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에 대한 경계 인식과 시적인 언표들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봄을 보내고 새롭게 찾아오는 여름이라 하지만, 완연한 여름은 아니다. 계절은 변화를 불러오지만, 우리 곁을 떠날 때면 안타까운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매번 반복되는 계절이지만, 지난봄을 상기하면서 혹자는 ‘지독한’ 이란 말을 붙여 쓰곤 한다. 과거가 되어버린 짧은 봄의 시간을 상기해본다면 그런 말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 이전부터 우리가 사는 환경이 변화될 것 같은 조짐을 예감케 하는 징후들이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확정’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말하길 꺼린다. 정치가 변하고 사회가 그 뒤를 따르지만, 항상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 하는 성질을 잃지 않은 것은 자연의 복원력뿐이다. 우주의 질서에 충실한 여름을 두고 사상 최대의 폭염이라는 둥 뻔한 말들에 식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계절에 맞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지루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여름은 이미 우리 곁에 오래전부터 삶의 방식이 되어 있어 순응해야만 한다. 여름의 계절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듯 시인들은 문학적 개별성으로 사유의 세계를 절제된 문장으로 의미를 피력한다. 마치 여름이란 계절이 혹독한 겨울을 통과해 시간의 주체가 되듯 타자의 시선으로 문학성을 확인시키려 한다. 강경호 시인의 시 다섯 편도 변별성을 통해 시적인 것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노정인 것이다. 결국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공감적 사유에 근거한 ‘타자’적 은유가 내재해야 가능하다. 강경호 시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시적인 정서는 실존에 대한 고뇌와 지속 가능한 ‘평화’에 대한 지향 의지이다. 그래서 시적 대상으로 인식한 시선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시적 감응으로 다가온 대상이 우리와 동등한 생명체라는 본질에서 출발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시편마다 등장한 대상은 우리와 친숙한 동물들이 다수다. 그중 ‘비둘기’와 ‘고양이’ 그리고 ‘강아지’와 ‘염소’는 사람과 친연성이 매우 강한 종種들이다. 그들과 달리 성장기 불행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에 대한 시적 개방은 결국 각각의 변화 인식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건강한 사회의식을 주문하고 있다.
한때는 사람들이 ‘평화의 새’라고 불렀던
성북동 공사현장에서 살 수 없어
하늘로 날아가버린 새
남광주다리 교각에 새끼를 기르며
사람들과 더욱 가까워진,
사람들 머리에 똥을 갈기고 가도 아무렇지도 않는
철없는 그 새 한 마리가
무엇을 잘 못 먹었는지 광주천 풀섶에 누워
제가 날았던 푸른 하늘길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손에 쥐면 재처럼 가벼워 한줌 밖에 안 되지만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데
사람들 마음대로 이념의 이름을 붙였다가
유해조수로 지정하여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한다
아침 9시, 남광주 도깨비시장
상인들의 귀가를 재촉하는 경쾌한 음악이 들려오자
하나둘씩 좌판을 정리하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한때의 남루한 비둘기들이
가난한 상인들이 일부로 남겨준
콩나물과 쌀 보리 주워 먹느라
자리를 정리하는 시장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면서도
연신 머리를 주억거린다.
-<비둘기들> 전문
‘새’는 자유롭다. 마음껏 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조물주가 부여했다. 사람이 땅을 점유했다면 ‘새’는 지상의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새는 창공을 누비며 배를 채우고 사람은 땅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도저히 겹칠 수 없는 새와 사람이 이해충돌이란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결국, 하늘을 나는 새도 지상에 안착해야 편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다. 비둘기가 상징하는 ‘평화’란 이미지는 진부한 말이 되었다. 비둘기가 평화의 밀서를 품고 적진으로 날아가던 일마저 통신 수단의 발달로 무용해졌다. 사람들의 냉대에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다 조류 인플루엔자의 유행을 우려해 비둘기를 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도심 광장에서 평화롭게 모이를 쪼던 낭만 가득한 풍경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비둘기가 생존할 환경을 없애야 한다는 반 생태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마저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이어서 당연한 것이다. 그 많던 비둘기들은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강경호 시인은 시에서 ‘성북동’이라는 지명을 명시한다. ‘성북동’은 단순히 도시의 한 부분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적 위의를 의식하고 있다. 김광섭 시인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면서 사람이 자연을 파괴해 가는 과정을 말해준다. 사람들과 공존하려 해도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내몰려버린 비둘기는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라고 말한다. 비둘기의 가슴에 금이 간 것은 인간이 추구한 평화로운 삶이 파괴되는 것과 같다. 강경호 시인의 시적 근원은 김광섭 시인이 가진 생태주의적 환경 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 사람처럼 지상의 공간을 점유하며 사는 것도 아닌 비둘기다. 남광주 교각 한쪽에 둥지를 틀고 살던 새들이다. 먹이를 잘못 먹은 어린 새가 죽어가는 모습과 그 어린 새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자. 아무 죄도 없는데 죽어야 하는 새와 살아있어도 유해조류라는 딱지가 붙은 처지다. 빈궁과 남루를 더한 비둘기의 신세는 남광주 시장의 가난한 상인들이 던져준 한 끼가 전부인 하루다. 그런 적선에도 감사하듯 항의 한번 못한 채 “연신 머리를 주억거린다.”는 모습이 시인의 마음을 충동한다. 힘에 부쳐 중심에서 밀려나 버린 힘없는 민중처럼 애처롭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가 꼭 저랬다. 불의와 억압에도 말 한마디 못 한 채 세월을 감당만 했다. 우리 곁에 있어야 할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이 사라진 때가 있었다. 거대한 폭력으로 주검이 된 기시감에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어린 비둘기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우려가 깊다.
바람만 불어도
난간 위로 도망치는 고양이들
오늘은 햇살 좋은 이른 봄
냉이꽃 피어나는 중국집 담장 밑에서
그 앞을 지나가는데도 무섭지 않다는 듯
누워서 하품하고 있다
검은 놈 흰 놈 누런 놈
세탁기 속 빨래처럼 포개져
눈 게름칙하게 지그시 감은 채
무거운 머리 졸고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괘씸함에
슬쩍 부아가 났다가
사람이 무서운 짐승이 아니라는 그것들의 생각에
차차 귀엽고 이쁘다는 생각,
지난겨울 허기진 채 담장을 타거나
바람 부는 난간에서 울어대던 놈들
오늘은 배가 부른지 무심한 것이 고맙다.
-<봄, 고양이들> 전문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랜 과거가 아니다. 다들 고양이 한두 마리 정도를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70년대까지 도시나 농촌을 가리지 않고 쥐가 극성이었다. 오죽하면 매월 쥐 잡는 날을 정해놓을 정도였다. 특히 농사로 먹고살던 시골도 그랬지만, 도시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쥐 때문에 고양이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 위생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주거 공간이 아파트 위주로 변화되면서 쥐를 잡는데 유용한 고양이들이 더는 필요 없게 된다. 거기다 애완용으로 키우는 고양이마저 길거리에 유기되다 보니 사람에 대한 친연성을 잃고 야생화된 개체들이 늘면서 “바람만 불어도/ 난간 위로 도망치는 고양이들”이 많아진 현실이다. 시인은 길거리에 버려진 고양이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괘씸함에/ 슬쩍 부아가 났다가/ 사람이 무서운 짐승이 아니라는 그것들의 생각에/ 차차 귀엽고 이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고양이의 습관을 관찰하면서 묘사한 정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강경호 시인이 말하고자 한 의도는 다른 데 있다. 고양이가 사람을 만나면 경계성 눈빛으로 돌변한다는 것에서 시적 상상력이 발현된다. 시인도 사람이기에 충분히 공감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배가 부른지 무심한 것이 고맙다.”는 것이다. 해소되지 않은 긴장 속에서 얻은 작은 평화를 공유한 것이다. 항상 소소한 위력이나 폭력이 사회적 소요로 불안을 야기했다. 사람과 고양이의 공존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까지를 함의한다. 강경호 시인은 일상이 사회 현상을 초과 할 수 있다는 경계 인식을 놓지 않는다.
강아지 한 마리,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다리를 질질 끌며 쫓아와
자동차가 사라질 때까지 짖는다
언젠가 집을 벗어나 찻길에서
자동차에 치여 한 마리는 죽고
어쩌다 살아났다는 강아지 한 마리
실은 자동차가 저승사자처럼 무섭지만,
세상의 모든 자동차는 적이어서
강아지가 짖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
중학교 때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그 불량배네 집 앞으로 지나지 못해
멀리 돌아가곤 하였던 기억
그러므로 상처입은 개가 짖는 것은
최대의 용기지만
나는 강아지보다 못한 나약한 미물
강아지가 있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자동차를 멀리 두고
다리 다친 강아지를 쓰다듬곤 한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아직도 쓰라린
내 상처를 위로하곤 한다
-<상처를 위로하다> 전문
강경호 시인의 평소 삶에서 지향한 의식을 가늠해볼 수 있는 시다. 여기에 ‘강아지’에 대한 관찰을 오랫동안 해왔다는 것이다. 일상을 바라보는 심상의 배후에는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 속 온정의 충동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그것이 문학 속으로 들어와 시라는 상징적 수사가 씌워져 시가 창작되는 것이다. 강경호 시인의 가슴속 자아는 자기애에 대한 진정성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가한 폭력에서 생존의 위협에 노출된 ‘타자’에 대한 인식이자 존중에 대한 고뇌에서 출발한다. 거기에는 ‘나’와 ‘너’로 분리하지 않고 ‘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공존하겠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그 바탕이 된 심상적 사유는 본성에 충실한 ‘사랑’이고 궁극은 ‘평화’로운 삶의 구현을 위한 문학 행위이다. 사람의 잘못된 행동으로 생애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강아지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다. 사람도 살며 별별 일을 다 겪고 사는 것이 세상사다. 비록 강아지라지만, 생때같은 생명이 자동차에 치여 비명횡사했다면 환장할 일이다. 그 중 한 마리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다리를 심하게 다친 횡액을 당했다. 이후 자동차가 지나가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쫒아가 짖어 댄다는 반응적 트라우마가 깊다. 환장할 정도의 심정적인 병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묘하게도 시인의 손길이 닿으면 격한 감정이 진정되는 강아지를 보며, “중학교 때 폭행을 당한” 기억을 떠올린다. 이후 “그 불량배네 집 앞으로 지나지 못해/ 멀리 돌아가곤 하였던 기억/ 그러므로 상처입은 개가 짖는 것은/ 최대의 용기지만/ 나는 강아지보다 못한 나약한 미물”이었다며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철저한 응징과 진정한 용서가 병행되어야 한다. 사람도 못 한 폭력에 대한 항거를 강아지가 지속하고 있다. 강아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온몸으로 맞서는 것뿐이다. 요즘 사람들은 불의나 부당한 일에 쉽게 포기하고 말지만, 뼛속까지 광주 사람인 강경호 시인은 ‘80년 광주’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어른들은 들에 가고
뒷산 뻐꾸기만 울어대는 적막한 봄날
아직 날지 못한 새 한 마리
누군가 대문 밖 발소리만 들려도
제 몸을 숨기곤 했다
새 한 마리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지나갔다
십 년이 넘도록 얼굴 보지 못했다
어쩌다 길에서 보아버린 새의 얼굴
화상을 입어 일그러진 날지 못하는 새
하늘엔 한무리 비둘기가 날아가는데
미친 듯이 얼굴을 감싸고 달아나는
불길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날개 꺾인 새
흡사 내 유년의 날지 못한 새가 떠오르는데,
언제부터였을까
그 여자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당당하게 날아가는 얼굴이 일그러진 그 여자
무엇이 그 여자, 하늘을 날게 했을까
어린시절 학교에 나가면서부터
날갯짓을 배운 내 유년과 오버랩되는데
의젓하게 보란 듯이 새떼와 함께
햇빛 속으로 날아가는 새의 실루엣이 눈부시다.
-<새, 날다> 전문
태초에 사람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수 있다. 새끼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수없이 머리를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듯 사람도 몸을 곧추세우기 위해 새처럼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한다. 새는 기어이 하늘을 날고자 노력했고, 사람은 직립 보행에 만족한 차이뿐이다. 새가 날기 전까지 감당해야 할 긴장의 강도는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다. 하지만, 생명은 모질어 악착같이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 실행한다. 강경호 시인은 불완전한 ‘새’의 모습으로 맞닥뜨린 여자아이를 기억하고 있다. 적막을 깨듯 울어 재끼는 뻐꾸기 소리마저 처량한 시골 마을에 스스로 고립되어 지낸 “어른들은 들에 가고/ 뒷산 뻐꾸기만 울어대는 적막한 봄날/ 아직 날지 못한 새 한 마리/ 누군가 대문 밖 발소리만 들려도/ 제 몸을 숨기곤 했다” 소싯적 애잔하기까지 한 추억 속 아이다. 이야기인즉 여자아이는 불행하게 화마에 휩싸이고 만다. 하필 화상이 집중된 곳이 안면 부위여서 여자아이한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이후 사람을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지나”칠 때마다 기피하길 반복한다. 화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자폐적인 삶을 선택한 여자아이의 사회성은 멈춰버렸다. 훗날 강경호 시인이 마주쳐 보게 된 얼굴은 참혹 그 이상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여성(여자 아이)과 조우하게 된다. 놀랍게도 신앙심을 통해 당당하게 변모한 여자를 보게 된다. “그 여자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당당하게 날아가는 얼굴이 일그러진 그 여자/ 무엇이 그 여자, 하늘을 날게 했을까”라는 감동적인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수의 사람과 어깨를 겨누며 당당히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사람도 하늘을 나는 ‘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의젓하게 보란 듯이 새떼와 함께/ 햇빛 속으로 날아가는 새의 실루엣이 눈부시다.”며 모처럼 환희에 찬 환한 세상을 본 것이다. 시인도 유년 시절 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지만, 비상飛上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했다는 반성도 곁 붙였다. 결국 확고한 자아적 신념이 삶을 바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상이 절벽을 잘 타던 뒷발차기 명수 염소가
두 뿔로 불도저처럼 거위를 몰면
하늘을 나는 것을 포기하고 지상을 내달리던 거위가
밥주걱 같은 주둥이로 맞받아친다
만나면 싸우는 것이 일인,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긴 자도 없고 진 자도 없는 놈들이
누가 집에라도 오면 제 영역을 지키겠다는 건지
뿔과 주둥이를 세우고 막무가내로 들이받는다
이제는 절벽도 타지 못하고 하늘도 날지 못하는 놈들
실은 절벽에서 내려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지상에서 살만해서일까
생각 끝에 한 우리에 살게 했더니
하루 내내 두 패가 죽기살기로 싸우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제는 한 밥그릇에서
함께 밥을 먹을 줄도 알게 되었다.
-<평화> 전문
이전투구와 혈투는 그 격이 다르다. 미물에 불과한 그들이 혈투를 알 리 없다. 차라리 소인배만도 못한 두 녀석이 시의 문장으로 본다면 개싸움 축에도 낄 수 없는 이전투구를 감히 한 것이다. 묘한 인연으로 만나 동고동락해도 모자랄 판이다. 주어진 생의 시간이 얼마큼 절박한가를 모르니 치밀어 오른 증오와 시기가 극에 달한 경계성 성격 장애의 전형을 그놈들이 시현한 것이다. <평화>란 시 전문은 아이러니한 세상사를 우화적으로 희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도 그와 다르지 않다. 길모퉁이 좌판 벌인 고만고만한 노점상들의 이전투구도 간혹 보아온 터다. 알고 보면 보는 하찮은 것이지만, 그들에겐 절박한 삶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말이다. 그 사람들의 과거 이력을 듣고 보면 충분히 공감 가는 서사가 가슴으로 지쳐 들어온다. 그들도 한때는 고공을 비상하듯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거위가 거대한 몸통을 달고 하늘을 날던 기억은 퇴화를 거듭한다 해도 생생한 사실이다. 나름 비상飛上한 시절의 이야기는 죄다 사실일 것이다. 세상 한번 멋지게 살아보려고 별의별 일을 해보다 길거리까지 나 앉은 바닥 인생 군상과 다르지 않다. 결국 염소와 거위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대립보다는 공동체적 공감대를 어느 순간 이뤄냈다 ‘평화’란 시제를 통해 말하고자 한 시적 의미는 상대방에 대한 존재를 ‘나’와 대등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절벽도 타지 못하고 하늘도 날지 못하는 놈들”이 각성에 도달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동물적 화해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시 다섯 편에 내재된 ‘평화’라는 상징 이미지는 강경호 시인의 생명 존중에 대한 문학적 지향이다. 각각의 서사적 일상이 시적 자아라는 문장으로 재현된 것도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할 이유다. 현실 속 하찮은 변화에도 사람의 문제로 고민하는 시인 정신은 문학적으로도 유용한 서정의 근본이다. 강경호 시인의 시를 관통하는 시적 정념은 삶에 미치는 부정성을 경계하고자 한다. 일상을 반성하며 자의식으로 현실을 부단히 호출해가는 외연에 구분을 두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