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일기 6일째: 내가 살아야 할 이유
2013.06.03. 월요일. 더위가 한풀 꺾인 날
아들아, 들어보렴. 네 비록 이립의 우듬지에 다다라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라 하나, 두 딸의 애비요 한 여자의 지아비라 하나, 나에게는 그냥 아들일 뿐이다.
80대 아버지가 이순을 넘긴 아들에게 '물가에 가면 조심하라' 고 한 옛말도 있다. 지금은 '길 건널 때 조심하라'하겠지만. 오늘 아침일이 그렇다. 20회의 방사선치료는 너 혼자 다녔지만 오늘부터 3일간 항암과 방사선 한다기에 내가 운전해 주겠다고 하니 너 혼자 갔다 오겠다고 고집 부렸지.
환자인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 아니면 가장으로서 체통과 자존감 때문이었겠지. 굳이 묻지 않겠다. 나라도 그랬을 터니까. 항암주사는 보호자가 곁에 있는 게 당연하지 않니. 지금 너의 상태는 또 어떻고. 어기적 어기적 걷고 있는 너를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아직 나는 겉이 멀쩡하잖니.
다른 누군가 본다면 넘치는 부정과 지극한 효심이 대결하는 아름다운 실랑이로 여기겠지만 나에겐 부정을 넘어선 절박함이 있었다.
네 나이 20대 한창 팔팔하던 그 시절 결핵으로 세면기에 검붉은 피를 토하고서 몰래 수건으로 닦아 발병을 감춘 일 기억하니. 휴학 복학을 몇 번이나 했는지 입학동기가 군대 갔다 오고 졸업할 때도 병실에 갇혀 울울하게 지냈던 일도. 내가 하는 사업이 접네 마네 할 그 시절, 암보다 무섭다는 다제내성결핵으로 진행되어 강남세브란스병원 안철민교수께 살려 달라고 매달린 적도 있었지.
키우는 강아지도 아픈 놈에 정이 가고 화초도 시든 놈을 한 번 더 보는 것이 인간상정 아닐까. 10년이나 투병하던 네 허파꽈리 한 쪽에 훈장처럼 붙은 희멀건 흔적. 이번에도 결핵성이 아닐까 마음 조렸잖아.
다행히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내가 주장을 꺾지 않은 절실한 이유는 이 뿐이 아니다. 나와 네 어머니의 가슴에 묻은 나영이 때문이다. 너와 두 살터울이니 살았으면 한 가정을 꾸려 외손주를 데려 올 나이가 되었겠구나.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 말고 토하길래 먹기 싫어 투정하는 줄 알고 버릇 고친다며 몇 대 때리고 굶겼었지. 자는 모습을 관심있게 살폈던들, 약국문을 두드리지 말고 빨리 병원 응급실로 갔던 들, 지난 일은 빨리 잊으라고 하지만 네 어머니와 나는 나영이의 신발을 아직도 신발장에 숨겨두고 있다. 버리지도 못하고 꺼내보지도 못하는 앙증맞은 신발. 무슨 운명인지 그 애가 가던 날이 결혼기념일이라니. 사우디로 발령이 난 나는 바로 떠나야 할 몸이었고.
내 어머니, 곧 너의 할머니께서 올라 오셔서 내 등을 치시며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촌에 살면서도 너희 육남매 다 키웠는데. 아이 셋이 뭐 그리 많다고. 이게 웬일이고."
가슴을 후비는 슬픔은 아이가 아니라 차라리 어머니의 연약한 주먹이었지 싶다.
"더 쎄게 치세요.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둘이는 잘 키울께요."
그 날 어머니께 잘 키운다는 약속을 했다. 네가 살아내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지하의 어머니를 뵐 면목이 선다. 너는 날 위해서 살아줘야 하고 나는 너를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오직 그것뿐. 이제 우리 가족사에 10년 주기로 어른거린 어두운 그림자를 거둘 때다.
질곡의 삶, 고민 걱정에 대한 울음은 태어날 때 이미 울었다. 아들아, 결연히 일어선 스칼렛의 어깨를 보았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고 내뱉는 그녀의 눈동자도. 아들아. 우리 서로 힘내자.
첫댓글 마지막 구절은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구절 아닌가요?
호미같이 둔탁 하지만 아픈 아버지가 아픈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낫 같은 모정 못지 않지요!
맞습니다. 비비언리가 분한 스칼렛 오하라의 명대사지요. 레트버틀러가 곁을 떠나자 결연한 의지를 보인 거지요.
우리 가족을 옭아 맨 비운의 포박줄을 풀기위해서는 서로를 격려하는 말밖에 다른 방책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