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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구적 기근이 차단된 유일한 곳>의 줄거리 :
기근을 해결하고자 다시 애굽을 찾은 11명의 형제와 애굽의 총리 요셉이 만납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12지파의 근원이 되는 선조들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만나는 장소는 요셉의 집입니다. 이 집은 흉년으로 인한 지독한 기근의 쓰나미 같은 기운이 미치지 못하는 지구 위의 유일한 장소입니다. 이처럼 온 세상을 덮고 있는 기근의 기운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 선민이 모여 있는 상태를 우리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지구적 기근이 차단된 유일한 곳
(창세기 43:15~34)
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32.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33.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지구적 기근이 차단된 유일한 곳’이라는 제목은 전 지구적으로 기근이 임하여 지배하고 있는데 그 기근의 강력한 힘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유일한 곳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언뜻 보기에 직접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겨냥하고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에 담긴 메시지는 지독할 정도로 영성적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두 번째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와 다르게 이번에는 막내 베냐민까지 데리고 와서 열두 형제 모두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17살에 애굽에 노예로 팔릴 때 베냐민은 어린 아기였습니다. 요셉은 20년 만에 성인으로 훌쩍 커버린 베냐민을 보게 되었으니 무척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 광경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에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애굽을 중심으로 주변 모든 나라들이 어마어마한 흉년에 짓눌려 기근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애굽에서만 곡식을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찾아와 근근이 연명하던 상황입니다. 애굽에 있는 요셉은 온 천하가 기근에 쫓기는 상황에 열두 형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들이 요셉의 집에 둘러앉아서 살진 짐승을 잡으며 기근 속에서 풍요로운 잔치를 벌입니다. 이 광경이 참 놀랍습니다.
쓰나미 같은 강력한 기근은 온 천하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에서 이 기운이 완전히 차단된 곳이 바로 요셉의 집입니다. 요셉의 집에서만 곡식이 흘러나와서 온 세상을 덮고 있는 기근을 이기고 만백성이 생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궁정에 사는 바로의 식량조차도 요셉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을 통해 모든 곡식이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집 딱 한 곳을 곡식의 옹달샘으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온 천하를 쓰나미 같은 기근의 기운이 지배하는 중에 오직 요셉의 집에만 원천 봉쇄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성인이 된 열두 형제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열두 형제는 선민 이스라엘의 선조가 됩니다. 우리가 상상으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5년은 더 지속될 기근이 온 천하를 덮고 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총리인 요셉의 집에만 이 기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습니다. 기근을 이기고 생명을 보존할 곡식이 요셉의 집에서만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곳에서 선민 열두 명이 모임을 갖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인 열두 형제가 모두 성인이 된 뒤에 처음으로 요셉의 집에서 회동하는 장면은 교회의 원시적인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뒤에는 예루살렘에서 모형이 아닌 실제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보여주십니다. 교회의 원시적인 모형이라고 하지 않고 교회라고 해도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기점으로 하여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태동하고 시작되었던 교회를 언급한다면 교회의 원시적인 모형이라 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교회는 전 세계를 덮고 있는 기근의 기운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 이루어지는 선민의 모임입니다.
사실 요셉 당시의 흉년과 기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모든 세대를 관통하여 지속되는 이 세상의 실제 상황을 계시해 주는 사건입니다. 지구 위에 사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흉년과 기근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다만 이 기근이라는 현상은 마음의 굶주림을 의미합니다. 육체에 음식을 채워야 하는 위가 있듯이, 영인 마음에도 채워야 하는 공백이 있습니다. 이 공백은 하나님의 크기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습니다.
작정하고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삼사일을 굶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면 굉장히 신령하게 기도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 정도는 그 결심으로 신령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음식만 보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근이 임했을 때 사람들이 자식까지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 자식 먹고 내일은 네 자식을 먹자는 소리가 나왔던 것입니다. 사람의 굶주림이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굶주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에너지를 어디에서 받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음을 채우겠다는 욕구가 생각하는 에너지, 말하는 에너지, 행동하는 에너지로 나타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세상의 문제는 굶주림입니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빈 주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로 죄와 타락이 끼어들면서 채워지고자 욕구하는 마음의 흡입구가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을 등졌으니 채워질 방법이 없습니다. 그 결과 마음의 기근으로 지배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2024년도 이 지구는 흉년으로 덮인 기근의 별입니다. 마음 채움이 이루어지지 않는 기근의 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근의 별인 지구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간단명료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모른 채 공백의 마음을 끊임없이 채우려고 합니다. 육체로 마주하는 이 기근의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가짐으로써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감의 문제입니다. 내가 무척 건강하고 많은 재산을 가졌다고 해보겠습니다. 혹은 국회의원이나 판검사 같은 권력자이거나 연예인들처럼 인기와 명예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가족과 친구가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소유감을 느낄 수 있지만 이것은 마음의 굶주림에 대한 궁극적 해결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결혼을 해도 마음의 굶주림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마음의 굶주림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재벌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마음의 굶주림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한 해결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먹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위해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는 한 이 굶주림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소망하기만 해도 굶주림은 채워집니다. 하나님만을 소망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향해서는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소망하지 않을 만큼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셉 당시처럼 세대를 막론하고 기근이 온 세상을 덮은 실제 상황에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기근이 차단된 요셉의 집이란 어디일까요? 그곳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들어가 모여야만 하는 기근의 기운이 완전히 차단된 요셉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기근의 기운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집은 온 세상에 가득한 기근의 기운이 차단된 공간입니다. 그 요셉의 집에서 선민의 조상인 열두 형제가 모입니다. 선민이란 온 세상이 기근으로 허덕이는 중에도 유일하게 기근이 차단된 장소에서 모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민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창세 전에 예정하심을 따라 선민이 된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마음의 기근을 느끼지 않습니다. 기근이 가져다주는 굶주림은 세상을 향한 굶주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굶주림으로 지배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선민은 그 굶주린 세상으로부터 차단되고 밀폐된 곳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 자들입니다. 본문에서 형들은 요셉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내밀한 자리에서 가장 기쁜 잔치가 열립니다. 요셉의 집안 깊은 곳에서 벌어진 잔칫상은 상징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하늘 보좌 우편까지 끌고 가시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온 세상이 기근으로 덮인 중에도 기근의 기운이 차단된 유일한 장소인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이란 살진 짐승을 잡고 맛있는 요리들이 제공되는 요셉의 집안 깊은 곳에서 잔칫상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라고 애굽 사람과 히브리 사람을 구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이하게도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밥을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애굽에는 소를 신성시하는 우상숭배가 있었는데 히브리 사람들은 소와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모세에 의해 기록된 제사에 관한 내용을 보면 가장 대표적인 번제의 희생제물이 소와 양입니다. 제사 이후에는 고기를 제사장이 먹었고, 화목제 같은 경우에는 제사장과 제사 드리는 자가 같이 먹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인들이 소를 먹는 민족이었기에 애굽 사람들은 이들을 멀리했습니다. 쉽게 말해 소를 먹는 자들과 어울리면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부정하게 된다는 것은 복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은 선민이 아닌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번제로 드려지는 소와 양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 안에 모여야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2000년 전에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이 형들이 요셉의 집안으로 안내받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한편 소를 먹지 않는 애굽 사람들은 비선민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부정하게 여겨서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과 자기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자리를 제일 재수 없는 자리로 여깁니다. 재수 없는 자리를 나의 자리로 동일시할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소를 먹지 않는 애굽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먹지 않는 비선민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본문에서 애굽 사람들은 요셉 집안에 속한 자들입니다. 다만 이들은 여전히 히브리 사람과 밥상을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소를 먹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목은 부정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에서 발생하는 굶주림을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는 세상의 성공과 번영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습니다. 그렇기에 비선민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성공과 번영으로부터 가장 먼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지는 부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는 자들은 선민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만 굶주림은 진정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서만 천지를 지배하는 기근의 기운이 차단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먹음과 하나님을 먹음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먹음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죽었는데 나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은 몸이 곧 내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내가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피와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동일시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을 먹음이란 예수님의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내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있음에 대한 존재감으로 채우고 하나님 좋음에 대한 소유감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이 굶주림을 없애는 것이고 하나님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예수님을 먹음과 하나님을 먹음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필요한 이유와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만찬의 예식이 아닌 성만찬의 정신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 예수님께로 가지 않으면 마음의 굶주림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이루면 굶주림이 해결되리라 여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멀리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종교인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여기고 곧바로 십자가를 제쳐놓고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애굽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진짜 복이 주어질 수 있는 곳은 십자가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부정하게 되는 자리라고 여깁니다. 재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공과 번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공과 번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십자가 예수님의 자리를 좋아하십니까? 그렇다면 선민입니다. 그곳만이 기근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향하고 있거나, 세상에서 풍요롭고 잘되기를 바라는 한 마음의 기근은 끝나지 않습니다. 절대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번영에서 완전히 벗어난 십자가 자리로 가야만 비로소 마음의 기근은 차단되고 굶주림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가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33~34절입니다.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열두 형제를 나이에 따라 앉히는데 또 편애의 상황이 발생합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의 음식을 주었습니다. 주었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초점을 분명히 맞춰야 합니다. 다섯 배를 더 주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형들은 요셉이 채색옷을 입고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것에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랬던 형들이 이제는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에게만 다섯 배의 음식을 주는데도 모두가 함께 즐거워했다는 점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으로 마음의 배를 채우고 만족하려 할 때는 언제나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분노가 일상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입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직면하면 다른 특징이 나타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먹고, 하나님의 좋음을 욕구하고 소망하여 소유감으로 먹는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본문의 상황에서 형들은 총리가 자신들을 죽일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죽이기는커녕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목숨이 구원받았다는 것에서 완전히 만족감을 느낍니다.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에게 다섯 배를 주든 열 배를 주든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으면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직면했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하나도 부러워할 일이거나 시기할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짜 굶주림이 해결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함으로써 진짜 굶주림이 해결되면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보아도 절대로 부럽지 않고 시기와 질투가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다는 이외에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을 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직면함으로써 자유로움이 생깁니다.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함이란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내가 존재감으로 느끼고 열망함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입은 동안에는 소망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기간입니다. 이 소망만 가지더라도 이미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함이란 결국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지구에 있는 것 중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채워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굶주림은 지구에 있는 것들로는 채워질 수 없다.’라고 여겨서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나님을 직면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할 일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는 자체보다 더 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잃어버리는 것을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게 여깁니다.
애굽의 총리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던 형제들이 잔칫상을 보고서는 베냐민에게 다섯 배를 주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함께 즐거워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직면하고 보면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음으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옆에서 육체로 확인되는 장면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로또에 당첨되든 말든 부러워할 일이 아니게 됩니다. 베냐민이 다섯 배의 음식을 받아도 형제들이 시기하기는커녕 서로 즐거워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근의 기운이 차단된 곳은 십자가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의 집안에 들어가 잔칫상의 음식을 먹듯이 하나님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도 온 지구를 지배하는 기근의 기운이 완전히 차단된 요셉의 집인 십자가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는 선민들입니다. 비록 몸은 흩어져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역사가 오늘도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놀라운 본문의 장면이 내가 속하는 장면이며 내가 속하는 사건이 되게 하시고,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