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물론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를 쓰는 모든 사람에게 시인이란 칭호를 주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는 시단이라는 문인 사회가 있어서 등단의 자격을 몇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언론사가 공모하는 신춘문예나 문예지가 주관하는 신인상의 관문을 통과하거나
개인 시집을 출간한 경력을 지닌 사람으로 제한한다.
그러니 비록 혼자서 수백 편의 시를 썼더라도 아직 사회적인 공인을 못 받았다면
시단에서는 시인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인의 등용문을 통과하고 여러 권의 개인 시집을 갖고 있는
경력을 지녔다면 다 시인다운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시인도 시인나름 천차만별 다양하다.
시를 잘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문단활동을 잘 하는 시인도 있고
인품이 훌륭한 시인이 있는가 하면 자유로운 영혼 선비의 성품의 시인도 없지 않다.
시인은 물론 시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호칭이다.
그러나 나는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시 쓰는 일을 삶의 1차적 가치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한정하고 싶다.
시를 쓰는 사람을 소설가나 수필가처럼 詩家라고 칭하지 않고 詩人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까닭은 시인을 시를 만들어내는 전문가로 보기에 앞서 생래적인
어떤 특별한 기질을 지닌 사람으로 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시인이 지닌 그 특이한 기질은 어떤 것일까 한번 따져 볼 일이다.
시인은 자유인이며 건달이다
시인은 속박을 싫어하는 자유인이다.
게다가 대개는 생활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빈둥대며 지내는 閑良이라고나 할까?
물정에 어둡고 이해타산에 별로 밝지 못하다.
말하자면 乾達에 가깝다.
사전에선 건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짓 또는 그런 사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허풍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사람.
그러니 건달은 긍정적으로 말하면 속박을 싫어하는 자유인이라 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말하면 일하기 싫어하는 가난한 게으름뱅이다.
생활의 무능력자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바로 이런 건달의 기질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시를 쓰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활동적이며 手腕이 좋은 사람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시보다는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시를 1차적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여길 공산이 크므로 이런 사람을 시인다운
시인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우리 역사상 이런 건달의 기질을 지닌 대표적인 시인이 바로 김삿갓이라고 할 수 있다.
공초나 천상병 등도 이런 기질의 소유자들일지 모른다.
시인은 다정다감한 눈물 많은 사람이다
시인은 감정이 풍부하고 연민의 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소한 일에도 감동을 잘하고 딱한 처지를 보면 동정에 인색하지 않다.
이지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그러니 눈물도 많고 흥분도 잘 한다.
한용운 만해나 육사 같은 지사적 풍모를 지닌 시인도 없진 않지만 대개는
김소월이나 상화 같은 센티멘탈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이해타산에 지나치게 밝고 냉철한 사람은 비록 괜찮은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손치더라도 시인다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동정심이 많고 귀가 얇아 남의 말에 잘 넘어간다.
달을 보고도 꽃을 보고도 쉽게 감격을 한다.
한잔 술에도 쉽게 눈물을 흘리는 박봉우 박용래 같은 시인들이
그런 기질을 지닌 대표적인 분들이다.
시인은 선지자적 초월 의식을 지녔다.
시인은 스스로 보통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신적 수준이 높다고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사물 속에서 범인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능력을 지닌 우월한 존재라고 믿는 것도 같다.
현상 저 너머의 어떤 본질의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見者 랭보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시는 샤먼의 呪文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최초의 시인은 샤먼 곧 巫覡이라고 할 수 있다.
샤먼은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단한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샤먼의 권능의식이 오늘의 시인들에게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시인들이 지니고 있는 초월의식의 근거일지 모른다.
시인은 비판적이며 선도적인 기질을 지녔다.
시인은 자신은 비록 나약하지만 세상의 불의를 못 보는 정의감에 불탄 사람들이다.
그래서 못마땅한 세태를 대하면 풍자적인 작품을 통해 비판하고 규탄하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민중을 계도하고 가르치고자 한다.
앞에서 얘기한 초월의식이나 선민의식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선동적이거나 저항적인 작품들이 여기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시인이 김수영 김지하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말재주꾼 예능인이다.
시는 언어예술이므로 시인은 당연히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화가가 그리고 싶은 대상을 선과 색채로 잘 형상화할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황을 언어로 잘 구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잘 하는 언재도 타고난 것처럼 글을 잘 구사하는 문재도 타고날지 모른다.
그러나 언어구사의 능력은 수련에 의해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시를 위시해서 어느 장르의 문학이든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로 갖춰야 할 것이 문장력이다.
언어구사력은 작가가 갖춰여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言術師 언어를 잘 다루는 기술자여야 한다.
이상적인 시인은 선비다.
시인이 지닌 기질을 앞에 열거했는데 이를 요약하면 시인은 감정이 풍부한 건달이며
혜안을 지닌 비판적인 말재주꾼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앞에 지적한 다섯 가지의 기질을 모든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다 구유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그동안 많은 시인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질을 몇 가지 선별해서 제시했을 뿐이다.
실제로는 시인 개인에 따라 어떤 특질은 강하게 혹은 어떤 특질은 약하게 지닐 수도 있다.
건달이 아닌 시인도 있고 이지적인 시인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좋은 시인이란 어떠한 시인인가?
어떠한 기질을 강하게 지녔던 간에 우선 훌륭한 인품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상적인 좋은 시인을 맑은 정신세계를 구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고 싶다.
그러면 맑은 정신세계를 지닌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아름다움을 기리는 사람
변함이 없는 사람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
세속적인 욕망을 멀리하는 사람
시인은 진 선 미에 가치를 부여하고 변함없는 지조와 無慾淸淨을 지향하는 정신이다.
이는 곧 우리의 전통 속의 선비정신에 상통한 것으로 나는 본다.
시인의 바탕은 선비여야 한다.
선비정신이 바탕이 되어 시를 쓰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다.
따라서 시인은 우선 선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詩 2010년 1월호 에서-
첫댓글 한국 시단의 시의 전성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시인의 수효가 5만 명을 헤아리는 데에 이르렀고 수많은 시집과 詩誌
시동인지 들이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시인다운 시인이 얼마나 되고 시다운 시들이 얼마나 생산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나는 요즈음 별로 시를 읽지 않는다.
게을러서라기보다는 시를 읽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이다.
아니 즐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시를 읽는 일이 오히려 싫증이 난다.
시가 설령 재미있다손 치더라도 거의 매일 우송되어 온 적지 않은 시집이나 잡지들을
섭렵한다는 것은 여간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재미없는 경우라면 그 작품들을 위해서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마음이 선뜻 생기겠는가
처음 몇 줄 읽어서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고 넘어간다.
난해하거나 답답한 것도 외면한다.
평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소수의 시인들 위주로 작품을 골라 읽게 마련이다.
오늘의 시라는 글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난삽하고 골치 아픈 글이 되었는가?
어떤 사람이 이상한 악기를 하나 만들어냈다고 가정하자.
새로운 그 악기는 물론 음악을 다채롭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악기가 모든 음악을 연주하는데 최상의 악기라고 잘못 판단하고
이를 고집하는 무리들이 횡행한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하나의 새로운 유형의 출현은 그 가치가 인정되지만
그것을 마치 시의 전범인 것처럼 여기고 이를 모방하는 것은
개인이나 문단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效顰이라는 말이 있다.
越나라의 미인 西施가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보고 한 醜女가 이를 부러워한 나머지
흉내 내다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고사인데 이와 다를 바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정련 된 언어 예술이어야 하며
정결한 시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를 하찮은 말장난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색다른 시를 만들어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감동적인 시를 낳아 긴 생명을 갖게 할 것인가 하는 데로
시단의 관심이 되돌아왔으면 싶다.
시는 음악이나 미술 무용과 같은 예술의 한 영역입니다.
하지만 시는 음악이나 미술 무용 등을 소재를 채택하여 형상화할 수 있습니다.
시와 미술 혹은 음악이나 무용의 상호 텍스트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언뜻 들으면 모순된 말 같지만 결코 모순된 표현이 아니다.
방황한다는 의미는 쓸데없이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찾아서 모색하는 것이며 어느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말하기 때문이다.
일생 동안 시 창작의 길을 걸어와 그쪽 분야에선 제법 달인의 경지에 섰을 법한
시인들도 한결같이 시는 쓰면 쓸수록 어렵다라고 말한다.
지나친 겸손 같기도 하고 엄살을 떠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말은 괴테의 그것과 같은 의미로서 시 쓰기 역시 죽을 때까지
부단한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시인은 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시인은 꾀꼬리처럼 어둠 속에서 그 고독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부르며
사람들을 위로 해준다라고 영국의 시인 셸리는 말했다.
우리는 셸리의 이 말 속에서 시인의 가슴이 어떠해야 하며
시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위로로써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지는 자리에 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랑을
모성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論語의 陽貨편에 보면 시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물으며
시의 기능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 可以興과 可以群이다.
조금 변형시켜 해석한다면 가이흥은 시가 삶을 활기 있게 만들어준다는 뜻일 터이며
가이군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불어 살게 한다는 뜻일 터로 시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아포리즘으로 여겨진다.
시는 죽음과 똑같이 모르는 사이 우리를 엄습한다
시와 죽음은 의미의 틈새의 침묵에 의해서 잉태되는 것
비로소 꽃이 피고 고기가 헤엄치고 짐승이 어슬렁대고 사람들은 진정된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과학과 물질만이 지나치게 발달한 반면 정신문화의 총체적 부재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어야 함에도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지고 벗어 던져야 할 육신의 살만 찌우고 고고한 인간정신은 사라지고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평가 잣대는 경제적 척도가 기준이 되고 인간관계는 투쟁의 연속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는 정신문화의 총체인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경원시하는 참담한 시대에 살고 있다.
문학 그 중에도 시 문학이 인간정신의 정수인데 이러한 시 문학이 홀대받는 이유는
시인들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원인이 더 크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시인의 시 쓰기와 기본이 갖추어 있지 않는 시인의 대량 양산이 지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