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밤 / 김경주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房)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출처] 김경주 시인의 시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밤'|작성자 주영헌
꽃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 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드라이아이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꼈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 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夜景을 다 보여줘 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 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 고대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폭설, 민박, 편지 1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인편이 잘린 외딴 바닷가 민박집,
목단이불을 다리에 둘둘 말고 편지를 썼다
들창사이로 폭설은 내리고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들을 만지고 있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처럼 쌓여갔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쓰다만 편지지로 소금바람이 하얗게 쌓여 가는 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움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쓸쓸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푹푹 끓기 시작하고
방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몸은 피 속에서 눈물을 조용히 번식시켰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 불면은
나 아닌 곳에 가서 쌓이는 가혹한 삶의 은유인가
눈발은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씩 덮어 가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혹성같은 낱말들을
편지지에 별처럼 새겨 넣곤 하였다
■폭설, 민박, 편지 2■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벤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 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조금씩 풀어 넣은 그림들은
모두 내가 꿈꾼 푸른 죄는 아니었는지
새 ·나무· 별· 그리고 눈
사람이 누구하고도 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그러한 것들을 한 몸에 품고 잠드는
머언 섬 속의 어둠은
밤늦도록 눈 안에 떠있는데
어느 별들이 물이 되어 내 눈에 고이는 것인가
바람이 불면 바다는 가까운 곳의 숲 소리를 끌어안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그러나
나무의 속을 열고 나온 그늘은 얼지 않고
바다의 높이까지 출렁인다
비로소 스스로의 깊이까지 들어가
어두운 속을 헤쳐 제 속을 뒤집는 바다,
누구에게나 폭설 같은 눈동자는 있어
나의 죽음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눈동자를 잃는 것일 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프고
눈 안을 떠다니던 눈동자들,
오래 그대의 눈 속을 헤매일 때 사랑이다
뜨거운 밥물처럼 수평선이 끓는가
칼날이 연필 속에서 벗겨내는 목재의 물결 물결
숲을 털고 온 차디찬 종소리들이
눈 안에서 떨고 있다
죽기 전 단 한번이라도 내 심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만 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언젠간 세상을 향한 내 푸른 적의에도
그처럼 낯선 비유가 찾아오리라는 것
폭설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
하늘의 일부분이었던 눈들을 주워 먹다보면
황홀하게 얻어맞는 기분이란 걸 아느냐
해변에 세워둔 의자하나 눈발에 푹푹 묻혀가는 지금
바라보면 하늘을 적시는 갈매기
그 푸른 눈동자가 바다에 비쳐 온통 타고 있다는 것을
목련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12년 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 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 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부재중
말하자면 귀뚜라미 눈썹만한 비들이 내린다 오래 비워둔 방안에서 혼자 울리는 전화 수신음 같은 것이 지금 내 영혼이다 예컨대 그 소리가 여우비 는개비 내리는 어느 식민지의 추적추적한 처형장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 두고, 바닥에 내려놓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댕강 댕강 목 잘리는 소리인지 죽기 전 하늘을 노려보는 그 흰 눈깔들에 빗물이 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카자흐스탄에 간 친구가 설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 무릎팍이 깨져 울면서 내게 1541을 연방연방 보내는 소리인지 아무튼 나 없는 방안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그대라는 봄을 타는지도 모르겠다 비 맞으며 귀신이 자신의 집으로 저벅저벅 문상 간다 생전에 신던 신발을 들고 운다 산에 핀 산꽃이 알토기의 혀 속에서 녹는다 돌 위에 해가 떨어진다 피난민처럼 나는 숨어서만 운다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입는다■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순면을 문지르고 있다
안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죄 많게 그 꽃무늬가 내 볼에 어린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 순간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던 것처럼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으리라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 송이 몇 점 다가와 곱게 물든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맑은 꽃물이 똑똑 떨어진다
눈덩이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 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는다
■나무에게■
매미는 우표였다
번지 없는 굴참나무나 은사시나무의 귀퉁이에
붙어살던 한 장 한 장의 우표였다 그가
여름 내내 보내던 울음의 소인을
저 나무들은 다 받아 보았을까
네가 그늘로 한 시절을 섬기는 동안
여름은 가고 뚝뚝 떨어져 나갔을 때에야
매미는 곁에 잠시 살다간 더운
바람쯤으로 기억될 것이지만
그가 울고 간 세월이 알알이
숲 속에 적혀 있는 한 우리는 또
무엇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냐
모든 우표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연이다
허나 나무여 여름을 다 발송해 버린
그 숲에서 너는 구겨진 한 통의 편지로
얼마나 오래 땅 속에 잠겨 있어 보았느냐
개미떼 올라오는 사연들만 돌보지 말고
그토록 너를 뜨겁게 흔들리게 했던 자리를
한번 돌아보아라 콸콸콸 지금쯤 네 몸에서
강이 되어 풀리고 있을
저 울음의 마디들을 너도 한번
뿌리까지 잡아 당겨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굳어지기 전까지 울음은 떨어지지 않는 법이란다
■오래 전 나는 휘파람이었다■
-1 바다로 가는 길
휘파람은 바람 위에 띄우는 가늘고 긴 섬이다
외로운 이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나무가 있는 그림들을 보면 휘파람을 불어 흔들어 주고
도화지 끝에서 푸른 물소 떼를 불러오고 싶다
대륙을 건너오는 바람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휘파람이었으리라
어느 유년에 내가 불었던 휘파람이 내 곁을 지금 스치는 것이리라
죽어 가는 사람 입 속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의 입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면 나는 잠시 그에게 옮겨가는 것이다
내 휘파람에선 아카시아 냄새가 난다
유년을 향해 휘파람을 불면 꼭 그 냄새가 난다
자전거위에서 부는 휘파람이 내 학업이었다
헌책방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골방에 엎드려 그 책 속에 불어넣었던 휘파람이 숨쉬고 있다 이스트에 부풀린 빵처럼 비 오는 날이면 휘파람은 방안 가득 부풀어올라 천장을 꽉 채웠다
휘파람이 데리고 가는 길로 끝까지 가지 마라 절벽은 휘파람의 성지이다 벼랑끝에서 다친 말을 버리면 말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지막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간다
갈매기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날아간다
등대가 부는 휘파람은 절해고도의 음역이라 흉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래나 물고기들은 그 휘파람소리를 듣고 그물을 피하고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은 내내 이 등대의 휘파람을 들으며 잔다 바다로 가는 길에서 나는 가끔 아버지의 옛날 휘파람소리를 듣곤 했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
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피를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한 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
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 생에서 희박해져가요
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어요
네 음모로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삶이란다
눈이 쏟아지면 앞발을 들어
인간의 방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아버지와 나는 같은 곳에 똥을 누게 되었단다
너와 누이들을 이곳에 물어다 나르는데
삼십년 동안 침을 흘렸단다 그 사이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자국 소리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려요
자기 이빨 부딪히는 소리에 잠이 깨는 짐승은
너뿐이 아니란다
얘야 네가 다 자라면 나는 네 곁에서 길을 잃고 싶구나
엄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