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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시내물이 모여져야 강과 바다로 된다 -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법칙
이 장의 제목으로 쓴 말은 우리 나라 전국시대의 순자가 쓴 ≪권학편≫에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이와 유사한 말을 많이 하였다. 예를 들면 흙이 쌓여 산을 이룬다. 물이 고여 못을 이룬다.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야 천리를 갈 수 있다는 등등이다. 순자보다 좀 선배인 노자도≪도덕 편≫에서 ≪아름드리 나무도 어린 싹으로부터 자라나고 9층 높은 탑도 흙을 쌓는데로부터 시작되며 천리길도 첫걸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였다 철리가 풍부한 이런 말들은 우리 조상들이 벌써 2천여년 전부터 사물의 질적 변화는 양적 변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소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물론 역사적 조건의 제한으로 그들은 양과 질이라는 이런 과학적 개념을 명확하게 쓰지 못하였고 그것을 보편적 법칙으로 간주하여 과학적 논증을 하지 못하였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인식은 아주 대단한 것이다.
그러면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본법칙의 하나로 되는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법칙은 어떠한 내용들을 포괄하는가? 그것을 연구하는 의의는 무엇인가? 아래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하자.
사물은 모두 질과 양의 통일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사슴을 말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고는 재상으로 된 후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사슴 한마리를 끌고 와서 진2세에게 드리면서 그것을 말이라고 하였다. 진2세가 ≪아니요. 사슴을 어찌 말이라고 하오?≫라고 하자 조고는 좌우에 죽 늘어선 관원들에게 이것이 사슴인가 아니면 말인가고 물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그대로 말했고 눈치를 보아가며 듣기 좋게 말하는 아첨쟁이들은 말이라고 하였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모두 이색분자로 인정하고 후에 여러가지 죄명을 들씌워 그들을 강직시켰거나 죽여버렸다.
사슴과 말은 질적으로 같지 않은 두가지 동물로서 혼동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갖가지 사물이 다른 사물이 아니고 바로 그 사물이 것은 사물마다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물과 비생물은 다르며 동물과 식물도 같지 않다. 우리가 산, 강 호수, 바다, 해, 달, 날짐승, 들짐승, 풀, 나무, 벌레, 물고기 같은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각기 자기의 특수한 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질이란 철학용어로 말하면 사물의 내부에 고유한 규정성을 말한다. 이 규정성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특수성이다. 이런 규정성은 사물내부의 특수한 모순에 의하여 결정된다. 어느 한 사물의 질에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사물은 그 사물이 아니라 다른 사물로 변한 것이다. 사람들은 사물을 인식할 때 우선 그것이 무엇인가를, 즉 그것의 질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질을 인식하는 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기초이다.
그렇다면 한개 사물은 한가지 질만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사물의 질은 사물내부의 특수한 모순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사물은 흔히 많은 층차와 측면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물의 질도 여러 측면인 것이다. 인간을 놓고말하며 도구를 제조하고 사용하여 생산노동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질이다. 계급사회에 있어서 각 계급의 인간은 또 각자의 계급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계급적 질이다. 동일한 계급의 사람들 속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봉사성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청결공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의사로 일하는 사람도 있으며 과학, 문화, 교육 등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또 사회적 분업에서의 같지 않은 질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물의 질을 연구할 때 사물의 본래의 모습과 같지 않은 실천목적에 근거하여 그 어느 한 측면의 질을 포착하고 주요한 질과 주요하지 않은 질, 근본적인 질과 근본적이 아닌 질을 구별하여야 한다.
사물의 질은 사물의 내적 규정성으로서 그 속성을 통하여 표현된다. 속성이란 바로 사물의 질이 다른 종류의 사물과 관계를 발생할때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관계를 발생할때 표현되는 질이다. 이를테면 질이 같지 않은 화학물질이 물이나 불 같은 것과 관계를 발생할 때에는 같지 않은 속성을 나타낸다. 속성은 일정한 측면에서 표현되고 있는 질이다. 그러나 질은 각종 속성의 내적인 유기적 통일로서 다른 사물과 같지 않은 한계를 표시한다.
사물은 질적 규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양적 규정성도 있다. 양이란 사물의 규모의 크기, 운동의 속도, 색깔의 농도, 수효의 다소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동일한 질의 사물은 다른 양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양의 증가와 감소는 어느 한사물의 존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표준대기압에서의 물은 섭씨 영도로부터 100도사이에서는 물리적 성질이 변하지 않고 그냥 액체상태를 보전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질에 상대하여 말하면 양은 사물의 외적 규정성이다. 한가지 사물은 그 규모가 좀 클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그 색깔이 좀 진할 수도 있고 연할 수도 있으나 일정한 한도 내에서는 그 질적 규정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양이라는 이 외적 규정성은 중요하지 않단말일가? 그렇지 않다. 사물의 양을 정확히 장악하는 것은 사물의 질을 정확히 인식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화학에서 화합물의 구성부분만 알고 각 구성부분의 양의 다소를 모른다면 그 어떤 화합물을 만들어낼 수 없다. 국민경제는 질적으로 다른 여러 부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다른 부문들은 또 언제나 일정한 양의 비율로 표현된다. 비율관계가 균형잡혀야만 국민경제가 계속 고속도로 발전할수 있으며 비율관계가 파괴되면 경제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양적인 통계가 없으면 경제현상을 연구할 수 없고 경제건설을 올바르게 지도할 수도 없다. 혁명전쟁시기에 적아 쌍방의 역량을 타당하게 평가하고 건설시기에 경제발전의 수준과 속도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은 전략과 전술 및 방침과 정책을 정확하게 제정하는 근거로 된다. 어떠한 사업을 하든지 그 사업의 양적인 면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한개 생산대가 잘 꾸려졌다면 반드시 양곡의 생산량과 다종경영에 의한 생산물의 수량이 비교적 대폭적으로 늘어날 것이며 공공축적이 늘어날 것이며 사원들의 수입이 뚜렷하게 높아질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의 양적 증가가 없다면 그 생산대가 잘 꾸려지고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모택동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흉중에 숫자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즉 정황과 문제에 대하여 반드시 그것들의 양적 측면에 주의를 돌려야 하며 기본적인 양적 분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떠한 질이든지 다 일정한 양으로 표현되며 양이 없으면 질도 없다.≫(≪당위원회의 사업방법 ≫, ≪모택동선집7, 제4권, 1965년판, 2111쪽)
어떠한 사물이나 그것은 다 질과 양의 대립물의 통일이다. 질이 없는 양이란 없으며 양이 없는 질도 없다. 그러면 수학은 순전히 양만 연구하는 과학이 아닌가? 그렇다. 엥겔스는 ≪수학은 수량에 관한 과학이다.≫(≪자연변증법≫,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20권, 601쪽)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근원을 캐본다면 수학에서의 수와 형의 개념은 모두 현실생활 가운데서 개괄해낸 것이며 이런 양은 그 어떤 질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보기에는 순수한양 같지만 역시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수와 부수, 완전수와 분수, 기수와 우수 같은 것들은 모두 질적으로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운데서 가장 순수한 양적 규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적 차이로써 가득차 있다.≫(≪자연변증법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20권)
질과 양의 통일은 또한 양자가 상호 제약하는 데서도 표현된다.
질은 양의 기초이고 양은 언제나 일정한 질의 양이다. 질을 떠난 양은 아무런 의의도 없다. 우리가 양이 얼마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것(즉 질)이 얼마라는 것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질은 양을 결정한다. 일정한 질이 없다면 일정한 양도 없다. 어떤 공장에서는 단순히 생산액과 생산량만 추구하여 제품을 되는대로 만든다. 그리하여 이런 제품은 소비자의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여있게 된다. 일정한 질이 없는 이러한 양은 허위적인 것이다. 다른 한면으로 양은 또 질을 제약한다. 다시 말하면 일정한양이 없으면 일정한 질도 없다. 예를 들면 일정한 양의 건축재료가 없다면 집을 지을 수 없고 일정한 양의 물이 없다면 호수를 이를수 없으며 일정한 양의 나무가 없다먼 삼림을 이를 수 없고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수준이 없다면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할 수 없는 등등이다. 보다시피 일정한 양은 일정한 질을 이루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사물의 도를 잘 파악하여야 한다
사물의 질과 양의 통일을 장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한가지는 사물의 도를 잘 파악하는 것이다.
19세기 러시아의 저명한 작가 끄뢰로프는 ≪제미얀의 국≫이라는우화 한편을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제미얀은 신선하고 맛좋은 물고기국으로 손님을 대접하였다. 이는 원래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가 연거퍼 한대접씩 자꾸 권하는 바람에 손님은 참다못해 좌석에서 빠져나온 후 다시는 그 집에 가지를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떤 사물이든지 다 그 일정한 질의 양적 한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손님을 반기며 열정적으로 대접하는데도 일정한 도를 지져야 한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양적 변화가 사물의 질을 개변시킬 수 없지만 일단 그 한계를 벗어나면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신선하고 맛좋은 물고기국은 두말할 것없이 손님을 대접하는데 좋은 음식이지만 양적으로 너무 많이 권하다보면 손님에게는 도리어 실례로 되고 만다. 자연현상에서나 사회현상에서나를 막론하고 그 어떤 사물이든지 다 일정한 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예를 들면 각종 기체는 ?그 응결점이 있고 각종 액체는 다 그 빙점과 비점이 있으며 매개생물은 다 그 생명의 한계가 있다. 이러한 관절점은 모두 사물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한계이다. 이러한 관절점 내에서 사물은 상대적 안정과 일정한 질을 유지한다. 사물의 이런 특정적 질을 유지하게 하는 이런 양적 한계를 철학상에서의 도라고 부른다. 표준대기앞에서는 섭씨 영도로부터 100도 사이가 물의 도이다. 이 한계를 벗어나면 물이 아니라 얼음이나 수증기로 된다.
우리 나라 고대의 사상가들은 오래전에 벌써 사물의 도를 장악하는 것이 중대한 방법론적 의의를 가진다는 데 주의를 돌렸던 것이다.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않은 것과 같다≫고 말하였는데 이말은 도를 장악하는 중요성을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나칠 것과 미치지 않은 것은 다 변증법이 아니다. 미치지 않아 일정한 도에 이르지 못하면 일정한 사물의 질을 담보할 수 없다. 지나치면 일정한 도를 벗어나게 되어 사물의 질을 파괴하게 된다. 우적인 것을 미치지 않은 것이라 하고 좌적인 것을 지나친 것이라고 한다면 우적인 것도 냐쁘고 좌적인 것도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일으여 좌적인 것이라 하여 우적인 것보다 좋을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좌적인 것이 우적인 것보다는 좋다고 하는데이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지나친 것은 마치 전진하고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일정한 도를 벗어났기 때문에 결국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아주 심각하게 말한 바 있다.
≪촌보를 더 내디디기만하면-동일한 방향에서 한걸음 더 내디딘 것 같지만-벌써 진리는 오류로 변하고 만다.≫(≪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좌익소아병 ≫, ≪레닌선집≫, 한문판, 제4권, 257쪽)
이것은 아주 정확한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물의 도를 능숙하게 장악하는 것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는데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
사물의 질과 양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변화하는 것이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사물발전의 일반적 법칙이다.
헤겔은 이 문제에 언급할 때 통속적이고도 생동한 실례를 많이 들었다. 그는 ≪소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를 들면 밀 한알이 밀더미를 이를 수 있는가? 또 예를 들면 말꼬리에서 말총 한오리를 뽑아내면 몽당꼬리로 될 수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이런 양적 증감에도 그 한도가 있다. 이 극점에 이른 후에는 한알의 밀을 더 놓아도 밀더미가 될 수 있고 한오리의 말총을 더 뽑아도 몽당꼬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한 농부의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한 농부는 자기의 당나귀가 짐을 끌고 별로 힘들지 않게 가는 것을 보고 짐을 조금씩 더 실었다. 그래서 나중에 당나귀는 힘에 부치어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모든 사물의 변화는 양적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양적 변화로 하여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큰 방축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는 말이 있다. 조그마한 개미구멍이 그처럼 큰 방축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홀시해서는 안된다. 그 개미구멍을 없애지 않으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질적 변화가 일어나 방축이 무너지게된다. 헤겔은 ≪한가지 양적 변화가 일어날 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다른 사물이 숨어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교훈적인 말이다. 옛날사람은 ≪미연에 방지하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오류나 나쁜 일이 아직 양적 변화상태에 있을 때에 미리 근본적인 질적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도리는 우리들의 사상수양에도 역시 적용된다.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사물발전의 두가지 상태이다. 양적 변화는 분명하지 않은 점차적인 변화로서 사물의 상대적 안정성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사물의 근본적 성격을 개변시키지 않는다 질적 변화는 점진과정의 중단으로서 사물의 근본적 성격의 변화이며 한가지 질로부터 다른 한가지 질로의 비약이다. 사물의 발전에는 어째서 이런 두가지 상태가 나타나는가? 이것은 사물의 내적모순의 발전정황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제8장에서 모순의 전화를 이야기할 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물의 내적 모순에는 주요한 측면과 차요한 측면이 있다. 사물의 성격은 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있는 모순의 주요한 측면에 의하여 결정된다. 모순의 주요한 측면과 차요한 측면은 통일도 되고 투쟁도 한다. 이런 투쟁이 아직 쌍방의 위치를 개변시키지 않았을 때에는 사물의 성격에 변화가 없으며 사물은 양적 변화상태에 처하여있다. 이러한 투쟁으로 하여 역량관계가 부단히 변화하여 쌍방의 위치를 개변시켰을 때에는, 즉 원래의 주요한 측면이 차요한 측면으로 하강되고 원래의 차요한 측면이 주요한 측면으로 상승되었을 때에는 사물의 성질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리하여 사물은 질적 변화를 실현하여 자기의 타자에게로 전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양적 변화의 지적 변화로의 이행 법칙은 사물의 모순법칙의 구체적 표현이며 전개이며 보충이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데 있어서는 한가지 정형은 단순한 양적 증가와 감소에 의해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위에서 든 말꼬리가 몽당꼬리로 된다는 사실과 큰 방축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는 사실들이 이런 류에 속한다. 어떤 사물은 그 양이 증가되거나 감소되기 시작할 때에는 흔히 양적 변화의 의의를 보아내기 어려우며 일정한 양적 변화를 거친 후에야 그 의의를 똑똑히 알수 있다. 말꼬리의 말총이 상당한 정도로 빠지기 전에는 누구도 그 말꼬리가 몽당꼬리로 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양이 증가되거나 감소되기 시작하자마자 질적 변화가 잇달아 일어나는 사물도 적지 않다. 우리 나라 농촌에는 ≪나귀 한마리가 끌지 못하는 짐을 나귀 두마리는 쉽게 끈다≫는 속담이 있다. 하나이던 것이 둘로 되니 사물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멘델례예프의 원소주기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원소의 성질은 그 원소의 궤도전자수, 즉 핵전하수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것을 원자번호라고 부른다. 수소의 원자번호는 1인데 거기에 궤도전자 하나를 증가하여 원자번호를 2로 만들면 헬륨으로 되며 거기에다 궤도전자 하나를 더 증가하면 리튬으로 되며 궤도전자를 또 하나 증가하면 베릴륨으로 된다. 원자번호의 증가로 하여 원소는 주기적 변화를 나타낸다. 즉 활발한 수소원소로부터 활발하지 않은 헬륨원소로 변하고 다시 금속원소로 변하는 등등이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양적 증가나 감소에 의해 사물의 성질이 개변되는데서 표현될 뿐만 아니라 양적 증가나 감소에 의하지 않고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각종 성분의 내부구성면에서의 변화로 인하여 생기는 질적 변화에서도 표현된다. 물질계통을 그것을 구성한 요소의 양이 증가되거나 감소되지 않는 정황하에서도 단지 그 배열이나 연결이 다름으로 하여 같지 않은 질의기능과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계통공정에는 이른바 월등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부동한 방안과 설계 가운데서 가장 월등한 계통방안을 선택한다는 것을 말한다. 일정한 수량의 병사들은 잔지 그 조직과 배치의 다름에 의해서도 전투력 면에서 질적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화학에서 포도당과 과당은 모두 탄소, 수소, 산소라는 세가지 원소로 구성되었고 그 분자식도 모두 C6H12O8이지만 분자속에 있는 원자의 공간 배열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의 성질이 다른 것이다. 포도당은 알데히드와 다가알콜의 화학적 성질을 가지고있지만 과당은 알데히드의 화학적 성질이 없다. 규모가 변하지 않은 같은 한 생산대이지만 평균주의적 경영관리방식을 개변하고 그 생산대의 생산력수준에 알맞는 생산책임제를 세우기만 하면 사원들의 생산 적극성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 후에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같지 않으므로 서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또한 상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일정한 경우에서의 질적 변화는 다른 한 경우에서는 앙적 변화로 될 수 있다. 이와 상반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본세기 40년대 후에 원자력공업, 전자계산기, 공간기술이 나타났기 때문에 과학기술에 거대한 변혁이 생겼다. 원자력공업의 출현은 원자핵물리학에 대하여 말하면 하나의 질적 변화이지만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제3차 기술혁명에 대하여 말하면 하나의 양적 변화이다.
지금 여러가지 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양적 축적은 또 필연적으로 질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돌파가 나타나게 될 것이며 또 한차례의 과학기술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사물은 양적 변화로부터 질적 변화를 일으키며 질적 변화가 있은 후에는 새로운 질에 기초하여 또 새로운 양적 변화가 시작된다. 이와 같이 반복적으로 순환하면서 사물은 끊임없이 저급적인 단계로부터 고급적인 단계로 전진한다. 이리하여 사물의 발전은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통일로 표현된다.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 법칙은 사물발전의 보편적인 변증법적 법칙이다.
두가지 오류적 경향을 반대하여야 한다
위의 서술에서 우리는,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변증법적 통일로서 서로 구별도 되고 연관도 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의 준비이며 질적 변화는 양적 변화의 필연적 결과이다. 이것은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상호관계에 대한 유물론적 변증법의 정확한 정식화이다. 형이상학은 유물론적 변증법과는 반대로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대립을 절대화하고 양자의 연관을 분리시키다.
그 한가지 표현은 사물의 발전에 양적 변화과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질적 변화가 돌연히 발생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자연과학자 퀴비에의 격변론이 바로 이런 관점의 한개 전형으로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지구는 여러 차례에 재난적인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재난적인 변화가 생길때마다 강물과 바닷물이 범람하고 암장이 사처로 흘러 낡은 생물들이 사멸되고 다른생물들이 이곳으로 옳겨온다. 재난적인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낡은 생물이 부단히 사멸되며 다른 곳의 생물이 부단히 옮겨오는 이런 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다른 지층에서 다른 생물화석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후계자는 이런 관점을 발전시켜 재난적인 변화는 전 지구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모든 생물이 몽땅 사멸되고 하느님이 다시 생물을 창조한다고 인정하였다. 이런 격변론은, 생물의 종은 양적 변화의 축적결과로서 나타났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생물 자체의 발전으로써 생물의 진화를 해석하지 못하고 하느님이 생물을 창조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좌경모험주의자들은 혁명투쟁에서 역량을 축적하는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고 하루아침에 혁명의 승리를 취득할 것을 환상하였던 것이다. 이것도 양적 변화를 부인한 표현의 한가지이다.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시기에도 양적 변화의 필요한 준비과정을 부인하는 이런 사상이 표현되었다. 예를 들면 생산력의 발전에 필요한 양적 축적과정을 잘 예견하지 못하고 생산관계를 급급히 변혁시키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인민공사화운동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이리하여 결국은 조절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우리 나라 대다수의 지역에서는 ≪생산대를 기초로 한 3급소유제≫를 실시하는 것이 현단계의 생산력발전수준에 알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당히 오랜 시기에 걸쳐 이 제도의 안정성을 확보하여야만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시킬수 있다. 생산력의 양적 발전이 일정한 정도에까지 이르러야만 생산관계의 질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주관적 염원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가난한 채로 이행한다≫는 주장은 변증법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를 분리시키는 다른 한가지 표현은 사물의 양적 변화만 승인하고 사물의 질적 변화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사상의 본질적 표현이다.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의 전제로서 양적 변화가 없으면 질적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양적 변화는 어쨌든 질적 변화와 같지 않다. 질적 변화가 없으면 사물의 근본적 변화가 있을수 없으며 사물의 비약도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사물의 산생과 낡은 사물의 사멸도 있을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여 사물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질과 양은 서로 적응된다. 일정한 범위 내에서 양의 증가는 제한이 있다. 새로운 질이 없다면 새로운 양적 변화도 있을 수 없다. 사회주의혁명이 필요한 것은, 즉 사회주의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은 결국 낡은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적 변화만 승인하고 질적 변화를 승인하지 않는 관점을 속류진화론이라고 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이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항하는데 쓰는 한가지 수단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이지만 형이상학의 사상특징은 고립적으로, 정지적으로, 일면적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다. 속류진화론은 표면적으로 발전을 승인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에서는 발전을 부인한다 실용주의자 호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실험주의는 구체적인 사실과 문제를 중시하기 때문에 근본적 해결을 승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금씩 가져오는 진보만 승인한다. ≫ 호적에게 있어서는 ≪조금씩 가져오는 진보≫와 ≪근본적 해결은 물론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진보를 승인한 그 목적은 근본적 해결을 반대하는데, 즉 중국인민이 제국주의, 봉건주의 및 관료자본주의의 반동통치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을 반대하는데 있었다. 이것은 에누리없는 개량주의이다.
우리 나라 신민주주의혁명의 빛나는 승리, 신중국의 탄생 및 구중국의 멸망은 이와 같은 속류진화론에 대한 강유력한 반박으로 된다.
사실이 설명한 바와 같이 구중국에서는 조금씩 가져오는 진보만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자기의 매장자를 만들며 스스로 새 제도의 요소들을 창조하기는 하나 그와 동시에 이 개별적 요소들은 ≪비약≫이 없이는 사물의 총적 정세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자본의 지배를 건드리지 못한다.≫(≪구라파 노동운동에서의 의견상이≫, ≪레닌선집≫, 제2권, 500쪽)
인재로 될 포부를 가진 사람들은 지식의 양적 축적을 중시하여야한다. 본 장의 제목에서 ≪시내물이 모여져야 강과 바다로 된다≫고 말한 바와 같이 어떠한 사람의 성과나 그것은 다 지식의 축적과 갈라 놓을 수 없다. 서특립동지가 일찍 프랑스에서 고학할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당신은 나이가 많으니 머리를 써가며 프랑스어문을 배우느니보다 체력에 알맞는 노동을 하는 것이 비교적 쉽지 않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서특립동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글쎄, 급해말고 천천히 배우면 되겠지요. 금년에 나는 43살인데 하루에 단어 하나씩 배운다면 일년에 365개라, 7년이면 2,555개 단어를 배울 수 있으므로 50살이 되면 프랑스어문을 장악한 사람이 되지 않을가요? 만약 하루에 단어 두개씩 배운다면 46살 반이 되면 한개나라 어문을 장악할 수 있게 됩니다.≫ 그후 서특립 동지는 4, 5년의 노력을 거쳐 끝내 프랑스어문으로 된 과학서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층건물을 짓자면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의 고봉에 오르는데도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 한다. 배움에 있어서는 죄를 부리거나 허영심을 가지지 말고 착실하게 한걸음 한걸음씩 심입하여야 하며 조금조금씩 축적하여야 한다. 이것은 학습에서 성과를 거두는 법칙이다. 빠블로프는 임종시에 청년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과학에 뜻을 둔 우리 나라 청년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순차적으로 점진하는 것이다. 나는 과학사업을 효과적으로 진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 조건을 말할 때마다 격동하지 않을 수 없다. 순차적으로 점진하자, 순차적으로 점진하자, 순차적으로 점진하자! 우리는 이 경험담을 잘 기억하여야 한다.≫
질적 변화는 비약이다
양적 변화가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이것은 일체 사물발전의 일반적 법칙이다. 어떠한 질적 변화든지 그것은 다 점진과정의 중단으로, 즉 비약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비약의 형태 는 다종다양한 것 이 다. 폭풍우와 같은 혁명 전쟁을 통하여 세 개의 큰 산을 뒤엎고 구중국을 신중국으로 전변시킨 것도 비약형태의 하나이고 생산의 발전과 과학기술수준의 제고를 통하여 발달하지 못한 사회주의국가를 현대화한 사회주의강국으로 전변시키는 것도 역시 비약형태의 하나이다. 전자는 폭발식 비약형태라고 하고 후자는 비폭발식 비약형태라고 한다. 사회현상에서 폭발식 비약은 일반적으로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비약형태이고 비폭발식 비약은 비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비약형태이다. 사회주의조건 하에서는 양적 축적만 있고 질적 비약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질적 변화 또는 비약이란 사물내부의 대립물의 전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모순이 존재하면 곧 모순의 통일과 투쟁이 있고 모순 쌍방의 전화가 있으며 비약이 있게 된다. 물론 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는데 인위적으로 비약시키거나 비약의 형태를 폭발식 비약에만 귀결시키거나 철학적 의미에서의 비약을 단순하게 정치혁명과 동일시하고 끊임없이 정치운동을 진행하며 폭풍우를 일으킨다면 일대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로의 발전은 일련의 작은 비약과 질적 변화를 거쳐야 하는데 매개 질적 변화는 다 양적 축적의 결과이다. 이러한 일련의 양적 축적을 거쳐야 나중에 큰 비약이 일어나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관계를 변증법에 따라 처리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형이상학의 두가지 오류적 경향을 반대하고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변증법적 통일을 견지하여야 한다. 우리는 4개 현대화건설에서나 일상적인 사업과 학습에서 이 법칙을 준행하기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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