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에 갇힘이 강청기도다>의 줄거리:
본문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강청'은 요청을 받는 사람이 오히려 다급함을 느끼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제일 잘 아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다급하게 느끼시도록 하는 강청기도를 코치하고 계십니다. 하늘 아버지를 몰아세우듯이 그렇게 다급하게 느끼시게 함으로써 기도한 것을 얻어서 누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갇힘이 강청기도다
(누가복음 11:5~8)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에 갇힘이 강청기도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에 갇힘이 강청기도다’
본문 8절을 보면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간청(懇請)함의 표현이 개역개정 성경에는 강청(强請)함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을 따라서 강청기도라고 해보았습니다. 흔히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를 강청기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강청기도는 바로 십자가에 갇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삶에서 다급하게 해결해야 될 문제가 생기거나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소원이 생기면, 일정한 기일을 정하여 기도를 하거나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하거나 혹은 부흥집회 때에 큰 목소리로 주여 삼창을 하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것을 강청기도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기독교적 문화와 상식 안에서 강청기도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복음적 의미에서 강청기도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강청기도에 대한 본문을 두고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존에 생각하던 삶의 문제해결이나 세상적인 소원성취를 위해 강청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종교인으로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절대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도는 아닙니다. 강청기도는 힘을 줘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힘을 빼야만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종교는 마귀에게 속아서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입니다. 주여! 주여! 외치며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마귀에게 속아서 하는 기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주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본문 2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주기도의 의미를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 외에 다른 기도를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주기도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복음적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주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강청하는 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주기도를 드릴 때 강청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는 궁극적으로 두 가지의 충만한 채움을 목표로 합니다. 한 가지는 내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충만히 채우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나의 삶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주권과 뜻으로 충만히 채우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채움을 위해 주기도를 드릴 때는 반드시 강청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주기도의 의미를 살펴볼 때 3절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단어만 추가해보면 됩니다. 2절을 보면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3절에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셨는데 이 간구 또한 독립적인 내용이 아닌 2절의 기도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일을 위하여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해석한다면 본문은 오해 없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둔다면 3절의 기도는 단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2절은 하나님을 위한 공적인 간구이고 3절은 나를 위한 사적인 간구라는 오해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주기도는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내용일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과 나라가 임하시는 일을 위해서만 세상에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3절의 간구를 쉽게 말하면 “하나님! 제가 밥을 먹고 하는 일은 오직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내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뜻으로 채워지게 해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밥 먹고 이 세상에서 해야 될 일은 바로 기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과 연관시키자면 강청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강청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미 암시하신 바 있습니다. 주기도나 강청기도에 대한 말씀은 모두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를 위한 여정에서 이루어진 말씀이었습니다. 별세(別世)로 번역된 원문은 엑소도스(ἔξοδος) 즉 탈출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탈출하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주기도와 강청기도의 바탕에 존재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신 사건이 산상수훈의 일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누가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과의 연결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시기 위한 여정 속에 주기도와 강청기도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주기도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생 밥 먹고 살면서 해야 할 기도도 주기도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고 삶을 하나님의 주권과 뜻으로 채우는 강청기도를 드리기 위해 별세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별세하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면 유일한 기도인 주기도를 드릴 수 없고 강청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너희가 마음 채움을 위해 아버지를 구하고, 삶의 채움을 위해 아버지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는 바 아버지께서는 강청하는 마음가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를 바라신다. 너희가 아버지가 응답하시는 강청기도를 원한다면 나를 따라서 예루살렘 별세의 자리로 함께 가야 한다. 나와 함께 세상을 탈출해서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드리는 기도만이 강청기도가 될 수 있다.”는 의도에서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주기도는 부활의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기도를 따라 이루어지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도 부활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바로 부활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만이 강청하는 기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강청하는 기도를 아주 좋아하십니다. 이 강청하는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나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고, 나의 삶은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의 주권과 뜻에서 비롯된 지혜와 능력으로 이끌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강청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강청함이란 헬라어 아나이데이안(ἀναίδειαν)으로써 “부끄러움이 없다,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잘못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탁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체면, 위신, 자존심, 예의가 전혀 없는 모습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도 않고 때나 장소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주저함이나 지체함이 없이 오직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시간은 깊은 밤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식구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가옥 구조는 큰 방 하나에 온 가족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자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찾아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립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동네 친구입니다. 자기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떡 세 덩이만 꾸어달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집주인으로서는 상당히 불편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치니 자던 가족들도 다 깨는 것은 물론이고 고요한 동네에 소리가 다 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집 주인의 마음에는 단지 귀찮거나 불편함을 떠나서 빨리 대응해야 한다는 다급함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 비유의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8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라서 의리나 긍휼의 마음으로 떡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문을 두드리고 외치는 소란 때문에 조바심이 생겨서 문을 열고 요구를 들어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드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드려지는 강청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강청을 하는 이유는 내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영생을 얻고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요동치 않는 절대기쁨과 절대만족과 절대감사가 생겨납니다. 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삶이 디자인되고 성취되기를 원하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임하기를 바라는 강청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청기도의 두 가지 측면은 모두 부활의 자리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드리는 강청기도가 아버지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부활의 자리가 십자가에 갇혀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자리에 머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나서 세상을 탈출한 상태입니다.
주기도의 첫 번째 의미가 아버지로 마음을 채우고자 함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에 십자가에 갇혀서 세상과 격리된 부활의 자리에서 하는 주기도가 어떻게 강청기도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마음에 모셔 들이고자 하는 이유는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발생하는 흡입력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흡입력으로 세상을 향해 발동하고자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건강이라는 실제 상태를 얻고 유지하고자 애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사는 중에 돈 문제가 발생하면 일시적으로라도 마음은 돈이라는 이름도 붙잡게 됩니다. 마음의 흡입력이 양분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자녀가 수능시험을 보게 되어서 시험을 잘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흡입력이 세 갈래로 분산되었습니다. 분산되는 만큼 흡입력은 약해집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님이 들어오실 때 채워질 수 있기에 하나님 외의 어떤 대상을 담는다고 하여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이름을 담았을 때도 흡입력은 하나님의 크기만큼 존재합니다. 다만 일시적으로나마 흡입력이 여러 대상으로 분산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빠져나간 상태에서는 더는 세상에서 붙잡을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건강도 세상에 남아있고, 재정문제도 세상에 남아있고, 수능시험을 보는 자녀도 세상에 남아있고, 사고 싶었던 외제차도 세상에 남아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빠져나왔으니 세상에 있는 대상들에 흡입력이 분산될 항목이 없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 집중된 흡입력이 이제 어디를 향하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오고 십자가에 갇히게 되는 부활의 지점을 간과하고 무시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빠져나온 마음에서 생겨난 흡입력은 집중되어 있는데 세상으로는 갈 수가 없으니 예수님의 승천하신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집중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흡입력 전체로 하나님을 모시고자 마음이 하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밤에 찾아온 친구를 대하는 집주인처럼 다급하게 대응하시게 됩니다. 친구는 집주인에게 떡을 구하며 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집안에서는 식구들이 어서 나가보라고 성화입니다. 우리로 인해 이와 같은 다급함이 하나님께도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갇힌 마음의 흡입력이 어디로도 분산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뻗어 나갈 때 이러한 일은 일어납니다.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을 얻기 위한 힌트를 주시는 예수님의 귓속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것은 가장 좋은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 강청기도를 드리도록 해라. 강청기도를 드리기 위해 나를 따라와서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탈출하라. 그리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라. 부활의 자리에서는 마음이 십자가에 갇혀 있기 때문에 분산되지 않고 나의 승천의 길을 따라 아버지께로 향하게 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로 인해 다급해진 집주인과 같은 다급함을 가지시고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을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두 번째 측면에서도 강청하는 기도는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으므로 세상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그럼에도 몸이 있기 때문에 관계는 만들어지게 됩니다. 사람과 상황에 대한 관계, 사건에 대한 관계, 사물에 대한 관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몸은 살아야 하는데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어서 꼼짝 못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독자 이삭을 제단 위에 놓고 칼로 잡아서 번제로 바치고자 합니다. 10~12절을 보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다급함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고자 한 것은 마음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이는 곧 십자가에서 우리의 마음을 죽이는 것과도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녀에 대해서조차 죽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녀에 대해 죽고, 몸에 대해 죽고, 재정문제 등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합니다. 나의 마음은 십자가에 갇혀서 꼼짝을 못 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몸은 여전히 살아있기에 몸으로 관계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누군가는 관여를 해야만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급함을 가지고 돌보시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부르시며 천사를 보내셨듯이 이러한 다급함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나의 삶에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직 마음이 십자가에 갇혀 있는 부활의 자리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자꾸만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동안에는 아버지 마음에는 다급함이 아닌 괘씸함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주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주권에 반항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자녀로 채우고 건강으로 채우고 돈으로 채우고 형통과 출세 등으로 채우겠다는 고백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도둑질하여 자기의 뜻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이러한 괘씸한 짓을 반복하는 것을 강청기도라 오해해왔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괘씸하게 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밀고 나갔던 것입니다. 돈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만족할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괘씸한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태도를 강청기도라 장려했고 시도해왔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괘씸함이 들지 않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아버지의 주권을 도둑질하기를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마음의 공백을 오직 아버지를 향하게 함으로써 다급함을 만들어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강청기도입니다. 아버지를 다급하게 해드리고 기도가 응답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빠져나온 부활의 자리입니다. 이 부활의 자리야말로 기도의 응답을 받는 기도원이자 기도처가 됩니다.
십자가에 갇혀 있는 부활의 자리에서 드려지는 강청기도를 통하여 마음에도 삶에도 기도응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시는 밥 먹고 물 마시며 오직 기도만 하다가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이 기도가 마음에는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기도가 되게 하시고, 삶에는 아버지의 주권을 모시기 위한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강청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갇혀 부활의 자리에서 기도함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다급하게 해드리며 응답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