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58)-촌놈 파리로 날라가다
김해공항에서 사복차림으로 바로 회사로 직행했다. 사복차림으로 회사에 출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늘 쇳물 색채의 누런 작업복과 안전화를 신었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3기 종합준공을 앞두고 #2분괴공장(Slab mill plant) 용 주 압연기 모터 DC 4000 KW직류모터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스테이터(Stator, 고정자)와 로터(Rotor,회전자)를 분리해서 운송했는데 로터를 포철부두에서 하역 중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스테이터와 로터는 분괴공장에서 조립하여 한 개의 직류전동기로 역할을 다 하는 것인데 파손된 로터(Rotor, 회전자)는 전기수리공장에서 편안한 낮잠을 자듯 누워있었다.
현물을 보는 순간 우선 크기에 놀라 압도되었다. 축길이를 제외하고 코아(Core, 철심)길이 만해도 내 키 보다 컸고 둘레도 서너 아름이 넘을 것 같았다. 이렇게 큰 모터는 처음 보았던 것 같다. 일본에서 제철소를 돌아다녔지만 그들은 전기실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공급처는 프랑스의 세심(Sesim)이나 메이카는 쥬몽슈나이더(Jewmon Shneider) 제품으로 세심(Sesim)의 서브콘(Sub-contractor)이었다.
놀란가슴을 억누르고 파손된 부분은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코어(철심)밖으로 노출된 권선의 한부분이 찌그러져서 몇 개의 코일이 변형되어 스테이터와 조립도 문제지만 휘어진 코일들의 절연손상도 걱정스러웠다.
그 동안 국제검정단과 주 공급처인 세심에서 파견된 서브콘인 쥬몽슈나이더의 엔지니어는 사용불가로 판정을 내리고 신규제작을 할 것인가 수리를 할 것인가 포철이 결정해달라고 압박을 했다.
수리를 할 경우 로터를 다시 프랑스로 이송해서 수리해야 되므로 운송기간이 소요되고 신규 제작시는 작업량이 많아 어느 경우나 납기가 6개월 이상 소요된다고 했다. 이 경우 3기준공일인 12월까지는 불가능했고 더군다나 유럽이 지금 하기휴가 중으로 공장이 가동되고 있지 않아 휴가가 끝나는 8월말에야 작업이 시작된다면 더 늦어질 것이라고 들 했다.
결과적으로 포철의 3기 준공은 전체가 늦어지게 되는 것이다. 제선-제강-분괴-압연의 철강공정 중 분괴공정이 따라오지 못해 #3고로와 #2제강에서 생산된 용강을 슬라브로 제조할 수 없어 #2열연공장마저도 가동할 수 없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열연공장은 슬라브를 수입해서 가동하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슬라브보다 코일을 만들어 팔아서 슬라브를 파는 공장들은 거의 없었다. 건설에서 공기단축만 한 원가절감도 없는데 준공이 연장되면 공기가 늘어나 건설단가도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날 형편이었다.
포철에서 전문가가 왔다고 해서인지 국제검정회사 검사원과 세심 및 쥬몽 슈나이더의 엔지니어들이 모여들어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로 웅성거렸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후진국이어서 너희가 무얼 어떻게 해보겠냐는 듯 멸시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예상외로 밖으로 돌출된 부분이 찌그러지긴 했으나 절연물은 손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아 잘하면 될 것 같은데 용량이 작은 것 같으면 전 직장에서 하던 대로 철심밖으로 돌출된 권선을 고무망치로 살살 두들겨서 바로잡아 보겠는데 당시 국내에서 제작되는 용량이 200HP(마력, 0.75KW) 내외인데 비해 분괴 주전동기용 모터(Motor)는 4000Kw로 워낙 대형이라 기계력을 가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경우 코일의 절연파괴 또는 약화는 불을 보는듯 뻔했다. 하지만 한번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냥 포기하기에도 3기종합준공이 주는 압박이 너무 컸다.
우선 그들의 의견을 좀 듣고 싶어서 통역을 불러서 ‘메이카의 엔지니어로서 코일의 절연이 손상되었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답은 절연파괴 여부를 떠나 로터와 스테이터의 조립이 불가능해서 무조건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들도 제작과정에서 권선코일을 고무망치로 두들기거나 기계력을 가해 포밍(Forming)해서 조립하지 않느냐? 절연손상이 되지 않았으면 변형된 권선을 원형대로 한번 복구시도를 해 볼만하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완전 무시하는 눈치로 나보고 모터에 대해 어느정도 아느냐고 되물어왔다.
하는 수 없이 ‘전직이 전력기기 메이카의 설계 과장이었고 일본 도시바에서 설계와 제작을 해봤다’고 트레이닝 받았던 것을 함께 설계하고 제작했던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실제 현장에서 제작할 때 철심 밖으로 돌출된 코일은 소형은 고무망치로, 대형은 코일제작시 아예 권선설계에 따른 틀을 만들거나 코일을 만들어서 틀에 끼어 코일 형태를 잡아서 조립하는데 ‘절연손상이 없으면 기계력을 가해 코일을 정리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다시 설명하며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불어로 협의하더니 ‘코일의 절연파손 여부는 직접 제작하지 않아 모르지만 어떤 경우 던 한국에서 손을 댄다면 보증을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대답하는 걸 보니 수퍼바이저(Super Visor)로 왔을 뿐이지 제작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다시 그들에게 ‘직접 설계나 제작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들은 ‘직접 설계나 제작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키펀치통신으로 공장 전문 엔지니어와 협의한 결과는 사용 불가이고 한국에서 설사 보수가 가능하다고 해도 개런티를 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내 경험으로는 육안으로 보아서는 절연파괴가 없으니 코일마다 절연상태를 체크해서 그 결과에 따라 사진을 프랑스에 보내어 담당 엔지니어와 직접 수리방안을 협의하고 싶었지만 당시는 요즈음처럼 팩스도 스마트 폰도 없던 시대라 사진을 보내는데도 한주일 이상이 소요되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국내 전문업체와 협의하고 그 결과에 따라 협의하자고 서플라이에게 말했다. 그들은 국내 전문업체라는 말을 듣고 바로 ‘한국에 그런 전문 메이카가 있느냐?’고 되물어서 ‘국내에 전 도시바 한국공장(이천전기)’이 있다고 말했다. Really. Really (정말, 정말)하면서도 도시바라는 말에 놀라면서도 한풀 기가 죽은 듯 자기들끼리 마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당시로는 도시바는 전 세계적인 메이커이지 만 쥬몽 슈나이더는 유럽에서 지멘스(Simens)에 뒤쳐지는 프랑스의 한 전기 메이커에 불구한 수준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국내전문업체와 협의 후 다음날 결론을 내기로 하고 본부장실로 돌아왔다.
그럴 때 마다 내가 전직장에서 모시고 있던 선배분들에게 자문을 받으려고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걸렸다. 변형된 코일의 수정과 절연 보강은 실물을 보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워낙 대형이어서 그 무게를 핸들링 할 장비나 공장 크레인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 제작하는 것은 200HP(마력)이 수준이었는데 그의 20배이상 큰 용량의 중량을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포철은 핸들링 장비가 있으니 포밍 마신(Forming machine)을 갖고 전문 엔지니어가 포철에 와서 출장수리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의를 했다.
국내 메이커로서는 대형전동기를 접촉할 기회가 되어 한번 시도해 보고 싶지만 결과에 대한 보증은 역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회사는 지프라기라도 잡아야 할 심정이라 일단 엔지니어를 내려오라고 하고 본부장과 사장실로 바로 직행했다.
사장님은 문에 들어서자 말자 ‘어, 왔어, 그래 어때’하며 궁금해하셨다. 본부장께서 ‘안부장 견해로는 크게 파손된 것이 아니어서 국내 전문 메이커가 내일 내려와서 외형만 수정해서 시험을 해 볼만하다고 합니다’ 라고 보고를 드렸다. 사장님은 ‘그래?’ 하시며 안도의 한숨을 쉬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막 돌아서는데 비서실에서 서류 한 장을 들고 와서 사장님께 보여드렸다. 사장님은 다시 우리를 불러 세우며 서류를 보여 주었다.
‘국제 검정회사도 프랑스에서 파견된 엔지니어도 국내에서 수리하는 건 포철의 옵션이지만 어떤 경우이던 보증을 할 수 없다’는 서류였다.
본부장실로 되 돌아와 마주 앉으며 본부장도 ‘안 부장, 그게 국내에서 가능하겠어?’ 하며 걱정을 했다. 자신은 없지만 3기 준공을 생각하면 쉽게 포기 할 수도 없는 게 회사의 현실이었다.
그 다음 날 새벽같이 전문 엔지니어가 내려와서 함께 체크를 했다. 예상대로 절연 파손은 없으나 철심에 삽입된 체 변형된 부분에 외력을 가해 수정할 경우 절연이 파괴될 수도 있고 또 코일을 바로잡으려면 사전 코일 형태로 틀을 사전 제작해야 되는데 설계도면이 없었다. 코일 하나를 샘플로 발췌해서 자기 공장으로 갖고 가서 틀을 제작 후에 코일을 제작해서 해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휘어진 부분을 수정하는 것은 꼭 해보라면 하지만 보증은 못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국내에서 수리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을 갖고 다시 본부장과 함께 사장님께 보고 드렸다. 사장님은 서울에 계시는 회장님께 유선으로 보고를 드리고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서 보고하라고 하셨다.
로터를 다시 보내어 수리해오는 것이 가장 바람 직 하지만 코일을 제작해 와서 주몽 슈나이더의 기술진이 포항에서 조립할 경우 운송기간을 줄일 수 있어 중량물인 로터를 운송하지 않고도 가능 할 것 같아 회장님과 서플라이에게 이 방안을 제시했다. 서플라이어는 본국과 협의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날 밤 내내 어떻게 하면 될까 궁리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거기에 일본 출장여독이 아직 그대로 남아 몸은 천근이었지만 전기정비 수장으로써 전회사의 시선이 한 몸에 꽂히는 것 같아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 늦게 본부장께서 회장님께 전화를 드리라고 연락을 받았다. 회장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회장님은 서플라이어의 답도 오기 전에 무조건 출장 갈 준비를 해서 서울로 상경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다음날 비서실에 일정이나 행선지를 알려고 전화를 드렸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출장기간이 어느정도 되는지도 모르고 서울로 향했다. 회장님실로 들어서자
‘안부장, 3기 종합준공은 늦출 수가 없다, 자네 말 대로 코일을 제작해서 포항에서조립하자’. 하시면서 ‘지금 유럽은 하기 휴가로 공장이 샸다운(Shut down)되어 있으니 무슨 재주를 부리던 집집마다 방문해서 휴가를 떠나지 않은 자들을 불러내어 작업을 시켜야 한다. 서양부인들은 연수정을 좋아하니 그걸 부인들에게 선물을 주면서 남편들을 설득해서 8월말일까지 작업자들을 데리고 와서 포항에서 조립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뒷바라지는 비서실과 독일 뒤셀돌프(Dusseldorf) 사무소에서 지원할 것이라 했다.
당시는 단일여권이라 하루종일 비서실의 도움을 받아 방문국에 프랑스를 추가하고 프랑스 대사관에서 비자를 얻었다.
그날 저녁 비서실에서 여권과 연수정을 준비해 주며 이미 프랑스에 도착시간을 알렸고 픽업(Pick up)을 하도록 연락이 되어있다며 담당자 성명을 얼려주었다. 집사람에게 아마 유럽출장이 3개월 가량 걸릴 거라는 전화만 하고 김포공항을 떠나 다시 일본 하네다(羽田)공항에서 프랑스에 관한 포켓북을 두서너권 사서 에어프랑스에 옮겨 타고 촌놈이 첫 유럽행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