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만식계.

[유아독종]

보만식계

보문산, 만인산, 식장산, 계족산. 산행거리 대략 60km.

나는 산을 모른다. 보만식계가 뭔지도 몰랐고, 어디에 있는 산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보만식계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잘 아는 지인들이 간다고 해서 나도 같이 가자고 했고, 그들이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4월9일 오후 5시. 다섯 명의 남자가 우두리 삼겹살 식당에 모였다.

성백연. 원당산악회 고문.

비박 전문가이자 지리산 전문가. 지리산에 대해서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등산로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오르기 힘든 모든 비등구간은 물론이요, 2004년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곰 수컷2호와 암컷7호의 데이트 코스까지 환히 꿰고 있을 만큼 지리산 전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는 형님이다. 이재명 방형민을 비박의 세계로 끌어들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으로 알고 있다. 들꽃에 대한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 요즘은 마라톤에 빠져있는 중.

조경선. 원당산악회 감사.

사춘기 소녀가 조금씩 성에 눈뜨듯 산과 비박에 조금씩 눈떠가는 남자.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고, 도전정신이 강하며 마라톤 풀코스를 다섯 번 이상 완주한 남자. 주말부부이면서 주말에 집에 돌아와 아내와 격렬한 만남을 한 번 가진 후 산으로 달려가는 남자.

친구에게 도둑질을 권한 후, 훔쳐온 장물을 갈취하는 남자. 엄청난 친화력의 소유자. 요즘 비박에 빠져 집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음.

이재명. 원당산악회 산악대장.

방형님과 함께 묻따마를 만든 남자. 산에 대한 열정이 가슴속에 용암처럼 끓고 있는 남자. 정상적인 등산로보다는 비등을 더 좋아하고, 여자보다 산을 더 좋아하며, 딸 성적이 오르는 것보다 산에 오르는 것을 더 좋아하고,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식당 매상이 오르는 것보다 자기가 산에 오르는 걸 더 좋아하는 남자. 호텔에서 편안하게 자는 것보다 산에서 자는 걸 더 좋아하는 진정한 산꾼. 엄청난 배려의 소유자. 요즘은 지리산 태극종주 준비에 빠져있음.

방형민. 원당산악회 산악대장.

이재명과 함께 묻따마를 만든 남자. 산에 거의 미친 남자. 전 재산의 반 이상을 산에 쏟아 부은 남자. 이산 저산 곳곳에 묻어 놓은 술과 음식만 해도 강남 아파트 한 채 값 정도. 전국 비등구간을 거의 섭렵한 남자. 사비를 털어서라도 사람들에게 좋은 산을 소개시켜주고 싶어 하고, 여자를 소개받는 것보다 못가 본 비등구간을 소개받는 걸 더 좋아하는 남자. 수많은 산과는 사귀어봤지만, 산과 사귀느라 여자는 사겨보지 못한 순수한 남자 방형민. 엄청난 열정의 소유자. 요즘 장거리 산행에 빠져있음.

유아독종. 원당산악회 평회원.

산도 모르고 등산요령도 모르는데다 등산용품도 제대로 모르고 산에 갈 때 늘 무언가 한두 가지 빠뜨리고 가는 어설픈 남자. 산에 대한 열정도 별로 없고, 가본 산도 별로 없으며 누가 산에 가자고하면 배낭 메고 따라나서는 산행초보. 조경선이 도둑질을 시키면 훔쳐다가 훔친 장물을 조경선과 나누는 남자.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 그러나 발기부전으로 엄청난 정력이 무용지물인 상태. 총알은 엄청나게 많은데 총이 고장 난 경우와 비슷함. 요즘 개에 빠져있음.

이렇게 다섯 남자가 우두리 삼겹살 식당에 모여 커피 한 잔씩 마시고 다섯 시 조금 넘어 대전으로 출발했다. 계족산 아래에서 식사를 한 후 하산할 용화사 주차장에 주차시켜 놓고 택시를 불렀으나 오는 택시가 없어 다시 보문산으로 출발. 보문사 근처에 차를 주차시키고, 차에서 배낭을 꺼냈다. 조경선이 내 배낭을 차에서 내리며 이렇게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떻게 60km를 걸을 거냐고 한마디 했다. 성백연 형님의 배낭도 내 배낭만큼이나 무거웠다. 장거리 산행이라 살짝 겁을 먹고 이것저것 준비하다보니 배낭이 무거웠다.

8시40분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보문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보문산은 유명세만큼이나 등산로가 많았다. 등산로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었다. 간신히 길을 찾아 능선에 올랐을 때 우리를 처음 맞이한 것은 깊은 어둠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보문산성 망루였다. 망루에 올라 인증샷을 찍고 대전 시내 야경을 잠시 감상한 후 본격적인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망루에서 내려가 잠시 걷는데 누군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했다. 발길을 돌려 걷는데 우연히 내가 맨 앞에 서게 됐다. 길치인 내가 앞에 섰지만 다행히 등산로 하나밖에 없어 앞에서 걸어도 잘못된 길을 갈 염려는 없었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부지런히 걸었다. 60km에 대한 부담감과, 밤에 어느 정도 걸어놔야 낮에 좀 쉬울 거라는 생각에 부지런히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봤더니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불빛이 하나 둘 올라오고 있었다. 재명이가 앞에서고 내가 바로 뒤에 서서 쫓아갔다. 나는 페이스조절을 할 줄 몰라 누군가를 앞세우고 쫓아가는 것이 편했다. 맨 앞에서면 무조건 걷기만 해서 자칫하면 페이스를 잃어 힘들 수 있었다.

헤드랜턴 불빛만으로는 산속의 어둠을 몰아낼 수 없었다. 밤길은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위험한 구간은 없었다. 하지만 산은 높낮이가 심했다. 어느 봉우리에 올라 쉬면서 조경선이 오록스라는 어플로 기록을 살폈다. 시간은 두 시간이 지나 있었고, 거리는 7km를 진행했다. 평균 3.5km를 걸은 것이었다. 밤에 평균 3.5km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등산로의 난이도를 고려했을 때 조금은 빠른 속도였다. 보만식계의 등산로는 보를 지나 만을 넘고, 식에 오를 때까지 고도편차가 심했다. 계속 치고 올라갔다가 뚝 떨이지고, 다시 치고 오르는 구간의 반복이었다. 마치 악어의 꼬리처럼, 좀 과장하면 톱니처럼 봉우리와 골짜기만 있는 산이었다.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능선이나 평지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가파른 오르막이 아니면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나를 제외한 네 사람은 산행의 고수들이었다. 조경선은 세 사람보다는 경험이 일천하지만 그들과 함께하면서 쌓인 노하우가 고수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산에 대해서나 등산요령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걷는 것은 잘 걷는 편이었다. 페이스조절이나 쉬는 타임, 장거리 산행에 필요한 물품 등, 등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무조건 걷는 것이 내가 아는 등산의 전부였다. 등산로가 오르막이 아니면 내리막이다 보니 산행의 고수들도 힘들어했다.

시간만 나면 배낭을 메고 지리산으로 달려 가 비막을 하고 오시는 성백연 형님. 요즘 비박에 미쳐 등산장비를 구입하느라 용돈의 전부를 쓰고 있는 조경선. 여자와의 약속보다는 산과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는 이재명. 달력에 새겨진 빨간 글씨마다 빼곡이 산 이름을 적어 놓은 방형민. 네 사람의 고수들과 함께 걸으니 60km 장거리 산행에 도전했음에도 든든했다.

형민이와 둘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사람들이 조금 늦어지면 잠시 기다렸다 다시 걷기도 하고, 걸음의 속도를 조금 늦추기도 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보문산 정상을 찍고, 오도산을 넘어 만인산을 향해 걸었다. 만인산까지 가야 20km를 걷는 것이었다. 만인산에서 식장산까지의 거리가 거의 20km. 식장산 정상까지 가면 40km를 걷는 것이었다. 만인산에 도착하기 전부터 성백연 형님은 발가락과 무릎 통증을 호소했고, 조경선은 밤샘 작업으로 부족한 잠과 체력으로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에 조금 빨리 걷는 바람에 페이스를 살짝 오버해 더 힘들어했다. 성백연 형님은 마라톤의 피로가 아직 회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거리 산행을 시작해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였다. 더구나 난이도가 심한 등산로를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걸었으니 피로가 일찍 몰려 온 모양이었다. 나는 아침에 몸을 살짝 풀어놓은 상태였다. 대덕산 등산로 9km를 걸었고, 개를 끌고 평지 8km를 걸어 몸이 충분히 풀린 상태라 저녁에 시작할 때 가볍게 시작할 수 있었다.

평지는 별로 없었다. 능선도 드물었다. 등산로는 대부분 오르막이 아니면 내리막이었다. 나는 오르막을 빠르게 치고 올라가 쉬다가 후미가 도착하면 다시 출발하곤 했다. 나를 제외한 네 사람은 지난 해 당진산악회에서 영남알프스 종주 번개 때 미리 출발해 당진산악회 사람들이 30km를 걸을 때 네 사람은 54km를 걸은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경험도 많았고, 장거리 산행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네 사람의 말에 의하면 보만식계 등산로가 영남알프스 등산로보다 훨씬 힘들다고 했다. 나도 장거리 산행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치악산 종주를 시작으로 화대종주 때 50km가까이 걸었고, 영남알프스 때도 30km를 걸었기에 거리에 대한 두려움은 큰 편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도 화대나 영알보다는 많이 힘든 코스였다. 화대는 능선이 많았고, 영알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편차가 심하기는 했지만 경사가 완만한 곳도 있었고, 능선도 꽤 있었다. 하지만 보만식계는 능선이 거의 없고, 오르막이 아니면 내리막이었다. 경사도 대부분 가파른 경사였다. 그러다보니 컨디션이 좋지 않은 사람은 일찍 지칠 수밖에 없었다.

형민이와 둘이 걷는 시간이 많았다. 재명이는 중간에서 걸었고, 조경선과 성백연 형님은 뒤에서 걸었다. 서로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안 되기에 거리가 많이 벌어졌다싶으면 쉬면서 기다렸다. 중간 중간 쉬면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물도 마셨다.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걸었더니 평소보다 훨씬 많은 물을 마셨고, 평소보다 빨리 배가 고팠다. 쉬지 않으면 걸었다. 다른 건 할 게 없었다. 어둠이 깊어 경치를 감상할 수도 없었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그저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걷는 것 밖에는 할 게 없었다.

남은 거리는 생각하기도 싫었고, 지나온 등산로는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기에는 욕 나올 만큼 힘든 코스였기 때문이었다. 걷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처럼 걷고 또 걸었다. 형민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형민이는 가끔 오르막 중간에 멈춰 서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나는 무조건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서 기다렸다. 중간에 서면 더 힘들 것 같았다. 걷고 쉬기를 반복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만인산에 도착했다. 20km를 걸었는데 아직 아침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아직까지도 산속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만인산 정상에서 잠시 쉬다가 휴게소로 내려와 휴게소 근처에서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드디어 내 배낭 속에서 내 어깨를 짓누르던 2리터 물병이 비워졌고, 라면도 배낭 속에서 빠져나와 내 어깨를 가볍게 했다. 라면을 다 먹고 잠시 쉬는데 성백연 형님이 내 비워진 2리터 물병에 물을 가득 담아왔다. 점심 때 전투식량을 먹으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가득 채워진 2리터 물병을 다시 배낭에 챙겨야 했다.

아침을 먹고 쉬는 사이 새벽 미명에 놀란 어둠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면서 헤드랜턴을 끄고 배낭에 넣었다. 식사와 휴식으로 체력이 회복된 우리는 다시 배낭을 메고 식장산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가 식사를 한 곳은 공원 주차장이었다. 공원에서 산에 오르는 길에 유격 훈련장이 있었다. 성백연 형님이 유격훈련을 하며 네발로 계단과 그물망을 통과해서 올라갔다.

다시 시작된 오르막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날이 밝아 여기저기 피어 있는 진달래가 어설프게 보이기 시작했다. 만개한 진달래가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바닥까지 내려갔다 해발 580m의 정기봉까지 등산로는 가파르고 거리가 좀 길었다. 정기봉에 도착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방형민이 올라왔다. 사진을 찍었다. 뒤이어 성백연 형님이 올라오고, 이재명이 올라오고 마지막으로 조경선이 올라왔다. 살짝 지친 모습이었다. 정기봉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 여전히 방형민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식장산은 멀었다. 이제 겨우 20km를 진행했는데 날이 밝았으니, 앞으로 40km를 더 걸으려면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았다. 20시간을 예상하고 왔는데 좀 늦어질 것 같았다. 지치면 걸음이 느려져 평균속도도 느려질 것이었다. 날이 밝으면서 사진 찍을 일도 많아졌다. 빼어난 경치는 아니었지만 카메라에 담고 싶은 풍경은 더러 눈에 띄었다.

날이 밝으면서 보이기 시작한 진달래는 등산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활짝 피기는 했지만 화려하지는 않았다.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 숲 속에 드문드문 피어 있어 화려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등산로 양 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진달래는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눈을 즐겁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봉우리는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았다. 30km쯤 진행했을 때 드디어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백연 형님의 발가락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이제 체력적으로도 많이 지칠 시점이었다. 장거리 산행은 체력이 바닥나 움직이기 힘들다가도 잠시 쉬면서 음식을 먹으면 회복되어 평상시처럼 걸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체력이 고갈되는 속도는 빨라질 것이고, 회복속도는 느려질 것이었다. 30km지점을 통과할 때 시간은 출발한지 10시간이 넘어 있었다. 보만식계를 완주한 경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제부터는 코스가 훨씬 쉽다는 백연형님의 말에 용기를 얻어 체력이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조경선도 벌떡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지나면 그 때부터 쉽다고 했다. 하지만 걷다보니 조금 나아졌을 뿐, 여전히 오르막과 내리막의 경사가 심했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능선이 조금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식장산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꽤 긴 오르막을 쉬지않고 올랐다. 속도를 끌어올려 부지런히 오르고 또 올랐다. 나는 아직 체력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 다리나 발이 아프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빨리 봉우리 정상에 올라 자리에 누웠다. 후미까지 올라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었다. 어제 8시40분부터 오전11시 까지 밤새 잠을 못자고 걸었더니 졸렸다. 잠시 눈을 붙이려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후 방형민이 올라왔다. 곧이어 이재명이 올라오고 11시20분경 성백연 형님과 조경선이 올라왔다. 이왕 자리를 잡았으니 점심을 먹기로 하고 전투식량과 물을 꺼냈다. 물을 끓여 전투식량에 붓고 남은 물은 비워진 물병에 채웠다. 드디어 2리터의 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산에서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꽤 많은 물을 마셨다.

형님은 발가락과 무릎이 아파 중간에 탈출해야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재명도 지쳤다고 했다. 조경선은 방전됐다,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마라톤을 완주한 경험이 많아서인지 지구력은 좋았다. 형민이와 나는 아직까지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다. 내 양다리는 지치지도 않았고,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아픈 곳도 없었고, 피로하지도 않았다. 다만 양다리가 아닌 다른 다리가 좀 이상했다. 식사 후 잠시 쉬면서 소변을 보는데 평상시에는 7m전방의 파리도 정확하게 쏘아 맞히던 오줌발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각으로 떨어져 발등을 찍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몸은 지치지 않았는데 오줌발이 지쳐 발등을 찍는다고 얘기했다. 방형민이 신발을 닦으라며 솔잎을 긁어왔다. 나는 손영재가 리듬체조 할 때처럼 다리를 쫙 벌려 등산화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식사를 하고 즐겁게 농담을 하며 쉬다가 다시 출발하가 위해 짐을 챙겼다.

멀리 식장산이 보였다. 아직도 수많은 봉우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봉우리에서 식장산까지의 직선거리는 가까웠으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빙 돌아가는 코스였다. 그래도 전반부 30km보다는 좀 수월했다. 전반부 30km는 톱니처럼 봉우리와 골짜기밖에 없었다면 이번에는 중간 중간 이빨도 빠져있었고, 톱니 끝이 부러져 능선이 이어져 있는 곳도 있었다.

한참을 걸었다. 성백연 형님과 조경선은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됐고, 이제 재명이의 다리가 살짝 풀려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앞으로만 걸었고, 산을 아는 네 사람은 뒷사람에게 뒤통수를 보여주며 걸었다. 앞사람이 보여야 덜 지친다고 했다. 앞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 쉽게 지친다는 것이었다. 장거리 산행이다 보니 물과 음식이 부족했다. 나는 중간에 모르는 사람에게 마시던 물을 얻었고, 조경선은 식장산에 거의 다 도착해 뚜껑도 따지 않은 물병을 얻었다. 지칠 대로 지쳐 보이는데다 생긴 것도 불쌍하게 생겨 쉽게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좀 불쌍하게 생겨야 살아가는데 유리한 면이 있다.

식장산 정상석에서 인증샷을 찍은 후 내려오다 맥주와 생수 등을 파는 곳에서 생수와 맥주를 마시며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 등산로를 따라 내려왔더니 마을이 나타났다.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식당과 물건을 파는 노점상이 늘어서 있었다. 식당에 들러 식사를 했다. 식당에서 빈 병에 물을 채우고 다시 출발했다. 2~3km차도를 걸어 오늘의 마지막 관문인 계족산으로 향했다. 중간에 사람들은 바지를 내리고 스프레이 파스를 듬뿍 뿌렸다. 누군가 내게 파스를 뿌릴 거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 아픈 데가 없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성백연 형님이었다. 무릎도 무릎이었지만, 발가락 때문에 제대로 걷기가 힘들어 무릎에 더 부담이 가는 것 같았다. 사실 아픈 발가락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계족산은 산책로라고 했다. 맨발로 걸어도 될 정도로 흙이 깔려있고, 잘 정돈된 전형적인 동네 산책로라고 했다. 하지만 산은 산이었다. 맨발로 걷다가는 발가락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지나온 등산로에 비하면 정말 편하고 쉬운 코스였지만 그래도 산이었다. 당진 아미산을 맨발로 뛰어다녀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계족산을 맨발로 걸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저녁식사 후 대부분 체력은 어느 정도 회복 된 것 같았다. 다만 백연형님의 발가락과 무릎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고, 멀쩡하던 형민이의 발에도 물집이 생겼고, 조경선의 발은 물집이 이미 터진 상태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7m전방에 있는 파리를 정확하게 쏘아 맞히던 소변줄기의 실종 말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쉬지 않고 걸었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봉우리를 넘고 능성에 도착,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어둠이 밀려 들 것 같았다. 백연형님의 발가락 상태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발가락 때문에 무릎의 통증도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내리막을 걸어 가양임도에 도착, 형님은 포기를 선언했다. 계족산까지는 3km정도가 남은 상태였다. 하산까지는 5km정도. 나는 차키를 형님에게 건넸고, 네 사람은 형님을 남겨두고 출발했다. 700m정도 내려가면 공원이라고 했다. 형님은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차가 있는 보문사로 간다고 했다. 네 사람은 계족산을 향해 오르막을 올랐다. 40m쯤 진행했을 때 방형민이 휴대폰을 놓고 왔다고 했다. 아래에서 형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을 가지고가라는 소리 같았다. 40m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현재의 몸 상태로는 기운이 쭉 빠지는 거리였다. 형민이는 휴대폰을 찾으러 다시 내려갔고, 나머지 세 사람은 계속 올라갔다.

갈림길이 나왔다. 재명이가 휴대폰을 보더니 다시 만나는 길이라고 했다. 왼쪽이 정상적인 길이고, 오른쪽은 정상적인 길은 아니지만 다시 만나니까 어느 길로 가던 상관이 없다고 했다. 조경선이 오른쪽이 편할 것 같다며 오른쪽 길로 가자고 했다. 오른쪽 길을 택해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절이 나왔다. 절을 에둘러 등산로가 있었고, 좀 가파른 길이 짧게 이어져 있었다. 내가 맨 앞에서 걸었고, 중간에서 재명이가 걸었다. 조경선이 맨 뒤에서 걷고 있었다.

언덕 정상에 올라 형민이를 불렀다. 저 앞에서 형민이의 대답이 들려왔다. 왼쪽 길이 훨씬 빠르고 쉬운 길이었다.

부지런히 걸어 형민이를 쫓아갔다. 저 멀리 앞에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뒤에 걷는 사람은 형민이가 분명한데 앞에 걷는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혼자 산행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걸음을 빨리해 바짝 따라붙고 보니, 앞에 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성백연 형님이었다. 정말 반가웠다. 포기하려 했던 마음을 다잡고 휴대폰을 찾으러 갔던 형민이와 함께 다시 올라온 것이었다. 형민이는 재명이와 경선이를 기다렸다 함께 온다며 우리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형님과 나는 계속 걸었다. 형님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조팜나무 꽃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고, 형님의 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경청하면서 걸었다. 형님은 지리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더 알고 싶어 했다. 시간만 나면 지리산에 들어가 비박을 하며 수많은 야생화와 대화를 나누고, 지리산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바위와 나무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지리산에 대해 환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지리산을 더 알고 싶어 했다.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형님이었다.

조팜나무를 찍은 정자에서 1km쯤 진행하니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다. 바위위에서 계족산 임도를 따라 피어있는 벚꽃을 잠시 감상하다 오르막 정상까지 올라갔더니 정자가 서있었다. 정자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하고 배낭을 벗었다. 잠시 후 이재명이 올라왔다. 어디쯤 오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멀었다고 했다. 조경선이 많이 지쳐 힘들어한다고 했다.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형님은 배낭에서 헤드랜턴을 꺼냈다. 한 15분쯤 더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싶어 배낭이라도 받아오기 위해 랜턴을 켜고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잠시 서서 형민이와 경선이의 이름을 부르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멀리 바라봤지만 헤드랜턴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달렸다. 1km쯤 달렸더니 오면서 조팜나무 꽃을 찍었던 정자가 나왔다. 계속 달렸다. 아직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고,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다시 1km쯤 달려 언덕 정상에 올라섰다. 언덕 아래를 내려다 봤지만 아무런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탈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전화기는 벗어 놓은 배낭에 있었다. 다시 뒤돌아서 열심히 달렸다. 그 시간에 그 길을 100m, 2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우사인볼트와 달렸어도 내가 크게 뒤지지 않은 만큼 빠르게 달렸다. 왕복4km를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달린 것 같다. 형님과 재명이가 기다리는 곳에 도착해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나도 전화기를 꺼내 비행모드를 해제했더니 조경선으로부터 전화가 두 통이나 와 있었다. 곧이어 형님과 조경선의 통화가 이루어졌고, 그들은 이미 계족산에 도착했다고 했다. 정자를 거치지 않고 아랫길로 간 모양이었다.

대략 2km를 빠르게 걸었다. 드디어 우리도 계족산 정상에 도착해 인증샷을 찍고 용화사로 하산했다. 용화사 근처 계단을 내려오며 나를 4km 달음질 시킨 조경선이 내게 한마디 했다.

“영구야, 그래도 내가 너보다 먼저 계족산에 도착했다.”

그랬다. 나는 처음으로 장거리 산행에서 조경선보다 늦게 도착했다.

드디어 다섯 명 전원이 보만식계를 완주했다. 형님의 발가락과 무릎에 이상이 생기기는 했지만, 조경선의 체력이 고갈되기는 했지만, 재명이의 다리가 살짝 풀린 적도 있었지만, 형민이의 발에 물집이 잡히기는 했지만, 7m전방의 파리를 정확하게 쏘아 맞히는 내 엄청난 오줌발이 실종되기는 했지만, 우리는 무사히 보만식계 60km를 두 발로 온전히 걸은 것이었다. 예상시간보다 서너 시간 늦어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모두 보만식계를 완주했다. 형민이가 머리를 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용화사 주차장에서 성백연 형님의 동생분이 차가 주차되어 있는 보문산까지 태워다 주었다. 보문산 아래에서 식사를 한 후 당진으로 향했다. 좀 피곤하기는 했다. 다행히 운전을 하며 졸지는 않았다. 네 사람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전했다. 1시가 거의 다 되어 당진에 도착, 각자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솔직히 각오했던 것보다는 쉬웠다. 발톱 한두 개는 빠질 줄 알았는데 전혀 이상이 없었다. 월요일엔 산에 가지 않았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잠을 자느라 산에는 못 가고 개만 산책시켰다. 화요일 아침에 아미산 몽산 다불산을 한 바퀴 돌았다. 다리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실종된 오줌발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보만식계 끝.

[이순옥]

참들 대단하신 분들이여~~한땐 나두 묻따마 회원으로 따라다녔었는디~~어찌 60키로를 완주할수 있지~~다섯분의 무사귀환 축하합니다~~그러구보니 울 영구오빠가 체력 최고네~~산에서 날라다니는 모습 눈에 떠오른다~~고생 많이 하셨어유~~

[블루마운틴]

산행거리만큼이나 긴긴 보만식계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이러한 산행을 통해 개인적으로 성취감과 함께 하신 분들의 멤버쉽까지...^^
-힘들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산을 맘껏 조망할 수 있는 산행이 더 좋은 블루마운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