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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이단사이비 교주들은 거짓 예언자의 영성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이 인간의 정욕에서 나온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하고 위선하였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아차렸더라면 거기에 속는 자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악한 천사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지도 않은 자들이 보냄을 받은 것처럼 행세를 함으로써 한국 교회가 큰 타격을 받아 왔다.
교회가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거짓 예언자(선지자)의 문제를 심각하게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 김중은 교수의 논문 일부분을 구분선 아래에 게재하고자 한다(김중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영성 비교연구”, 『구약의 말씀과 현실』(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1996), pp.262-268.). 논문 전체를 다 보면 좋겠지만, 참 선지자였던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비교한 논문의 끝부분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계시가 완전하게 주어진 지금의 시대는 예레미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짓과 진리를 분별하기에 용이하지만, 말씀과 거짓 선지자들의 속임수를 모르거나 방심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거짓과 가짜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서는 분별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중략)
이상의 논의를 배경으로,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통해, 정반대의 메시지를 가지고 양쪽이 모두 야훼의 말씀을 주장함으로써 그 판별이 매우 어려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역사적 대결 현장을 본보기로 보여주는 예레미야 27~29장의 본문을 간략히 고찰함으로써 그 영성을 비교하는 데 도움을 삼고자 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면 일찍부터 예루살렘 예언자들의 잘못이 지적되었으나(렘 5:12-13, 30-31; 6:13-14; 8:10-11; 14:13-16),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 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판의 강도가 높아진다(렘 23:9-40). 예레미야는 앗수르 제국에 멸망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책임을 사마리아 예언자들에게 묻고 있으며(23:13; 3:11 비교), 이제 나보폴라살과 느브갓네살의 신흥 바벨론 제국 세력이 이미 여호야김 왕 3년 (주전 606/605년)에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하나님의 성전기구 얼마를 가져가고 왕족과 귀족자제들을 볼모로 잡아간 상황(단1:1 이하 참조) 직후에도, 유다와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이 유다의 죄(2:13, 28; 3:6-10)로 인한 야훼 하나님의 거듭되는 심판경고(렘 4:9)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샬롬 샬롬”을 선포함으로 “거짓"을 믿게 하여 멸망을 자초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지적한다(6:14; 8:11). 예루살렘의 다수의 예언자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의 사활문제가 풍전등화와도 같은 역사적 위기상황에서 야훼의 이름으로 한결같이 예언하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6:13)고 예언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강을 전하는 예언자의 메시지가 예레미야에게도 크게 거부감을 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4:10 참조). 그러나 예레미야는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위탁받고 평강(샬롬)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야훼로부터 보냄을 받지 않았으며,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거짓을 예언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6:14). 이제 예레미야는 야훼의 말씀에 따라, 유다가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될 것을 공개적으로 예언한다(25:1-11). 그러나 예레미야와 같이 심판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을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7:25-26; 25:4),왕과 권력자들은 그같이 예언했던 우리야를 죽었으며(26:23), 예레미야도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26:24).
여호야김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어 3개월이 채 못되었을 때 바벨론 군대가 다시 와서 솔로몬 성전을 노략하고 보물과 집기를 약탈해 갔으며, 여호야긴 왕과 그 왕실 및 수많은 포로들을 잡아가는 제2차 바벨론포로(주전 597년) 사건이 발생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요아스의 아들 맞다니야로 대신 왕을 삼고 충성을 다짐받았으며 그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쳐 주었다(왕하 24:817). 이러한 파멸 직전 상황의 어지러움 속에서, 지금까지 “샬롬, 샬롬”을 외치던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변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왕과 왕의 백성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할 것이다. 여호와의 집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올 것이다.”(렘 27:9,14, 16).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기 위해 회개를 촉구하던 예레미야의 메시지(렘 23:14, 22; 25:5 이하 참조)도 또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이제 야훼의 말씀에 따라 나무 멍에를 만들어 줄로 매어 목에 얹고 다니면서 왕과 백성들과 유다 왕실을 방문하는 이방국가의 사신들에게 "너희는 목에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 백성을 섬기라. 그러면 살리라”(렘 27:11-12)고 예언한다. 회개의 촉구는 이미 끝나고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에 순종하는 길이 살 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침내 성경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의 정면대결 장면이 생겨나게 된다.
오버홀트의 연구에 따르면, 예레미야 28장을 중심으로 이러한 대결장면은 예레미야 27~29장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를 중심으로 유다의 예루살렘과 바벨론 포로 유배지에서 다음과 같이 반복적으로 전개되었다(각주 1: Thomas W. Overholt, "Jeremiah 27-29: The Question of False Prophecy", 241-249쪽).
● 유다의 예루살렘 현장
1) 주제 메시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겨야 하며, 그 기간은 오래다(27장).
2) 위의 메시지에 대한 예언자 하나냐와의 대결(28장).
● 바벨론 포로 유배지 현장
1) 주제 메시지 반복 예레미야의 편지(29:1-14).
2) 예레미야 편지에 대한 구체적 대결상황 두 가지 :
① 아합과 시드기야의 경우(29:15-23).
② 스마야의 경우(29:24-32).
오버홀트의 관찰에 따르면, 먼저 27장에서 거짓을 예언하는 다수의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는 혼합종교 예식과의 관련성이나 직업적 왕궁-성소 예언자의 성격 또는 부도덕성의 문제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두드러진 현상은 예레미야의 메시지와는 정반대되는 무조건적인 구원선포의 내용이 문제점으로 드러난다는 지적이다(각주 2: Thomas W. Overholt, 242쪽 이하 참조). 이러한 현장의 특징은 28장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예언자 하나냐는 성전에 모인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라는 야훼 예언자의 전령 양식을 사용하여, 제2차 바벨론 포로는 두 해가 차기 전에 다 돌아올 것으로 예언한다. 그리고 이것이 야훼의 말씀이라고 끝맺는다.
이것은 분명히 바벨론에 항복할 것과 오랜 바벨론 포로 기간을 예언한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다. 당당한 하나냐의 야훼 이름으로의 구원 예언선포(렘 28:2,4 참고)에 대해, 예레미야는,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집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 오시기를 원하노라.”(28:6)고 즉석에서 응답한다. 거짓 예언의 판별문제가 구체적 역사적 대결현장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하나냐는 어느 모로 보나 야훼가 보내신 참 예언자로 여겨졌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제3차 포로를 예고했으나(27:17 이하), 하나냐는 그와 정반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신속한 회복을 야훼의 이름으로 거듭 주장하고 있다(28:2-4, 10 이하). 역사적 위기상황에 대한 정반대의 메시지를 가지고 대결하는 두 예언자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그 영성의 최초의 차이는 하나냐는 당당히 나섰고(렘 23:21 참조), 예레미야는 한 걸음 물러섰다는 점에 있다. 예레미야는 창조주 하나님 야훼의 주권적 자유를 역사 속에서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렘 27:5-6 참조). 불확실한 점이 없지 않으나, 야훼 하나님은 하나냐를 통해서도 말씀하실 자유가 있고 그의 뜻을 바꾸실 수도 있다고 예레미야는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하나냐의 메시지는 예레미야 자신도 간절히 원하는 내용이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예레미야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이 오히려 거짓 예언자가 아닌가 성찰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렘 15:18; 17:15 참조). 학자들 중에는 하나냐의 구원메시지가 전통적인 이사야의 시온신학(사 1:7 이하: 31:4 이하:33:17-22 등)에 서 있으며, 하나냐의 잘못이 있다면 하나냐는 시대착오적인 “이사야의 앵무새" (마틴 부버)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냐에 대한 실존적인 해석도 불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시온신학과 함께 이사야는 하나님의 율법준수(사 33:22)와 죄악에 대한 심판을 언제나 강조하기 때문이다(사 5:3 이하 참조). 하나냐에게는 이 점이 결핍된 것이다(각주 3: Thomas W. Overholt, 245쪽 이하 비교).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구원 예언자는 그 예언이 성취된 후에야 참 예언자로 판별된다는 모세신학 전통의 기준(신 18:21-22)을 제시해 보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빼앗아 꺾어버리면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두 해가 차기 전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버리리라”(28:11)고 선포한다. 이 장면에서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기 길을 갔다"고 단순하고도 짤막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언자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대결에서 이제 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2년을 기다려 보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2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하냐냐가 멍에를 꺾어 버린 사건 후에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냐에게 "네가 나무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멍에를 만들었다.”(28:13)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이제 하나냐에게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 하나나의 예언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벌을 통고한다. 금년에 죽으리라는 예레미야의 전한 말대로 하나냐는 그 해에 죽었다. 이로써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극적인 대결 상황은 끝이 난다.
앞서 지적한 예레미야의 한 걸음 물러섬과 대조적으로 이제 하나냐의 영성에서 차이점으로 주목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일방적으로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는 일종의 “폭력”까지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두드러진 영성은 자기 성찰과 함께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다림의 영성”이다. 한 걸음 물러서고 기다려서 얻은 말씀에 의지하여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거짓을 분명히 식별하고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냐의 예언이 유다 백성으로 거짓을 믿게 했다는 지적은 놀라운 것이다. 거짓 영성은 언제나 대중을 미혹하는 힘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 참예언자의 영성은 더욱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야훼 하나님은 하나냐의 반대 예언에 밀려 한 발자국 물러서서, 멍에를 빼앗겨 꺾이는 수모를 당하고 말없이 자기 길을 갔던 예레미야를 버려두시지 않고 오래지 않아 하나냐의 영성을 분별하는 말씀을 예레미야에게 주셨다는 이야기의 골자는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의 범례(paradigm)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 예언자는 말씀이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오버홀트가 분석한 대로 29장에 나오는 제2차 바벨론포로 유배지에서 발견된 두 개의 예레미야 편지에 대한 유배지 예언자들과의 대결 내용도 28장의 내용과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예레미야는 편지를 통해 아합과 시드기야(29:13), 그리고 스마야(29:31)가 주장하는 조속한 포로 귀환 내용이 하나냐처럼(28:15) 거짓 예언임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아합과 시드기야는 간음죄까지 저지르고 있었다(29:23). 이들 예언자들은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에게 거짓을 믿게 한 잘못이 있었다. 결국 그들도 하나냐와 같이 죽음의 벌을 받는다(29:21) 역사는 야훼 하나님께서 분명히 개입하시고 행동하시는 시간이며 장소이다. 당시 상황에서 볼 때 하나냐를 위시한 예레미야의 적대 예언자들은 당당하게 떨쳐나선 조국의 애국투사들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며 바벨론에 항복을 권유한 예레미야는 외세에 굴복하고 아부하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나 반역자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예레미야는 “야훼의 말씀”에 충실했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 말씀대로 586년 제3차 바벨론 포로 사건과 함께 멸망했다. 그러므로 참 예언자의 영성은 상황(Context)에 근거하지 않고 말씀(Text)에 기초한다. 상황은 말씀을 왜곡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을 직시하게 한다. 그러므로 참 예언자의 영성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야훼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대한 신뢰성이다(각주 4: B. S. Childs, 139쪽 참조, 차일즈는 예레미야의 태도를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21세기를 바로 앞에 둔 우리 시대에도 예언자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음이 사실이다(각주 5: Thomas W. Overholt, 165쪽 이하 참조). 때로는 우리 시대의 예언자들끼리도 갈등과 충돌이 없을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어떻게 우리는 거짓예언과 거짓 예언자를 식별할 수 있는가? 오늘도 이러한 물음을 제기하고, 자신을 포함해서 왜곡된 영성을 성찰하고 바른 영성을 찾아 나아가려는 태도 그 자체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아닐까? 특히 우리 시대의 많은 고통의 원인이 거짓 예언자들과 이기적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지적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각주 6: Edgar F. Magnin, 108쪽).
각주 1) Thomas W. Overholt, "Jeremiah 27-29: The Question of False Prophecy",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Vol, XXXV(September, 1967), No.3, 241-249쪽.
각주 2) Thomas W. Overholt, 위의 글, 242쪽 이하 참조.
각주 3) Thomas W. Overholt, 위의 글, 245쪽 이하 비교.
각주 4) B. S. Childs, "True and False Prophets", Old Testament Theology in a Canonical Context(Fortress Press, 1989), 133-144쪽.
각주 5) Thomas W. Overholt, Channels of Prophecy: The Social Dynamics of Prophetic Activity (Fortress Press, 1989) 165쪽 이하 “Prophecy Today" 참조.
각주 6) Edgar F. Magnin, "The Voice of Prophecy in this Satellite Age", Interpreting the Prophetic Tradition (The Hebrew Union College Press, 1969), 108쪽.
첫댓글 좋은 포스팅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예레미아 27-29장 등 예언서 부분을 성경에서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래야 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구약은 물론이고 신약교회의 시대에도 활동을 하므로 크고 치명적인 위험이 됩니다.
마태복음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가복음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네, 예레미아 시대의 상황이 산약교회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더 큰 문제와 화근이 되고 있습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
본문의 삽화 사진은 마태복음7:15에 딱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초신자 신학공부 게시판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게시물입니다. 삽화의 근거 구절이 되는 마7:15의 거짓 선지자에 대해 칼빈은 어떻게 설명했을까? 찾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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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석: 공관복음>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이 말씀은 교회가 여러 가지 다양한 속임과 기만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세심하게 조심하지 않으면 믿음으로부터 떨어질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거짓에 끌리는 아주 강한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속이고자 하는 천성을 타고 났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있어서도 천재성을 타고 났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시키는 일에 귀재(鬼才)인 사탄은 무지하고 조심성 없는 자들을 덫에 걸리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덫을 놓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날이 오면, 그들은 모든 다툼이나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되리라는 것이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한다면 힘써서 사탄의 덫을 피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신다. 이미 말했
이미 말했듯이, 자기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싸움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끝까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위해서는, 단지 순종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하여야 한다. 사탄에 의해서 끊임없이 공격을 받는 우리의 믿음은 사탄을 대적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선하고 신실한 일꾼들의 지도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깊게 깨어 있어서 인내로써 확고하게 믿음을 지켜 나가지 않는다면,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쉽게 양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나니 …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 5)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취지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이리들"이 그리스도의 양 무리 속으로 몰래 들어올 수 있다고 해서, 즉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된 가르침들로 순전한 믿음을 더럽히고 훼손하고자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서, 믿는 자들이 낙심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들은 낙심하는 것이
그들은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음을 굳게 먹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조심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나태함으로 인해서 그릇된 길로 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온갖 종류의 덫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조심하는 데에 필요한 담력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사탄이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오든,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반드시 지키시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서 지혜의 성령을 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의 감화(感化)들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그의 참되심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인쳐 주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속임수들과 술수들을 드러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속임수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려 깊게 철저히 살펴서 분별하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아주 그럴 듯하게 위장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만약 그리스도께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는 표지(標識)에 관한 이 말씀을 덧붙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든 선생들의 권위를 예외 없이 다 의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려할 만한 치명적인 위험성이 선생들에게 존재하고, 우리가 그 위험을 피할 길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선생들을 모두 의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 선생들 모두에 대하여 우리의 귀를 막는 것보다 더 좋거나 간단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불경건한 자들은 그들에게 불리한 온갖 종류의 가르침을 단호하게 배척함으로써 위험을 차단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는 반면에, 약하고 뭘 잘 모르는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계속해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게 되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및 그 신실한 일꾼들과 선생들에 대한 우리의 공경심이 줄어들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열매”를 보고서 "거짓 선지자들”을 식별해 내라고 명하신다.
@장코뱅 거짓 선지자는 악한 열매로써 자신이 사이비임을 보여줍니다. 이단이나 신비주의로 갈수록 공금횡령과 성법죄, 파렴치 범죄가 횡횡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천이다 공감합니다.
@장코뱅 칼빈의 안목이 탁월하고 설명도 좋네요. 불경건한 자들, 즉 세속인들은 오히려 불리한 가르침을 단호하게 배척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데, 연약한 자들은 그리 못해서 혼란에 빠진다는 말에서 안목의 탁월함을 보여 주네요.
거짓 교사들은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에 경계심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우네요.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본문에서 거짓 예언자는 오히려 당당히 나서고 참 예언자(예레미아)는 한발 물러섰고, 말씀과 함께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에 눈길이 갑니다. 현대판 거짓 예언자인 이단, 사이비, 신비주의자가 더 나대는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네, 공감합니다.
네. 그렇지요. 거짓 선지자는 폭력과 간음까지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네요. 목사들 중에서도 이런 부류가 있다면 나쁜 나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