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시인 작품세계>
시적 영향과 ‘극복’
-나종영의 <신작 소시집> 해설《시와시》, 2011겨울호.
장성규
1.
지금은 문학 이론에서 하나의 ‘정전’이 된 책 중의 하나가 헤럴드 볼룸의 『시적 영향과 불안』이다. 모두 아는 것처럼, 이 책에서 헤럴드 볼룸은 모든 시인들은 전대의 선배 시인들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다고 논한 바 있다. 그리고 자신의 독창적인 목소리가, 행여 선배 시인들의 목소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는지에 대한 ‘불안’이 잠재적으로 놓여 있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헤럴드 볼룸은 시적 ‘영향’만큼이나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불안’의 심리에 주목한 셈이다.
그런데 이 불안의 범주는 다소 모호하다. 선배 시인들의 영향을 넘어서려는 무의식적 욕망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무의식적 욕망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은 매우 상이할 수 있다. 예컨대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공식대로 자신의 텍스트에서 선배 시인들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는, 나아가 새로운 꼭지점으로서 자신의 시를 위치시키려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때의 시는 선배 시인들의 목소리를 전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립한다. 우리는 2000년대 이후 이러한 경향을 무수히 확인한 바 있다. 그러니까, 기존의 서정이 지니는 문법 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반-서정의 경향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 시에서 이미 반-서정의 경향이 하나의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처음 선배 시인들의 발화 방식을 부정하며 등장했던, 그리하여 강고한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정점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을 내뿜었던 시적 경향들이, 이제 오히려 스스로가 그 삼각형의 정점을 차지해버린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선배 시인들의 시적 영향으로부터의 불안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선배 시인의 자리로 이끌었을 때, 전복적 상상력의 전위성은 무엇을 향하여 발현될 수 있을까? 스스로가 영향의 주체가 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시의 전위성은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기에 이 불안을 넘어서는 다른 방식에 대한 탐색이 필요한 시기일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러한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시적 리비도의 분출 지점이 모호해진 시기, 오히려 선배 시인들의 영향을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전위성의 좌표를 모색하는 것. 그러니까 시적 영향과 불안의 반복으로서의 문학사라는 도식을 인정하면서, 바로 그 도식 위에서 지금 서정이 놓인 위상도를 가늠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위상도로부터 반복에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인 ‘차이’에 주목하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의미를 지닌다면, 아마도 그것은 2000년대 이후 범람한 영향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 ‘선언’들이 종국에는 스스로가 사물화된 현재 우리 시의 통시적 좌표를 더듬는 데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방가르드가 주류가 되는 순간, 이미 그 아방가르드는 더 이상 전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가 놓인 지점이 여기라면, 다른 방식의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식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영향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이를 통한 ‘차이’만들기, 나아가 시적 영향과 ‘극복’의 문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나종영의 신작 소시집을 읽으면서 눈에 띤 것은, 그가 자신의 시적 영향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대 대부분의 시인들이 시적 영향의 ‘부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 근거를 만드려는데 반해, 나종영은 오히려 자신의 시적 영향을 전면에서 탐구함으로써 자신의 시적 위상도를 모색하려는 자의식을 표나게 보여준다. 이는 예컨대 「다시 매천을 읽다」와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이 시는 두 겹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겉 표면에서의 진술이 현재 시점에서, 그러니까 “구월 남실바람에 물비늘 치는/ 저수지 둑에 홀로 앉아/ 매천 시집을 읽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 이면에서의 진술은 과거 시점에서, 그러니까 “초승달도 기울어 어두운 새벽/ 선생은 절명시를 짓고 나라 잃은 울분에/ 아편 부은 독배를 들었”을 매천의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겹의 구조 간의 긴장감이 시 전반을 관통하는 정조이다.
시에 진술된 것처럼 ‘매천’은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던/ 옛 선생도 절의를 지키려 목숨을 버”린 선배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은 부정의 방식으로 표출되며, 그 결과 “세상은 꺾이고 어지러운데/ 시인들은 죽고 말장난 거짓 시들만 넘쳐/ 푸른 대나무도 고개를 떨구”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시인 역시 이러한 현실에 대한 뚜렷한 ‘극복’의 문법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시적 영향은 “사람도 시대도 훼절하는데/ 언제까지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걸일까”라는 자문의 형식으로 귀결된다.
이 시에서 ‘매천’이 지니는 의미를 추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절명시”로 표상되는 매천-선배 시인의 영향은, 현재 “말장난 거짓 시”들 사이에서 철저히 부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에 모종의 나종영의 시적 성과가 존재한다. 그는 손쉽게 “절명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매천을 읽”으며 자신의 “손끝이 아”림을 느낀다. 이 ‘아림’은, 아마도 ‘절명시’와 ‘말장난 거짓 시’ 사이의 어딘가에서 시적 모색을 진행중인 시인의 위상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 아림이 ‘절명시’의 단순한 모방과는 다른 시적 영향과 ‘극복’의 문법을 생성하는 힘의 원천일는지도 모른다.
3.
그러니까 나종영의 근작들은 ‘절명시’와 ‘말장난 거짓 시’의 ‘사이’에서 자신의 시적 좌표를 모색하는 진행형의 형식을 지닌다. 매천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이의 모방을 넘어서려는 ‘극복’의 의지가 ‘아림’으로 나타나듯이, 그의 근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모종의 ‘잉여’의 감각들이다.
예컨대 「첫 눈」은 그 자체로는 고전적인 서정시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첫눈은/ 언제나 눈부시게 온다”는 첫 연의 진술이 반복, 확장되는 구조는 이미 익숙한 시적 문법이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다소 갑작스러운 진술이 등장한다. “첫눈은/ 해마다 슬픈 술꾼들이 잠든 밤/ 첫눈의 새로운 모습으로 온다/ 참 눈부시게, 지그시 눈을 감고 온다.” 앞에서 “눈부시게” 온다던 첫눈은 마지막 부분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오는 것으로 진술된다. 시의 다른 부분들에서 첫눈에 대한 진술들, 즉 “눈부시게”, “조금은 늦게”, “환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등등의 진술과 마지막 부분의 “지그시 눈을 감고”는 아무래도 다른 감각으로 느껴진다.
이는 「와온에 와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의 마지막 진술, 즉 “이 눈물겨운 마을에 오래오래 머물다가자고”는 아무래도 낯선 진술이다. 위에서 마을에 관련된 수사들은 일관되게 “평화”와 “아름다운”의 의미체계로 수렴된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제시된 “눈물겨운”이라는 진술은, 역시 아무래도 낯선 감각이다. 같은 맥락에서 「담쟁이」를 관통하는 “생명”과 “연초록 물결”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피멍든”의 감각 역시 무언가 낯설다.
어쩌면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잉여의 감각을 읽어내는 것이 나종영의 근작시를 해명하는 관건일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아림’의 감각이 시적 영향과 극복에 대한 나종영의 의지를 표현하는 감각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 이질적인 잉여의 감각들을 독해하면 나름 그 의도가 부각되기도 한다. 「첫 눈」의 “지그시 눈을 감고”라는 수식어는 고전적 서정이 지니는 “눈부시게”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적인 수사로, 「와온에 와서」의 “눈물겨운”이라는 수식어는 “평화”와 “아름다움”의 클리쉐를 벗어나려는 수사로 읽힐 수도 있다. 이는 「담쟁이」에서의 “피멍든”의 수사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나종영의 신작시가 ‘매천’으로 표상되는 선배 시인의 영향과는 다른 차이를 ‘아림’이라는 잉여의 감각을 통해 표출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러한 잉여의 감각은 이번 나종영의 신작시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를 영향에 대한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자면, 고전적인 서정시의 문법이 지닌 미덕과 그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나름의 ‘차이’를 각인하려는 모색의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우리 시는 명백한 영향을 부정하거나, 혹은 이 영향을 무비판적으로 승인하고 모방하는 두 가지 편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4.
이렇듯, 나종영의 신작시는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을 영향에 대한 ‘극복’으로 바꾸려는 의지의 소산이다. 그것은 곧 ‘절명시’를 통해 ‘말장난 거짓 시’를 넘어서려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절명시’와는 다른 독창적인 문법을 향한 ‘아림’의 감각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아림’의 감각, 즉 잉여의 감각들은 다른 시들에서 고전적 서정시의 문법에 균열을 가하는, 그리하여 모순의 결합을 노출하여 클리쉐를 벗어나려는 고유한 실험으로 나타난다.
기실 우리 문학은 다소 오랫동안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을 곧바로 시적 영향에 대한 ‘부정’으로 치환해 온 감이 있다. 물론 시적 영향을 벗어나려는 욕망 자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과도한 인정 투쟁의 방식으로 시적 영향을 ‘부정’하면서, 결국에는 스스로가 삼각형의 꼭지점을 욕망하는 이 기묘한 형국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절명시’와 ‘말장난 거짓 시’의 이분법적 대립구도의 공고화에 그칠 따름이라면, 서정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그렇다면 문제는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는 또 다른 방식에 대한 탐색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선배 시인들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 우리의 시적 좌표를 측정하면서도, 반복 속에서의 필연적인 ‘차이’를 생성하려는 성실함으로부터만 가능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나종영 특유의 머뭇거림과 잉여의 감각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시적 영향과 극복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