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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민권(民權)의 승리
(1) 혁명전야(前夜)
1956년 신익회, 장면과의 정권쟁탈에서 민중(民衆)의 이산(離散)을 깨달은 자유당은 60년 차기 선거를 위해 무리를 거듭했다. 먼저 조봉암을 제거했고 경향신문을 폐간했으며 보안법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을 장악했다. 국회에서는 정․부의장 3석과 상임위원장 자리를 모두 독점해 버렸고 행정부에서는 내무, 재무, 법무 등 주요 장관자리를 자유당계 인물로 바꿨다. 법관 연임법을 만들어 뜻에 맞지 않는 법관들의 연임을 거부함으로써 사법부마저 지배했다.
보성(寶城), 양산(梁山) 등지에서 실시된 재(再)선거는 3․15 부정선거의 예비훈련이나 다름 없었다. 부정선거를 위한 선거도구로 ‘반공예술인단’이라는 걸 만들어 전과 3범의 깡패 임화수(林和秀)가 경무대(警武臺) 곽영주(郭永周)를 등에 업고 날뛰었다. 국제사회에서는 자유당 정권이 고립되어 재일교포의 민단(民團)에서 불신임성명을 냈고 북송교포가 나와 이 정권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세칭 ‘가짜 이강석(李康石)’이 출현할 정도로 사회가 썩었고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증인으로 법정에선 치안국장 김종원(金宗元)이 재판장에게 “일개 재판장이 무엇이냐?”고 고함을 칠만큼 자유당의 위세가 대단했다.
자유당은 59년 6월 29일 제9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뽑았다. 민주당은 59년 11월 26일 조병옥이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당의 실권은 신파의 장면이 잡았다.
그러나 조병옥은 신병치료 차 미국에 갔다가 그곳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자유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3월 15일을 선거일로 정해 맹렬한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반공청년단을 조직하고 군소정당의 정․부통령 후보등록을 방해하는 한편 전국 유권자 성분을 조사하여 3인조, 9인조로 세포조직을 형성했다. 이는 비밀경찰이 맡았는데 총지휘는 치안국장 이강학(李康學)이 맡았다.
2월 27일 대구에서 자유당이 연설을 하고 다음날 민주당이 하려하자 일요일인데도 대구시내 학생들을 전원 등교시켰다. 이에 불만을 품은 경북고 5백여명의 학생들이 이날 오후 1시쯤 “학생인권 옹호하라”고 외치며 거리에서 시위를 하자 다른 학교 학생들도 쏟아져 나왔다. 이같은 학생운동은 삽시간에 대전, 수원, 서울, 충주, 부산 등으로 번져 나갔다.
학생시위 속에서도 자유당은 ① 총유권자의 40%는 사전투표 시켜라 ② 나머지는 3인조 9인조를 동원 공개 투표하라 ③ 야당이 반대하면 유혈도 주저하지 말라 ④ 구(舊)진보당, 언론인, 족청계(族靑系), 국군 하사관, 요시찰인(要視察人) 등은 회유 포섭하라 ⑤ 경찰은 선거에 총동원하라 ⑥ 야당 선거자금 유입을 철저히 봉쇄하라는 등 부정선거 지령을 내렸다. 선거결과는 물론 이승만, 이기붕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2) 4․19혁명
참다못한 백성들의 분노는 가장 먼저 마산(馬山)에서 터졌다. 경찰의 발포로 수십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그래도 자유당은 백성들의 폭발을 얕보고 책임전가에만 급급하는가 하면 경찰력으로 능히 진압될 줄만 알고 있었다. 4월 11일 김주열(金朱烈)군의 시체가 마산 앞 바다에서 떠오르고 사인규명이 흐지부지되자 마산시민이 또 들고 일어섰다. 4월 18일 서울에서는 고대생 3,500여명이 궐기 “민주역적을 몰아내라”고 외치며 국회 앞에서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이 평화적인 시위에 자유당은 깡패를 동원 고대생 가운데서 10여명의 중경상자가 났다. 이에 격분한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은 4월 19일 총궐기해 경무대로 몰려갔다. 경찰의 총탄에 수많은 학생이 죽고 다쳤다. 이 정권은 이날 오후 5시를 기해 대구, 부산, 대전, 광주 등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은 자유당과 일절 관계를 끊는다고 발표 전 각료의 사표를 받고 허정(許政) 등에 과도 내각을 수립토록 지시했다. 이기붕은 우물쭈물 시일을 끌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부통령 사퇴를 ‘고려’한다는 태도를 표명했으나 이미 사태가 그 정도로는 수습되기 어려워졌다.
정국이 수습되지 않고 있는 4월 25일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고 대학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채택 258명의 교수가 국회 앞에서 시위를 했다. 이를 본 수많은 학생 시민들이 재차 시위를 벌여 자정까지 계속됐다. 데모대들은 이기붕, 이정재, 임화수의 집 등을 습격해 파괴하거나 불을 질렀다.
4월 26일 시민들의 시위는 다시 시작됐고 계엄 하에 탱크가 거리로 나왔으나 “우리 국군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날 밤, 시위대는 최인규(崔仁圭)집을 습격 방화했다. 부산에서도 5만여명의 시민들이 시위를 전개 자유당 청사를 습격해 불을 질렀다.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은 “민권이 이겼다”고 외쳤다. 전국적으로 183명이 죽고 6,25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승만의 사표는 27일 국회에서 수리됐다. 이기붕은 28일 새벽 아들 이강석(李康石)이 쏜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가족 전원이 집단 자살했다. 이로써 이 정권 12년 간의 폭정은 종말을 고했다.
국회에서는 야당이 여당으로 바뀌어 자유당 의원들은 민주당에 끌려 다녀야만 했다. 국회 정국 수습위는 ▲ 3․15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즉시 재선거를 실시한다 ▲ 과도내각 아래 완전 책임내각제로 한다. ▲ 개헌 후 민의원의원 선거를 바로 실시한다는 등의 결의를 했고 과도내각의 조각위임을 받은 허정은 조각을 발표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승만은 60년 5월 29일 오전 8시 50분 전세기 편으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만 동반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다. 12년 간 독재자로 군림해온 그는 망명생활에서 귀국한지 15년 만에 다시 망명길에 오르는 신세가 됐다.
제4대 국회는 4년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6월 23일 해산했는데 그에 앞서 숙원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물러섰다.
4․19뒤 자유당이 무너짐에 따라 유일한 보수정당은 민주당이 됐다. 혁신세력은 조직 정비를 하지 못하고 군웅할거(群雄割據)식이었다. 총선을 앞둔 정계는 보수․혁신 두 세력으로 크게 나뉘어졌다. 4․19 후 가장 먼저 당명(黨名)을 내건 것은 서상일(徐相日), 김달호(金撻鎬), 윤길중(尹吉重), 박기출(朴己出)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이었다. 그러나 당세(黨勢) 확장에만 너무 급급한 나머지 자유당계 인사까지 마구 받아들여 혁신이념에 흠을 남겼다. 그밖에 혁신정당으로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 혁신동지연맹(革新同志聯盟), 구국청년단(救國靑年團) 등이 등장했으나 당의 노선이 모두 구호(口號)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구국청년단의 고정훈(高貞勳)은 보수 정치인들의 지난날 흑막을 폭로하는 전술을 쓰다가 명예훼손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바라던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 선거가 60년 7월 27일 실시됐다. 7월 29총선은 지금까지의 어느 선거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민의원 입후보자 총수는 무려 1,562명에 달했으며 참의원 입후보자는 214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소속 중 3백명 가까운 민주당 낙천자(落薦者)가 신파 또는 구파의 지원을 받아 공공연한 경쟁을 벌여 7․29총선은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판이 되었다.
투표는 표면상 조용히 진행 되었다. 그러나 개표가 시작된 지 몇 시간 후에 창령(昌寧)을 비롯한 각 선거구에서 난동사건이 벌어졌다. 투표함파괴, 소각(燒却) 등으로 당선자를 결정짓지 못한 선거구가 13개나 되었다. 특히 창령에선 입후보자를 발가벗겨 광장에 세워놓고 ‘인민재판’식으로 사형을 언도하는 난동을 저질렀다. 집권에 눈이 뒤집힌 민주당 신파가 저지른 소란들이었다.
이같은 난동으로 재선거를 실시한 선거구는 진도(珍島), 광산(光山)을 비롯해 대전갑(大田甲), 서천(舒川), 김천(金泉), 괴산(槐山), 고성(固城), 영양(英陽), 밀양갑(密陽甲), 남원갑(南原甲), 삼천포(三千浦), 산청(山淸), 창령 등이었다. 7․29총선 결과는 물론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3) 민주당 정권의 성립과 말로(末路)
민주당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밀기로 결의했으나 구파가 양직(兩職) 안배(按配)를 거부하고 윤보선, 김도연을 고집했다. 8월 12일 민․참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 2공화국 대통령에는 예정대로 윤보선을 선출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윤 대통령은 신파측 요구를 거부하고 김도연을 지명해 버렸다. 그러나 국회표결에 부친 결과 부결되고 두번째로 장면을 지명해 가결됐다. 총리 인준에서 실패한 구파는 ‘건전 야당’을 표방하고 70여명의 의원이 신당 조직에 서명 입각거부도 의결했다. 정치 생리가 다른 신․구파는 10월 13일 마침내 결별을 선언하고 구파는 신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했다.
이 정권이 무너지자 반(反)민주행위자들을 처단하라는 여론이 높아져 검찰은 3․15 부정선거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최인규, 이강학이 체포되고 이정재는 자수했으며 장경근(張暻根)은 병보석 중 일본으로 밀항(密航)했다. 기소된 13명 가운데 10월 8일 선고 공판에서 유충렬(柳忠烈) 한 사람에게만 사형이 내려지고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집행유예나 무죄 등이 선고돼 석방됐다. 그러자 서울, 부산, 마산 등지에서 데모가 일어나고 4․19 부상학생과 희생자 유가족들에 의한 의사당 난입사건이 10월 1일에 일어났다.
민의원 본회의에서는 ‘민주 반역자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검찰과 경찰이 석방된 원흉들을 다시 검거하기 시작했다. 구속된 자들 가운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꼴사나운 일이 많았으나 최인규는 자기 죄를 솔직히 시인하고 이승만에 충성하는 태도를 견지해 화제가 되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을 현행법으로 다스리기 어려워 혁명입법에 의해 탄생한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가 맡았다.
혁명입법 중 가장 말썽이 많았던 것은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 법안’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4․19 부상청년들이 두 차례나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이 법안은 법사위를 통과한 지 한달 뒤인 12월 5일에야 본회의를 통과했는데 이처럼 심의기간이 길어진 것은 민․참의원 중에 그 대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안에 따르면 공민권 제한 자동 케이스는 3․15 당시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자 ▲ 중앙당 당무위원 ▲ 기획위원 ▲ 정무위원 ▲ 심계원장 ▲ 대통령 비서관 ▲ 민의원 의장 비서실장 ▲ 자유당 경찰 ▲ 중앙 및 지방 행정기관 ▲ 금융기관 ▲ 노총(勞總) ▲ 반공 청년단 등의 지도층 ▲ 3군 참모총장 등으로 하고 심사 케이스는 현저한 반민주행위자를 대상으로 했다. 61년 1월 4일 효력이 발생한 이 법에 따른 자동케이스 해당자는 전국적으로 658명이었다. 국회의원 가운데는 자동 케이스가 이재학(李在鶴․민의원), 박철웅(朴哲雄․참의원) 등 8명이었고 심사 케이스가 이정석(李丁錫․민의원), 황성수(黃聖秀․참의원) 등 8명이었다. 이들은 의원 자격이 상실되는 동시에 7년 혹은 5년 간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반민주 행위자로 판정되어 자동 케이스로 7년간 공민권이 박탈된 자는 전국적으로 666명이었으며 일반인으로서 심사 케이스 해당자는 14,000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는 경찰관 2,534명(경감 7, 경위 84, 경사 45, 순경 1,970여명)이 들어 있었다.
혁명입법 4개 법률 중 ▲ 3․15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조직법 ▲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등 3개 법률은 별 말썽없이 입법되었으나 ▲ 부정축재처리법안 만은 각파간 의견대립으로 입법이 지연되었다.
부정축재 처리위원회의 기능은 61년 5월 4일부터 발휘됐으나 집권당인 민주당 각파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5․16 때까지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해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4․19의거의 덕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내각은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 경제정책의 실패 ▲ 대(對)UN외교의 실패 ▲ 중석(重石)사건 ▲ 인사행정의 부패 등 무능과 부패로 일관돼 원성이 날로 높아갔으며 장 정권을 규탄하는 데모와 성토대회가 연일 곳곳에서 열렸다. 이에 당황한 장면 내각은 발족 후 8개월만에 대남간첩 단속을 강화한다는 구실로 ‘반공법안’이라고 이름 붙인 특별법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민의원에 제출하기도 전에 원내 야당의원들과 재야인사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이 정권 당시의 2․4 보안법파동 못지 않게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2․4 파동 때 극한투쟁으로 보안법을 저지하려고 나섰던 것이 민주당 신파였으나 자신들이 정권을 잡자 다시 2․4 파동에 못지 않는 정치적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혁명과업 수행에는 성의가 없고 실정(失政)을 얼버무리려는 처사라고 야당과 각계의 규탄이 높았음에도 민주당 정권은 입법을 서둘렀다. 더구나 이 법안과 함께 민주당 정권은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 도 만들어 민의원에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격분한 신민당과 재야 인사들은 정부의 무능을 공포 분위기로 감추려는 계획이니 절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신민당 내 청조회(淸潮會) 회원들은 이 법이 악용되기 시작하면 건전한 노동쟁의도 불법화할 것이며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완전히 말살하고 말 것이라고 극한 투쟁을 선언했다. 또 민주당내 소장파인 신풍회(新風會)에서도 “우리는 이 법안에 관여한 바 없으며 공산당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방 예비법으로도 충분하다.”고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민주당 정권은 반공에 관한 입법이 어렵겠다고 느껴 제3의 시안(試案)으로 국가보안법 중 개정안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반공법과 거의 같았다. 이를 반대하기 위한 ‘반민주 악법반대 성토 대강연회’가 서울시청 앞에서 61년 3월 22일 오후에 열렸다. 이 대회는 혁신세력이 주동했는데 4개 반공단체는 반공법을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이날 반대대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밤 9시까지 데모하다가 해산했는데 다음날 국회에서 용공성(容共性) 여부가 논의되기까지 했다. 어쨌든 보안법은 개정되지 못한 채 다음 국회로 넘어갔다.
장 정권은 대일(對日)외교, 대(對)UN외교에서 모두 무능과 실패를 드러냈다. 장 정권에 앞서 허정 과도(過渡)정부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대일(對日)친선정책을 쓰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았는데 장 내각은 수립되면서부터 ‘지일(知日)내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각(組閣) 직후 ‘외교쇄신 7개 원칙’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대일외교의 근본쇄신과 국교 정상화’였다.
정일형(鄭一亨) 외무부장관 초청으로 9월 6일 일본 외상의 방한(訪韓)이 수락됐고 61년 5월 6일에는 일본의 여당인 자민당(自民黨) 중의원(衆議院) 의원 8명과 일본 외무성 아시아 국장 등으로 구성된 자칭 ‘친선 사절단’이 내한(來韓)했다. 이들은 1주일 간 우리나라에 머물며 과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 그들은 돌아가서 ▲ 한국의 대일(對日)재산청구권은 일본의 대한(對韓)경제원조로 상계할 수 있으며 ▲ 김 외무차관과의 단독회견에서 잠정적 어업협정 체결을 약속 받아 사실상 일본 어선이 평화선(平和線) 내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있게 됐고 ▲ 불원간 주한 일본 대표부를 서울에 설치할 수 있게 됐다고 중의원에 보고했다. 이 무렵부터 터부시해 온 일본 노래가 다방에서 예사로 흘러 나왔으며 반일(反日)정책이 크게 완화된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4․19를 계기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솟아난 것이 비(非)보수세력 다시말해 혁신세력이었다. 이 정권아래서 불법화한 진보당계와 결별한 최근우(崔謹愚), 유병묵(劉秉黙) 등이 민족통일을 내세우고 사회대중당을 결성했는가 하면 전(前)진보당계의 김달호(金達鎬)계는 윤길중(尹吉重)계와 갈라져 한국사회당이란 신당을 만들었다. 윤길중계는 결국 혁신당 발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사회당은 전진한(錢鎭漢) 의원이 중심이 돼 민족주의 민주사회당으로 존재했으나 60년 8월 4일 전 의원이 사퇴함에 따라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김창숙(金昌淑), 장건상(張建相) 등이 혁신조직연맹을 만들어 14명의 공천자를 냈으나 모두 낙선돼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 뒤 일부는 독립사회당을 추진하고 장건상계 일부는 윤길중과 혁신당을 추진하던 중 5․16을 맞았다.
이처럼 혁신세력들은 군웅할거, 이합집산(離合集散)만을 거듭했다. 그것은 조직보다 구호로 규합보다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장 정권의 행정력이 무력함을 보고 자만한 나머지 사회대중당의 경우 ▲ UN과 제휴하고 민주주의 보루를 확보할 수 있는 조건 아래 국토의 평화통일을 기한다. ▲ 국토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전 민족적인 초당외교가 수행될 것을 희망한다는 등의 통일방안을 내세웠다. 또 사회혁신당은 UN정신 및 정책에 입각한 자주적 민주통일을 내세우고 있다가 차츰 변화를 일으켜 서울대의 ‘민족통일 학생연맹’이란 단체가 남북통일을 위한 선행조건으로 남북학생회담이 필요하다고 제의하자 이에 호응하고 나섰다. 이처럼 남북학생회담 추진론이 표면화하고 일부 학생들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오자 혁신세력의 군소정당들은 종래의 중립화 통일론을 내세우고 남북교류론을 들고 나오는 등 통일논의가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었다. 이 북새통 속에서도 민주당 정권은 속수무책 방관만 하고 있다가 5월 16일 새벽, 군인들이 궐기하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었다.
민주당 정권 당시 장성군수는 이해영(李海英)씨와 이시형(李時炯)씨였다. 담양군수로 있다가 60년 2월 8일 장성으로 부임한 이해영 군수는 4․19 직후인 그 해 4월 22일 4개월만에 영광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뒤를 이어 영암군수에서 장성으로 옮겨 온 이시형 군수는 5개월 간 근무한 뒤 그 해 10월말 의원면직했다. 후임으로 진도군수였던 김남권(金南權)씨가 60년 12월 8일 부임했다. 60년 한해 동안에 3명의 군수가 장성을 거쳐간 셈이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