은 일시적 카타르시스의 도구와 수단은 될지언정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닐 수 없다. 우리는 이제까지 문학을 자기 감정의 분출 수단이나 그를 위한 도구처럼 인식해왔다. 그러나 보다 견고한 가치를 지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소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리얼리즘 문학으로서 수필의 의식은 개인의식의 형이상학적 지향에서 개회의식의 형이상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수필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고, 노력의 흔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측면에서 또 강문석의 수필은 가치를 지닌다.
그러면서도 당시 피에 굶주린 이리떼처럼 쳐들어오던 잔인무도한 공산괴뢰군의 추악한 발아래 짓밟혔을 아버지의 시신을 떠올리며 전율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6. 25사변이 우리 국민들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왜 ‘사변’으로 불러야하는지를 모르는 대부분의 세대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한국전쟁’ 또는 '6.25전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호칭이 오도된 데는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들이 붙인 이름 Korean War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코 사변을 전쟁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전쟁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것이라면, 한 나라가 상대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것이 사변이 아니던가. 6.25를 사변이 아닌 전쟁으로 부르나 했더니 어느 때부터 북침으로 둔갑시키는 세력들까지 등장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변의 참상> 중에서 -
문학은 한 시대의 구성원이 지닌 고유한 정신이며 체온이고, 도도한 흐름이어야 한다. 그 시대와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구성원이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위해 자기의 희생을 소진하며,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의 하나이기에, 문학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강문적은 한국적 한의 정서를 문체화하려는 흔적을 보였다. 작가는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개념 정립을 통해 전쟁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을 바로잡고자 한다. 6.25사변이 우리들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지고 잇는 근원을 캐고자 한다. 강문석의 글을 읽으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우리가 너무 무개념적이라는 점이다. 한국전재이라는 용어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날카롭다. 국어학자도 아닌 그의 국어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수필보다는 소설이라면 더 흥미 있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에프’의 발음표기가 잘못된 경우는 수없이 많지만 ‘파일’과 ‘파이팅’을 ‘화일’과 ‘화이팅’으로 잘못 쓰고 있는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외래어가 아닌 우리말에서도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같지 않은 것’과 ‘맞지 않은 것’은 그 의미가 확연히 구분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뒤죽박죽 섞어서 쓰는 것이다. 자기나라 말을 가장 잘 가꾸면서 그 긍지도 세계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다. 시집보내는 딸을 사위에게 소개하면서 아버지가 건넸다는 인사말 “다른 것은 잘 몰라도 아름다운 우리 프랑스 말 하나만은 잘 가르쳐놓았네”를 우리도 한 번 새겨봤으면 좋겠다.
- <같은 거 같아요> 중에서 -
우리는 지금 심각한 언어파괴 내지는 오용 시대에 살고 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만 알 수 있는 신조어를 가시처럼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상대가 받을 데미지는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문제다. 현대 사회 속에서는 몰상식한 사람들의 언어오용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어는 그 속에 혼이 담겨져 있다. 그 민족의 얼굴이기도 하다. 바른 언어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수필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작게는 낱말에서부터 크게는 사회 전체의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상이 다양한 만큼 비판의 정도나 근거 제시도 차차만별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정확하고 풍부한 근거이다.
앞에서 분노는 반드시 풀어야한다고 했다. 나는 그 해소방법을 이렇게 권하고 싶다. 명상이나 수도를 통해 자신의 정신세계를 넓히거나 지극정성으로 절대자에게 매달려 얻게 되는 사랑과 용서의 힘을 구한다면 일시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쯤이야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노약자석 트러블로 난 또 한 번 후회를 하고 있다. 흰 바지 노인을 다시 만난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리. 그가 가진 분노를 한꺼번에 날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용서만이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나는 믿고 있다.
- <노인의 분노> 중에서 -
어떤 이유로든 걸러지지 않는 분노는 적절치 않다. 작가는 이런 차원에서 분노는 반드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수필가의 사명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이 같은 현실을 말해야 하고, 이에 대한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수필가다. 강문석은 이런 현실을 '침묵하지 않는다'의 입으로 말하고자 하는 작가다. 그의 시선은 예리하면서도 그 문제점이나 원인 등에 대해서는 매우 논리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닫혀진 현실 속에서 억압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막힌 출구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응하는 자신의 일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강문석은 이것을 사명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추호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
이 작품은 삶의 질서는 분노조절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한 사람의 분별없이 행하는 언어를 통해 상처받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언어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느낌, 그에 대한 의사를 인간 관계를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피력하거나 판단케 하는 결정적 매체라는 것임을 말해준다. 작가가 언어 사용에 있어 각별한 배려와 함께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수필 쓰기는 진실을 구명하고 참다운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투쟁이다. 강문석은 이러한 것을 구현하기 위해노약자석 트러블로 인해 또 한 번 후회를 내보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버린 지난날이 행복했고 다시는 그런 멋진 날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닐까 싶다. 이와는 달리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게 채색되기 마련이란 말도 있다. 그 말 때문인지 나에겐 지나고 난 모든 일들이 행복했던 순간들로만 다가오니 예삿일이 아니다. 악몽처럼 떠올리기조차도 싫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까지 오늘의 나를 미리 단련시켜준 조련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 마감하는 날까지 봄날로 살아가길 바란다면 과욕이라는 지탄을 받기가 십상이리라. 하지만 비록 봄날이 가버린 여생일지라도 베풂을 실천하면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고목에도 꽃은 필 수 있다는 걸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 <봄날은 간다> 중에서 -
여행을 하다보면 지구촌 곳곳의 웬만한 공연행사장에선 젊은 세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터뜨리는 모바일 폰 플래시를 만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아날로그 사진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진의 존재목적이기도 한 진실을 그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덮인 안나푸르나 봉우리와 백설 흩날리던 몽블랑의 운무 속에서 만난 환상적인 설경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인 몽골의 테를지국립공원의 때 묻지 않은 비경을 나의 주문대로 묵묵히 받아들였던 아날로그 카메라가 나는 좋다. 역할이 끝난 줄 알고 낙담했던 카메라도 반색을 하는 듯하다.
- <봄날은 간다> 중에서 -
인생에 있어 진실을 추구하기를 외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생을 실용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진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앞으로 전진할 기력마저 빠지고 만다. 이것은 바로 자아를 버리는 일이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수필가란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또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은 새롭고 편리한 것이 나오면 가볍게 그것을 취하지만 수필가들은 사라지는 것들의 허전한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주고자 한다. 그는 ‘아직도 아날로그 사진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진의 존재목적이기도 한 진실을 그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수필적 자아의 삶을 꿈꾸고자 한다. 참된 사랑을 맛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참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렵다고 영국의 시인 "키츠"가 말했듯이 수필도 그러한 생활의 자세가 요구된다.‘아날로그 카메라가 나는 좋다. 역할이 끝난 줄 알고 낙담했던 카메라도 반색을 하는 듯하다.’라는 진술은 그의 긍정적인 인생관과 타자의 사회학을 잘 보여준다. 영혼을 갈고 닦아 더욱 빛내고자 하는 과정이 없으면 수필은 쓰여질 수가 없으며, 진실을 향한 피나는 싸움이 없으면 수필작가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문이 아파트 관리비 비리를 시리즈로 쏟아내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심각성은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어떤 젊은이는 이러한 비리를 조목조목 파헤쳐 책을 찍어 서점 진열대에 올리기도 했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을 손가락질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우리와 같이 이렇게 도덕적으로 썩진 않았다. 도덕이 무너진 나라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선 초등학생 때부터 엄격한 도덕률을 가르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신축아파트에 꿀이라도 발렸는지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만 찾아다니면서 입주자 대표 자리를 노리는 자들도 있다. 언제 우리는 선진화된 법질서 속에서 깨끗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 <아파트관리비> 중에서 -
순간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각고의 작업을 우리는 자아 성찰이라 한다. 수필을 원숙한 인생의 문학이라 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인생 저편에서 사상을 관조하고 거기에서 지혜를 터득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수필화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른 비판적 사고는 특히 대상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옳고 그름을 따져 보는 태도는 잘못된 기존의 개념이나 관념을 새롭게 바꾸는 좋은 방법이다. 이 수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글에는 작가정신이 번득이고 있다. 고장난 세상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작가의 외침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곳곳에 수두룩하다. 자신의 삶에서 부딪치고 체득되어지는 여러 가지 역사적, 시대적 상황들을 외면하지 못해서 강문석은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투입시켜 비판정신으로 잘 구체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가 선진국이고, 우리가 선진국민이라는 새로운 기점에서 도덕률로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지성적 삶의 실천을 통해 깨끗하고 편안한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작가정신은 높게 평가된다.
더 큰 문제는 뒷골목에서 자생적인 문화를 만들어내던 상인들이 밀려나면서 그 자리를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채운다는 것이다. 결국 이태원의 문화가 사라지면 관광객도 사라질 것이고 결국은 죽은 거리가 될 것이라며 우려한다. 살아오면서 젊은 날의 아픈 기억으로 잊히지 않는 이태원 거리를 꼭 한번 찾고 싶었는데 그동안 인사동과 북촌 서촌에 마음을 두느라 탐방이 늦어졌다. 오늘도 나의 스케줄엔 없던 코스를 거절하지 못해 따라나섰기 때문에 전체를 둘러보기엔 시간이 모자라 아쉽기만 하다. 결국 가까운 날에 또 한 번 찾을 것을 스스로에게 기약하면서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 <이테원거리> 중에서
작가는 이태원거리에 투영된 타자의 모습을 주시하면서 공존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방법을 수필을 통해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간 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원숙한 인생의 맛을 느끼며 살기 위해 수필을 씀으로써 세상의 구원에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작가는 카메라를 메고, 젊은 날의 아픈 기억을 승화시켜나간다. 이는 건강한 생활인의 자연적 부화라는 측면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부가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의 공감대 위에서 작가가 떠남을 통해 일상의 행복에 젖어 들고 있는 것은 무료한 일상을 지나가는 시간의 관성이 아니라 창조의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한 의지의 확산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환영할 만 하다고 보겠다. 강문석의 수필을 읽으면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는 참다운 이의 깨달음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산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자신에의 집착을 엮어 가는 일이다. 원근과 대소를 재면서 자신과 관련을 현재화시킬 때 집착에 이를 것은 뻔한 이치다. 인간의 일상적 삶은 여기에 그 거점을 정하고 방향을 터 잡아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 수필집에서 읽히는 또 하나는 자신의 존재적 인식을 교정하는 활달함이다. 인간이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은 무아와 달관을 전제로 한 안심입명을 의미한다.
V. 나오며
에이브럼즈는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작가는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어둠 속을 헤매는 영혼들의 갈 길을 일깨워주는 선지자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작가는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쳐주는 거울이어야 하는가. 문제는 거울이 중요하다 등불이 중요하다가 아니라 문학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미덕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런 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문학이 되어야 한다. 거울이니 등불이니 순수니 참여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의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수필이 상상력이나 예리한 관조, 지적 통찰의 체로 걸러지지 않은 채 쓰여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수필은 단순한 체험의 나열이어서도 안 되고, 결코 관념의 퇴적장이어어도 안 된다. 화려한 수식어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 몰두해서도 안 된다. 수필은 삶과 세계에 대한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 있어서 강문석의 작품은 문학이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강문석은 글감을 생활 주변의 세태와 그를 둘러싼 사건 속에서 찾아내는 작가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는 버폰의 표현에 정확히 맞는 언행 일치의 삶을 사는 작가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경북 김천에서 자라나, 평생을 산업계에 투신해서 헌신한 사람으로서 그의 글은 잔잔한 교훈을 남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인생을 달관한 삶의 원로로서 버릇없음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 담겨 있는가 하면, 한 가정을 편안하게 리드해가는 가장으로서 일상 속에서 느끼는 편편들에 대한 다소곳한 정감을 수필 속에 용해시켜 내는, 가슴 따스한 작가다. 차분함과 여유에서 나오는 그의 글에는 오늘을 사는 생활인의 가슴 저린 애환이 있고, 따스한 정이 소리 없이 흐르며, 감사하는 생활의 미학이 녹아 있다. 이 사실은 <시가 짝사랑한 들꽃>에서, "세상의 하고많은 잘난 것들보다 힘없고 가련한 존재라 더욱 정이 가는 것이다.“고 한 말에서 입증되듯 그는 타자의 사회학으로 기득권에 저항하며, 소수자에 베풀며 살고자 한다.
그의 수필 ‘산으로 남고 싶은 산’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문제의 한 켠에는 언제나 초극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선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들은 그 세계를 통해 삶의 기쁨을 만끽하고, 처절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벽으로 해서 어쩔 수 없이 각박한 삶을 자처해 그 길로 들어서기도 도망치기도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자의 마음가짐이다. 물질만이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나를 있게 한 과거의 끈으로 튼튼한 미래를 창조하려는 창조적이며 포용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비록 봄날이 가버린 여생일지라도 베풂을 실천하면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고목에도 꽃은 필 수 있다는 걸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는 표현에서그가 추구하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가 드러난다. 그는, 카메라 렌즈에 삶의 현장을 담고, 이를 바탕으로 베풂과 긍정의 미학을 실천하며, 행복의 나무를 키우고 있다. 그는 정녕 본받아야 할 이 시대의 지성이요, 정말 사상근육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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