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타고 있다
손석호
파란시선 0072 / B6(128×208) / 135쪽 / 2020년 12월 5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어떤 이름을 부르면 불이 붙는다
손석호 시인이 시에서 주체로 내세우는 이들은 대체로 농민과 노동자와 소시민 등이다. 당연하지만 그들의 터전은 고향과 산업 현장 그리고 서울이다. 그런데 손석호 시인의 시가 가진 개성은 이들 시공간이 각각 농경사회,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를 상징하는 곳으로 등장한다는 데에서 발휘된다. 이들 시공은 실상 벌써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포개져 있다. 중심이 바뀌었다고 이전의 산업과 그것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 사라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마치 그런 것처럼 취급된다. 지금-여기의 폭력성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시집 곳곳에 포진해 있는 ‘발’과 ‘뿌리’의 이미지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이러한 부재선고를 고발한다. 절룩이거나 매달리고 또 으깨진 참혹한 ‘발’들은 “아귀를 풀지 못한 한 움큼의 질문들”을 던지고(「무한궤도」), “뿌리를 갖고 싶어” 하는 이들의 존재를 알린다(「질주」).
이런 맥락에서 눈에 띄는 시어가 사투리 ‘갱빈’이다.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주이지만 거의 유일하게 출현하는 이 경북 방언은 시인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어는 그 자체로 손석호 시인에겐 고향에 상응한다 해도 무방하다. 한편으로는 지금-여기에 대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이다. 그곳은 푸코의 말을 빌려 오면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로서, “우리가 사는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 제기를 수행하는 다른 공간들”의 하나인 연유에서 그렇다. 그리고 증상이기도 하다. 라깡의 정의를 따르면 “실재의 세계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 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손석호 시인의 시에는 우리 앞에 놓인 세계라는 거울이 지워 버린 시공간과 존재들을 복원하려는 안간힘이 실려 있다. (이상 김영범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손석호 시인은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으며, 1994년 공단문학상, 2016년 <주변인과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는 손석호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불타고 있다. ‘마포대교’가 불타고 있다. ‘마포대교 난간’이 불타고 있다. ‘공단’이 불타고 있다. ‘구의역’이, ‘승강장 9-4’가 불타고 있다. ‘계약직 청년’이 불타고 있다. ‘꽃잎 한 장’이 불타고 있다. ‘반지하방’이 불타고 있다. ‘남편의 죽음을 모르는 아내’가 불타고 있다. ‘가족’이 불타고 있다. ‘묘지’가 불타고 있다. ‘컨베이어 벨트’가 불타고 있다. ‘사무실’이, ‘넥타이’가 불타고 있다. ‘소주잔’이 불타고 있다. ‘낮과 밤’으로 불타고 있다. “얼굴에서 꺼지지 않는 화염”, “노을에 불을 붙인다”. ‘골목’이 불타고 있다. ‘야근’이 불타고 있다. ‘야근을 마친 동료들’이 불타고 있다. ‘새 떼’가 불타고 있다. ‘용융점’이 불타고 있다. “육신이 화장로에 피고 있다”. ‘타워크레인’이 불타고 있다. ‘오래된 회전축’이 불타고 있다. ‘신도림역’이 불타고 있다. ‘지구’가 불타고 있다. “굴뚝이 내뿜는 화염이 밀려오는 어둠을 끝없이 태”우고 있다. ‘아버지’가 불타고 있다. ‘아버지’가 들고 선 ‘들돌’이 불타고 있다. ‘내성천’이, ‘갱빈’이 불타고 있다. ‘동사리’가 불타고 있다. ‘송아지’가 불타고 있다. ‘논둑’이, ‘뙈기밭’이, ‘난전’이 불타고 있다. ‘농자금 대출이자’가 불타고 있다. ‘생장점’이 불타고 있다. ‘저무는 빈 전깃줄’이, ‘서녘 길 윤슬’이, ‘은하수’가 불타고 있다. ‘제비 새끼’가, ‘처마’가 불타고 있다. ‘독촉장’이 불타고 있다. ‘숟가락’이 불타고 있다. ‘밥솥’과 ‘밥그릇’이, ‘밥’이 불타고 있다. ‘홀로 깬 실직의 한낮’이, ‘늦은 저녁상’이 불타고 있다. ‘대리기사’가 불타고 있다. ‘연탄재’가 불타고 있다. ‘유서’가 불타고 있다. “사람들이 죽음을 에워싸고 있다”. ‘목련’이 불타고 있다. ‘허공의 심장’이 불타고 있다. ‘청보리밭’이, ‘비 갠 마당’이, ‘모시나비’가 불타고 있다. ‘장기수’가 불타고 있다. ‘풀잎배’가 불타고 있다. ‘무량수전’이 불타고 있다. ‘저 밑바닥’이 불타고 있다. ‘대합실’이 불타고 있다. ‘맨발’이, ‘내일’이, ‘길’이, ‘사라진 길’이 불타고 있다. ‘혼잣말’이 불타고 있다. ‘당신의 입술’이 불타고 있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이 불타고 있다.
―채상우(시인)
■ 시인의 말
어떤 이름을
부르면
불이 붙는다
당신이 불타고 있다
■ 저자 소개
손석호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1994년 공단문학상, 2016년 <주변인과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마포대교 - 11
온산공단 - 12
승강장 9-4 - 14
극야 - 16
우화(羽化) - 18
세상 밖의 가족 - 19
줄타기 따방 - 20
절개지 - 22
목발 - 24
타워크레인 - 26
무한궤도 - 28
울음을 미장하다 - 30
틈 - 32
거푸집 - 34
기어 박스 - 36
제2부
구속 - 39
내성천 - 40
그해 가뭄 - 42
장생포 - 44
간고등어 - 46
난전 - 48
하회탈 - 50
홀로 - 52
겉을 적신다는 건 - 54
장터 - 56
파 - 58
들돌 - 60
목욕탕 - 62
제3부
노숙 비둘기 - 65
모기 - 66
투잡 대리기사 - 68
골목 - 70
옷 - 72
닭장 - 74
목련 - 75
견고한 낙화 - 76
흥부를 기안하다 - 78
긍정적인 학교 - 80
세검정 - 82
자하문 - 84
동양방앗간 - 86
수박 고르기 - 88
3-Ⅱ-72#220 - 90
제4부
시큰거린 이유 - 95
상실의 굴뚝 - 96
채널을 돌리는 저녁 - 98
우울증 - 100
윤동주 시인의 언덕 - 102
질주 - 104
자문밖 - 106
숟가락 - 108
자판 - 110
가벼운 이별 - 112
저편 - 113
희방사역 - 114
입술 - 116
발 - 118
해설 김영범 존재하는 부재(不在) - 119
■ 시집 속의 시 세 편
승강장 9-4
역사 밖
핏발 선 비둘기 발가락에 꽉 쥐어져 있는
검푸른 새벽의 입술
느린 어둠의 부스러기를 쪼아 대며
스크린 도어 안쪽을 들여다본다
희망이 버거울 때
느슨해지지 않게
절망을 조이고 있었다
공구의 금속 면에 삐뚤어지는 햇살
바로 세우려 잠깐 고개 돌릴 때
당도한 마지막 눈부심
지독한 슬픔은 예고 없던 열차 같아
눈물을 데리고 오지 못한다
그런 슬픔은 눈물이 금방 오지도 않아서
동공에 망치질을 한다
스크린 도어 깨지도록
문틈에 끼어 퍼덕이는 바람의 죽지
열리지 않는 세계
열차 소리를 타고 오래된 눈물이 도착하고 있다
내릴 곳은 추락의 방향
깜박여야 한다
철로에 달라붙어
날아가려 애쓰는 꽃잎 한 장
파르르
쪼그려 앉아 있다
네 잘못이 아냐
훨훨 날아가렴
*승강장 9-4: 2016년 계약직 청년의 목숨을 앗아 간 구의역 사고의 스크린 도어 번호. ***
줄타기 따방
매달린 세상의 등산법
내려가는 등산이 있다
바람의 이파리 털어 운세 점치며
발목 묶인 새처럼 스스로 묶인다
내려다보면 자궁 밖 같아서
탯줄처럼 놓지 못하고
종일 휘파람새 흉내 내며 부르는
군데군데 울음 매듭진 트로트풍 노래
밧줄에 꼬인다
허공 딛고 빌딩 안 들여다보며
층층이 스치는 밟지 못한 유년의 계단들
초침처럼 발 뛸 때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
닦다가 가볍게 노크하면 창 열어 줄 것만 같아서
장력의 만만찮음 견디며 유리 벽에 스스로를 그리는 동안
어느새 노을 뒤따라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덧칠한다
지상은 잠시 시간을 놓는 산장
꽁꽁 묶인 하루 풀어놓고
다시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정상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으로 눕는다
밤새 노래해도 메아리 없는 반지하방에서
날아오를 내일의 높이 가늠하며
태엽 감는다
산정 팽팽하게 압축되고 있다
*따방: 고층 빌딩 유리창 청소 일을 연고 없이 혼자서 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 ***
들돌
삼강 나루터에선
들 수 있는 돌의 크기로 품삯을 정했다고 한다
깍지 낀 손을 수없이 미끄러져 나갔을
크고 작은 들돌
저마다의 식솔을 악물고 들어 올린 채
허청거리던 허공을 얼마나 오래 버텼을까
살며 들어온 내 돌의 크기를 가늠하는 동안
병세 깊어진 아버지가 유심히 들돌을 바라본다
아직 들어 올릴 게 있는 걸까
아침마다 눈꺼풀 무게도 버거워하던 부끄러운 일상을 깜박일 때
바투 앉아 지나온 시간을 달래듯 쓰다듬는다
손끝과 침묵의 간극,
더는 미끄러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생은 깍지 끼고 꼭 끌어안아도 빠져나가는 것
무심코 들돌에 걸린 발등을 본능처럼 빼내 숨기며
들돌 너머로 미끄러지는 시선
억새가 갱빈을 끌어안는다
박힌 돌이고 싶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바라보는 강가
아버지가 긴 깍지의 시간을 풀어 주듯 손가락을 씻고
강물은 미끄러지는 일이 섭리라는 듯
서녘 길로 윤슬을 흩뿌리며 흘러 나간다
갱빈에 앉은 나는
양손으로 들풀을 꽉 쥐고 있다
*들돌: 삼강 나루터에서 일꾼의 품삯을 정하는 용도로 사용한 크고 작은 둥근 돌.
*삼강: 내성천,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경북 예천군의 지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