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품(元品)」이란 근본을 의미하고 일체의 근본이 되는 원초(元初)라는 것입니다.「무명(無明)」이란 밝지 않은 것이고 일체의 어두운 미혹을 말합니다.
즉「원품의 무명」이란 중생의 일체의 미혹의 근본입니다. 이것을 근본무명이라고도 하고 또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명에 본연적으로 갖추어진 근본적인 번뇌의 미혹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미혹을 자각하는 것조차 대단히 어려운데 하물며 이것을 타파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 원품의 무명을 어떻게 단절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석존 불교의 가르침 상에서, 다음에 니치렌대성인의 어서 상에서 그리고 어법주상인 예하님의 어지남 상에서 배찰하고자 합니다.
먼저 번뇌란 일체중생의 생명에 갖추어진 욕망과 여러 가지 망념(妄念)을 말합니다. 그 수는 8만 4천이라고도 하는데 성불 득도 하는 데에 제일 장애가 됩니다.
천태대사는 불도수행을 방해하는 세 가지의 번뇌를 견사혹(見思惑), 진사혹(塵沙惑), 무명혹(無明惑)이라고 설하셨습니다. 또 원교(圓敎)의 가르침에서는 보살이 단절해 나가는 42위(位)의 가르침 가운데 마지막에 단절하는 무명혹을 원품의 무명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兄弟抄(형제초)』에는「설사 등각(等覺)의 보살(菩薩)일지라도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라 하는 대악귀(大惡鬼) 몸에 들어가, 법화경(法華經)이라 하는 묘각(妙覺)의 공덕(功德)을 저지하느니라. 어찌 하물며 그 이하(已下)의 사람들에 있어서랴.」(어서 980)라고 41위까지 올라간 보살에 대해서 원품의 무명은 대악귀가 되어 보살의 심신에 들어가서 부처의 위(位)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밖의 사람들이 원품의 무명을 단절해 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원품의 무명은 번뇌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인데 다른데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을까요?
『祈禱抄(기도초)』에는「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라는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몸에 들어가서 부처를 적대시(敵對視)하여 설(說)하시지 못하게 했느니라. 소위(所謂) 파유리왕(波瑠璃王)이 오백인(五百人)의 석자(釋子)를 죽이고 앙굴마라(鴦掘摩羅)는 부처를 쫓았고, 제바(提婆)는 큰 돌을 던지고, 전차바라문녀(旃遮婆羅門女)는 대접을 엎어놓고 부처의 자식(子息)이라 하였으며, 바라문성(婆羅門城)에는 부처를 들여보내는 자(者)는 오백량(五百兩)의 금(金)을 징수(徵收)했다. 그래서 길에는 가시덤불을 세웠고 우물에는 분(糞)을 넣었으며, 문(門)에는 빗장을 질러놓고, 음식에는 독(毒)을 넣었으니 이는 모두 부처를 적시(敵視)했기 때문이니라」(어서624)고 원품의 무명은 제육천(第六天)의 마왕이 되어 일체중생의 몸에 들어가서 온갖 작용을 하여 부처를 비방하고 미워하고 해친다고 말씀하시며 석존이 여러 가지 박해를 받은 것이 설해져 있습니다.
제육천의 마왕이란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을 말하는데 불도수행하는 자를 방해하여 생기를 빼앗는 것, 공덕을 빼앗는 것을 일삼고 있습니다.
『兄弟抄(형제초)』에는 「이 세계(世界)는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의 소령(所領)이니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시(無始) 이래(已來) 그 마왕(魔王)의 권속(眷屬)이니라」(어서 980)고 하셨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을 살해하려고 하면서도 자신을 세간에는 생불처럼 보이게 한 고쿠라쿠지(極樂寺) 료칸(良觀)이나 권력의 힘을 빌려 니치렌대성인을 박해한 헤이노사에몬노죠(平左衛門尉) 등은 바로 제육천의 마왕이 몸에 들어가 한 마의 소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이 세간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정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역시 제육천의 마왕의 권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신심을 하여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장애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은 우리들이 마의 권속을 벗어나 부처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마는 거꾸로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御講聞書(어강문서)』에서는「의(疑) 자(字)는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말하느니라」(어서 1829) 고 하셨고, 또『御義口傳(어의구전)』에서는「오천(五千)의 상만(上慢)은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니라」(어서 1732)고 교시하셨습니다.
석존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40여년 미현진실이라는 말에 의심을 일으킨 5천 명의 만심(慢心)의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 법화경을 청문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의심을 갖는다는 것은 성불의 직도(直道)를 벗어나 퇴전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무명을 자르는 이검(利劍)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니치렌대성인께서는 『諸經(제경)과 法華經(법화경)과 難易(난이)의 사(事)』에 「생사(生死)의 장야(長夜)를 비추는 대등(大燈)·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자르는 이검(利劍)은 이 법문(法門)보다 더함이 없느니라」(어서 1468)고 하셨습니다.「이 법문」이란 법화경을 말하는 것으로 법화경 본문수량 문저의 사(事)의 일념삼천의 南無妙法蓮華經가 암야(暗夜)를 비추는 큰 등불이며 원품의 무명을 자르는 이검인 것입니다.
그리고『御講聞書(어강문서)』에「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의 대양약(大良藥)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어서 1848) 고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니치렌대성인을 믿고 제목을 부르는 것이 원품의 무명의 미혹을 타파하는 대양약인 것입니다.
또『當體義抄(당체의초)』에「일묘진여(一妙眞如)의 이(理)라 하더라도, 악연(惡緣)을 만나면 미혹이 되고, 선연(善緣)을 만나면 깨달음이 되느니라. 깨달음이란 즉(卽) 법성(法性)이고, 미혹이란 즉(卽) 무명(無明)이니라」(어서 692)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연이란 정법인 본존님을 믿는 것이고 악연이란 사법인 방법(謗法)엔 연을 맺는 것입니다. 신심을 하고 있어도 탐·진·치의 삼독 강성한 생명과 만심의 생명이 싹트기 쉽고 원품의 무명의 번뇌의 불은 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일련정종 신심 상에서 말한다면 선연(善緣)이란 그저 입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묘법의 이검의 근본인 본문계단의 대어본존님께 참예하고 혈맥부법의 어법주 상인 예하의 어지남을 근본으로 하여 그대로 자행화타의 신심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법주 니치뇨상인 예하는 원품의 무명에 대해서『御義口傳(어의구전)』에는「일념삼천(一念三千)도 신(信)의 일자(一字)에서 일어나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성도(成道)도 신(信)의 일자(一字)에서 일어나느니라. 이 신(信) 자(字)는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자르는 바의 이검(利劍)이니라. 그 까닭은 신(信)은 무의왈신(無疑曰信)이라 해서 의혹(疑惑)을 단파(斷破)하는 이검(利劍)이니라」(어서 1737) 고 말씀하시고, 역시『御義口傳(어의구전)』에「이 본법(本法)을 수지(受持)함은 신(信)의 일자(一字)니라.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대치(對治)하는 이검(利劍)은 신(信)의 일자(一字)니라. 무의왈신(無疑曰信)의 석(釋) 이를 생각할 지어다」(어서176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본존님에 대한 절대 신이야말로 원품(元品)의 무명(無明) 즉 중생의 심저(心底)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의 미혹을 퇴치하는 이검(利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에「신(信) 있고 행(行) 없음은 즉 신(信) 견고하지 않으니, 행(行)을 떠난 신(信)은 연(緣)을 만나면 곧 퇴전하느니라」(육권초 71)고 말씀하신 것처럼 신심이란 신행구족(信行具足)의 신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절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서, 절복도 실제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절복한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말만 붙여보는 절복이 아니라, 절복을 행하고, 절복을 체험하고, 절복을 실천하는 데에 의의가 있으며 거기에 비로소 대어본존의 광대무변한 공덕을 향수할 수 있습니다. (2008년 5월 4일 광포창제회 때, 정도 제87호 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품의 무명을 자르는 이검이란 의심 없는 무의왈신의 신심이며 그 신심은 신(信)과 행(行), 즉 본존님을 마음속으로부터 믿고 근행창제에 힘써 그 공덕을 가지고 절복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어지남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무의왈신의 신심을 가지고 자기의 원품의 무명을 단절하여 2011년『도약․정진의 해』의 삼대활동 목표 달성을 위해 용맹정진 해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