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기도문을 기도의 최고 모범으로 알고 따라서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 이유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1문 아래에 우르시누스의 해설로 올립니다. 알고 이해하며 믿으시면 좋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1문)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하나님의 천상의 위엄을 땅의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또한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여 기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주기도문의 서언의 두 번째 부분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씀에 있는데, 이는 곧 "하늘의", 혹은 "천상(天上)의"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하늘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과 복된 사람들의 거소(居所)를 나타내는데,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에서 "하늘은 나의 보좌요"라고 말씀하시고(사 66:1), 또한 그리스도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신다(요 14:2).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어디든지 계신다. 그러나 그가 하늘에 계시며 거기에 거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보다 거기서 더 영광스러우시며 거기서 자기 자신을 직접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령하시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땅의 부모들과 성부 하나님이 서로 얼마나 대조적이며 다른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혹은 성부 하나님을 땅의 부모들과 분리하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그 하나님을 다음과 같은 아버지로 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①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며 하늘에 영광 중에 거하시는 천상의 아버지. ② 어디서나 하늘의 영광과 위엄으로 통치하시며, 만물을 주관하시고, 그가 친히 창조하신 온 세상을 그의 섭리로 다스리시는 분. ③ 온갖 부패와 변화에서 자유하신 분. ④ 하늘에서도 자기 자신을 천사들에게 영광스럽게 드러내시고 그가 어떤 아버지이시며 얼마나 선하시며 얼마나 위대하시고 풍성하신지를 선포하시는 분.
2.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우리 아버지시요 또한 무한한 선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특별히 하늘에서 발휘하신다면, 그는 또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며, 이 우리 아버지께서 또한 하늘의 주(主)시요 또한 무한한 권능을 소유하고 계셔서 우리의 필요를 도우실 수 있다면, 우리가 그에게 구하는 바를 쉽게 베풀어주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존경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함이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그렇게 위대하신 주(主)시니 천상의 주로서 어디서나 통치하시고 또한 영혼과 육체를 모두 지옥에 던질 권능을 지닌 분이시니 우리는 마땅히 그를 존경하고, 영혼과 육체를 지극한 겸손으로 그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4. 간절한 심령으로 그에게 아뢰게 하시기 위함이다.
5. 그를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을 높여서 하늘의 것들에 고정시키게 하시기 위함이다.
6. 하늘의 것들을 사모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7.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앙모하고 예배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이교도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8. 구약 시대처럼 우리의 기도를 어느 특정한 장소와 결부시키지 않도록 권고하시기 위함이다.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p.600~601.
첫댓글 내용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성도의 심령을 통하여 이 땅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성부와, 그 우편에 앉아 계신 성자는 하늘(천국)에 계십니다. 성도들이 종말 후 갈 곳도 천국인데요. 이런 것들을 종합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당연히 하나님 한분 밖에 안 계시므로 가장 함축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크마 주석>, 마6:9
너희는 -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 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고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제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기도하라 -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 )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 , 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 ) -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충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 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충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사 57:15;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아버지(* , 파테르 헤몬) -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형태가 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항-찬양과 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항-개인의 현실문제) 첫번 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겔 36:23;벧전 1:15).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장코뱅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적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별로' 없다는 점에서 한 수 배웁니다. 이래서 주석이 필요합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박윤선 주석>, 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시다 함은 모든 피조물들과 다르시고 절대적이시고 그 권능이 무한하시고 또 지극히 높은 주재가 되시고 지극히 성결하시다는 내용을 가진다. 이런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기도가 헛되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음 중요한 뜻이 있다. 비록 "하늘 "의 주재이시지만 그와 우리와의 관계가 사랑의 것이 아니면 우리는 그에게 기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 사실에서 우리의 기도문은 열릴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본질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마6:33)으로 본질을 삼는다. 곧 이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다스리신 나라와 및 그를 중심한 생활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구함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기구건과 및 그 아래 두 가지 기구건은 직접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것을 구함이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의를 구함이다. 클로스텔만은 여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문구가 현세 관계의 사항이 아니고 내세 관계의 것을 구함이라고 한다.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구함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기구건과 및 그 아래 두 가지 기구건은 직접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것을 구함이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의를 구함이다. 클로스텔만은 여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문구가 현세 관계의 사항이 아니고 내세 관계의 것을 구함이라고 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 끝날의 심판으로 우주의 죄악을 일소하여 인생들로 하여금 그의 성결을 깨닫게 함을 구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 기구를 현제 관계의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이 기구가 인간들이 하나님께 경배하게 해 주시기를 구함이라고 하였으니 합당한 해석이다. 여기 "거룩히 여김"은 제사행사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무신론의 오만한 생활을 하기 쉽다. 신자들이라도 그 시련기에 있어서 참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하면서 경외심을 상실하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는 땅 위에 극히 요구 된다.
@장코뱅 하늘, 천국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 것에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노베 아멘!
늘 느끼는 것이지만 우르시누스의 설명은 논리적이면서도 성경적입니다. 매우 공감이 되는 포스팅입니다.
사실 이번 건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나 우르시누스의 해설보다는 호크마 주석의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와닿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초월적인 분이라는 것과, 복수로 된 하늘들이 3층천으로 되어 있는 가장 높은 곳이며 이곳이 하나님의 거처일 거라는 유대인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고,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임을 인식하고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내용에서 놀라움을 주네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이 구약에선 별로 없다가 예수님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단순히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친밀히 자녀를 돌보시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시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설명이 매우 뛰어납니다. 또 제자들과의 관계성도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 나타난다는 설명도 좋네요.
오늘도 귀중한 성경공부를 하였네요. 감사합니다.
읽고 참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