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69
명품이 뭐길래
호주에는 정원을 만들어 암컷을 유혹하는 바우어새가 살고 있다. 최근 이 별난 새는 꽃잎 대신 색이 고운 플라스틱 조각을 물어와 화려하게 정원을 꾸민다고 한다. 인간이 버린 폐기물이 사치를 배운 날짐승의 보석이 되었다.
여성만이 아니라 젊은 남성 직장인들 사이에도 가방 계모임이 있는 모양이다. 결혼할 대상이 생기면 명품가방을 선물하기 위해서란다. 그런가 하면 명품을 빌려주는 회사가 있다.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동창회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쩍거리게 할 수 있다. 호랑이 담배 물던 시절에도 타고 다니는 말에게까지 장신구를 달았으니, 현대인만 겉치레가 유별난 건 아니다.
명품은 품질이 좋고 태가 난다. 하지만 품질이나 디자인을 따지면 이미 명품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가성비 측면에서 보면 짝퉁을 사는 게 현명하다. 품질과 기능에 있어 명품이나 짝퉁이나 도긴개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명품족들은 기를 쓰고 오리지널을 고집한다. 그들이 몰라서가 아니다. ‘좋다’라는 단순한 형용사에 무척 복잡한 서술구조를 달고 있는 것이 명품이다.
명품은 노동가치설을 부정한다. 투입된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면 거래되는 명품 가격은 절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거품 덩어리인 명품은 효용이란 상자에 담긴다. 마르크스가 질겁하는 효용가치설은 ‘인간이 재화를 소비할 때 느끼는 소비자의 주관적 만족도’라고 줄여 말할 수 있다. 문제는 효용의 상자로 명품을 모두 담아내기엔 뭔가 허술하다는 점이다. 명품을 증명하려면 유성 생명체의 타고난 과시욕과 철학의 미로를 그 속에 그려 넣어야 한다.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였던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구분했다. 욕구단계설에 이론적 모순이 없지 않지만, 결핍에도 수준이 있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바우어새처럼 본능적 욕구에 만족하지 않는다. 타자로부터 존경받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 자아실현이란 욕구에 이른다. 매슬로는 후에 또 다른 욕구를 제시했다. 욕구 5단계인 자아성취를 이룬 사람은 타인과 세계에 기여 하려는 ‘자기초월의욕구’가 나타난다고 한다. 허기진 욕구의 극단에 타자와 인류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있어 다행이다.
오늘날의 명품시장이 생긴 것은 프랑스혁명 이후다. 왕실과 귀족들에게 보석이나 생활용품을 공급하던 업자들이 자본을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들에게 눈을 돌렸다. 보석상 까르띠에, 말안장으로 시작한 에르메스, 트렁크를 만들던 루이뷔통 등이 대표적이다. 신분 상승에 목맨 부자들은 비싼 장신구와 옷가지를 몸에 두르고 마치 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허세를 부렸다. 배부르고 나면 존경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구가 용트림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망상적 허영심을 명품업자들이 모를 리 없다. 오늘날 한정판매나 멀쩡한 재고상품을 소각하는 것도 희소성을 부각하려는 그들의 마케팅 전략이다. 이처럼 어떤 상품이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게 되면 이미지가 된다. 명품구매자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사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구 대비 으뜸의 명품소비국이다. 브랜드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계를 모아서라도 루이뷔통 가방을 산다. 명품족들은 자기 내면의 비루함도 가방 속에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방 소비마저 할 수 없는 사람은 명품점을 지날 때마다 더러운 세상이라고 침을 뱉는다. 물론 명품은 죄가 없다. 모든 물건은 인간의 필요에 의한 제품에 불과하다. 문제는 인간이다. 지나친 명품지향 사회는 공동체의 연대를 와해하고 계층 간 위화감을 확대한다. 노파심이 아니다.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은 존경과 분노의 외투가 같은 쇼윈도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수신(修身)보다 제가(齊家)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나는 새도 떨군다는 세도가 부인들이 입방에 오르내린다. 용산에서는 명품가방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세간의 비난이 억울할지 모른다. 하지만 논란의 빌미를 보탠 것만으로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어떤 영부인은 화려한 옷치레가 화근이 되어 고발로 이어졌다. 불우이웃돕기 모금행사에선 진주반지를 돌려 끼는 해프닝에 보는 이를 웃프게 했다. 또 다른 유력 정치인 부인은 법인카드로 한우를 사 먹고 사적 의전을 받았다는 의혹이 일어 수사받는 처지다. 하나같이 바우어새가 웃을 일이다. 그네들에게 자기초월적 욕구는커녕 존경의 욕구라도 있는지 씁쓸하다. 허영과 분별의 철없음이 딱할 뿐이다.
프랑스혁명은 군주의 몰락을 영화처럼 그렸다. 권력자 가족의 언행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지, 여론이 어떻게 굴절하여 분노의 화덕에 성냥을 그어대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사실 사치의 대명사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한 적이 없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도 라 모트 백작 부인의 사기극임이 밝혀졌다. 그녀에게 국고를 탕진했다는 죄가 씌워졌지만, 왕실 예산을 초과한 적이 없었으며 실제로는 소박한 생활을 즐겼다는 일설도 전해온다.
앙투아네트는 세상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터무니없는 누명을 썼다. 그녀에게 내려진 또 다른 죄목이 8살짜리 아들과의 근친상간이었다. 빗자루를 가지고 말타기 놀이하던 루이 17세가 고환에 상처를 입자 약을 발라준 게 빌미였다. 그녀는 단두대에 오르다 실수로 사형집행인의 발을 밟자 죄송하다며 겸손히 사과할 만큼 교양을 잃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우리 여사님들 신발은 어떤 브랜드인지 궁금하다.
번쩍인다고 모두 금이 아니다. 젖은 앞치마를 두르고 라면을 끓여도 기품 있는 사람이 있고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아도 천박한 사람이 있다. 본질에 있어 브랜드는 허상이다. 허영의 신이 명함으로 쓰다 버린 플라스틱 조각에는 명품이란 로고가 새겨져 있다. 허름한 평민의 옷을 입고 머리카락이 잘린 채 기요틴의 칼날을 마주하면서도 끝까지 품위를 가지려 애썼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새삼 소환되는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