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종거리
서울에 명동거리가 있다면 부산엔 남포동거리가 있다. 명동과 남포동처럼 동네 이름을 붙이지 않은 거리가 불종거리였고 당시 마산 환락가의 중심이었다. 불종이란 불이 났을 때 종을 쳐 알리면서 붙은 이름이다. 반세기 전 마산은 전국 7대도시에 오를 정도였으니 불종거리의 위상 또한 그만큼 높았다. 상남동 월남다리에서부터 오동동 아구찜 집이 밀집한 지대를 지나 창동 부림시장까지 이어지는 상권의 중심지를 차지했던 거리였다. 좁으면서도 짧은 거리였지만 오랜 세월 마산을 대표하다보니 한국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과 희囍예식장과 희囍다방은 같은 건물에 들어 있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 당시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는 희다방이었다. 다른 곳에서 만나더라도 기준점은 항상 희다방이었으니 그만큼 요지였다. 마산을 거친 사람들은 지금도 이 골목의 희다방과 불종거리 3총사로 통했던 오행당약국과 고려당제과점을 들먹인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희다방도 문을 닫았고 오행당약국도 간판을 내렸지만 고려당은 지금도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고려당은 처녀 시절 아내도 즐겨 찾은 빵집이라지만 이제 지역의 후발주자인 코아양과의 거센 도전에다 파리바게트와 뜨레주르 같은 브랜드에 밀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 불종거리에는 사계절이 따로 없었다. 혹자는 당시의 불종거리가 위치한 창동을 서울의 명동에 빗대면서 그 옆 오동동을 소공동으로까지 불렀다. 한일합섬과 한국철강 수출자유지역 국군통합병원 결핵요양원 마산화력발전소에다 향토기업인 몽고식품과 유원산업 불로식품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으니 왜 아니었겠는가. 마산 젊음들의 낭만과 꿈이 어우러져 사물놀이 굿판을 펼치던 곳이 바로 불종거리였다. 지금의 국민은행 뒷골목에는 당시 유명한 고급 요정들도 많았지만 흐르는 세월에 떠밀려 불종거리와 오동동 창동 상남동 부림동 일대 상권은 이제 쇠퇴하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오동동에 통술집들이 들어섰으나 한번 신마산으로 발길을 돌린 사람들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마산요양원이 낳은 비감어린 노래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산장의 여인」이 저절로 떠오르고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의 「가고파」도 읊조리게 된다. 옛 영화 사라진지 오래지만 지금도 불종거리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 시민의 화합과 마산의 발전을 기원하는 제야의 종을 타종하고 있어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을 터이다. 6.25처럼 유사시에 임시수도를 목표로 건설한 창원 신도시에 2개의 구로만 편입된 마산이니 옛 영화를 타령한들 무슨 소용이랴 싶다.
내가 마산에 첫발을 디딘 건 1968년 봄. 부산에서 근무하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직하자 마산발령이 났던 것. 제대하면서의 제일 목표는 주경야독하던 대학을 마치는 일이었는데 퍽이나 낙담이 컸다.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서울로 가서 고학으로 새 꿈을 펼쳐보겠다고 했더니 친형처럼 날 보살펴주던 선배는 마산에 가서 6개월만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대전과 부산 등 도청소재지였던 대도시에서만 근무하면서 시건방짐이 들대로 들어 마산은 반눈에도 차지 않았다. 그해 4월부터 11월까지 3계절을 거치는 동안 마산에 정이 들었고 평생의 반려자까지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결혼 반세기 금혼식을 앞두고 웨딩마치를 울린 불종거리 초입 희예식장을 찾았다. 그날의 예식장은 오래 전 사라진 걸 알면서도 발길은 그리로 향했으니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건물 2층의 예식장과 다방은 사라졌지만 고급스런 하얀 바로크 양식 3층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건물이 나를 알아볼 리 없겠지만 한참을 그 앞에 서성였다. 찻길을 물고 있는 1층 코너 점포는 휴대폰매장으로 변했고 바겐세일 오색 풍선이 현란했다. 나머지 점포 절반은 실비 중국집으로 바뀌어 코로나가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하지만 칸막이가 된 방이 없어서 금혼식이랍시고 처가 형제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예식장 건물 2층은 노래주점 간판이 붙었고 영업을 준비하는지 악기소리가 1층까지 새어나왔다. 불종거리가 있는 창동과 인근 오동동 일대를 다 훑어도 독립된 방을 갖춘 식당은 만날 수 없었다. 낙담하다가 퍼뜩 마산만 바닷가에 위치한 마산관광호텔이 떠올랐다. 호텔 부속건물은 이미 다 헐렸고 철근더미가 주차장을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철거용 장비를 본체로 옮기던 일꾼들이 차에서 내리는 내방객을 힐끔거렸다. 마산역 앞 아리랑관광호텔도 황성옛터로 변했고 주변엔 퀴퀴한 냄새까지 떠돌고 있었다. 창원엔 반듯한 호텔이 있지만 금혼식 회식은 마산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다시 불종거리로 향했다.
금혼식 땐 바다 건너 홋카이도를 둘러본 후 태어난 히로시마를 다녀오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변이바이러스로 일본이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마지막 백신까지 맞은 아내는 금혼식에 형제들 초청마저 불안하다며 조용히 지내자고 한다. 아내의 불안은 그의 지갑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0년 결혼생활 중 은퇴 후의 삶이 23년이었으니 눈앞의 치솟는 물가를 생각하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장수명 시대라며 천국이나 도래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르는 노부부는 더욱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감정을 떨치기가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