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벽향춘 (碧香春-시인이 지은 송순주의 별칭)
汲 取 碧 岩 泉 (급취벽암천) 바위 틈의 샘물을 길어다
釀 得 蒼 松 液 (양득창송액) 푸른 솔로 송순주 빚으니
淸 香 盎 胸 襟 (청향앙흉금) 맑은 향기 가슴에 넘치고
至 味 餘 澹 泊 (지미여담박) 그 맛이 좋고 담백하구나
<어 휘 >
汲 取 : 물을 긷다
釀 : 술을 빚다
盎 : 술동이
澹 泊 :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지은 이>
김정(金淨, 1486-1521), 자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庵), 시호는 문간
(文簡)이다. 성종 17년(1486년) 9월 5일, 報恩의 聲足里에서 태어나다.
14세에 別試 初試에 장원하였고, 18세에 恩津 宋氏와 결혼하였다.
중종 1년 공의 나이 21세에 崔壽峸ㆍ具壽福과 함께 孤峯精舍에서 講學
하고, 22세 봄에는 別試文科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 홍문관수찬이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후에는 병조좌랑과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23세 3월에는 文臣庭試(정시)에서 장원하여 병조정랑,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고, 이듬 해 교리가 되었다. 25세 3월에는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서
忠淸道都事가 되고 이 해 가을에는 俗離山을 유람하였다.
29세 여름, 奉常寺僉正이 되었다가 外職을 청하여 淳昌郡守가 되었으며,
이 때 潭陽府使(담양부사) 朴祥과 함께 〈請復故妃愼氏疏/청복고비신씨소〉
를 올린 일로 報恩 含林驛(함림역)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3월에 放免(방면)
되어 가을에 金剛山을 유람하고, 11월에 성균관 사예로 敍用 되었으나 나아
가지 않았다.
32세 7월에는 홍문관 부제학, 12월에는 승정원동부승지ㆍ좌승지를 거쳐서
이조참판, 윤12월에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는 대사헌에 이어서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이어서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이 해 11월에 士禍로
인하여 錦山에 杖配(장배) 되었다가 다음 해 5월에는 珍島로 移配(이배)되고,
여름에는 濟州에 安置(안치)되었다. 36세 「濟州風土錄/제주풍토록」을 지었고
이해 10월 30일에 賜死(사사)되었다.
<해동잡록>이라는 책에서 공의 인물됨을 평하기를,
“공은 천성이 순수하며 겉으로는 순후하고 안으로는 민첩하다. 서사(書史)를
두 세번만 읽으면 곧 외웠다. 그 문장이 정하고 깊으며 넓고 멀어서 멀리 서한
(西漢)의풍을 따랐으며, 시는 성당(盛唐)을 배웠다.
일찍이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경전(經傳)에 침잠(沈潛)하여서 거경(居敬)ㆍ
주정(主靜)의 학문을 하였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거워함이 천성
에서 나왔다.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뇌물을 받지도 아니하였으며
봉급(俸給)은 친척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라고 하였다.
이 시를 남긴 선생은 제 고향인 충북 보은 경주김씨 집성촌에서 출생하셨고,
저의 15대조이신 병암(屛庵) 具 壽(수)자 福(복)자 하시는 어른과는 종종 만나
교제를 나누신 분이다. 지금도 제 고향의 고봉사(孤峰祠)라는 곳에는 위의 두분
외에도 猿亭(원정) 최수성(崔壽成) 선생까지 세 분을 모시고, 후손들이 해마다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선생의 시는 기백이 늠름하고, 시풍이 맑고 깨끗하며 자신의 딱한 처지에서
우러나오는 처연한 심정을 표현한 시가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지만, 오늘에
소개한 시는 송순주(松荀酒)라는, 술을 소재로 한 소박하면서도 흥취를 돋구는
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