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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형 <임종구 목사님께 여쭙니다.>
1. 목사님은 우리가 지켜야 할 ‘성경무오’라는 표현으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근거로 드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 14:34)나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2)라는 말씀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데도 그게 어떻게 여성 목사 금지로 해석할 수 있나요?
또, 성경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이니라.”(갈 3:28)나 ‘서로 상대가 없는 남녀가 없고, 서로를 통해 났다.’는 근본적인 창조 원리와 남녀 동등선언과 같은 말씀도 있는데, 이 말씀은 왜 무시합니까?(고전 11:11~12)
2. 성경무오가 해석의 여지도 없이 그저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면…
지금도 그 뿌리를 이어가는 미국 보수 정통 신학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세기 9장 18절~27절 노아 저주를 근거로 흑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했고, 각 사람이 부르심 받은 대로 지내고,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 받았다면 주 안에서는 이미 자유인인(고전 7:20~22)이니 굳이 벗어나려고 할 필요 없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는 잘못된 적용이라고 판명이 났으며, 아마 목사님께서도 이 말씀을 흑백차별 근거로 믿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예장 합동이 여성 안수 불가 근거로 삼는 구절들은 과연 명명백백한 해석이라 믿으십니까? 교회에서 잠잠하고 복종하라는 말씀이 정말 목사 안수 불가를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까? 전도사는 되지만 목사는 안 된다는 근거는 또 뭡니까? 너무 자의적이지 않습니까? 흑백차별 근거로 믿어온 옛 미국 신학계 행태와 지금 예장 합동 모습이 닮았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3. 아무런 근거 없이 동성애와 여성 안수를 연결 짓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혹시 여성 안수를 반대하기 위해서 일부러 동성애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십니까?
4. 일관성과 정직성이 없습니다. 총신대원은 아예 여성을 뽑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똑같은 시험을 거쳐 목사 후보생 과정으로 뽑아놓고 졸업과 동시에 다른 길을 가게 한다면 그건 부당하지 않습니까? 똑같이 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고도 여성에게는 장교 임관을 시키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임종구 목사님!
저는 총신대원 86회를 졸업한 합동 목사로 지금 여성안수공동행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목사님과 개별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이와 관련된 열린 토론을 정중히 제안드립니다.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저는 예장 합신 일반 신자입니다. 공개 토론 저와 하시죠.>
예장 합동 내內 김세윤 학파(총신신대원 82회 이광우, 83회 이국진, 86회 구교형, 새물결플러스 대표 88회 김요한 목사)는 홀로인 저에게는 군단 병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개 토론 승낙하시면, 퇴직해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중인데,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질문드립니다.>
임종구 목사님께 쓰신 글, ‘위 1’에서 디모데전서 2장 12절을 인용하신 뒤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데도 그게 어떻게 여성 목사 금지로 해석할 수 있나요?” 하셨습니다, 구교형 목사님은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적힌 “한 아내의 남편”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이국진 목사님과 똑같이 “한 남편의 아내”로도 해석하십니까?
‘위 1’에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왜냐면 너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는, 이 번역은 김세윤 교수 번역입니다. ‘구원에서 평등: 구원론’과 ‘직분에서 구별: 교회론’은 다른 범주임에도, 바울 사도께서 ‘구원에서 평등’을 말씀하신 것을 ‘직분에서 평등’까지 범주를 확장해 버리면, 직분(교회 질서)에서 남자도 없고 여자만 없겠습니까?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왜냐면 너희 모두(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자 상전, 졸병과 대장,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ㅡ“바울 사도께서 열거하신 것에는 부모와 자식은 없다.”는 반론은 기대하지 않습니다.ㅡ
예장 합동 여성 목사 안수론의 김세윤 교수 학파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영광스러운 구원론의 평등 선언’을 범주가 다른 ‘하나님께서 내신 교회 질서’를 해체하는 도구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범주 오류에 따른 이 오용은 결국 ‘하나님께서 내신 가정과 교회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신학적 #자폭’으로 귀결할 뿐입니다.
신대원에서 공부하지 않은 주제인 일반 신자로서, 이 신학적 자폭을 제가 운영자로 있는 {Daum} 카페 {개혁신앙 푸르내} 분별 게시판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에서 다뤄왔고, 다루고 있고, 계속 다룰 것입니다. ㅡ현재 김세윤 교수 여성 목사 안수론 텍스트 비평을 하고 있습니다.ㅡ 이광우 목사와 이국진 목사님에게 반론 비평 한 장 못 받았는데, 구교형 목사님 반론 기대합니다. 제 비평문 한 편 링크하고 이만 물러갑니다.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26117885177841129&id=100001390085442
구교형 <주신 말씀 답변드립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대한 답변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문은 교회의 다양한 직분자들이 어떤 자격과 품성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 복음 정신에 기초해 당시에 당연한 도리를 기록한 것입니다.
선교와 목회에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유념했던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의 본질과 또한 당대 시대적 분위기와 일반상식입니다. 복음의 본질이란 삼위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 등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반면, 복음을 이방에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 절제, 품성 같은 것은 성경 각 권마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됩니다(몸가짐은 이렇게 해라, 사람은 저렇게 대해라. 등등 수없이 많죠). 적용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 문제 삼으시는 본문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이 지도자 될 수 없던 당시에 통용되는 일반상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표현이지, 그것 아니면 감독이 뭔지 알 수 없는 근본적인 규정이나 정의가 아닙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면 그 분위기가 충분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목회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구요.
그래도 정의라고 하신다면 같은 맥락의 다른 규정을 보시죠. 디모데전서 3장 12절에도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돼”라는 구절이 있지요. 그래서 예장 합동은 안수 집사도 여성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겠죠. 그러나 예장 합동도 ‘서리 집사’는 엄청나게 많이 주죠. 항존직이냐 임시직이냐 차이만으로 여성에게 ‘서리 집사’를 주는 게 합동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서리 집사, 더구나 권사는 맘대로 주면서, 모호한 구절을 근거로 죽어도 여성 목사, 장로, 집사는 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제멋대로입니까? 목회적 상황에 따른 모든 말을 다 성경의 기본 정신과 섞어버리면 우리는 지금도 성경을 근거로 훨씬 더 많은 규정을 만들고, 지켜야 합니다. 다른 건 자유롭게 어기면서 “여성만은 절대 안 돼!”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망발인 줄 알아야 합니다.그래도 “성경을 말씀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실 것 같아, 하나만 더 예로 들죠.
목회적 상황에 나타난 다양한 서신서도 다 지켜야 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건 더 철두철미 말씀대로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태복음 5장) 분명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 남자들치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한 번쯤 품지 않는 사람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왜 우리 맘대로 눈을 빼버리지 않고 멀쩡히 거리를 활보할까요? 혹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저 교훈을 주시려고 강조용법을 쓴 것이고, 목회 서신의 여성 구절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꿀 수 없는 창조원칙이라고 믿는다면, 그게 바로 자유주의이고, 이단인 겁니다.
제가 비판하는 것은 ‘정통 보수’를 내세워 자기들이 믿고 싶고 유리한 것만 철칙으로 내세우며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셨던 바리새인, 서기관들 태도와 너무 흡사합니다. 너나없이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피를 토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①>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예.”나 “아니오.”라는 직답 없는 ‘논점 일탈’로서 ‘제3의 길인 전형적인 상황 윤리적 해석과 수사적 물타기를 하는 답변’을 주셨군요.
《구교형 목사님은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적힌 “한 아내의 남편”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이국진 목사님과 똑같이 “한 남편의 아내”로도 해석하십니까?》라는 제 질문은 간단한 질문입니다. 이 간단한 제 질문에 관한 직답은 “예.”이거나 “아니오.”입니다.
만약 “예.”라고 답하면, 텍스트를 혼잡스럽게 해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훼손한 자가 됩니다. 그리고 “아니오.”라고 답하면, 스승 김세윤 교수를 중심으로 그동안 20 년 넘게 동료 목사들과 여 전도사들과 함께 애써 쌓아 올린 공든 탑, 여성 목사 안수 운동 기반이 됐던 논리를 무너뜨리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간단한 질문에 정면승부를 할 수 없습니다. 진퇴양난의 승부인 것입니다.
물론, 힘들더라도 정면승부를 피하는 차선책이 있습니다. 차선의 답인 제3~6의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진 못 하고 뒤로도 후퇴 못 할 때는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을 기억해 제3(오른쪽 샛길: 문법상 남성이지만, 본질은 도덕성에 관한 규정이다.), 4(왼쪽 샛길: 문맥상 감독직 자격은 남성으로 한정되지만, 시대 상황이 바뀐 오늘날 적용에서는 재해석이 가능하다.), 5(하늘길: 본문은 원칙을 제시하나, 그 원칙에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아닌 시대 상황이라는 문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6(무덤이 될 수 있는 땅속 길: 3, 4, 5의 해석 모두.)의 길을 모색해 볼 수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광우 목사, 이국진 목사님과 같이 #침묵으로 장렬하게 전사하는 길’을 선택하지 못한, 구차하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비겁한 선택일지라도, 그 용기만큼은 이해합니다. 이해해야 하지요.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②>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구교형 목사님, ‘거짓 컨텍스트(Context)로 텍스트(Text)를 독살한 일’에 관해 논증하겠습니다. 스승을 잘 만나야 하는데, ‘김세윤 교수 제자 목사들 #신학적 #자폭, #자중지란 #자승자박’에 관해 논증하겠습니다.
구교형 목사님은 《이것은 여성이 지도자 될 수 없던 당시에 통용되는 일반상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표현》을 말씀하셨습니다. 김세윤 교수 제자 목사들, 여성 목사 안수주의 목사들이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해 고린도전서 7장과 11장과 14장, 디모데전서 2장과 3장을 해석하면서 내세우는 게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 시대 배경입니다. 이국진 목사님도 <하와가 가져온 저주: 디모데전서 2장 11절~15절을 어떻게 해석할까?>에서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던 지역이었다. 이 이교도의 예배 의식에서는 여성 사제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었다. 이런 개종 전 습성들이 에베소 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 상태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권면을 한 것이다.》며 시대 배경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구교형 목사님, 《여성이 지도자 될 수 없던 당시에 통용되는 일반상식》이라는 주장, ‘바울 사도가 사셨던 1세기 에베소와 로마 세계에 여성은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는 게 일반상식이다.’는 주장은, 이국진 목사님 글에서 보는바 의도적 왜곡이거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신 주장입니다. 왜냐면 [디모데전서]와 [고린도전서] 역사 배경이 되는 그 시대는, 로마제국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집트왕국 최고통치자 클레오파트라 7세(BC 59년~BC 30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수렴청정, 로마 황제 뒤에서 로마제국을 통치했던 여성 리비아 드루실라(BC 59년 ~ AD 29년)가 존재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이 “도시의 어머니(Meter tes poleos)”라는 칭호를 받으며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정교일치 시대였던 그 당시 에베소 정치와 경제와 종교를 지배한 곳은 아르테미스 신전이었는데, 이 신전 최고위직은 여성들이 독점하거나 여성들이 강력한 지위를 가졌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로마제국 명운을 쥔 베스타 신녀神女(Vestal Virgins)들이 존재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성화(Holy Fire)를 지키는 베스타 신녀들이 존재했던 시대에 로마인들은 이 불이 꺼지면 국가가 멸망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베스타 신녀들은 단순한 사제가 아니라 국가 안녕을 책임지는 영적 지도자로 추앙받았습니다. 로마제국 황제들은 베스타 신녀들에게 자신의 유언장 같은 국가 비밀문서들을 맡겼습니다. 집정관 같은 고위 관리도 베스타 신녀들에게 길을 양보하며 존경을 표해야만 했습니다. 황제 행차 시 베스타 신녀가 나타나면 황제 호위병들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베스타 신녀에게 경의를 표하며 길을 비켰습니다. 사형수라 할지라도 베스타 신녀를 마주치면 사면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또한, 에베소 정치 최고 권력자는 로마에서 파견된 속주 총독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시 운영은 지역 엘리트 계층인 ‘아시아르크(아시아의 장관들)’(행 19:31)가 담당했습니다. 여성 아시아르크들 경우, “도시의 어머니(Meter tes poleos)”라는 칭호를 새긴 비문들을 세워, 그녀들 사후에도 그녀들을 추앙했던 시대였습니다.
구교형 목사님, ‘이같이 여성 지도자들이 넘쳐나던 이교 문화’ 속에서 바울 사도께서 ‘교회 감독(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로서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 자격’을 말씀하시기 전,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하시며, 그 근거로 영원(항존)법인 ‘하나님께서 내신 창조 질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 여자는 남자의 몸’이라는 머리론(딤전 2:13)을 ‘#전면前面’에 내세우신 까닭을 생각해 보십시오.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③>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전후 문맥을 고려해 한 단어나 한 어휘나 한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문장 해석학’ 기본 원칙입니다. 그러나 제 페친 이국진 목사님은 <여성은 구원받을 수 없다.>에서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 채,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적힌 어휘 “한 아내의 남편”을 “한 남편의 아내”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하나님 말씀을 혼잡스럽게 하셨습니다.
“남편”을 “아내”로, “아내”를 “남편”으로 뒤바꿔서 읽을 수 있으면, 디모데전서 3장 2절 앞 문맥 2장 11절~12절 역시 뒤바꿔서 읽을 수 있겠지요.
남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남자가 가르치는 것과 여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 여안추에서 활동하는 목회자들과 여안추를 지지하는 교인들이 환호할 해석입니다. 그래서
이는 하와가 먼저 지음을 받고 아담이 그 후며, 여자가 속은 것이 아니고 남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남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여안추의 딤전 2:13~15)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④>
구교형 목사님, 《성경에도 없는 서리 집사, 더구나 권사는 맘대로 주면서, 모호한 구절을 근거로 죽어도 여성 목사, 장로, 집사는 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제멋대로입니까?》 하셨습니다.
목회 서신 시대 배경인 역사(Context)를 제대로 모르는 무지로 텍스트(Text)를 해석하며 ‘성경 후대 삽입설’을 주장하거나 하면서 텍스트를 “#제멋대로” 난도질해 텍스트를 혼잡스럽게 만든 위험한 학파, 예장 합동 내內 김세윤 군단 여성 목사 안수주의 목회자들에게나 “모호한 구절”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해석하기 힘든 난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믿는 저에게는 디모데전서 2장 8절~3장 7절은 “모호한 구절”들이 아닙니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한 구절들입니다.
구교형 목사님, 《다른 건 자유롭게 어기면서 “여성만은 절대 안 돼.”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망발인 줄 알아야 합니다.》를 두고 답변드립니다.
구교형 목사님이 말씀하신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의 본질”에 속하는 두 교리인 ‘삼위일체’론과 ‘신인神人’론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ㅡ저는 {뉴스앤조이} 게시물들 댓글란에서 ‘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며 하나님께 온갖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았던 회원,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회원(별명: 이스마엘의 도끼)을 방목하거나, 이단과 자유주의 사신신학자들 놀이터였던 {뉴스앤조이}를 ‘교회를 허무는 트로이 목마’로 여깁니다. 이런 {뉴스앤조이}에서 {성경}에 ‘신인神人’이라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내세워 “이 땅 위 예수님은 오직 사람이셨다.”고 주장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예장 고신에서 제명당한 박창진 삯꾼이었습니다.ㅡ
“{성경} 어디에 여성 목사는 안 된다는 구절이 있느냐?”는, 이광우 목사 식으로 답변드립니다. 구교형 목사님,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명명백백’한 규정은 있을지라도 {성경} 어디에 서리 집사나 권사는 안 된다는 구절이 있습니까?
{성경}이 명명백백하게 ‘남성’을 지목한 직분(감독: 목사, 장로) 제도를 반대하며 “여성 목사 안수”를 외치는 일과, 예장 합동에 {성경}이 침묵한 직분(서리 집사와 권사)을 운영하며 “여성 목사 안수 반대”를 외치는 일, 이 두 외침에서 어느 외침이 하나님 앞에서 “#망발”입니까?
구교형 목사님, 이 정도 반론문으로도 족하지 않습니까? 기록된 텍스트를 엉뚱하고도 한심한 해석으로 훼손하면서까지 공든 탑을 지키려는 용기가 아니라,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목사라면,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하나님의 준엄한 텍스트 앞에 무릎 꿇는 정직성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지금은 이 정도로 줄입니다. 틈나는 대로 반론문을 타이핑해, 이곳에 올리겠습니다.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⑤>
임종구 목사님께 쓰신 글에서 《전도사는 되지만 목사는 안 된다는 근거는 또 뭡니까?》 하셨습니다.
불교 집안에 태어난 저를 목포 산정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예장 합동 목포 시온교회 초등부 주일학교로 이끄셨던 제 신앙의 어머니께서는 그 당시 시온교회 서리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공과 공부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던 시온교회 초등부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남 선생님들보다 여 선생님들이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으로 ‘제1 신앙의 아버지’로 여기는 고故 잡초 조길선 목사님을 목포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시온교회 교육전도사님으로 만나 뵙게 됐습니다. 또한, 목포고등학교 시절에 시온교회 권사님 두 분이 저를 참 예뻐해 주셨습니다. 한 분은 목회자 꿈을 가진 저를 사위 삼고 싶어 하신 권사님이셨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저는 지금까지도, {성경}에 없는 직분이기는 하지만, 예장 합동 서리 집사와 권사와 여 남 전도사 직분에 거부감이 없습니다. 좋은 직분들로 생각합니다. 물론, 제 경험이 이 직분들을 평가하는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직분들이 {성경}을 어기는 직분인가?’입니다. 저는 {성경}을 어기지 않는 직분들로 생각합니다. 이를 [‘이광우 <여성 목사 안수가 교회의 세속화와 무슨 상관인가>’를 비평함: 이 비밀이 크도다!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시는 주님]에서 다뤘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회를 허무는 트로이 목마’로 생각하는 {뉴스앤조이}에서 소개한 책이 있습니다. ‘프랭크 바이올라 {이교에 물든 기독교}’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2013년 10월에 {Daum} 카페 {개혁주의 마을}에서 ‘개혁 교회 교회론과 직분론’을 흔드는 주된 목적으로 이 책을 발췌 소개하며 자신들 교단 정통성을 선전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지방교회 교리 수호와 포교를 위한 인터넷 사역 팀’ 수장 김바울(별명)이었습니다. 저는 김바울이 발췌한 대목들을 하나하나 파쇄하는 비평문을 썼습니다.
“Ps: 프랭크 바이올라 그릇된 주장들을 지방교회 수뇌부 사역자인 김바울 님이 이같이 동조해 지방교회 이단성을 증거해 주셔서, 저는 김바울 님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습니다. ㅠㅠ. 김바울 님, 제발 정신 좀 차리셔서 화인 맞은 양심을 깨끗한 양심으로 회복해 지방교회 교회론과 교회 직분론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그릇된 교리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로 맺은 [‘김바울 <조금 더 압축해 봤습니다.>’를 반론함]이었습니다. 이미 ‘주님의 비유 해석’ 문제를 가지고 했던 토론에서 저에게 참패를 당한 뒤, “지방교회는 이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 몸 안의 지체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서로 싸우게 합니다.”라며 호소했던 김바울은 이 반론문에 한 마디 반론을 못 했습니다. 김바울이 {이교에 물든 기독교}에서 발췌한 한 대목 소개합니다.
《1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젊은 일꾼들을 훈련하려고 성서학교나 신학대학원을 설립하지 않았다. 기독교 일꾼들은 교회 생활의 토양에서 나이 든 일꾼들에 의해 교육되고 훈련됐다. 그들은 ‘현장에서’ 배웠다.》
총신신학대학원 역시 서리 집사와 권사와 전도사와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제도입니다. 구교형 목사님, {신약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제도이니, 예장 합동 목회자(여 전도사, 목사) 양성 학교인 총신신대원을 없앨까요?
구교형 목사님, {성경}에 없는 직분들이라는 까닭을 내세워 이 직분들이 곧 여성 목사 안수론이 옮음을 증명하거나 여성 목사 안수론을 세우는 논리 기반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직분들을 {성경}을 어긴 직분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이 직분들 폐지를 주장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이 직분들을 빌미 삼아 {성경}이, 하나님께서 엄중히 명명백백하게 금지하신 여성 목사 안수를 주장해 ‘하나님께서 내신 교회 질서’를 파괴해야겠습니까? ‘예장 합동이 도둑질했으니, 살인강도 짓을 해도 된다.’는 논리입니까?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입니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 앞에서 정직해지십시오. {성경}의 순수성이나 예장 합동을 걱정해서 서리 집사와 권사와 전도사 직분을 걸고넘어지시는 것입니까? 여성 목사 안수라는 이념, 그동안 20 년 넘게 쌓아온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욕망을 관철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예장 합동 김세윤 군단은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허무는 트로이 목마임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⑥>
《이 말씀은 그저 교훈을 주시려고 강조 용법을 쓴 것이고, 목회 서신의 여성 구절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꿀 수 없는 창조원칙이라고 믿는다면, 그게 바로 자유주의이고, 이단인 겁니다.》 하셨습니다.
논쟁에서 불리하면, 쓰는 작전이 있습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 식 ‘물귀신 작전’입니다. ‘동반 자살 작전’이지요. 순화해 말하면 ‘물타기 작전’입니다.
주님 말씀을 인용해 전형적인 물타기 작전, 물귀신 작전을 펼쳐 논점을 흐리셨습니다. 논점 일탈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 논점 흐리기에서 ‘어차피 모든 인간은 마음속으로 간음죄를 범하는 죄인이니, 실제로 간음죄를 저지르자는 것인지? 어차피 모든 인간은 마음속으로 살인죄를 범하는 죄인이니, 실제로 살인죄를 저지르자는 것인지?’ 생각하며 이단 구원파를 떠올렸을까요?
인용하신 주님 말씀은 당연히 시詩적인 수사법으로서 “강조 용법”입니다. 주님께서 강조 용법을 써서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지켜라!” 하며 우리 눈이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수 없는 말씀입니다. 칼이 들어오면,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눈을 내놓거나 목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 질서를 세우는 교회 행정법은 이와 다릅니다. “지켜라!” 하며 우리 목에 칼에 들어오면, “예!” 하며 무릎을 꿇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여자 차별 법이니, 못 지켜!” 저항하며 장렬히 전사해 헛된 죽음으로 가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⑦>
《제가 비판하는 것은 ‘정통 보수’를 내세워 자기들이 믿고 싶고 유리한 것만 철칙으로 내세우며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마태 23장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셨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태도와 너무 흡사합니다.》 하셨습니다.
이런 걸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정통 보수주의자들이 “자기들이 믿고 싶고 유리한 것만 철칙으로 내세”운 것 열거해 주십시오. 또한 “함부로 사람을 판단”한 사례 적어 주십시오.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그리스도 복음의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 복음을 허무는 오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복음만이 아니라, ‘평등’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제 살 깎아 먹기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누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할아버지 자손으로서 상속자들인가?’(갈 3:6~9, 29)라는 ‘구원에서 평등’을 말씀하시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강조하셨던 바울 사도께서는, 디모데전서에서 교회 질서만이 아닌, 하나님 이름과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사회 질서를 소중히 여기시며 이를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딤전 6:1~2)
구교형 목사님, 바울 사도께서 사회 직분에서 차별(구별)을 인정하신 디모데전서 6장 1절~2절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상충(모순)되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을 김세윤 교수처럼 ‘후대 삽입설’을 주장해 {성경}에서 삭제해 버릴까요?
김세윤 교수는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여성 한 명도 없이 남성으로만 세우신 사실을 두고 ‘열두 사도를 남성만이 아닌 여성으로도 채우시면, 여성은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적 유대교 사회에 줄 문화적 충격이 커 그리스도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것인데, 주님께서 이를 고려하신 문화적 타협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스승 김세윤 교수 ‘여성 목사 안수론’을 교과서로 삼은 제자들로 이뤄진 김세윤 군단은 “바울 사도가 종들에게 상전을 섬기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 복음이 사회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 세력’으로 오해받아 복음 전파가 막히는 것을 막으려는 문화적 타협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인들 완악함 때문에 모세 선지자(신 18:18)께서 이른바 “문화적 타협”을 하신 적은 있었지만, “본래는(창조 질서는) 그러지 아니하니라.” 하시며 문화적 타협을 바로 잡으셨던 주님(마 19:8)께서는 시대의 눈치를 보며 타협하신 분이셨을까요?
남성으로만 한정한 감독의 자격을 말씀하시며, 남성으로만 한정하는 그 근거로 ‘창조 질서’를 전면에 내세우신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전서 6장 1절~2절에서 ‘종의 윤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종의 윤리’는, 인간성 말살의 미국 흑인 노예제도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폐지됐지만, 여전히 ‘상전(고용주)과 종(노동자)’이라는 사회 제도가 존재하는 오늘,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⑧>
구교형 목사님은 임종구 목사님께 쓰신 댓글에서 《지금도 그 뿌리를 이어가는 미국 보수 정통 신학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세기 9장 18절~27절 노아 저주를 근거로 흑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했고, …(중략)… 흑백차별 근거로 믿어온 옛 미국 신학계 행태와 지금 예장 합동 모습이 닮았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셨습니다.
저는 이 글 역시 구교형 목사님 무지無知에 따른 ‘물타기 논법’으로 생각합니다. ‘예장 합동 정통 신학 우물에 인종차별이라는 오물(독극물)을 넣어 예장 합동 여성 목사 안수 반대 목사님들을 음해한 독극물 타기 논법’으로 생각합니다. 연좌제 논법이기도 한, 이 논법에서 저는 “과거에 백인 판사가 법전 해석을 잘못하는 오판을 했으니, 현재 백인 판사들 판결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무법천지를 만들려는 참 비겁한 선동가 모습을 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장 합동 여성 목사 안수 반대 목사님들은 흑인 인종차별의 후예들이 아니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남북전쟁은 1861년에 터져 1865년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예장 합동 총회 신학 정체성에 영향을 준 미국 북장로교 총회가 1818년에 만장일치로 채택한 문서가 있습니다. 노예해방을 선언한 문서입니다.
예장 합동 총회 신학의 주된 정체성은, 좌경화되기 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북장로교회(PCUSA) 직영 신학교였던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해 좌경화되자, 이에 저항해 존 그레샴 메이천 목사님 중심으로 1929년에 설립한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하셨던 메이천 목사님께서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신 뒤 1936년에 미국 정통장로교회(OPC)를 설립하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 때 메이천 목사님과 함께하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20세기 개혁 신학의 거목들이신 게할더스 보스 목사님과 벤자민 워필드 목사님과 메이천 목사님께 배우신 존 머레이 목사님이십니다. “진리의 자기주장은 장엄하다.” 하셨던 존 머레이 목사님이십니다. 다음은 ‘존 머레이 {성경과 기독교 윤리} 김남식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0)’ 310쪽에서 옮깁니다. 즉, 이 책 [부록 4: 미국 장로 교회와 노예 제도]에서 옮깁니다.
《논쟁사(論爭史)에 한 흥미있는 전개(chapter)가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에서 마련됐다. 1818년에 그 보고서를 준비하기 위해 임명된 위원회의 한 보고서가 이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 중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 노예로 삼는 것이 인간 본질에 속하는 가장 귀중하고 또 권리를 심하게 침해하는 것이고, …(옮기는 제가 중략합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정신과 원리에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옮기신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중략하셨습니다.)… 노예제도는 인간성과 종교가 명하는 바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논증됐고, 또 일반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러므로 현대의 빛을 향유하고 있는 모든 크리스천 의무는 분명히 그 성실하고 열심있는 부단한 노력으로 전 시대 잘못들을 바로잡는 것이다. 되도록 빨리 우리 거룩한 종교에 얼룩진 잘못들을 바로잡아 이 오점을 씻어 내, 노예 제도를 기독교 세계에서, 가능하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다.”》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⑨>
임종구 목사님께 쓰신 글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동성애와 여성 안수를 연결 짓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혹시 여성 안수를 반대하기 위해서 일부러 동성애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십니까?》 하셨습니다.
구교형 목사님, 정말 몰라서 임종구 목사님께 여쭈신 것입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속이려고 ‘프레임 전환’을 하신 겁니까? 정말 몰라서 여쭈셨으면, 이 역시 구교형 목사님 무지에 따른 질문입니다. 아니면, 임종구 목사님께서, ‘이웃집 여자가 현관문을 발로 차며 하도 난리를 쳐서 현관문이 부서질까 봐 현관문을 열어주니(여성 목사 안수), 이웃집 여자가 안방 문을 열고 안방을 차지했다(동성애자 목사 안수).’는, 먼 세계 교회사가 아닌 아주 가까운 현대 세계 교회사에 있는 실제 사례들을 열거하셨음에도, 의도적으로 본질을 회피해 임종구 목사님을 ‘음모론자’로 몰아세우는 아주 비겁한 수법, ‘프레임 전환 수법’입니다. 참으로 비겁한 ‘기만술’입니다.
∎ 장로교 계열// 자유주의 사신신학에 저항하지 못한 미국 장로교(PCUSA): 여성 목사 안수 허용 → 동성혼 예식 허용-동성애자 목사 안수 허용.
∎ 개혁교회 계열// Reformed Church in America (RCA): 여성 목사 안수 허용 → 동성혼 문제로 보수 교회 대거 이탈.
∎ 루터교 계열 //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ELCA): 여성 목사 안수 허용 → 동성혼 예식 허용-동성애자 성직 허용.
∎ 성공회 계열 // Episcopal Church (TEC): 여성 사제와 여성 주교 안수 허용 → 동성혼 수용-동성애자 성직 허용.
∎ 침례교 계열 // American Baptist Churches USA (ABCUSA): 여성 안수 허용 → 동성애자 문제에 지역 교회마다 다름. 즉, 일부 지역 교회 수용, 일부 지역 교회 반대.
∎ 감리교 계열 // United Methodist Church (UMC): 여성 안수 허용 → 다수 지역 연회에서 동성혼과 동성애자 성직 수용 방향으로 이동한 결과, 이를 반대한 남은 자들이 Global Methodist Church(GMC) 설립.
구교형 목사님,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미국 글로벌감리교회 목회자들과 교우들 앞에서도 “여성 안수와 동성애가 무슨 상관이냐?”고 당당하게 물으실 수 있습니까?
하기야, 김세윤 군단 목사들에게는 “오! 어리석은 사람들아,(갈 3:1)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하. 갈 5:9)” 하신 바울 사도 경고는 오늘날에는 적용할 수 없는 시대 산물, 초대 교회에만 적용할 수 있는 문화적 산물이겠지요. 그러므로 《너나없이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피를 토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하신 것 역시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물귀신 작전에서 나온 기만술이겠지요.
기만술이 아니라면, {성경} 권위를 지키고자 희생 분투하신 미국 글로벌감리교회 목회자들과 교우들 앞에서 “피를 토하며 회개”하십시오.
朴埰同 <구교형 목사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정직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⑩>
임종구 목사님께 쓰신 글에서 《4. 일관성과 정직성이 없습니다. 총신대원은 아예 여성을 뽑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똑같은 시험을 거쳐 목사 후보생 과정으로 뽑아놓고 졸업과 동시에 다른 길을 가게 한다면 그건 부당하지 않습니까? 똑같이 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고도 여성에게는 장교 임관을 시키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하셨습니다.
총신신대원과 사관학교를 같은 범주에 두신 것은 범주 오류입니다. 예장 합동 총회 헌법을 따르는 총신신대원 학칙과 우리나라 헌법을 따르는 사관학교 학칙은 당연히 다른데, 예장 합동 총회 헌법과 우리나라 헌법을 같은 범주에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범주 오류입니다. 이 범주 오류를 보니, 제 청년 시절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기억을 더듬어 적습니다.
제 제2 모母 교회 목포 제일교회(그 당시 예장 개혁: 현재 예장 합동) 한 해 후배이자 목포 고등학교 한 해 후배인 안00은 1982년에 원광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성적이 안 돼 목포와 가까운 전남대학교 약학과가 아닌 원광대학교 약학과에 입학 원서를 넣은 것입니다.
안00: (자랑스럽다는 듯이) 지금 학교에서 CCC를 중심으로 기독 학생들이 원불교 법회 참석 의무를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고 있어요.
박채동: 그 기독 학생들은 원광대학교를 입학하기 전 너랑 마찬가지로 원광대학교가 원불교 학교라는 걸 알고 입학했을 것 아냐?
안00: 예.
박채동: 그러면 입학하기 전, 주마다 원불교 법회에 참석해야 졸업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네.
안00: 예.
박채동: 그러면, 애초에 입학하지 말았어야지.
안00: 왜요?
박채동: 원불교 법회에 참석해야 졸업할 수 있다는 건 원광대학교 설립 취지를 따른 학칙일 것인데, 그걸 알고도 입학했다는 것은 그 학칙에 동의해 입학했다는 것을 뜻하지?
000: …….
박채동: 종교 재단 학교들은 설립 목적이 있는데, 그 설립 목적에 따라 학칙을 제정해 놨는데, 총신대학교를 예를 들어 역으로 생각해 보자. 총신대학교에 불신 학생들이 위장 입학해 채플 반대 데모를 하며 학교를 시끄럽게 하면, 너는 좋겠니?
000: …….
박채동: 너나 기독 학생들은 입학한 뒤에 학교를 개혁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기회주의야.
000: …….
구교형 목사님, 제가 원광대학교 기독 학생들 부정직함을 꾸짖으며 일관성 있게 말하는 이 대화에서 ‘행간 숨은 의미’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채식만 파는 식당에 어떤 양아치가 친구들과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 “메뉴판에 왜 야채 햄버거가 없냐? 당장 햄 사 와서 야채 햄버거 만들어 주지 않으면, 우리 먹을 권리, 행복권을 침해한 사장과 주방장을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며 친구들을 선동하는 일 그만 두십시오. 그런 무식한 논리 그만 펴십시오. 신학적 자폭 멈추십시오.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외치며 “인간 부흥”을 외쳤던 르네상스 운동에서 말하는 “인간 부흥”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인간관 부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르네상스 이념이 어떻게 페미니즘 신학과 연결되는지 적고 싶지만, 이만 줄입니다.

첫댓글 절대적 차별 금지를 밀어붙히면 임산부가 채석장 중노동을 해야 합니다. 성경적, 현실적으로 합리적이고 합당한 남녀 구별이 필요하고요. 여성 목사 안수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