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代)를 이어 함께 하는 회사로 컸으면 좋겠어요”
30대 초 늦깎이로 법 공부 시작…한인 사회 무료 법률 서비스에도 한
몫
‘변호사’ 최유진. 그는 “‘최유진 변호사가
우리 가족 변호사야’하는
말을 들으면 참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해마루.’
순우리말인 이 단어는 해가 뜰 때 제일 먼저 올라오는 해의 붉은 기운을 만날 수 있는 산등성이의 꼭대기를 뜻한다.
‘법무법인 해마루.’
이 법률사무소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글렌필드 링크 드라이브(Link Drive)에 자리 잡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로 아침 해가 뜨면 붉은 기운을 온몸으로 받을 것만 같다.
30대 초반에 변호사 업무 시작
최유진 변호사. 그는 법무법인 해마루의 대표 변호사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아주 오래전이다. 1990년대 중반 내가 운영하던 한솔문화원 단골손님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책을 사랑했다. 20대 중반의 열혈 독서가, 유진은 30대 초반에 변호사로 멋있게 변신했고, 이제는 그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 자기 사무실을 열어 운영한지도 어언 3년째다.
오랜만에 유진을 만났다. 첫 웃음이 싱그러웠다. 말에도 사랑이 묻어 있었다. 사무실을 찾아오는 손님 모두에게도 그렇게 대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진은 1990년 8월 부모를 따라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다. 그때 오클랜드 교민 숫자는 100명도 채 안 됐다. 오클랜드에 교회는 하나뿐이었고, 옆집 숟가락 수가 몇 개인지도 알 정도로 모두 친하게 지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온 유진은 이민 1.5세 치고는 이미 좀 나이가 들어 있었다. 영어의 벽이 그만큼 두꺼웠다는 뜻이다.
“곧바로 대학에 들어갈 줄 알고 왔어요. 그런데 뉴질랜드와 한국의 학제가 달라 칼리지를 더 다녀야 대학 입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본의 아니게 호윅 칼리지를 1년하고도 석 달을 다녔어요. 영어는 잘 못 했지만 그때는 무척 당당했어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됐으니까요. 참 용감했던 것 같아요.”
‘법은 곧 삶’…나이 들어 공부해도 좋아
유진은 1992년에 오클랜드대학 일본어/중국어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오클랜드 한국무역관(KOTRA)에서 2년 정도 일했다. 결혼하고 애 낳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세월이 흘렀다.
삼십 대 초, 유진은 그 힘들다는 법학 공부에 도전했다.
“진짜 공부는 법대에서 한 것 같아요. 정말 독한 마음을 품고 공부했어요. 한 과목이라도 불합격하면 공부를 그만두려고 했는데 다행히 무사 통과해 변호사가 될 수 있었어요. 아이를 잘 돌봐준 부모님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어 가능했어요.”
중국 변호사가 운영하는 회사에 첫발을 내디뎠다. 얼마 안 있어 한국 변호사가 차린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거기서 5년 가깝게 이민, 부동산/비즈니스 매매와 임대, 가족신탁 설립/관리, 가족법, 소송 등 포괄적 법률 분야에서 업무를 익혔다. 그러면서 경력을 하나둘 쌓아 나갔다.
“이민 업무를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어요. 결과가 좋으면 저도 기분이 좋았어요. 이민은 한 가족의 운명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제가 뭐라고 그분들에게 평생의 은인이 될 수 있는 영광도 누렸고요. 취업 비자부터 영주권 취득까지 또 정착을 위한 사업체 구입과 주택 구매 등 이렇게 계속해 저의 소중한 손님이 되시면서 그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었어요. ‘최유진 변호사가 우리 가족 변호사야’하는 말을 들으면 변호사로서 참 행복해요.”
법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을 위한 도움말.
“나이 들어 법을 공부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법은 곧 우리 삶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격이 좀 더 성숙된 뒤 하는 게 훨씬 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믿어요. 꼭 제가 늦게 공부를 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 연륜이 많아지면 그만큼 이해의 폭이 넓어지니까요. 흔히들 법은 외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건 아니에요. 법은 이해하는 것이에요.”
유진은 덧붙여 꼼꼼하고 논리적인 성격이 변호사에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법을 공부하면 갈 수 있는 길이 많다고 하면서 꼭 변호사가 되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공부해도 좋을 매력적인 학문이 바로 법이라고 했다.
NZ한인여성회 부회장 맡아
유진은 한인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또래 변호사들도 많고, 나이가 훨씬 아래인 1.5세 변호사들도 많은데 그가 유독 빛나는 이유는 한인 사회에서 든든한 법률 봉사자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부모 세대가 잘 정착해 오늘의 우리가 있다고 믿어요. 그들의 희생이 큰 거름이었다는 뜻이에요. 그런 만큼 우리 1.5세도 훗날의 멋진 한인 사회를 위해 어느 정도는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진은 현재 뉴질랜드 한인여성회에서 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2008년부터 봉사를 시작한 여성회에서는 무료 법률 서비스 제공과 한 해 두 차례 법률 세미나를 주관하여 교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2년 임기인 민주평통 해외 자문위원도 이번이 세 번째다. 현재는 교육 및 차세대 분과위원장으로 한인 사회 1.5세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도록, 특히 고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될 때 분단 현실과 평화 통일의 인식을 심어 이들이 차세대 통일리더로 성장하도록 도움을 줄 방안을 연구 중이다. 그만큼 두고 온 조국, 대한민국에 관심이 많다는 방증이다.
유진의 변호사 생활을 잠깐 묘사한다.
그의 본격적인 업무는 오후 5시에 시작된다. 남들은 다 일을 마칠 무렵, 해마루 대표 변호사인 그는 그때야 밀린 서류를 검토하고 편지를 쓴다. 한창 바쁠 때는 새벽까지 일하기도 한다. 아침 출근 시간은 남들과 같지만 일과 시간에는 주로 미팅을 하고 전화를 받거나 후임 변호사를 돕는 일에 쏟는다.
“누구보다 편한 변호사로 인정받기를 꿈꾸고 있어요. 남보다 법을 조금 더 안다는 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회사를 찾아오는 손님을 가족같이 생각하며 대하려고 해요. 저의 작은 도움이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법률과 관련해 상의할 게 있으면 언제든 편한 마음으로 오셔도 돼요.”
평생을 함께하는 변호사로
유진의 비즈니스 신조는 ‘로이어스 포 라이프’(Lawyers for Life)다. ‘평생을 함께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의미다.
“우리가 아프면 먼저 지피(GP, 일반 가정의)를 찾아가잖아요. GP는 건강 문제와 관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요. 저희도 법률 쪽에서 한평생 함께 가는 변호사로 인정받고 싶어요. 대(代)를 이어 손님이 되고, 저희도 또 대를 이어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으면 좋겠어요.”
잔잔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얘기를 이어오던 유진은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법률 서비스 일을 하면서 늘 마음속에 간직하는 게 하나 있어요. 항상 손님의 입장에서 손님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법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려서 궁극적으로는 손님이 원하는 최선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도록 하자는 저 자신과의 약속이에요. 그들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일을 제 잇속만 생각해 할 수는 없다고 봐요.”
10년 넘게 변호사 업무를 보고 있는 유진이 품고 있는 꿈은 무엇일까?
“교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법률 봉사를 하고 싶어요. 일종의 재능 기부라고 할 수도 있지요. 영어로는 프로 보노(Pro Bono)라고 하는데 우리 회사가 안정되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면 체계적으로 할 생각이에요. 제가 공부한 법률 지식을 한인 사회에 내놓는 거지요. 제 작은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될 수도 있다고 믿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좋은 소식 전해 드릴게요.”
1세대와 2세대 사이 ‘다리’ 놓겠다
해마루 대표 최유진 변호사.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유독 ‘가족 같은’, ‘편한 마음으로’라는 말을 자주 썼다. 자기 일을 어떤 마음을 갖고 하는지 은연중 내비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변호사’ 하면 좀 대하기 거북하게 느껴졌던 평소 내 생각을 조금 고칠 수 있었다.
유진은 1.5세 변호사 가운데 선두 주자이고 뉴질랜드에서 살아온 햇수를 놓고 봐도 또래에서 가장 앞선 세대다. 그런 그가 앞으로 계속해 1세대와 2세대 사이의 ‘다리’를 놓겠다는 다부진 말에 나는 한인 사회의 희망을 보았다.
내가 아는 유진은 책을 좋아하는 젊은이였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던 ‘문학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스무 해 만에 중견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단순히 제 한 몸 잘사는 데만 그치지 않고, 자기 회사 크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인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멀리서 지켜본, 조금 더 나이가 든 이민 1세가 느낀 솔직한 감정이다.
‘해마루’, 이 예쁜 이름이 뉴질랜드 한인 사회에 밝게 빛나길 바란다.
글_프리랜서 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