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말에 건국한 조선왕조는 창업에 따른 긴장 때문에 사회 전반에 걸쳐 일정한 개혁을 추진한 결과 다방면에 걸쳐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정치•사회상의 제도 개선으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하는 한편 신분제에 있어서도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전대보다는 나아지는 추세였다. 더욱이 경제적 측면에서는 사전 개혁 조치로 일부 계층에 토지가 집중되는 현상이 크게 완화되었다. 게다가 국가 사회 전반에 충격을 줄 만한 내외적인 큰 도전도 별로 없었기에 그런대로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지배층은 현실에 안주하면서 그들의 기득권을 확대 유지하려는 보수적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해를 같이하는 무리들이 결속을 강화하면서 집단별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왕조는 건국 후 약 2백년이 지나면서 지배층은 그들의 이해에 따라 분열과 충돌을 거듭했기 때문에 국가 사회의 이익보다는 자기 당파의 이익을 먼저 앞세웠다. 그래서 일부의 뜻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우려하여 그것을 조정하고자 했으나 성과가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었다. 195) 여기에 비하여 이웃나라 일본은 당시 1세기 가까이 지속되던 전국시대가 통일되기 시작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대두했던 것이다. 더욱이 오다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면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나갔다. 당시 히데요시는 통일 과정에서 축적된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기반을 탈취하려는 경쟁자들을 합리적으로 소모시킬 수 있는 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그는 대륙진출의 관문인 조선을 주목하고 그 동태를 살폈는데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당시 조선은 지배층이 분열하여 그의 야욕 실현을 촉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592년(선조 25) 4월 중순 일본은 약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196) 이렇게 사태가 진전되자 조선정부는 전시체제를 구축하고 관군의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명나라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국가가 위기에 빠지자 평소 충•효사상을 체득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은 앞장서서 의병을 모집하여 구국 전선에 나섰다. 특히 안동 지방은 평소 유학사상이 많이 보급된 지역이었으므로 다른 지역에 못지않게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역사상 임진왜란 때와 같이 전국적인 규모로 광범하게 의병활동이 전개된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의병은 전란 초기에 관군(官軍)이 무력하여 흩어지고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왜군을 민중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봉기한 군사집단이었다. 그것은 대체로 재지 사족(士族)들이 주창하여 그 지방 민중들이 호응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들 재지사족은 15세기 후반이래 향교와 유향소 등을 중심으로 향촌사회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향약의 실시와 향안의 작성을 통하여 각 지방을 지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 상호간에 혼인을 함으로써 지역 간의 유대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기반과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기반은 의병의 조직과 활동을 위한 물질적 토대가 되고 있었다. 당시 재지사족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수 백 내지 수 천 마지기의 전답과 수백 명에 이르는 노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토지 가운데 일부는 그 지방 농민들에 의하여 소작 형태로 경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평소 유학을 익히던 사족들로서는 국가가 왜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조국과 임금을 지키기 위하여 충성심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편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지배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고 있던 자신들의 노비와 소작인인 평민들을 비교적 쉽게 동원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들의 경제력은 왜란으로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농민들과 전란초기의 패배로 분산 유리되고 있던 관군의 일부까지도 흡수하여 군사조직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그들의 경제력에도 한계가 있어 군량미 확보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임진왜란을 당시 우리 측이 극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거론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봉기한 의병활동일 것이다. 의병이란 개념은 몇 가지 입장에서 정의를 내릴 수 있으나 그 중 비교적 평이하면서도 간결한 것은 당시 의정부 우참찬 성혼(成渾, 1535~1598)의 주장일 것이다. 그는 “의병은 국가의 관권(官權)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집한 것이고 관군(官軍)은 고을 수령(守令)의 조발에 의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원수(元帥)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197)라고 하여 정곡을 찌르고 있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병의 주창자도 그렇고 거기에 모여드는 병사들도 대부분 강요가 아니라 적들의 횡포에 적개심을 가지고 스스로 찾아온 사람들로 구성된 군사집단이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부지방은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고려 말이래 전래된 성리학을 재빨리 수용하여 충효사상이 널리 보급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왜적이 침입하여 이 일대를 유린하자 뜻있는 이 고장 재지사족들은 앞 다투어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들을 격퇴하게 되었으니 여기서는 그 실상을 자세히 고찰하기로 하겠다. 안동지방의 의병들이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크게 항쟁했던 곳은 지금 문경시 남쪽에 인접하고 있던 당교(唐橋)였다. 이곳은 당시 경상좌•우도가 분기하는 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이고 아울러 천혜의 전략 요새지인 조령(鳥嶺)이 가까운 지점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여기에 왜군의 일부가 남아 있으면서 원활한 군수품 보급과 전후방을 연결하는 임무 등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북부지방의 여러 고을에서는 당교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소탕하는 일이 지역의 안전을 위하여 매우 시급한 과제로 대두하였다. 그와 같은 왜군 격퇴 작전은 안동지방 의병들이 선두에 나서서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안동 의병들의 활동 양상을 『鄕兵日記』 198)를 통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 때 당교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은 장기전을 시도하면서 방어시설 구축에 주력하여 목책(木柵)등을 축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것에 의지하여 우리 측의 공격에 대응하는 동시에 그 인근 지방에 대한 침탈을 계속하게 되었다. 왜군이 당교에서 오래 버티고 있었던 것은 그 곳이 전략상 중요하기도 했겠지만 견고한 방어시설도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당교를 거점으로 그 부근 각지에 수시로 침탈을 자행하고 있었으니, 이를테면 임진년 이듬해 1월 4일에는 예천군 서당 마을을 노략질한 다음 이를 불태웠으며 그 해 3월 16일에도 예천고을의 유천(柳川)지방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199)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고 있으니 당시 경상도 북부지방의 중심 고을인 안동지역 의병들이 앞장서서 인근 고을 의병들과 같이 당교의 왜적들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곳이 안동에서 그렇게 멀지 않을 뿐 만 아니라 그들의 공격이 바로 이웃에 있는 예천 지방에도 위에서 보다시피 자주 감행되었기 때문이다. 안동지방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임진년 6월 1일 쯤으로 보인다. 이것은 경상도 남부 지방에 비하여 한 달 이상 늦은 편인데 그것은 아마도 당시 왜적이 남쪽에서 쳐들어 왔으므로 북부 경상도에 위치한 안동 지역은 시간적으로 다소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임란때 영남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은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었다. 그가 임진 5월4일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경상우도의 함양에 이르러 여러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격문을 발송한 이후 그것에 감동되어 각 지방에서 적극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곳 안동 예안에도 그의 초유문이 도착하자 그 애국적인 문장에 고무되어 당시 조목(趙穆, 1524~1606)은 6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 구성에 적극 후원하였다. 즉 그는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집하는 일을 예문관 검열로 벼슬에서 물러난 김해(金垓)로 하여금 주선하게 했는데, 그 결과 임진년 6월 1일에는 안동의 진사 배용길(裵龍吉) 등이 퇴계에 모여 각 마을별로 책임자를 두고 군대를 모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0일 뒤에는 여러 마을 대표들이 모여 김해를 안동 열읍(列邑) 향병(鄕兵) 대장(大將)으로 추대하는 한편 진사 이숙량(李叔樑)으로 하여금 인근 고을에 글을 지어 보내 의병에 많이 가담하게 하였다. 안동부의 모병 논의는 여강서원에서 이루어졌는데 향병 대장에는 생원 김윤명(金允明)으로 하고, 군량도감으로는 유복기(柳復起)를 뽑았다. 그러나 며칠 뒤 김윤명의 사양으로 향병대장은 이정백(李庭柏)으로 바뀌었으며, 의병들에 대한 검열은 안동 향교(鄕校)에서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안동을 비롯한 인근 고을 의병들도 어느 정도 군대의 모습을 갖추었으므로 연합 체제를 구축하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임진년 8월 20일에는 안동•예안•의성•의흥•군위 등의 고을 의병들이 안동 일직(一直)에서 모여 서로 연합하기로 다짐하고 군대의 이름을 안동 열읍향병이라 칭하는 동시에 김해를 다시 대장으로 삼고 본진(本陣)은 안동으로 하였다. 안동 의병의 구성형태는 총 지휘자로 대장이 있고, 그 아래로 좌부장과 우부장이 있으며, 그 아래의 지휘자로는 정제장(整齊將)을 비롯하여 조전장(助戰將)과 군량도총(軍糧都總)등이 있다. 그 가운데 정제장은 소속 고을별로 각기 독립하여 이를 설치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안동 정제장ㆍ의성 정제장ㆍ군위 정제장 등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의병 진영에서도 군량조달이 매우 중요했던지 군량도총 아래 전향유사(典餉有司)를 여러 명 두고 군량을 조달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연합된 안동 열읍의 의병들은 그 해 9월 2일 운산역(雲山驛)에 모여 합동행군을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정숙할 뿐만 아니라 대오를 이탈하는 자도 없어서 10여 리에 뻗쳤으나 일사불란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언양현감 김옥(金沃)은 안동 읍성의 남문 위에 올라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군대의 모습이 성대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안동 의병의 지도층은 군대의 기강확립에도 크게 노력하고 있었음을 다음 자료를 통하여 충분히 엿볼 수 있겠다.
“어느 군인이 벼를 베어 말에게 먹이자 그 사람을 곤장으로 다스렸다.…하급 병졸이 지휘자의 자리를 범하자 또한 곤장으로 때려 벌을 주었다.” 200)
는 것이다. 즉 의병이 민간인의 벼를 베어 말에게 먹이자 이것을 엄하게 처벌하는 한편 부하 병사가 상관의 자리를 범하자 이것도 위계질서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곤장을 쳐서 군기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군대가 진을 치고 주둔하고 있을 때는 군량미 확보가 제일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어 여기에 대한 배려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비교적 경제력이 있는 의병 지도부에서 자진 헌납하는 형태로 이것을 수집하고 있었으니 그 사례를 들자면 그 전에 현령을 지낸바 있던 권춘란(權春蘭)은 쌀 10말과 소 한 마리를 보내왔으며, 이전에 도사(都事)를 역임한 바 있던 안제(安霽)는 쌀 5말을 바쳤다. 그리고 그 전에 좌랑을 지냈던 이공(李珙)은 전투에 사용할 말 1필과 군량미 30말 및 황소 1마리를 기꺼이 바쳤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재지사족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의병을 조직하고 또 의병 진영에 필요한 군량을 비롯한 물질적 지원을 아낌없이 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진작하여 향토와 조국을 지키고자 하였다. 지금부터 이렇게 정비된 안동지방 의병들이 당시 당교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전하는 과정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안동지방 의병들은 당교로 출전하기 위하여 임진년(1592) 10월 22일 안동부의 서쪽에 위치한 풍산(豊山)에 집결하여 서진을 계속한 결과 그 다음날 예천군 진지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전열을 가다듬은 뒤 행군을 재촉하여 10월 25일에는 용궁 고을에 이르렀는데 이틀 뒤인 10월 27일에는 복병장수 이선충(李選忠)과 조전장수 박호인(朴好仁)이 함께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당교 가까이에 위치한 반암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11월 24일에는 복병장수 김사권(金嗣權)이 정예 군사들을 뽑아 이들을 거느리고 당교가 있는 함창으로 진격했는데 그 사이 반암에 머물던 기간이 상당한 것으로 보아 적의 동태를 자세히 살피면서 작전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더하여 그 해 12월 17일에는 의병 총지휘자인 대장과 우부장이 각 지역 지휘자들과 함께 왜군들을 공격할 작전계획을 위하여 서로 협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날 공교롭게도 충주에서 내려온 왜적 6백여 명이 당교에 주둔 중인 왜군들과 합류한다는 소문이 퍼져 우리의 의병 지도자들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당교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이 대규모로 다시 용궁 고을에 들어가 그 곳 뒷산에 진을 친 것은 같은 해 12월 23일이었는데 그 날 저녁 무렵엔 또 다시 군사를 이끌고 당교로 되돌아갔다. 그것은 아마도 왜적들이 그 때 경상도 북부 의병의 본거지인 안동 지방으로 다시 진출하고자 시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2월 26일에는 복병장 이선충(李選忠)이 선발한 정예군병 30명을 인솔하여 용궁으로 진격하였다. 201)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 안동지방 의병 진영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왜군보다 아주 열세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기는 곤란하므로 허점을 노려 기습 공격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임진년 12월 28일 안동지방 의병지휘대장 일행들은 용궁을 거쳐 왕태(王泰)마을 서쪽에 있는 산위에 올라가 멀리 진을 치고 있는 왜군들의 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 측의 대응방안을 협의하였다. 앞에서 이미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시기 당교(唐橋)는 왜군들이 전략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란 초기 수도 한양으로 진군했을 때도 일부의 병력은 여기에 잔류시켜 일정한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 뒤 명나라 군사의 내원과 조선 측의 대응 강화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도 병력의 일부를 당교에 남겨두고 임무를 수행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안동지방 의병들이 그 당시 당교와 그 부근 일대에 웅거하고 있던 왜적들과 어떻게 전투를 벌였는지 그 구체적 모습을 밝혀 보고자 한다. 우선 안동지방 의병들은 왜군의 일부가 당교 본진을 벗어나 인근에 있는 주요 지방을 침공하고자 할 때 그들보다 지리에 밝았으므로 왜군들이 경유할 지점에 미리 우리 측 의병 가운데 정예분자를 뽑아 복병장 책임아래 매복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매복된 의병들로 하여금 왜군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피해를 안겨 주었는데 매복된 병사가 부족할 때는 후원병까지 파견하여 이들을 돕게 하였다. 그 당시 복병장을 비롯한 의병 지도층은 대체로 말을 타고 지휘하였으므로 그만큼 기동력이 높았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의병 지휘자들은 때때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기를 맹세한 용감하고 대담한 병사들을 인솔하고 왜군 주둔지에 접근하여 정세를 살피면서 적당한 시기에 집중공격 하는 방법으로 큰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적들이 대규모로 이동하거나 분탕질할 경우는 정면충돌을 자제하고 우리 측 진지에 머물면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음을 다음 기록에서 볼 수 있겠다.
“우부장(右副將)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반암에 나갔을 때 왜적들이 강을 건너 분탕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서로 정면충돌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진중에 머물면서 변화를 기다렸다.” 202)
이 자료를 음미하여 보면 의병 대장 아래에 있는 지휘 대장인 우부장이 의병들을 인솔하고 당교 인근에 위치한 반암에 갔을 때 마침 왜군들이 강을 건너 대규모로 분탕질하고 있었으므로 정면충돌을 피하여 의병들이 진중에 그대로 머물면서 사태의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우리 의병측 진영은 군사적 면에서는 왜군보다 여러 가지로 열세에 놓였기 때문에 정면충돌해서는 불리하다고 판단되었으므로 이를 피했던 것이다. 그 대신 사태가 변하여 기습 공격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면 그 때는 나섰을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무모한 만용을 지양하고 열세의 병력으로 효과적인 전과를 올리자면 어쩔 수 없는 현명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안동열읍 의병들의 당교 지역 전투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격 형태는 한 밤중에 선발된 정예 병사들로 하여금 잠자고 있던 왜군들을 기습 공격하는 것인데 다음 기록을 보도록 하자
“이날 구름이 끼어 흐렸는데 한 밤중에 복병장 이선충 등으로 하여금 정예 군사들을 거느리고 왜군의 진중에 돌격하여 사살된 왜적의 숫자가 무수히 많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창과 칼 등의 무기도 많이 빼앗았으며 동시에 우리 측이 진천뢰를 발사하여 우뢰 같은 소리에 적진이 크게 놀랐다.” 203)
는 것이다. 즉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 한 밤중을 선택하여 정예 병사들로 기습 공격함으로써 그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무기까지 노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의 승리에 자신을 얻었는지 그 다음 날에도 당교 왜적에 대한 우리 측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날 안동열읍 의병대장은 우리 측 의병들이 매복하고 있던 곳에서 복병장 이선충 등으로 하여금 다시 정병을 이끌고 당교에 있는 왜군 진영의 목책을 파괴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때 적병 다수를 쏘아 죽이고 무기까지 많이 빼앗았다. 이번 전투에서도 진천뢰(震天雷)를 많이 발사했는데 밤이 어두워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 수 없었지만 적진에서는 비명소리 및 신음하는 소리와 함께 진천뢰가 터지는 우뢰 같은 굉음이 번갈아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당교 왜적들은 우리 측 공격에 보복하려는 뜻이었는지 이틀 뒤인 1월 4일에는 예천 고을 서당 마을을 다시 침공하여 행패를 자행하였다. 그러자 우리 측도 1월 6일에 안동과 예안지방 의병들이 연합하여 당교 근처에 이르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당교에 가서 그들을 공격하고 돌아왔다. 안동 의병들이 택한 또 다른 전투 양상은 당교 주둔 왜적들의 일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기회를 노렸는데 이 경우 그들이 통과할 지점의 산골 수풀 속에 의병들을 미리 매복하여 두었다가 그들이 통과할 때 갑자기 습격함으로써 당황하게 하여 살상시키는 방법이다. 그러한 사례를 다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의병 대장이 복병장 김사권(金嗣權)을 보내어 상주 송현(松峴)에 의병들을 매복시켜 당교 왜적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게 하다가 수풀 속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협격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혼란에 빠져 달아났는데 그런 와중에서 왜적 장수 1명을 우리 측 병사들이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적군들을 사살하였다.” 204)
는 것으로, 여기 보이는 상주 송현은 당교에서의 거리로 보아 상주 사벌에 소재하는 송현으로 추정된다. 위의 사실과 비슷한 또 다른 방법도 사용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교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일부가 강을 건너 다른 지방을 공격하고 돌아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습격하는 형태이다. 이때는 말할 필요도 없이 척후병으로 하여금 미리 왜군의 규모를 파악하게 한 다음 강변의 수풀 속에 매복할 병력 수를 결정하였는데, 주변에는 만약의 사태를 위하여 응원군도 대기시키고 있었다. 당교의 왜군 본진을 공격할 때는 대부분 야간에 화기(火器)를 사용하거나 창과 칼을 구사하여 그들을 살상하였다. 특히 안동 열읍 의병과 당교 왜적 사이의 전투에 있어서 우리 측에게 승리를 안겨준 대표적인 무기로는 진천뢰가 있었음을 다음 자료는 알려주고 있다.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진천뢰(震天雷)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일찍부터 의병 진영에서는 요새지에 의지하여 진천뢰로 큰 공을 세웠다고 듣고 있으나 이 화기를 갑자기 주조하여 가지기는 어려우니 관찰사와 병마사 그리고 여러 진관에 요청하여 조령을 넘어 온 왜적을 휩쓸어 버리도록 합시다.” 205)
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측 의병들이 진천뢰 소유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여하튼 경상도 북부지방 의병들의 애향심과 애국심으로 당교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에 대한 공격이 계속될 수 있었다. 그들은 병력과 무기면에서 왜군에 비하여 아주 열세에 놓여 있었으나 게릴라전과 지리에 밝은 이점으로 왜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안동 지방 의병들이 다른 지방 의병들과 두드러진 차이점은 관군(官軍)과의 관계가 대체로 원만하여 서로 협조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진영 사이의 대립적인 추세와는 서로 다른 현상으로 그와 같은 이유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것은 아마도 이 고장 출신으로 관군과 의병 사이의 조화와 협조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 김성일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206) 그리하여 경상도 북부지방 일원에서는 관군과 의병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서로 협조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쌍방이 서로 상대편 지휘자의 통솔에 따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양군 지휘자들이 서로 모여 군사상의 문제를 협의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의병 지도층에서는 효과적인 왜군과의 투쟁을 하자면 적어도 선발된 병사가 5~6백 명 정도는 기본 단위로 갖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자면 최소한 이 정도의 병력 규모는 유지되어야 관군과 제대로 협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곳에 모여 낮에는 왜적을 추격하면서 사로잡을 수 있으며 밤에는 그들 진영을 기습한 다음 분탕질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207) 당교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은 임진년 11월 중순까지는 주변지역에 대한 그들의 행패가 더욱 심하였으므로 경상좌도 순찰사는 의병과 관군의 지휘자들로 하여금 왜적이 자주 출몰하던 예천지방에 그대로 머물면서 왜적에 대응하게 하였다. 이런 조치와 더불어 인근 고을인 영주•봉화•예안•풍기 지방에서 선발한 정예 군사들을 안동에 모아서 군마와 함께 풍산으로 보내어 진을 치고 대응하게 함으로써 당교 왜적에 대비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와 더불어 경상도 병마사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안집사는 별도로 군마(軍馬)를 차출하여 감천 일대에 진을 치자 영주 고을 의병들도 이에 호응하여 진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주위에 우리 측 군대가 포진하게 되자 안동 열읍 의병 대장은 그 산하 각 고을 군사와 안동의 관군과 함께 서로 마주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 결진하여 당교의 왜군과 대응하게 되었다. 그러한 작전으로 상당한 성과를 얻어 안동 일대에는 왜군이 재차 침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당교에 주둔한 왜군들은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영남 북부지방 인접 고을 의병들 사이의 연합 작전에 의하여 격퇴되었다. 다른 고장에서는 대부분 각 고을 의병장 중심으로 단독 전투가 수행된 것과 비교한다면 하나의 두드러진 성격으로 파악될 수도 있겠다. 당교 일대가 차지하고 있는 군사적인 비중은 그 뒤에도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 졌으니, 그 단적인 사례는 19세기 말엽에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그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또 다시 조선을 침탈하면서 각 지방에 주둔하여 많은 피해를 안겨 주었다. 이 때 당교 인근인 함창 태봉에도 일단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자 김도화(金道和, 1825~1912)가 인솔하는 안동 지방의 의병들이 그 곳을 공격했던 것이다. 안동은 이와 같이 당시 영남 북부지방의 중추적 고을로서 부과된 군사적 임무를 잘 수행하여 당교 주둔 왜군을 격퇴함으로써 임란 극복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안동시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