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땅 최북단 사찰 강원 고성 건봉사와 북방식 전통마을 왕곡마을
이제 추워볼 만큼 추워도 봤다. 아침저녁 바람이 매섭지만 오후 햇살엔 따스한 봄기운이 실렸다. 아무리 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너그럽게 지켜봐주고 싶어지는 때다. 물러가는 늦겨울 정취와 다가오는 봄 흥취를 동시에 맛보고 예감할 수 있는 바닷가 마을, 강원 동해안 고성으로 간다. 금강산 산줄기의 옛절 건봉사 부도 무리는 눈속에 묻혀 있고, 북방식 옛집들 즐비한 왕곡마을 흙돌담은 햇살 앞에 나앉았다. 새학기를 앞둔 자녀와 함께 봄맞이 가족여행을 떠나볼 만하다.
등공대에선
좌우 산줄기뿐 아니라,
멀리 거진 앞바다까지 눈에 잡힌다
3000여칸 대찰이 산불·전란에 잿더미로 |
건봉사
인제에서 46번 국도 타고 진부령을 넘어 내려가 지방도를 한동안 달리면 건봉사에 이른다. 오가는 군용차와 행군하는 장병 행렬이 최전방 지역임을 실감케 한다. 1989년까지 40년 가까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던 곳이다. 금강산 산줄기 남쪽 자락, 전국 4대 사찰로 꼽힌 큰절이었으나 잇단 화재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금강산 건봉사'다.
절 들머리 산비탈의 널찍한 부도밭은 눈 반 돌 반이다. 70여개에 이르는 각양각색 부도·비석들에서 옛 건봉사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건봉사 해설사 최점석씨는 "그만큼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복원한 10여채의 당우들로 이뤄진 현재 건봉사의 모습은 옛 면모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한국전쟁 때 600여칸 규모의 절이 초토화됐고, 앞서 1878년엔 대형 산불로 3000여칸 규모의 절이 잿더미로 변했다. 남아 있는 육송정홍교·능파교·문수교·청련교 등 4개의 홍예교(사라진 극락교까지 5개)가 볼만하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이색적인 돌기둥들도 있다. 대웅전 앞 십바라밀석주 한 쌍엔 십바라밀(10단계의 수행과정)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5개씩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흔적도 널렸다. 경내 물길에 쌓은 일본식 축대나 일부 부도탑의 지붕돌, 불이문의 기둥 양식 등은 일본 불교의 영향이라고 한다. 사명대사의 행장을 기록한 '사명대사기적비'(1800년)도 일본인들이 깨뜨려버렸다. 고성문화원 박명재 사무국장은 "지금 남아 있는 기적비 돌조각은 원형의 50%도 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옛 건봉사의 위상과 규모를 설명해주는 말들이 많다. 국내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시발점, 부처 진신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3183칸에 이르던 사찰 건물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700여 승병을 일으킨 호국사찰, 백담사·낙산사·신흥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리던 본사….
건봉사 20분 거리 왕곡마을은
19세기 중후반 지어진
한옥·초가들이 잘 보존돼 있다
염불만일회란 스님과 불자들이 1만일(27년5개월) 동안 끊임없이 염불을 외며 수행하는 법회다. 신라 법흥왕 때(520년) 아도가 건봉사를 창건한 뒤, 758년 발징이 중건하며 염불만일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국내 만일회의 효시다. 당시 31명의 스님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육신은 땅에 버리고 정신만 극락세계로 올랐다(등공)고 한다. 절에서 북쪽으로 1㎞쯤 떨어진 산 능선에 이를 기리는 탑(1915년)이 세워져 있다. 탑을 세운 곳은 본디 다비식을 거행하던 장소로 소신대라 불렸다.
등공대까지는 40분이면 오갈 수 있어 산책 겸 다녀오기에 좋다. 민통선 안쪽이어서 미리 방문 신청을 하고 안내를 받아야 한다. 등공대에선 좌우 산줄기뿐 아니라 멀리 거진 앞바다까지 눈에 잡힌다. 차고 맑은 솔바람 사이로 드러난 짙푸른 바다 한 조각이 눈부시다. 건봉사는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모신 사찰이기도 하다. 종무소 안 만일염불원(5과)과 적멸보궁 뒤 사리탑(3과)에 8과가 봉안돼 있다. 염불원 사리는 직접 볼 수 있다. 얽힌 이야기도 많다. 통도사에 모셨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훔쳐가 사명대사가 찾아왔고, 1986년엔 도둑맞은 뒤 12과 중 8과만 돌아왔다.
안방·마루·부엌·외양간이 한 공간에 |
왕곡마을
건봉사에서 20분 거리. 죽왕면 오봉리에 '북방식 전통가옥 전시장'으로 불리는 왕곡마을이 있다. 두뱃재·젯가산·밧도산·숨방골·골무산 다섯 봉우리에 둘러싸인 아늑한 민속마을이다. 옛모습을 간직한 초가·한옥 40여채가 빛을 발하는,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 집성촌. 함씨가 주민의 80%를 차지한다.
주민 함형산(67)씨는 "마을이 600년 내력을 가졌는데, 그 숱한 전란에도 별 피해가 없었다"고 자랑했다. "육이오 때두 폭격을 받았지만, 다섯 봉우리 안으루다가 한 대여섯방은 떨어졌댔는데, 죄 불발탄이 돼가지구 그냥 넹겼지." 함씨는 마을이 살아남은 건 다 마을을 둘러싼 다섯 봉우리 덕이라고 말했다. 대형 산불 때도 주변 봉우리들은 거의 불탔지만, 마을은 멀쩡했다고 한다.
2000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아진 곳이다. 주로 19세기 중후반에 지어진 한옥·초가들이 잘 보존돼 있다. 추위를 막기 위해 안방·사랑방·대청마루·부엌을 한 건물 안에 배치한 북방식 가옥구조를 보여줘 흥미롭다. 외양간을 부엌 옆으로 배치한 것, 대문이 없고 봉당이 매우 높은 것도 이채롭다. 춥고 눈 많이 오는 지역에서 나타나는 구조다. 굴뚝마다 항아리를 하나씩 거꾸로 쓰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둥근 항아리를 이용해 열 손실과 화재 위험을 줄이기 위한 조처다.
마을이 자랑하는 효자비·효자각, 동학 교주 최시형이 머물며 포교했던 사실을 기리는 동학사적기념비도 있다. 106살 할머니를 비롯해 90살 이상 어르신이 즐비한 장수마을이기도 하니, 상주하는 해설사를 통해 마을 경로당에도 들러보시길.
물회 맛볼까 매운탕 먹을까 |
가진항 회센터
고성군 죽왕면 가진항의 회센터는 어민들 10집이 모여 자연산 해산물만을 취급하는 곳. 가진항은 본디 주로 가자미회에 멍게·소라 등이 올라가는 얼큰한 물회로 이름난 포구다. 물회 말고도 집마다 제철 생선회와 아구·우럭 등 매운탕들을 내며 단골손님들을 거느리고 있다.
"계원들끼리 우리 죽왕면 포구에서 나는 고기만 쓰자고 결의하고 철저하게 그걸 지키고 있어요." 한 식당 주인은 "외지 해산물이나 양식한 것들은 여기 발을 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50여가구 어민들이 3년마다 새로 제비뽑기로 회센터 입주권을 얻는데, 걸리면 자격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10호집인 백두산횟집은 물회(1만원)와 아구매운탕(3만원)으로 주민·외지인에게 두루 알려진 집. 매운탕에 된장을 곁들여 써 맛이 한결 구수하다. 고성군청 관광과 (033)680-3361, 건봉사 (033)682-8100, 왕곡마을 보존회 (033)631-2120.
옮교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