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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가 4층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지금 종로구청으로 사용 중인데 한 층을 증축했다. | |||
6-7 | 중앙현관이 꽤 넓었고 계단도 넓다. 교실 바닥은 나무이다 | |||
6-6 | 현관에는 나무 깔판이 있어 실내화로 바꿔 신었다. 신주머니 사용. | |||
6-5 | 교복에 흰 칼라를 붙였지. 모자에 교표를 붙였다. 교표에는 한자 壽가 새겨졌다. | |||
| 6 - 4 | 6 - 3 | 6 - 2 | 6 - 1 |
경찰 기마대
학년 | 유정민 | 장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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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서울, 女 담임 입술 옆 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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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부산 용두산 나무에 칠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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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부산 용두산 판자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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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부산 용두산 나무 책걸상 2학기 임시 보성사 후 본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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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본교 5학년 1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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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본교 6학년 3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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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국민학생 2019 03 29
수위(청소)하시는 키 작은 할아버지(할머니) 분유 배급 시 온통 얼굴 머리에 가루가 하얗게 묻었다. 드럼통보다 더 넓은 누런 종이통 안에 우유가루가 가득하다. 미리 예고를 하여서 학생마다 봉지를 가지고 가서 수업 후 가루를 배급받아 집에서 밥을 할 때 넣고 쩌 먹으면 딱딱하지만 달다.
1학년 본교 입학 여자 담임 손 선생님 입술 옆 점, 자기 성은 손(孫)가라고 손을 들어 가르쳐줌.
6,25 한국전쟁 일어난 후 학교에 갔는지 생각이 안 난다. 12월에 피난 인천으로 가서 이모 집에 며칠 있다가 부두로 가서 우선 작은 아가리 배(상륙정)를 우선 타고 조금 바다로 나가 큰 배로 옮겨 탄다. 우리는 엄마 형 나 남동생(젖먹이1949년 3월 생) 4명이 함께 갔다. 형과 나는 작은 배낭을 메었지만 그물망을 잡고 오를 수 있었지만 엄마는 동생을 업고 짐 보따리를 이고 오를 수 없어 아이만 업고 오르고 다른 사람이 짐 보따리를 올려주었다. 대략 보름 쯤 지나 12월 31일 부산 도착, 임시로 어느 극장으로 들어갔다가 날이 샌 후 은행 아버지 직장을 찾아갔다,
2학년 용두산에 임시로 마련한 피난 수송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 정말 교실이 없어 나무에 칠판 걸고 그늘에서 수업을 하다. 산이 진흙 산이라 비만 오면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화장시도 변변치 못했고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이었다.
3학년 판자건물 교실, 책걸상은 없고 거적 깔고 화판 들고 다니며 수업 전깃불은 물론 없어 어둡고 추우면 석유풍로에 물을 데워 먹음, 담임이 어디에서 얻어왔는지 촬영기를 가져와 우리들 제기차기 등을 찍어 교실에서 돌려보기도 하였음.
4학년 학생 수가 늘어나서 새로 지은 교실이고 진흙 땅바닥에 말뚝 박아 책걸상 만들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져 8월 24일 다시 서울 학교로 입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4학년 보성사(?) 지금 조계사 뒤쪽 길 건너 나무로 지은 작은 절에서 임시 수업, 책상이 위로 들어서 열림, 같은 반에 오른쪽(?) 손목이 잘린 친구, 항상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음. 본교로 돌어감, 수업 후 복도 청소 시 양초를 가져가 바닥에 칠하고 걸레로 문질러 닦음.
5학년 1반 김정훈(?) 남자 학년주임, 운동장 조회 때 방송 담당. 안경 쓰고 열성적인 선생님
6학년 3반 박민회(朴旻會) 선생님, 키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하신 선생님, 양복을 자주 입으시고 중절모를 쓰고 다니시다. 주로 밤색 옷을 입다. 목소리도 크고 수업한 후 바로 시험을 보고 짝꿍과 바꿔서 채점한 후에는 기준 점수 이하면 몇 대식 손바닥을 맞았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그때 중학교는 입학시험으로 진학하는 관계로 학교에서도 늦게까지 수업을 하다. 양초를 켜고 수업한 기억은 없지만 양초는 갖고 다녔다. 겨울에는 난로를 피었다. 일제 때 세운 학교라 난방시설이 되어있었지만 지하에 있는 보일러실이 장마 때에는 물이 차오르는 정도가 되어 사용을 못한 것 같다. 소풍을 두 번 갔다. 봄에는 자하문 밖 세검정으로 갔고 가을에는 수유리 화계사로 갔다. 자하문에서 찍은 사진에는 내가 담임 아들과 어깨동무하고 찍었다. 사진을 잘 보면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생각보다 얼굴을 구별할 정도는 된다.
수업 중 옆 여자반 반장이 무슨 쪽지를 가지고 오면 담임이 나가 보고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 반 누구의 여자친구(깔치)왔다고 놀리고는 했다. 그리고 노랑머리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1반은 백 선생님 안경을 쓰시고 좀 마른 편, 2반은 지 선생님 약간 비대하신 분, 4반은 성도 생각나지 않는다. 여자 반은 세 반이었던 것 같다.
6학년 3반 친구는 임동진(입술이 두툼하고 학급 1등), 박세환도 공부 잘했고 둘 다 경기중학교 입학으로 생각됨. 수송국교 친구들 중 누가 어느 학교로 진학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내가 궁금한 친구
한상영(?) 많이 말랐고 몸이 여린 편 도시락 반찬이 항상 좋았음, 생활형편이 우리보다는 많이 나았던 것 같다.
이관영 (2반?) 부산 피난 시 같이 피난 수송학교 다녔고 서울에서도 같이 다닌 것 같다. 성동중학교 진학, 아버지 이학동, 어머니 이름 모름, 할머니도 계셨음, 큰딸 이완희(서울사범고등학교 졸업, 초등학교 교장 역임) 작은딸 이청미(41년생, 이화여고, 스케이트 타다가 넘어져 다리 골절한 일이 있음, 한국외대 서반어과 출신 남자와 결혼, 미국으로 이주) 남동생 이관호, 막내딸 이정희. 우리 아버지 직장 동료, 서울로 올라와 얼마 지나서 은행 그만두고 혜화동 서울대 문리대에서 식당 운영, 종로 5가 거주, 청량리 제기동으로 이사, 관영이는 제화점도 운영하였음.
김호영 5학년(?), 6학년(?) 단짝 친구, 그 당시 귀하던 국산 만년필을 가지고와서 맨날 만지고 고치던 친구. 전차와 누가 빨리 가나 달리기 시합도 하던 일이 생각난다. 경기중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다른 중학교 입학 후 거리가 멀어짐.
이종성(?) 서린여관 아들, 학교 정문에서 똑바로 나와 길을 건너 청계천 건너기 전에 오른쪽으로 긴 한옥이 있었는데 그 집 아들.
나의 이야기
1학년 때에는 중학동(경복궁 동십자각, 삼청동 입구와 안국동 로터리 중간)에 살았다. 아버지가 은행 운전수였기에 집에 차가 있었고 차고도 있었다. 집을 크게 지어 차 2대가 들어갈 차고가 있었는데 실제는 우리 집 한 대만 있었다. 길 건너편에 은행원 사택이 많이 있었고 그 곳에 차를 타는 은행 고위급 직원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1학년 때 나는 사택 옆 골목길을 지나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그러면 경찰기마대 앞으로 지나 학교에 간다. 거리가 멀어야 1km나 되었을까.
부산 피난 때에는 부평동 4가 4번지 커다란 저택이 가운데 있고 주변에 하인들이 살던 집이다. 그곳에 있던 커다란 창고를 개조하여 네 집으로 나누어 피난민에게 빌려준 것이다. 또 다른 작은 하인 집에 방이 둘이 있어 두 가구, 길 벽에 붙은 작은 집에 한 가구 또 피난민이 들어와 길쪽 담장 옆에 새로 집을 지었다. 그 당시 집은 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씩이었다. 겨울에는 너무 추우니까 집 바깥쪽으로 가마니를 쪼개 펼쳐 붙이기도 하였고 뜰 뒤쪽에도 집을 하나 더 지었다. 식수는 우물이 있어 아홉 집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겨울용 연료는 나무 장작이다. 여러 집이 사니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살았다. 철부지 시절 장작더미에 올라가 놀기도 하였다.
4학년 때 다시 서울로 왔지만 중학동 집에는 벌써 다른 운전수가 와 있어 우리는 신설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5학년 봄에 왕십리로 잠시 갔고 또 을지로 집으로 이사를 와 수송국교 5학년부터 중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다니고 군 입대 후 왕십리 행당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행당동에 동화목재소가 있다. 지나가다 보면 아주 굵은 나무가 들어오고 그것을 잘게 잘라 건축용 재목으로 되파는 것이다. 아주 커다란 틀에 나무를 올려놓고 원형 톱이 돌아가면 나무를 실은 기계가 지나가면서 나무가 잘린다. “치애앵~~앵”하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 하다.
나는 수송국교 졸업앨범이 없다. 그래서 혹시나 수송국교에 남아있는지 궁금해 전화를 했다. 없단다. 그래서 졸업장과 생활기록부를 뗄 수 있는지 물었다. 물론 가능하단다. 신분증을 가지고 대한민국 초 중 고등학교에 가면 어디에서나 발급 받을 수 있단다. 그래서 3월 25일 월요일 날 근처 초등학교로 가서 신청을 했다. 이 학교에서 수송국교로 팩스를 주고받는 형식이다. 그러니 시간이 걸릴 수 있다더니 얼마 후 전화가 왔다. 한자 이름을 다시 넣어 보내란다. 내가 다시 6학년 3반이라고 전해주었다. 집에 가 기다리란다. 찾았는데 내가 써낸 생년월일과 다르단다. 그러면 동사무소에 가서 부모님이 나오는 가족관계 증명서를 발급받아 오란다.
시간이 늦어 다음날 아침에 동사무소 가서 이야기하니 두 가지를 발급 받으란다. 나는 이왕 발급 받는 것, 부모님과 형제 가족 전체가 나오는 것과 간단하게 부모님만 나오는 것을 말했다. 그러면 두 가지를 발급 받아 복잡해지는 줄 알고 그럼 한 가지로 가족 전체가 나오는 것 일곱 부를 신청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애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고모 삼촌에 대해 이름도 제대로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어제 신청한 졸업증명서와 생활기록부를 발급 받았다. 놀라지 마시라, 생활기록부에는 1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기록이 하나도 없다. 전쟁 통이었지만 그래도 기록이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언젠가 화재로 많은 자료가 소실되어 없단다. 그래서 직접 수송국교로 가서 생활기록부에 남아 있는 각 반별 전체명단만을 사진으로라도 찍어줄 수 있는가 물었더니 그것도 못해준단다.
사무직원 “요새 개인정보통신보호법이 생각보다 까다롭다”면서 못해주겠단다.
유정민 “아니 이름만 보는 것인데도 안 돼요?”라고 되물으니까
이름이 바로 정보란다. 할 말이 없다. 다시 창고에 내려가서 서류를 들추기 싫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점심시간이 되었으니까. 돌아서 나와 화장실 들렀다가 나오니 우르르 직원들과 어울려 나가면서 그 직원이 나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한다.
수송국교 다닐 때 하교 시에는 학교 앞으로 자전거 장사꾼이 심심찮게 온다. 어린 학생들이 돈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무엇인가를 팔아야하기에 오는 것이다. 자전거 뒤 짐칸에 그냥 깡통 채 미군용 ‘비스킷’ ‘땅콩버터’ ‘절인 양대추’ 등을 판다. 거의 사 먹지는 못했다. 누가 사면 그 더러운 손바닥으로 조금씩 얻어먹고는 했다. 또 연필 장수도 온다. 그 당시 연필의 질이 안 좋아 심이 잘 부러지기도 하고 나무도 질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새로 좋아졌다면서 얇은 판자나 종이 등에 깎은 연필을 팍팍 꽂아도 부러지지 않는다고 보여주면서 광고를 한다. 그것도 돈이 없는 학생들이 잘 사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음악시간이 되면 복도에 놓인 풍금을 주번이 가져다가 수업을 했다. 음악실을 따로 마련하지 못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음악시간에 풍금 건반을 인쇄해 주고 집에 가서 연습해 오란다. 소리도 안 나는 종이에서 건반을 찾아 손가락 연습을 하는 것이다. 소리도 안 나는 종이로 계명을 외어가며 하는 연습을 나는 거의 하지 않았다.
경찰 기마대가 학교 담 뒤쪽에 있다. 마사(馬舍)가 있고 훈련장도 있었으리라. 무슨 행사 때에는 꼭 등장하는 것이 기마대이다. 그때는 말(馬)이 재미있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말머리가 사람 가까이 오면 역시나 피해서 도망을 가야했다. 여름이면 슬슬 말똥냄새도 났다.
경복중학교 2학년 때 수송국교 동창회가 있다고 연락이 와서 참가했다. 중학교 2학년, 여자에 대해 가장 민감해지기 시작하는 때이다. 통 넓은 바지를 한껏 줄이고 다리미질까지 하고 갔다. 모임은 수영장 위의 판자교실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옷 다려 입고 간 생각만 나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는지는 생각이 하나도 안 난다.
학교 정문 앞에 작은 석유 판매점이 하나 있었다. 건물이 이층인데 건물 양쪽으로 길이 나있어 건물폭은 아주 좁다. 길은 넓혔지만 건물주가 제대로 보상을 못 받아 이사를 안 갔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잘 해결되었는지 건물을 허무는데 소방차가 등장 호수의 물 힘으로 건물 2층을 쓰러뜨렸다.
생활기록부
생활기록부를 보니 성적이 정말 가관이다. 아니 이 성적으로 어떻게 경복에 합격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국어 우, 산수 양, 사회 양, 자연 양, 보건 미, 음악 양, 미술 미, 실과 미 이다. 성적이 믿어지지 않아 다시 살펴보니 앞페이지가 87, 뒤페이지가 88이다. 맞기는 맞는가보다. 그래도 허참!
아동생활 종합평가
말이 많고 장난이 심한 편이나 학급에 성의를 내면 열심히 학습함.
기타
교육에 이해있는 가정임
수송초등학교 약사
1922. 04. 01. 수송공립보통학교 설립(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146=2번지)
1977. 02. 09. 제53회 졸업식(졸업생 21,019명 배출)
1977. 02. 28. 폐교
2001. 06. 11 서울수송초등학교 설립 인가(서울특별시 강북구 번1동 456번지)
2001. 09. 01. 초대 박찬훈 교장 부임 및 이선배 교감 외 42명 발령
수유초 290명, 신화초 615명, 신창초 391명 총 1,296 명 인수 시업식
2003. 03. 04 입학식(신입생 382명, 총 57학급 편성)
2005. 02. 16. 제 56회 졸업식(졸업생 305명)
2019. 02. 14. 제 70회 졸업식(졸업생 144명, 총 25,705명)
2019. 03. 04. 입학식(신입생 132명, 총 38학급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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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배를 타고 부산까지 피란가느라 고생많이 하셨겠네요. 부산 피란시절의 학교생활은 저도 비슷합니다. 천막교실에 바닥엔 쌀가마니를 깔았고 한학급 인원이 100명이 넘었었죠. 여름엔 찜통이었고.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국민학교 생활기록부도 발급받아 보다니 참 못말립니다. ㅋㅋ
근데 사실 저도 며칠전 국민학교 찾아가서 생활기록부 발급받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릴때 살던 동네가서 당시 우리집을 찾아보고 싶은데 주소가 전혀 생각이 안 나서 생활기록부에서 주소를 알아보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근데 요즘은 가까운 초등학교에 가서도 신청할 수가 있는걸 처음 알았습니다.
나도 요번에 알았습니다. 서울이야 가깝기는 하지만 그냥 걸어서 가는 초 중 고등학교 아무 곳이나 다 가능하답니다. 생활기록부 한 번 떼어 보세요. 6년치가 다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6학년 것 뿐이더라고요. 신분증 없으면 안 떼어줍니다. 배가 커서 그런지 멀미는 없었어요. 군인이 많아야 수 10명이 타는 화물선에 화물은 하나도 없고 수백명 피난민이 탔으니 식사 및 대소변 등 생활이 더 문제였을 것입니다.8살이니 뭐 고생이란 것도 몰랐어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