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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충격: 투쟁의 길로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고통받는 사람들은 항상 고통만 받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가끔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왔다. 인간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사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서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문제일 뿐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중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민주를 지향하는 사회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봉건시대 이래
잔존해오고 있던 이러한 억압, 피억압의 관계를 우리는 불식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아직도 저 '노예의식'의 찌꺼기, 깨어나지 않는 혼미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사회적 민주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한 인간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억눌리는 고통에 찬 현실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리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따라서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도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정신의 싹을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자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무조건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모르는
주체성을 빼앗긴 정신적 노예로서 길들여지는 것이다.
등 어루만지고 간 빼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강한 자들은 이 길들여진 양들에게
'착실', '겸손', '온건', '성실', '적응성 있다' 하는 등의 온갖 아름다운 찬사를
퍼부으며 환영하고 칭찬하면서 최대한으로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털을
뽑는다. 고통받는 인간은 한동안은 얼떨떨하여 그가 고통을 당하는지 털을
뽑히는지 모른다. 설사 어렴풋이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다만 생존하기
위하여 현실의 부당한 행태와 그로부터 오는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때때로 무언가 '부당하다'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역시 자신은 '무력'하며 그것은 시정될 길이 없으므로 그는 곧 머리를
흔들어 그런 건방진 생각을 털어버린다. 인내는 그의 영원한 금과옥조로 된다.
그러나 억압과 혹사,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이 그가 참을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립을 위협하게 될 때 잠자던 그의 비판의식은 돌연 고개를
쳐들어 절실하게, 부지런히 활동을 개시한다. 고통이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그가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 한 점에 다다랐을 때 그는 비로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무엇이 추잡한 것인가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자존심이 되살아나고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한다. 저항이 시작된다. 그것이 철저해질 때 그는 이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현실의 질곡이 결코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금성철벽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전태일의 경우 우리가 앞에서도 보아왔듯이 그는 어려서부터 가장 철저하게
버림받은 생활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무수히 참기 어려운 고통과 학대를
거쳐왔으며 점차로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현실의 횡포에 대한 반발하고 저항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특히 그가 재단사가 될 결심을 하던 무렵에는
약자인 노동자들이 강자인 기업주에게 당하는 억울함을 시정해보겠다고는
결심까지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까지도 아직 그는 정신적인 노예상태를
청산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끼는, 길들여진 양으로 남아 있었다.
1967년 2월 23일자의 그의 일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내일부터는 내가 힘 닿는껏 열심히 일해서 주인의 공을 갚고 이 해 안에 완전한
재단사가 되자(강조는 지은이).
이 일기를 쓰기 이전에 벌써 그는 업주들이 약한 입장에 있는 직공의 '피땀
흘린 대가'를 정당하게 주지 않고 가로채는 데 대하여 '억울하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서 그는 '주인의 공을'갚겠다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크게 보아
기업주란 직공들을 먹여 살리는, 은혜를 베푸는 존재이며, 직공들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동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그러한 기업주들의 선전,
이 사회의 통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시다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이때까지는 아직도 그것이 기업주가 책임질 일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직하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모든 고통이 직접적으로는 바로
기업주들의 비인간적인 횡포와 학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아직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열심히 일해서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고."라는 식의 생각을 품기 쉽다. 놀라운 것은 오히려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였던 전태일이 어떻게 이 노예사상을 극복하고, 현실을 주눅들지 않는
눈으로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던가 하는 것이다.
재단사가 되고 난 뒤부터 그는 부쩍 집에 돌아와 밤늦게 밥상머리에 앉아
어머니에게 시다들의 딱한 사정 이야기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무렵 어느
날인가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그날 낮에 태일이
작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시다 하나가 일을 하지 않고 자꾸만 머뭇거리고
있다가 태일이가 쳐다보니까 그만 와락 울음을 터뜨리면서, "재단사요, 난 이제
아무래도 바보가 되나 봐요. 사흘 밤이나 주사 맞고 일했더니 이젠 눈이 침침해서
아무리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도 않고 손이 마음대로 펴지지가 않아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평화시장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한창 발육기에 있는 어린 여공들이
가혹한 노동조건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할 수 없게 되면 기업주들은 도리어
게으름 부린다고 나무라기 일쑤였으며, 병이 깊어져서 아주 일을 못하게 되면
치료는커녕 사정없이 해고시켜버리는 것이었다. 몸이 아픈 여공들이 이렇게 태일에게
통증을 호소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돈을 털어서 약을 사주거나 여공이 할
일을 자신이 대신하거나, 그럴 형편이 못되면 그저 참고 일하라고 달래는 것뿐이었다.
만약 업주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하면 도리어 그 여공에게 피해가 갈 뿐이므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이런 사정이 그를 몹시 괴롭혔다.
이러한 괴로움은 그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1968년 봄에 그와
알게 되었던 한 재단사의 말에 의하면, 전태일의 첫 인상은 무엇인가 골똘한
상념에 짓눌려 있는 듯한, 매우 어둡고 침울한 얼굴이었다 한다). 이 당시의 그의
인간적인 괴로움에 대하여 전태일은 글 하나를 남겨놓고 있다. 이것은 그가
소설작품 구상형식으로 그의 일기장에 적어둔 글이다.
마루에 앉아서 그 어떤 심각한 생각 속에 잠긴 그
시내 중부시장, 그의 직장에서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반성해보는 것이다. 5번
미싱사가 그 가냘픈 소망을 자기에게 이야기하던 때의 상태를, "재단사요,
어디든지 주일날마다 쉬는 데를 좀 알아봐주세요."
"글세, 보세공장 같은 데 말고는 어디 그런 곳이 드물 거요. 요행히 믿는 사람이
공장을 차리고 있으면 되겠지만, 어디 그런 집엔 자리가 잘 비지 않으니까.
하여튼 빨리 알아보도록 힘써 보지요."
이렇게 무성의하게 답하는 그에게, 5번 미싱사는 그 자리에서 표시할 수 있었던
가장 순박한 감사를 표하지 않았던가?
그는 어디에 알아보겠노라고 이야기는 했지만, 막상 희망을 걸고 알아볼 곳은 없다.
이런 나날의 괴로움이 되풀이되었다. 이제 전태일의 머리 속은 기술자가 되어
돈을 벌겠다든지, 대학교를 가겠다든지 하는 생각보다도 눈앞에 매일매일
부닥치는 동료직공들의 딱한 사정을 어떻게 해결해주나 하는 생각으로 꽉
매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다가
왈칵 토해내었다. 각혈이었다. 태일이 급히 돈을 걷어서 병원에 데려가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었다. 평화시장의 직업병 중의 하나였다. 그 여공은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태일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각혈한 한 여공은 평화시장 생활 몇 년에 그 동안 번 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고치기 어려운 병만 얻고 거리로 쫓겨난 것이었다. 그야말로 '밑지는
생명'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길은 십중팔구 젊디젊은 나이에 썰렁한 판잣집 방구석에
누워서 치료 한 번 변변히 못 받아 죽어가거나, 아니면 요행 살아남아도 폐인이
되는 것밖에 없었다. 누가 알아주랴. 아무리 그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죽어간다 한들 불행한 가족들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돕기 위하여 혹은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하여, 남들이 한 창 까불고 뛰놀고
배우고 할 나이 때부터 잠 한 번 푹 못 자고 주린 창자 한 번 양껏 채우지 못하고
어두운 뒷골목에서 연약한 허리가 꺾어지도록 일만 해온 그녀가 이제 명랑하게 한
번 사는 것처럼 살아보지도 못하고, 캄캄한 절망 속에서 죽어가야 한다. 그 사실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태일의 가슴은 통곡과 분노로 들끓었다. 그 시각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주목하지 않았어도, 아니 모두가 그것을 외면했어도
전태일의 작은 가슴 하나만은 그가 일기장에다 아무렇게나 자주 낙서했듯이 "왜?
왜? 왜?."하고 울부짖다가 파열했다.
이러한 여공들의 참상은 전태일이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후로도 그의
기운이 약해질 때마다 끊임없이 그를 일깨우고 쇠잔해가는 투지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우리가 이 책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지만,
그가 깊은 좌절에 부딪쳐 죽음과 같은 번민 속에 빠져 있었던 1970년 8월 9일의
일기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조금만 더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이 글은 뒤에서 다시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지만, 삼각간 기도원에서 쓴 글이다.
평화시장에서 멀리 떨어져서 몇 달이 지났을 때이지만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에게 쏠리는 그의 마음은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고 부르짖을 정도로
안타깝고 초조하고 절절했던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다시 본줄거리로 되돌아가자.
피를 토한 여공이 전태일에게 준 깊은 충격은 그로 하여금 이제까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엄청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죽어가는 저 여공들을 살리자.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고 삶의 모든 기쁨과 보람을 빼앗아가며, 우리를 비정한
현실의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보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기어이 해보자.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지 없는지를 가리기에 앞서서 그는 우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절실한 양심의 목소리에 분연히 일어섰다. 지금껏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이제는 내버려두고 당하고만 있기에는 너무나 억울하여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되든 안되든 한 번 바로 잡으려고
해볼 수밖에 없는,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대적인 과제가 되었다. 훗일 그는
근로조건 개선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노동운동에 손대지 말라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에 대하여, "이 일은 안할 수 없는 일이니 되든 안되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고 대답하곤 하였다.
이제 태일에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그 전에는 드물었던 아버지와의 대화가
잦아진 것이다. 밤마다 집에 들어오면 저녁 먹을 생각도 않고 아버지가 알고 있는
노동운동에 관한 모든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가 생전 처음으로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이 필요하며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게 된 것도, 또 노동자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이 법적으로
인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모두 아버지의 체험담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이 무렵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이번에는 전태일 바로 그 자신에게
일어났다. 직장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재단사로서의 생활에 길어지면서부터 그는 어느샌가 피곤해서 견디지 못하는
어린 시다들을 일찍 집에 보내주고 밤늦도록 혼자 작업장에 남아 시다가 할 일을
대신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하루는 그날 역시 몸이 아픈 아이가 있어서 모두
먼저 내보내고 혼자 남아 작업장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업주에게 그만
들켜버렸다. 업주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어서 태일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기업주가 불쾌한 낯빛으로 "재단사는 재단사가 할 일만 하지 왜 시다들의
일까지 참견하느냐? 자꾸 그러면 시다들의 버릇이 나빠진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 업주가 다시 밤늦게 작업장에 올라가보니 여전히 태일이
혼자 남아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제 일껏 주의를 주었는데도 왜 또 마음대로 일찍
내보냈느냐?" "죄송합니다. 며칠 전 밤일하고 난 뒤부터 하도 피곤해 하길래
애처로워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애들 일할 만큼 제가 대신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음대로 해! 주인 말 안 듣고 그렇게 제멋대로 하는 재단사하고는 나도
같이 일할 수 없으니 내일부터는 나올 필요 없네." 업주와 재단사 사이에 이런
따위 말다툼이 몇 번 오가고 나서 그는 간단히 해고당해 버렸다.
원래 업주는 태일을 곱게 보지 않았다. 재단사가 미싱사와 시다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생각해주는 것이 업주에게 이로울 리 없었던 것이다. 그저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 하는 종업원이 업주에게는 가장 반가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놈의
재단사는 어찌된 셈인지 아무 때나 시다가 좀 아프기만 하면 약방에 데려간다고
자리를 비우기 일쑤고, 애들에게 밤일 좀 시키려고 하면 번번히 낯을 찌푸리고
하니 그러던 판에 때마침 적절한 트집거리가 생겼으니 업주는 이때다 하고
그를 내쫓았던 것이다.
해고당한 사실 자체는 태일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평화시장에서 그
정도의 재단기술이 있으면 일자리는 아무데서나 구하기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바닥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베푸는 것까지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가 처음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때의 일을 생각했다.
그때 그는 재단사로서 약한 직공들을 돕고, 불쌍한 '시다'들에게 잘해주자고
마음먹었던 것이 아닌가? 재단사가 되면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온정을 베풀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었던 것이 아닌가? 주인이 자신에게 차마 그것마저도 못하게
막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여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자신이 이제껏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그는 다른 직장에서 옮겨 여전히 재단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전태일은 이미 어제까지의 전태일이 아니었다. 그는 낮이면
직장에서 재단사 친구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며 '바보회'를 조직하는 조직자였고,
밤이면 그의 판잣집에서 '근로기준법' 조문을 뒤지며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내일의 밝은 노동조건을 꿈꾸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3부 바보회의 조직
노동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어울리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공정하며 상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사지며,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회보장 방법으로써 보충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여기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 23조의 3, 4 항)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인 제도 및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하는 휴식과 여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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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로기준법의 발견
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 씨는 젊은 시절에 대구에서 어느 방직공장에 다녔는데,
어느땐가 대구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게 되어서 그 파업에 가담하였던 경력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해방 직후의 혼란기여서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상수 씨는 이때 평범한 노동자로서 그의 공장에서
있었던 파업에 가담하였을 뿐이고, 파업을 주도하는 무슨 대단한 간부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파업에 비교적 열성적으로 가담한 편이어서 파업이
오래 끌게 되면서는 일종의 하급 연락원으로서 싸우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의 모든 노동운동이 그러했듯이 전상수 씨가 가담하고 있던 파업도
기업주와 경찰의 이중탄압을 받아 꺾여버렸다. 회사측에서는 새로 직공들을
모집하여 파업을 깨려하였는데, 파업노동자들이 완장을 두르고 공장문 앞에 진을
치고 막아 서서 새로 온 일꾼들을 돌려보내고 하며 버티어서, 파업은 한 달
넘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회사측이 파업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끝내 듣지 아니하고 공장문을 닫고 계속 버티는 바람에 먹고 살 것이 당장 없었던
노동자들이 동요되었고, 그 위에 경찰이 파업주동자들을 검거해버리는 바람에
파업이 결국 깨어졌다고 한다.
전상수 씨는 아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그는 그 시절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던 사람들이 예외없이
일생을 그릇치는 피해를 당하는 것을 무수히 목격하였던 것이다. 그의 세대
사람들에게는 그러기 때문에 '노동운동'이란 입밖에 내기도 꺼려지는 금기였다.
전상수 씨는 아들이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일이 처음으로 그에게 "아버지 옛날 얘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하였을
때 그는 굳은 표정으로 그런 것은 왜 묻냐고 하면서 일체 대답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아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의외로
깊고 집요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생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며칠째 계속하여 제발
좀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는 것이었다.
전상수 씨는 생각을 달리하였다. 이 정도 되었으면 이제는 자기가 얘기
안해준다고 영영 모를 리도 없고 하니 차라리 모두 다 아는 대로 이야기하여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또 노동운동을 하면 장래 어떤 화를 입게 될 것인지도 알려주어 이
기회에 아주 단념하도록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이렇게 하여 어쨌든 태일은 아버지로부터 노동운동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버지의 결론은 물론 언제나 뻔한 것이었다. 이만저만하니
일찌감치 단념하고 기술이나 열심히 배웠다가 나이 서른 넘어서 무엇을 하든 네
마음대로 해보라. 이런 말이 나올 때 전태일의 대답은 으레껏, "제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다음에 혹 필요하게 될까 싶어 그냥 알아두려는
것입니다"라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부자간에 말이 잘못되어 언성을 높이게라도
되면, 그는 "아버지가 못한 일인 내가 꼭 해내야 되겠다"고 하기도 하였다.
태일은 아버지의 얘기를 듣게 되면서 차차로 노동운동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가를 짐작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옛날 자기들이 파업자금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여 실패한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운동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하였을 때에는 무척 실의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얘기로 용기가 꺾이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강렬한 용기와 새로운
투지를 얻게 되었는데, 특히 아버지와의 얘기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의 전신에 새로운 희망과 확신과 환희가
벅차올랐다. 근로기준법의 발견은 실로 그의 운명을 좌우한 중대사건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킴을 목적으로"하는 법이라고 그 법 제1조에 못박혀 있다. 이제껏
'모든 환경으로부터 거부'당하며 살아온 전태일에게는, "근로자의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기 위하여 법률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암흑의 동굴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발견한 듯한 놀라운 환희였다. 근로자에게도, 모든
것을 빼앗긴 지지리도 천한 핫빠리인생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는 있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눈물겨운 자각이야말로 자유를 위한 모든 저항의 시초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것은 일순간에 곧 저주받은 현실에 대한 무서운 분노로
변하여 끓어오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근로 기준법 제 42조,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 8시간, 1주일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단, 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을 한도로 한다"는 규정을 보았을 때, 전태일은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또 제 45조,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는 구절을 보았을 때는? 하루에 14시간,
1주일에 98시간 이상의 노동이 어디에서나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던 평화시장의
현실 속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속만 태우던
그에게 이러한 발견은 실로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그뿐인가? 유해위험작업에 관한 규정(43조), 여공에 대한 월 1일의
유급생리휴가(59조), 18세 미만의 어린 근로자들에 대한 교육시설 규정(63조),
건강진단(71조), 재해보상(제8장), 여자와 18세 미만 근로자에 관한 야간작업 금지
규정(56조) 등등의 꿈같은 신천지가 눈앞에 열릴 때, 전태일은 그 모든
구정들과는 너무나도 어긋나게 벌어지고 있는 평화시장의 비인간적 노동현실에
대한 분노가 새삼스럽게 끓어올랐다. 근로기준법은 이러한 규정들이 실제로
지켜지도록 하기 위하여 근로시간인 7시간(경우에 따라서는 9시간)을 지키지 않을
때는 그 사용주는 2년 이상의 징역이나 2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며, 또 제 108조에는 근로감독관이 이 법에 위반된 사실을 알고도 고의로
묵과할 때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몇 년 동안 일하는 사이에 근로시간
같은 것을 아예 완전히 무시되어 버리고 있는데도 그 때문에 업주가 처벌을
당했다거나 근로감독관이 문책당했다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껏 '이렇게 좋은' 규정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직장에서는 주인이 맘대로
하는 것인 줄만 알고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속아 살아온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였다.
새로운 전망이 보일 때 사람들은 현실을 보다 철저히 반성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오늘의 현실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조만간에 다른 것으로
고쳐질 수 있는 것이라고 확인할 때 분노하는 자의 가슴에 타고 있던 불씨에는
기름이 부어지고 저항하는 자의 팔뚝에는 뜨거운 핏줄이 솟는 것이다. 전태일은
이제 그때까지의 자신이 '바보'였다는 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또 나라의
법으로까지 보장되어 있는 보다 나은 근로조건을 쟁취하지 못하고 죽은 듯이
혹사당하고만 있는 평화시장 일대의 모든 노동자들이 다 '바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바보'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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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단사 친구들
1968년 봄 평화시장 재단사인 김개남(가명)은 전태일을 알게 되었다. 당시 태일은
한미사를 그만두고 딴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랜 겨울이 끝나 바깥 세상은
화창한 새봄이 와 있었지만, 그들은 어두침침한 평화시장 2층 복도에서 만났다.
전태일은 머리를 짧게 깎은 '스포츠가리'를 하고 거무죽죽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김개남은 새로 사귀게 된 이 평범한 재단사 친구의 얼굴이 무엇인가
무거운 고뇌에 짓눌려 있는 듯한 어두운 인상이라고 느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무언가 넋을 잃고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 같기도 하였다.
개남과 태일은 작업장이 가까이 있었던 관계로 그 뒤로도 자주 마주하게
되었다. 개남은 만날 때마다 태일이 무슨 두꺼운 책을 항상 옆에 끼고 다니는 것을
보고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주위에서 들리는 평으로는 이 '특이한 친구'는
"여공들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이라 하였다.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잦았던
것이 차차로 깊은 교우관계로 발전해갔다. 그들은 점심시간에 근처의
간이식당에서 30원짜리 우동을 함께 들기도 하였고, 서울음대가 내려다보이는
평화시장 2층 복도의 창가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각자의 가정환경이나 자라온 배경에 관한 얘기들이, 차차로는 나날이 고달픈
노동에 대한 또는 세상의 이런저런 모습에 관한 얘기들이 그들의 짧은 작업여가를
메꾸어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개남은 태일이 평화시장 3만 노동자들이 다 같이 당하고 있는
작업환경이나 노동시간 문제 따위에 '이상하게도'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그이 표정을 어둡고 무겁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의 이야기가
근로조건에 미칠 때면 평소에 말수가 적고 침착한 편인 태일이 얼굴이 홍조를
떠올리며 열기 띤 어조로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을 개남은 자주 보게 되었다.
언젠가는 태일이 근로기준법 조문을 보여주며 1주일에 한 번씩 딱딱 쉬게 되어
있고 아이들은 야간작업 시켜서는 안되고 야간작업하면 수당을 더 주게 되어
있는데 평화시장에서 언제 그런 것 지켜지는 거 봤느냐고 하면서 열을 오릴 때에
그 말을 듣고 있는 개남 자신도 몸이 분노로 떨리는 듯한 것을 느꼈다고 한다.
여지껏 그저 빨리 기술만 익힐 것을 목표로 살아왔고 노동조건 문제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던 개남도 태일과의 대화가 거듭되면서
점차로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각도에서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1968년 말경이라고 개남은 기억한다. 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재단사들의
모임을 만들자고 제의해왔다. 우리들 근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떼어놓고 보면 가진
것 하나 없는 힘없는 존재들이지만, 뭉쳐서 싸우면 우리도 큰 힘을 낼 수 있다.
근로조건 개선이 쉬운 일은 아니나 재단사들 몇 명이라도 조직을 가지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노력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 다는 안된다고 해도
적어도 근로기준 조문 몇 개는 그대로 지켜지도록 만들 수 있다. 정 업주들이
말을 안 들으면 평화시장 3만 근로자가 일제히 파업을 해버리거나 데모를 하거나
하면 저희들이 안 들어주고 배겨낼 재주가 있겠느냐. 이러한 것이 태일의 이야기
취지였다.
그 말을 들으며 개남은, "야, 너무 커다란 것 아니냐?" 하는 섬찟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얘기는 좋은 얘기'이고 또 '그렇게 한번
해보고 싶은'마음도 솟구쳐 올라 좋다고 찬성을 했다.
그들은 곧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의논으로 들어갔다. 먼저 모임의 성격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야기되었는데 처음부터 노동운동단체로 내걸면 겁들을 내고
꺼릴 테니 우선은 친목단체로 해두자고 합의가 되었다. 사람 모으는 문제는 둘이
힘닿는 대로 각자 아는 재단사들을 규합하기로 하되 친목회를 조직하면 서로
어려운 일 있을 때 도와줄 수 있고, 특히 직장을 옮기고 싶을 때 서로 정보를
교환하여 알선해줄 수 있다는 취지로 설득시켜 모으기로 하였다. 다음 모임의
운영문제에 있어서는 우선 모일 장소가 걱정이었다. 개남은 방 하나를 얻어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방이 너무 비좁았고, 태일의 집은 평화시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무서워 거기서도 모일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비싼 찻값을 물더라도 시장 근처의 다방에서 모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모임에 드는 비용도 많아질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태일과 개남이 부담하기로 하였다. 태일의 말이 새로 가입하는 회원들에게 돈
부담을 시키면 회사 잘 안될 것이라는 것이다.
한 사나흘만에 10명 남짓한 인원이 모아졌다. 태일이 6, 7명, 그리고 개남이
3명을 모았다. 모집하다 보니 현재 직장을 가지고 있는 재단사들은 일에 쫓겨 잘
응하지 않았고 주로 직장을 옮기려고 잠시 쉬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태일도
그때 마침 직장을 바꾸려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첫 번째 회합은 동화시장 아래 은하수 다방에서 열렸다. 컴컴한 다방 한
구석자리에 그들은 몰려앉아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얼굴을 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화제는 자연히 누구누구를 아느냐는 식으로 시작되어 어느 공장은
어떻고 그곳 주인은 사람이 어떠하며 그곳은 임금이 어떠하다는 따위의 얘기가
나오고, 이제는 우리가 기왕에 친목단체로 모였으니 앞으로는 직장관계에
서로서로 협조하자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별 것 아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태일과 개남은 줄곧 주위 손님들이 이야기 내용을 들을까봐 신경을
썼다고 한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모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태일이 일어나서 "앞으로 우리가
친목을 도모하되 개선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도 그렇고 평화시장 일대의 3만 명
직공들이 다 혹사당하고 있으니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 다음 기회에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자"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모인 사람들은 이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회합이 끝난 뒤 한 재단사가 태일에게로 다가와 악수를 청하면서
"좋은 얘기를 했다. 나도 직장생활 하면서 느낀 것이 많으니 나중에 한번
이야기해 보자"라고 하였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이 날의 찻값은 태일이 전액
부담하였는데 그 뒤로도 번번이 그가 대부분의 찻값을 부담하였다. 그 얼마 저
그는 구로동의 어느 맞춤집에서 일하고 나오면서 월급을 탄 돈이 마침 있었는데
그 돈이 거의 이러한 찻값에 다 들어갔다고 한다.
두 번째 회합은 첫 번째로부터 한 주일 후에 역시 은하수다방에서 열렸다.
먼젓번에 모였던 사람들이 전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태일이 뜻하던 대로
근로조건 개선에 관한 얘기가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태일이나 개남이나
모두 이런 식의 회합을 진행시키는 데에 익숙하지 못한 처지였으므로 모임은
산만한 화제가 오가는 가운데서 별다른 성과없이 끝났다. 가끔 태일이 열변을
토할 때에 모두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듣고 있는 정도였다.
대부분이 지금껏 자기 눈앞에 닥치는 일상적인 문제만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이리라. 그들에게는 그들이 몇 년을 하루같이 겪어왔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과
생활의 고통에 대하여 새삼 분노를 터뜨리는 태일의 열변에 감동되기에 앞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지 알 수 없다는 식의 당혹감이 일어났던지도 모른다.
이러한 회원들의 소극적 태도는 조금씩 차차로 나아지기는 했으나 크게 보면
바보회가 해체될 때까지 그대로 계속되었고, 이것이 태일을 몹시 실의에 빠지게
했다. 그는 모든 재단사들이 자기 마음과 같지 않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까웠고
노동운동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더욱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는 가운데에서 태일은 하나의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거액의
돈을 마련하여 평화시장 안에 모범적인 업체를 만들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노동자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면서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업체들이 그 뒤를 따르도록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화려한 공상에 잠기다가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돌아올 때에는 암담한 절망감과 함께 또다른 엉뚱한
생각이 불현듯 고개를 쳐들기도 하였다. 그것은 정 안되면 내 한 목숨 바치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내 한 몸이 죽어 없어져야 일이
이루어질는지도 모르겠다는 무서운 생각이었다.
재단사들의 모임이 시작된 이래로 태일과 개남은 거의 매일같이 평화시장 2층
복도에서 만나서 서울음대 쪽을 창밖으로 내려다보며 머리를 맞대고 모임의
운영과 근로조건 개선 문제를 이야기하였는데 둘은 모임이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고 탄식을 하면서 모범업체를 만들어보자는 구상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보다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말이 미치면 마주 쳐다보며 "이게 원래
우리 힘으로 될 일이 아니지야."하며 허탈하게 웃기가 일쑤였고, 어떤 때는
태일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 두 목숨 없어져야 근로조건 개선이 이루어진다"고
말하여 개남이 "야,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다 하나."하고 섬찟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태일의 비상한 열의로 재단사 모임은 계속되어 1969년
6월말 경에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가지기로 되었다. 그 사이에 드문드문 있었던 몇
차례의 모임에서 태일은 근로기준법의 조문을 하나하나 회원들에게
설명해주었는데 그것이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는지 그들도 점차로 태일의 이야기에
호응하기 시작하여 창립총회가 열릴 때쯤 해서는 벌써 대부분의 회원들이
일반근로자들에 비하여 훨씬 노동문제에 민감하게 되었고, 모임의 성격도 스스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단체쯤으로 생각하게끔 되어 있었다. 다만 문제는 회원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 어떻게 근로조건 개선을 이룰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고, 이 의문을 아무도 설득력 있게 풀어줄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창립총회는 남들의 눈을 피하여 덕수중학교 근처의 어느 허름한 중국음식점
방에서 열렸다. 태일의 제의에 따라 명칭은 바보회로 부르기로 결정되었다.
얼마 후 그들은 창동 태일이네 집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서 밤을 새우며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토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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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보회의 사상
왜 전태일은 근로조건 개선을 목표로 하는 재단사모임의 이름을 바보회로
하자고 제의하였는가? 또 어째서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던 것인가?
전태일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기계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이다. 이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래야만
언젠가는 우리도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 또 그는 이런 이야기도 하였다.
재단사 모임을 시작하면서 그는 나이가 든 선배 재단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청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뭘 안다고 너희가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려 하느냐?"고 막으면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설치는 놈은
'바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우리가 한번 바보답게 되든 안되든
들이박아나 보고 죽자. 이것이 그의 제안의 내용이었다.
태일의 이러한 설명이 끝나자 좌중에서 일제히 박수가 터져나왔다. 만장일치.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고 곧 그것이 한 두 사람의 찬성발언을 거쳐 전체 의사로
채택되었다. 태일의 설명은 그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음, "좋다, 우리는
바보다!"하는 어떤 법열과 같은 감동과 연대감이 각자의 가슴속 깊이에서부터 뜨겁게
응어리져 올라와 소리 없이 함성으로 그 자리를 메아리쳤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바보'로 살아오다가 또 다른 뜻의 '바보'로 새출발을 한 것이다.
누가 바보이며 누가 바보가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뜻하는가? 남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사람, 남의 피땀의 성과를 가로채는 사람, 남을
속이며 남으로부터 절대로 속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남에게 손해를
끼치며 남으로부터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 그리하여 돈을 벌든지 권력을
잡든지 하여간에 '출세'를 해서 세상 사람들의 찬탄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명예롭게'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이른바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들이다.
이런 '똑똑한 사람' 말고 또 한 부류의 '약은 사람', '현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있다. 그들은 '현실과 타협'할 줄 알고 현실에 적응할 줄 아는, 이른바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다. 강자에게 절대로 저항하지 아니하고, 어떤 부당한 취급을 당하더라도
고분고분 고개 숙이고 받아들이며, 반대로 약자 앞에서는 허리를 뻣뻣이 펴고
헛기침을 한다는 것이 그들이 처세철학 제1조이다. 그들의 사전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강한 자에 대한 저항이라는 말이 없다. 일제 36년의 억압과 지배의 현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격동, 그리고 6^3456,12,15^의 혼란을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남았던 기성세대는 이러한 비굴한 처세철학을 뼛속까지 익힌 '현명한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잘난 사람'이 될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최소한 이러한 '약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뿐인가?
강자들이 판을 치는 모든 사회기구가 한결같이 새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응', '타협', '겸손', '순종', '온건' 등등의 '미덕'이다.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 당연한 삶의 요결, 전혀 의심할 여지 없는 공리처럼 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부모, 선배, 교사, 라디오, TV, 영화, 고명한 학자, 승려, 정치인 등등의
모든 권위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 들어온, 이 그럴 듯한 추상적 명제를
한 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그것이 곧 어떠한 현실에건 저항하여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쓸개를 빼놓고 살아야 한다는, 거세된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실로 무서운
주문인 것이다.
흔히들 아무개는 군대에 갔다오더니 '사람 다 되어서 왔다'고 하는 말들을 한다.
군대가 사람 만드는 곳이다. 군대에 갔다오면 사회에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우리가 수없이 듣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철저한
상명하복. "X으로 밤송이를 까라면 깠지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식의 어떠한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명령이라도 아무 이의 없이 지켜져야만 하는 숨막히는
계급사회, 인간적인 존엄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한 방울도 찾아볼 수가
없는 이 호령과 기합과 빳다 방망이의 세계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뼛속
깊이 깨달아 겸손(!) 해진 인간, 강자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거나 이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달걀로 바윗덩이를 치는' 일인가를 철저히
터득하여 온순해진 지각 있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 군대로부터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의 정체인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인간을 여러 가지 그럴 듯한 표현을 써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미화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는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란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참된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헌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회사원의 경우는 사장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그것이다. 노동자의 경우는
기업주가 필요로 하는 일 잘하고 말 잘 듣고 부지런한 사람이 바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지배하고 명령하는 강자의 이익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강자의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엄하고 독립된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모든 내면적 욕구와 의지와
희망의 충족을 포기하고 강자를 위한 하나의 도구, 기능, 노동력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상이며, 또 그 참혹한 전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상인
것이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유보다는 책임을" 숭상하라고 하는 요구는 바로
이러한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그들의 비장의 주문인 것이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은 '똑똑한 인간', '약은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바보'라고 선언하였다. 무엇인가 마음을 치는 대의의 부름이 있어 고난의
가시밭길을 스스로 나서는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바보이다. 열심히
기술이나 배워 일류 재단사가 되고, 그래서 돈을 모으고, 잘 되면 한 밑천
장만하여 장사를 하든지 평화시장 쯤에 공장을 하나 차리든지 하면 빠를 텐데
부질없이 되지도 않을 근로조건 개선이나 부르짖고 다니다가 업주들의 미움을 사서
해고나 당하고 혹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치도곤을 다하는 그런 아무
이득 없고 손해만 보는 어리석은 길을 택하다니. 그것은 바보이다. "남들은 다
밸이 없어서 가만히 죽어지내고 있는 줄 아나. 즈이들이 무슨 통뼈라고 중뿔나게
나서서 노동운동이니 뭐니 하고 설쳐? 그런다고 뭐가 될 줄 아나. 결국 신세
조지고 피보는 건 즈이들뿐이라고, 어리석은 것들."어떤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말할지도 모른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사회는 스스로의 인간다운 삶을 되찾으려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조소를 던지고 그들을 바보라고 낙인찍는다. 노예사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으로 취급된다.
세상 사람들은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을 '바보'라고 한다. 왜 바보인가? 고난의
길을 자초하니 바보이다. 세태와 타협할 줄 모르고 순응할 줄 모르니 바보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부르짖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나서자고 호소하는 전태일을 보고 나이든 선배 재단사들이 '바보'라고
불렀을 때 그는 단연코 '좋다, 나는 바보다'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비웃는 자조의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보고 바보라고 부르는
세상의 거꾸로 된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었고,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이 절대로
그릇된 길이 아니라고 하는 강렬한 자기 확신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똑똑한'자들에 대한 불을 토하는 매도였고 세상의'약삭빠른'자들에게 되돌려주는
동정어린 비웃음이었다.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이 바보인가?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이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보인가?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약은'자들이 참된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체념하고 굴종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 수는 없다. 삭막한 겨울 벌판의 나무둥치 속에서 내일 화사하게 피어날
꽃잎을 바라보고 오늘의 꿈이 내일의 현실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택한 길은 인간의 길이었다. 그것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스스로의 힘을 확신하는, 진리가 반드시 드러날 것을 의심치 않는
억압과 착취의 저 깊은 고통의 밑바닥에서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오랜 침묵을
깨고 솟아오르는 새시대의 목소리였다. 그들이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한국사회의 선구자였고 죽음과 같은 체념과 침묵의 벽을 깨는 시대의 참된
영웅들이었다 오늘 그들은 약할지라도 내일은 반드시 강성해질 것이다. 오늘
그들의 외로운 목소리는 언젠가는 거대한 함성으로 메아리 칠 것이다.
오늘 그들이 치켜든 한 개의 작은 촛불은, 내일 수천만의 횃불로 타올라 시대의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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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버지의 죽음과 바보회의 출발
바보회 회장에는 만장일치로 전태일이 선출되었다. 애초에 바보회 발족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그였고 그 당시로서 노동문제에 가장 열렬한 관심과
지식을 가진 것도 그였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립총회가 있던 날 태일이 바보회 회원 10여 명을 끌고 창동집으로 들어온
것은 밤 11시가 좀 지나서였다. 이때부터 바보회의 주된 회합장소는 태일의
집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 얼마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태일의 아버지 전상수 씨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69년 6월(음력 4월
30일)이었다. 잠깐 그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전상수 씨는 앞에서도 우리가
보았듯이 평생의 반 이상을 홧술과 주정으로 보낸 사람이었는데 작고하기 얼마
전쯤부터는 가족들에게 못할 짓만 하고 갖은 고생을 다 시킨 자신의 과거를 무척
뉘우치고 부인에게도 다정하게 대했다고 한다. 태일도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원망하였으나 차차 철이 들면서부터는 아버지의 어두운 생애가 가슴 아프게
느껴져 잘 해드리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때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하면, 그는 우리 아버지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으니 너무 그러지 마시라고
제지하곤 하였다. 특히 그는 실의에 빠진 늘그막의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끔찍히도 애를 썼다. 돈을 벌게 되면서부터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다달이 5백
원씩, 천 원씩을 드리면서 막소주를 안주 없이 자시면 해로우니 돼지껍데기
삶은 거라도 사사 안주해서 자시라고 하였다.
전상수 씨는 고혈압 증세가 있었는데 세상 떠날 때는 갑자기 떠났으므로 태일이
형제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하였고 어머니만이 임종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상수 씨는 베갯머리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그의 부인을 보고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를 하고 나서는 베개를 뜯어보라고 하였다. 뜯어보니 그곳에는 꼬깃꼬깃
접어서 뭉친 5백원짜리 지폐가 대여섯 장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남편을 보니, 남편의 주름진 두 볼 사이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태일이가 다달이 주는 돈으로 한동안은 술을 마셨는데 나중에는 그 어린 것이 뼈가
휘게 번 돈을 그렇게 쓰기가 죄스러워 술을 끊고 이렇게 안 쓰고 모아두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부인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 남편은 잘못
만났지만 아들 하나는 잘 둔 것 같애. 그놈 하는 일 너무 말리지 마오." 살아
생전에 전상수 씨는 아들이 노동운동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고 했다.
달래기도 여러 번이었고 야단도 여러 번 쳤다. 심할 때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호통치기까지 했었다. 태일은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서라기보다도 그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될 수 있는 대로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노동운동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재단사 친구들의 모임도 비싼 찻값을 물어가며 이 다방 저
다방으로 전진하면서 가졌지 한 번도 집으로 친구들을 데려온 적이 없었다.
태일이 처음 친구들을 데려온 것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지 며칠 후였던 것이다.
그날 밤 태일의 어머니는 우루루 몰려온 아들의 친구들을 보고, '올 것이
왔구나'하는 불안감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곧 남편의 유언이
생각났고 또 모처럼 먼 데까지 찾아온 아들 친구들에게 마땅찮은 낯빛을 보일
수도 없고 해서 마음을 수습하고 이들을 반겼다. 그러는 어머니에게 태일은
미안한 듯이 열적은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친구들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문이 안으로 잠기고 한동안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태일이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왔다. 그는 궁금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부엌에 서 있는 어머니의 손에
돈 얼만가를 쥐어드리면서 쌀도 없을 텐데 이 시간에 밥지을 생각일랑 마시고
비지를 사와서 비지찌게나 끓여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비지 사 와서 물 붓고 불만 대어놓고 어머니는 이
방에 들어오지 말고 가서 주무시라"고 하였다.
잠시 후 방안에서는 새로이 결성된 바보회의 활동지침에 대한 토의가
벌어졌는데 이 토의는 밤을 세워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분위기가 매우
열띤 것이었다 한다. 이날 토의된 내용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참석하였던 몇 회원의 회고담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한다.
첫째, 평화시장 일대의 3만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준수되도록
투쟁하는 것이 당분간의 목표이다. 특히 8시간 노동제나 주휴제는 법에 못박혀
있는 것인데 평화시장 업주들은 이 조문을 정면으로 무시해버리고 제멋대로
14시간, 15시간 작업에 밤근무까지 시키고 있으며 일요일이라고 제대로 쉬게
해주는 것을 못 보았으니 이러한 불법하고 부당한 현실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시다들은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의 애들인데 애들은 긴 작업시간에 묶여 글
한 자 못보고 영영 무식꾼이 되어야 할 판이며, 한 달 내내 햇빛 한 번 보는 날이
없이 먼지 구덩이 속에서 제대로 몸이 발육하지 못하고 병만 가지가지로 얻게
되니 이것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바로잡아야 한다.
둘째,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조직을 튼튼히
하고 확장하여야 한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빈털털이 인생인 우리들에게 있어
조직이야말로 유일한 밑천이요 희망이다. 우리도 뭉치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큰
힘을 낼 수 있다. 그리고 또 알아야 뭐를 해도 할 수 있다. 회원 각자가
근로기준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노동운동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보도록
노력하자. 서로 모여서 연구한 것을 토론도 해보자. 또 회원 각자가 노력을 해서,
아는 재단사들을 널리 접촉해서 우리 일의 협조자로 만들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의
주장을 3만 노동자에게 골고루 알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을 통하여 연락
루트를 마련한다. 협조자들의 신상에 관해서는 바보회 모임에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오래 접촉해봐서 믿을 만하다고 판단되면 새 회원으로 가입시킨다.
이렇게 해서 일이 잘 되어가면 언젠가는 돈을 모으든가 어디서 좀 얻든가 해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는가 감시하고 또 일반 근로자들로부터
애로사항을 진정도 받고 하면서 점차 바보회를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킨다.
셋째, 당장 필요한 일은 근로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하는 일이다. 법은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안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근로자들을 살기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지 남 좋은 일만 시켜주고 제 한 몸은 죽어가고 싶어서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근로기준법만은 유독 지켜지지 않고 근로자들은
생지옥에서 허덕거려야 하는가? 우리의 이러한 비참한 실정이 사회에 사실대로
알려지기만 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메말랐다고 해도 외면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근로기준법이 지켜지는가를 감독하기 위해서 노동청에서는 근로감독관이란 것을
내보내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평화시장의 노동실태 조사한 것을 증거로 내놓고
시정해달라고 요구하면 그들도 눈감을 수 없을 것이다.
넷째, 돈 많은 독지가를 찾아내서 한 5천만원 투자하라고 해서 평화시장 안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하나 만들자. 우리는 모두 재단사들이고 시장
실정도 남보다 잘 알고 있으니, 우리가 운영하면 근로기준법 그대로 하고도
얼마든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업주들은 입에 붙은 소리가 장사가 안되니
임금을 올려줄 수 없다느니, 기업주가 살아야 근로자도 살 수 있지 않느냐니
하는데 우리가 모범업체로 시범을 보여서 근로자들에게 사람 대접 해주고도
얼마든지 장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자. 그러면 그들도 꼼짝 못하고
근로자들의 요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금을 어떻게 구하느냐가
문제인데 평화시장 근로자들의 참상이 바깥 세상에 폭로되기만 하면 반드시
독지가가 나타날 것이다.
전태일이 대체로 이상과 같은 제안을 내놓자 회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최 아무개라는 회원은 태일의 열변을 듣고 있다가 "그런 일은 좀
있다가 하자. 우리 모두가 아직 부족한 사람들이 이제 겨우 20대가 아닌가? 좀더
알고 좀더 나이가 들어서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의문을 표시했다.
그 밖에도 몇몇 회원들이 그와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태일은 열심히 그들을 설득했다. 이일은 잠시도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우선
하루하루 우리가 고달프지 않은가? 이 상태로 몇 년 더 가면 우리도 영영 못난
핫빠리인생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또 무엇보다도 어린 여공들의 참상을 하루라도 더
팔짱끼고 앉아서 눈 뜨고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부족한 사람들이라 하지만
무엇이 그리 부족하단 말인가? 우리도 갖출 것 다 갖춘 남들과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우리가 굳센 의지로 뭉쳐서 싸운다면 못할 일이 무엇인가? 또 20대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20대에 이런 일을 못해낸다면 처자식 다 생기고 팔다리에 기운이
빠지기 시작하는 30대, 40대에 가서 어떻게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설득이 게속되는 동안 회원들은 그 열의에 감동되었음인지 차차로 숙연해졌다.
말을 끝맺으며 태일은 숨을 죽이고 듣고 있는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한다.
우리가 하려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 줄은 나도 알아. 그러나 목숨 걸고 하는
일에 안되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정 안될 것 같으면, 몇 목숨 없어지면 길이
뚫리겠지. 그렇게 해서 된다면 그렇게라도 해보자는 얘기야
이렇게 하여 대충 의견이 모아졌다. 모범업체를 만든다는 것은 아직 막연한
이야기지만 다른 제안들은 우선 실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것이 바보회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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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력
그것은 결코 화려한 출발은 아니었다. 바보회라는 젊은 재단사들의 모임이 서울
변두리의 한 판잣집에서 결성되고 있던 밤에, 세상의 누가 그것을 주목했을
것인가? 그들은 요리를 시켜놓고 축배를 든 것도 아니었고 밝은 내일을 내다보며
호기롭게 환호를 터뜨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비지찌게 한 그릇씩으로 허기를
달래며 좁은 방안에 옹기종기 웅크리고 앉아 더러는 낮 동안의 노동에서 쌓인
피로로 몰려오는 잠을 쫓아내다 못해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밤을 밝혔고,
닥쳐올 개인적인 고난들을 걱정하면서 자꾸만 어두워지려는 마음을 가누기 위하여
안간힘들을 썼던 것이다. 그것은 어둡고 쓸쓸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요한 출발이었다. 깊은 체념과 침묵과
굴종의 얼음과도 같은 벽을 뚫고, 이제 착취와 억압과 흡혈의 만리장성인
평화시장 일대에 스스로의 버려진 운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타개하려는 젊은
노동자들의 최초의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 모두의 인생은 이 출발을 계기로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이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평화시장의 모든
근로자들, 아니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의 삶에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건 영향을
미치게 될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히, 그것은 전태일에게 감개 깊은 새출발이었다. 이 순간을 위하여 그는 얼마나
고투하였던가? 집에서는 가족들의 걱정을 들으며, 직장에서는 기업주의 눈총을
받으며, 노임을 받은 주머니를 털어 허구헌 날 찻값을 물고, 날이며 날마다
망설이는 친구들을 붙잡고 끝도 없이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고, 심지어는
노동문제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친분이라도 묶어두기 위해 극장구경을
데리고 가거나 자신은 마시지도 않으면서 술을 사기까지 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하루의 고된 노동과 생계의 걱정이 그의 자꾸만 허약해가는 육신을 삶은 파처럼
기진케 하고, 일체의 의지와 의욕을 앗아가려 할 적마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다시 일어나 바보회 조직에 나서기로 했던 것이다.
이제 그것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한 노동자 단체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가슴을 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무거운 책임감이 그의 머리를 짓눌렀고 좀체로 해소되지
않는 다수 회원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이제부터가
그야말로 출발인데 앞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그
자신이 자신 있는 듯 제시한 방안들이 과연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확실할 전망을 가지고 낙관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앞으로 닥칠
가지가지의 어려움만이 확실한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미칠 듯이 답답하였다.
조직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이제 전태일은 그 자신의 의지만으로
움직인다기보다 조직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더욱 집요하고 열렬하게 노동운동에
달라붙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보회가 창립된 지 얼마 후 그는 어머니에게
빚을 내어 책 한 권을 사달라고 졸랐다. 어느 노동법 학자가 쓴 근로기준법
해설서였다. 정가가 2천 7백원이었는데, 어머니로서 엄청난 액수였다.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들이 하도 간절하게 부탁하는 데 못 이겨 동네 사람들에게 며칠에
걸쳐 천원씩 오백원씩 빚을 얻어 3천원을 마련해주었다. 그날 저녁 시내에 나가
책을 사들고 들어온 태일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는
근로기준법의 딱딱하고 알기 어려운 조문들만 가지고 씨름해왔지 그 내용을
풀이한 책을 못 보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는 시간만 나면 그 책을 일고 또 읽었다. 원래 그 책은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런데 학력이라고는 국민학교에
2학년, 중등 정도의 공민학교에 한 1년 다닌 것밖에 없는 태일이 그
대학교재를 붙들고 씨름하자니 여간 일이 아니었다. 몇 페이지만 넘겨도 전문적인
법학상의 개념과 법률용어들이 수두룩하게 나오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몇 장 읽다가 책을 덮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일은
하룻밤을 꼬박 새워 한 장밖에 못 보는 한이 있더라도 책을 놓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 한다.
태일의 근로기준법 연구는 어두침침한 작업장에서나, 털털거리며 달리는
시내버스 안에서나, 또 그의 집 골방에서나, 틈만 있으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여름밤이면 모기가 달려들어 잠시도 신경을 안정시킬 수 없는 그의
방에서 책을 읽기 위하여 온몸에 모기약을 뿌려놓고 잠과 모기를 쫓으며 밤을
새웠다. 겨울이면 몇 달씩 불이 꺼진 썰렁한 냉돌방에서 구멍 뚫린 나이롱 이불을
멀 끝까지 둘러쓰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새까맣게 손때가 묻은 근로기준법 책의
닳아진 책장을 넘겼다. 그것은 연구가 아니라 실로 사투였다.
태일이네 옆동네에 나이 많은 대학생 하나가 살고 있었다. 태일이 광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책을읽다가 모르는 한문 글자가 나오면 의레껏
그에게 찾아가 물어보았다. 어떤 때는 두세 시가 넘어서도 잠자는 광식이 아저씨를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을 열 번도 더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광식이 아저씨가 집에
없는 날은 태일은 몇 번이나 그 집을 찾아 왔다 갔다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그 집
문 앞에 서서 몇 시간이고 광식이 아저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전태일 모친의 회고담).
책을 읽으면서 태일은 간간이 평화시장 실정에 비추어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이
될 만한 것을 항목별로 메모를 해두었다(이것이 뒷날 그가 노동실태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작성할 때나 노동청에 진정서를 낼 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그는 책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할 무렵부터는 동생 태삼이에게 그것을 읽히고
설명해주기도 하였다. 책을 읽다가 흥분하여, 옆자리에 누워서 잠자고 있는
어머니를 깨워서 어머니에게 그것을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엄마, 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여기 이 해고의 관한 조문이 있는데
평화시장에서는 자기 기분대로 아무렇게나 해고시키고."
"야, 난 잠 안 자고는 못 살겠으니 너나 많이 읽어라. 그거 안다고 돈이 생기나
밥이 생기나?"
깊은 밤중에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간 일이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면 태일은, "어머니도 지금 꼭 알아두셔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한다(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이 말을 하던 아들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고 하면서 아마도 이런 말 할 때부터 태일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회고한다).
이렇게 근로기준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태일은 바보회 회원들은
물론이고 주위의 여공들이나 새로 사귀게 되는 친구들에게 기회가 있는 대로
근로기준법 이야기를 하면서, 현재 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대우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열심히 설명하였다. 시시때때로 친구들을 한두 명씩 혹은 칠팔 명씩
밤늦게 창동집으로 끌고와서 밤을 새우며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바보회
회장 전태일'이란 명함을 박아 각 작업장으로 돌려놓고, 다음에 찾아가서 전혀
모르던 재단사들에게 인사를 천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는 사이에 어느덧 그는 평화시장 일대에서 상당 범위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특이한 존재로 알려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고, 또 어떤 재단사들은 그가 나타나면 "저 친구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옆의
친구를 보고 쑥덕거리기도 했다. 그의 열의에 감동하여 바보회에 새로 가입해
오는 사람도 있었고 바보회에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는 사람도 생겼다. 전태일의
일기장 갈피에 이 무렵 어떤 노동자로부터 그 앞으로 보내온 듯이 보이는 다음과
같은 편지 한 장이 끼어 있다.
회장 귀하
단체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는지 상세히 적어 보내시면 미약하나마 근사한
묘안과 방침을 제공해드리고 싶습니다.
(실례):
1. 회원은 몇 명이며 여자도 있는지
2. 어떤 방향과 시도로서 움직이는지
3. 장소는 어디에 두고 있으며 얼마만 한지
4. 운영비용은 어떤 식으로 해나가시는지
5. 애로사항들이 무엇인지
회장님, 이런 표어를 벽에다 죽 걸어놓아 이채를 띠어보면 어떨까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사람들이란
허술하고 어리석은 바보투성이
약은 체 못난 체 날뛰어보지만
붙잡아서 이곳 저곳 뜯어보면은
어리석고 허술한 구멍투성이
바보회가 발전하려면 멋있고 흥미있는 방침이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보람과
흥미가 회원의 마음을 끌어붙이고 알찬 모임으로 확장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
6. 좌절 속에서
그러나 모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전태일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시련은 당초에 바보회의 창립에서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바보회가 창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일은 또다시 일하던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근로기준법이 어떠니 근로조건이 어떠니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고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며 특히
재단사 모임이 시작되고부터는 주인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고 스스로 직장을
그만둔 일도 한두 번 있었다. 그러나 이번 해고는 그 전과 경우가 달랐다. 그
전에라면 언제든지 평화시장 일대에 숱하게 깔려 있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시장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업주들
사이에 '위험분자'로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1969년 여름 어느 날 태일은 밤늦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왔다.
그는 어머니에게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난 이제 큰일났어요. 소문이 좍 퍼져서 이제 평화시장에서는 도저히
발을 못 붙이겠어요."
"그것 봐라. 네가 마음 잘못 먹어 서서 고생하는 것이니 누구 탓할 거 하나
없다. 우리 가족들만 고생이니 이제 제발 좀 그만둘 수 없나."
그날 이후 몇 달 동안을 그는 집에 돈을 거의 가져오지 않았다. 직장에 다닐
동안에도 월급 탄 돈을 친구들 모임의 찻값이나 병든 여공들 치료비로 써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다달이 1만원 정도의 돈은 꼬박꼬박 집에 들여놓았던 것이 이제는
돈을 들여오기는 커녕 이 명목 저 명목으로 어머니에게서 한 푼씩 두 푼씩
애걸하시다시피 하여 돈을 타가는 일이 많았다. 생기는 것은 없는데 노동운동을
계속하자니 드는 돈은 갈수록 늘어났던 것이다.
물론 태일이도 해고당하였다고 해서 전혀 돈벌이를 안하고 놀았던 것은
아니었다. 구로동, 남대문, 동대문, 그 밖에도 평화시장이 아닌 곳으로서
피복계통의 일자리가 있는 모든 곳을 전전하면서 며칠씩 재단일, 미싱일, 심지어는
시다가 하는 일까지 하면서 돈을 마련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임시의 일이었으며 그런 일거리가 그리 자주 얻어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뿐더러 일단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하기로 작정한 이상 평화시장을 오래 비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일이 없을 때는 매일같이 평화시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각 작업장의 노동실태에 관한 자료를
조사, 수집하였고, 다른 곳에서 일거리가 있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노상
평화시장에 있었다. 그러자니 그렇게 틈틈이 버는 돈으로는 집안생계에 보태기는
커녕 바보회 일에 드는 비용도 충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자신이 직접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거나 아니면 어머니에게 부탁하거나 하여 빚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동네에서 빚을 얻자니 일수돈이니 달라돈이니 하는 고리채밖에 없었고,
이렇게 하여 태일이 끌어 쓴 빚은 1970년 봄경에는 원리합계가 10만원 가까이에
이르렀다. 동생들이 자라 학교에 갈 나이였지만 가장 격인 태일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배우지 못한 설움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에 밥 굶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이것만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빚쟁이들의 독촉도 나날이 그의 신경을 볶아대는
큰 괴로움의 하나였다.
무능하였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다 겪게 하였던
아버지를 가진 태일은 그 자신이 아버지의 어두운 생애를 되풀이하게 될까봐
얼마나 두려워하였던가? 평생을 하루도 활짝 웃어보지 못한 어머니를 가진 그는
불쌍한 어머니를 한 번 편히 모시기는 커녕 그가 있음으로 해서 가족들에게
괴로움만 끼치고 있는 것이었다.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그를 괴롭힌 것은 바보회
일이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원래 바보회 회원이 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직장을
옮기려고 임시로 쉬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노동운동 같은 엄청난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쉬고 있는 동안 따로이 재미있는 일도 없고 하니
친구들 만나는 자리에 나가 소일도 하고 취직자리에 대한 정보도 들어보고 할
심산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시간이 감에 따라 태일의 영향을
받아 노동운동에 상당히 열의를 가지게 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새로 직장을 구하여 일을 다니게 되면 바보회 모임에 거의 나오지 않게
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1969년 초가을 경에는 회원중에서도 비교적 열의가
있었던 두세 사람이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바보회는
창립총회 이후로 한 번도 모임다운 모임을 가져보지 못하게 되었다. 일껏
모이자고 연락을 해도 너댓 명이 모이기 일쑤였고, 어떤 때는 아무도 안 나와
태일이 혼자 기다리다 가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바보회가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노동조건에 관한 실태조사용 설문지(앙케이트)를 돌린
이후로 더욱 심해져서, 나중에는 사실상 바보회가 해체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자세한 날짜를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1969년 8__9월경이라고 짐작된다. 태일은
어느 바짓집에서 닷새 동안 일을 해주고 받은 임금으로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
3백 매를 인쇄했다(이 설문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 책 마지막 장에서 소개함).
바보회 회원 서너 명이 그것을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돌렸다. 업주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비밀리에 하느라고 믿을 만한 미싱사나 재단사들을 접촉하여 주인이
자리를 비운 시간을 이용해서 작업장 안의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돌리도록 했다.
그런데 그렇게 조심을 하느라고 했건만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러서 그랬던지
곳곳에 업주들에게 발각이 나서 빼앗기거나 찢어지는 일이 생겼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돌린 설문지 1백여 매 중에서 제대로 걷힌 것은 불과 30매 정도였고,
나머지 2백 매 가까이는 아예 돌리지 않아 버렸다. 평화시장주식회사에서는 난리가
나서 바보회 회원들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 전태일은 이 일로 인하여 더욱더
평화시장 일대에서 발을 못 붙이게 되었다. 또 바보회 회원들은 더 이상 바보회
일에 개입하다가는 업주들에게 미움을 사서 언제 쫓겨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쌓이게 되었다. 이것은 이제 겨우 갓 발족한 바보회의 앞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 앙케이트 사건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전태일로 하여금 무서운 좌절에
빠지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하여 걷은 설문지를 모두 모아서 결과를 분석, 집계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하여 시청 근로감독관실로
찾아갔다. 근로감독관의 직책이 무엇인가? 각 공장에서 근로기준법이
준수되는가를 감독하고 위반사실이 있을 때는 고발조치를 하여 이를 시정토록 하기
위해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나라에서 월급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근로감독관이다.
나라에서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근로기준법을 제정한 줄로 생각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에 모든 희망을 걸다시피 하고 있었던 태일로서는 그것을
준수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는 근로감독관에게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리에 대해서는 산전수전을 다 겪어
훤하게 알고 있었지만 상층부에서 몰래 행해지고 있는 부정부패나 부조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 리가 없는 그는 근로감독관이 기업주와 결탁하여 서로 돕고
서로 봐주면서 짜고 해먹는 관계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적어도 그가 진정서를 들고 근로감독관실의 문을 두드렸을 때에는 그는
근로기준법의 명문조항에 명백히 위반되는 가혹한 근로조건이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는 평화시장의 실태를 제시한 그 진정서를 받은 감독관이 그것을 들고
찾아온 자신을 환영하기까지는 않더라도 체면상으로나마 치하를 하고, 이것저것
세세한 사정을 물어보고 곧 시정조치하겠다는 말이라도 해줄 것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근로감독관은 초라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 이 낯선 청년을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태일이 펴화시장의 실정을
설명하면서 찾아온 용건을 말하려고 하니 그는 말을 가로막고, "그 얘기 다 듣고
있을 시간 없으니 요점만 간단히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리고는 그 '간단한
요점'도 듣는 둥 마는 둥 재촉하여 끝맺게 하고는 "알았으니 서류 두고 가라"는
말 한 마디로 이 열의에 불타는 청년을 내몰았다. 도대체 평화시장의 참혹한
얘기를 다 듣고도 충격을 받는 빛도 없었고 최소한의 관심표시도 없었다.
정착 충격을 받은 것은 태일이었다. 이 근로감독관이란 사람은 평화시장의
실정에 대하여 대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자기의
당당한 권한으로 그것을 시정하지 못하였단 말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하였다는 말인데 과연 그럴 수도 있는 일인가? 만일 여태껏 평화시장의
실정을 모르고 있었다면 어째서 그것을 알려주러 온 자신을 그렇듯 냉랭하게
내쫓다시피 하였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노동청을 찾아가서 진정해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실태조사라는 것을 한 번 나오기는 나왔으나 아무런 대책이 없이
종무소식이었다.
이제 무엇인가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여태껏 그는 노동자들이 기업주들의 탐욕에
희생되고 있으며 그 기업주들과만 투쟁하면 되는 줄로 생각해왔었다. 만일 기업주들의
죄상이 폭로되고 그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참상이 알려지기만 하면 정부나
그 기관인 노동청이나 근로감독관들은 당연히 노동자편을 들어 기업주들을 혼내줄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노동청의 저 무성의한 태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마치 업주들을 싸고 드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만약 노동청이 기업주들과 결탁하고 있는 것이라면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태일은 가슴이 가위에 눌린 듯 답답해왔다. 그렇다면 나는 기업주들만이 아니라
근로감독관, 노동청, 아니 그 이상까지도 상대로 하여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
현실에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기를 도대체 어떻게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연 저들 모두를 상대하여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저 (악마와 같은) 현실의
벽은 도대체 얼마나 두꺼우며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인가?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던 태일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제껏 믿고 있었던 대상으로부터 야멸차게 배반당한 것 같은 충격이
그를 한동안 허탈상태로 몰아넣었다(그는 뒷날에 쓴 어떤 소설작품 구상
가운데에서 '사회를 신임하고 있던 J가 사회를 신임하지 않게 된 동기'라고 구절을
남겨놓고 있는데, 그'동기'는 바로 이 사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생계의 어려움, 실직자로서의 우울과 불안, 친구들 속에서의
고독, 바보회의 파탄, 사회의 무관심, 암초처럼 버티고 선 거대하고 두꺼운 억압의
벽의 발견. 이 모든 것이 몇 달 사이에 한꺼번에 몰려와 그를 짓눌렀을 때 그것은
실로 죽음과 같은 시련이었다. 현실은 그를 조롱하면서 그 거대한 발로 그의 목을
짓밟으며 항복을 강요하였다. 이 당시에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라고 썼다.
그는 깊은 실의와 낙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는 좌절, 좌절, 좌절을 거듭했다.
그는 자학, 자학, 자학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는 거듭거듭 다시 박차고 일어섰다.
인간과 사회의 현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가 이 과정을 통하여 마치 봄비를 맞은
초목처럼 그의 머리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보다 뿌리깊은 분노가, 보다 뜨거운
연민이 그의 가슴속 깊이에서 끓어올랐다. 거듭거듭 밀려오는 고뇌와 좌절과 자학의
늪을 빠져나올 때마다 그의 투지는 용광로를 거쳐나오는 쇠처럼 더욱 강인해져 갔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모든 투쟁방법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재검토해 나갔다.
1969년 가을부터 1970년 봄까지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저자가 '전태일
사상'이라고 이름짓고 싶은, 노동하고 사랑하고 투쟁하는 한 젊은이의 참으로
주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간적인 사상의 형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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