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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빛'을 찾아 떠난 한여름밤의 여행
- 2001년 새길교회 여름수련회 "명상과 대화"
길에서
2001년 8월 18일, 햇살 가득한 토요일 오후,
막바지 여름 휴가를 떠나는 차량들로 톨게이트 부근이 북적거린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노동강도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는,
그만 '쉼'조차 '고단한 이동'일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게 스쳐간다.
참다운 안식은 무엇일까?
고단한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쉼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쉼을 얻을 수 있을까?
노래배우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많은 교우들이 조금 늦게 도착했다.
어른, 아이 합하여 43명...
4시 30분이 되어서야 배명자 자매와 함께 노래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개회예배 - 참된 안식의 길
오후 5시,
이상화 형제의 인도,
조혜자 자매의 기도와 성서 읽기(마태복음서 11:25-30)에 이어,
길희성 형제가 '참된 안식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모두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며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쉼'이라는 말, 휴식, 안식이라는 말 때문이며, 우리는 모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 지는 짐은 다르겠지만, 모두 버거워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짐이 없어 보이고, 삶이 순탄해 보이지만,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고민이 없는 자가 어디에 있고 무거운 인생의 멍에를 지고 다니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모두 쉬기를 바랍니다. 안식을 원합니다. 누가 일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일을 하려는 것은 결국 좀 더 편안히 쉬고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역설은 우리가 안식을 얻기 위해서 애쓰면 애쓸수록 더 고달파진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번 사람은 더 많이 벌기 위해, 혹은 더 많은 권력을 쥐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 더 많은 명에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애씁니다. 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꼴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죽도록 일하다가 인생이 끝날 무렵에야 원하지 않는 휴식을 얻게 되며, 그것도 못내 아쉬워하면서 작별을 고합니다. 사는 동안 안식이란 잡히지 않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죽음으로 인생을 강제 퇴장 당하는 날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런 안식을 약속하시고 거기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지고 나에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멍에를 아주 없애주겠다고 약속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멍에를 없이 해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쉬운 멍에를 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무거운 멍에일지라도 쉽게 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짐, 지고 가는 짐, 우리의 멍에를 없애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쉽게 지는 법을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려고 합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가볍게 지는 비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고 가는 짐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짐을 지느냐가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짐을 지고서 우리가 끙끙거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멍에' 란 어떤 것이기에 쉽고 그가 지신 짐이 무엇이기에 가볍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의 삶을 회고해보면 오늘 이러한 말씀을 할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힘겨운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분이 나에게 오라, 나에게 배우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갑니다. 그런 말은 오히려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기 좋은 말씀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아예 마음을 쉬는 공부를 표방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예수의 초대는 짐을 없애는 휴식으로의 초대가 아니고, 또 잠시 짐을 내려놓는 일시적인 도피적 휴식으로의 초대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모두 참된 안식이 아니며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안식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안식은 짐이 없는 안식이 아니라 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안식입니다. 그것은 노동의 반대가 아니라, 노동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휴식, 일 속의 휴식이며, 임시로 찾은 산이나 잠시 다녀가는 기도원 속에서만 누리는 안식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시장 한 복판에서 쉬는 법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리는 진정한, 영원한 안식의 길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영혼의 안식이며 진정한 안식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단지 잠시 쉬려고, 그래서 내일 여기를 떠나서 또 다시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집에서 자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잠보다 더 잘 쉬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일시적 도피나 진통제 같이 일시적 해결은 되나 근본적 해결은 못됩니다. 퇴수회는 자칫 하면 일시적 도피가 되기 쉽습니다. 일과성 행사로 끝나고 연례 행사로 치릅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 하던 일을 접어두고 좀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일시적 휴식, 임시방편적 치유를 위해 우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 해결을 위해,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일 속에서 쉬는 방법, 기도원과 시장의 구별을 넘어서는 안식의 길,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누릴 수 있는 안식, 그리고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평화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문제들, 짐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되 쉽게 사는 방법, 쉬운 인생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초대합니다.
그 비법은 '마음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온유는 경쟁하고 올라서고 지배하려는 마음의 반대입니다. 베풀고, 허락하고 양보하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버리고 비우는 마음입니다. 겸손 역시 낮아지고 낮은 데 처하고 섬기는 종의 자세입니다. 스스로 낮음을 자취하는 자세입니다.
실로 인생의 피로와 괴로움은 경쟁심에서, 남을 이기고 올라서려는 마음,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버리고 비우는 마음의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되 그 짐이 그를 괴롭히지 않고, 많은 일을 하되 그 일이 그를 수고롭게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쟁심에서 하지 않고 마음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해도 사랑에서 나온 고생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들의 고생과 희생처럼 사랑에서 나오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한 값진 희생이기 때문에 삶이 고달파도 무의미하지 않고 멍에가 무거워도 벗어버리려는 마음이 없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렇게 낮은 데에 태어나서 더 낮은 데로 임하면서 살다가 간 분입니다. 그는 돈과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누구와 무엇을 얻기 위해 경쟁하지 않았고 스스로 좁은 길, 낮은 삶을 취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었으며,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여기에 인생의 진정한 안식이 있다고 증언하십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니라 더 어려워 보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초대의 말씀은 언뜻 우리에게 위로의 말로 들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짐, 또 하나의 심리적 부담을 안겨준다는 것을 압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낮출 준비, 자세가 되었습니까? 그렇게 살면 분명 쉽고 가벼운 멍에가 될 것이 틀림없지만, 나에게 정말 그럴 마음이 있습니까? 그럴 용기가 있습니까?
그러나 자기를 버리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없이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것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성현들의 한결 같은 증언입니다. 인생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힘든 것이며, 남이 나에게 문제를 주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쓸데없는 욕심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하며 산다는 것이며,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아무리 바꾸어도 나 자신을 바꾸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기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이 한결 같은 성인들의 증언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영성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부정의 영성은 도피적 영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적어도 예수의 영성은 도피적 영성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온유와 겸손의 영성, 자기 부정의 영성은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며 짐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자기와의 부단한 싸움 없는 영성, 세상과의 갈등이 없는 종교, 부정 없는 긍정,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증언입니다.
흔히 종교는 마음의 위로를 준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진정한 위로와 가짜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약이 있고 가짜 약이 있어 후자는 아편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병폐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단 번에 해결된다고 합니다. 인생의 모든 짐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복신앙으로 아예 짐을 없앨 수 있다고 공수표를 남발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순간만은 정말로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잊고 짐이 사라진 듯 착각에 빠지고, 일단 교회 밖을 나서면 또 다시 세상의 욕망과 격정에 휩싸여 온갖 죄를 짓고는 교회에 와서 또 모든 짐을 예수 앞에 내려놓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십자가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탐욕을 부리고도 탐욕 자체를 회개하지는 않고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탐욕을 이루지 못한 억울함을 인생의 짐이라고 예수 앞에 내려놓고 울면서 호소합니다.
짐 없는 인생, 멍에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누가 약속한다면 그것은 분명 허구요 환상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편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짐은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져야할 짐이 어떤 종류의 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져야 하는 것은 사랑의 십자가이지 세상적 욕망과 야심에서 오는 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신자들은 율법주의적 종교의 짐을 지고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자유와 사랑보다는 강요와 복종의 대상이 되어 버렸고, 권위에 대한 맹종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내가 보기에 지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짐을 지고서 고생하면서, 그것이 마치 십자가인양, 마치 그것이 참다운 신앙인양 열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영성은 우리를 세상적 욕망의 짐뿐만 아니라 율법의 굴레, 종교의 짐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새로운 짐을 질 것을 촉구합니다. 이것만은 우리가 져야할 짐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생명의 길이며 거기에 참다운 평화와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짐은 가볍고 쉬운 멍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짐 아닌 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와 겸손에는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우면 비울수록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기 때문이며 자기를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번민과 고통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온유와 겸손의 길, 십자가의 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지셨던 짐이기에 당연히 그를 따르는 우리들도 져야 하는 짐입니다. "내 주가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라는 찬송가의 가사 대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긍지가 있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감사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듯, 우리가 주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고난에 참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시고 우리가 자취한 고난 속에 고난의 연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시고 우리의 고난을 가볍게 해 주신다는 위로가 있습니다.(찬송가 367장과 510장)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하던 일을 잠시 제쳐두고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참다운 평안과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여기에 모였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다운 평화의 길, 그 깊이와힘을 함께 맛보고 확인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셨던 길,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리로 가라고 부르시는 온유와 겸손의 길, 십자가의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의 영성을 배우기 바랍니다.
생각 나눔 하나 - 초의 느낌
저녁 공동식사를 마친 후 연수원 마당 여기저기에 흩어져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다른 한 팀이 마당에 장작을 쌓아놓고 음향기기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른바 '캠프 파이어'를 할 모양이었다. 우리의 모임 장소인 소강당은 1층에 있어서 제대로 명상을 할 수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지하강당에서 명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여름 내내 배인 눅눅한 습기와 집요하게 침입해오는 소음이 주는 불편함... 강조웅 형제의 느긋한 목소리가 불편한 마음을 그나마 조금은 풀어주었다.
"여기 오니까, 카타콤(Catacomb) 같지 않아요?"
'움직이는 학교' 대표 박성준 박사. 통혁당 사건으로 시대적 수난을 겪었고 민중신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해온 분이다. 그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떤 영적 여행의 지도를 그리게 될까?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인자한 눈빛의 박성준 박사는 '소근소근 말하기'부터 시작했다. 넓은 공간임에도 그는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바깥의 소음을 피해 이곳 지하로 내려왔지만,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에서도 늘 소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근소근'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 버리고 끝없이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박성준 박사는 중앙의 탁자 위에 초를 다섯 개 올려놓았고, 그 한 가운데 있는 초에 성냥을 그어 불을 밝혔다. 전체적인 조명을 어둡게 한 후 초를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 침묵을 음미하고 즐겨도 좋은 것이다. 자기의 이야기를 끝냈거나 옆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넘길 때는 부드럽게 오른팔을 눕혀 권해야 했다.
길희성 : 시력이 나빠 이중으로 보이기도 하고, 가물가물거리기도 한다. 촛불이 불쌍하고, 외롭다는 느낌이다.
임동건 : 50년대 시골의 등잔불이 떠오른다. 중학생때 산골의 집에 가면 볼 수 있던 조용한 느낌이다. 등잔불... 반겨주시는 증조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의 느낌이 떠오른다.
이혜숙 : 너는 참 작지만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구나.
노정실 : 따뜻하다. 성냥이 탈 때의 유황 냄새도 느껴진다. 초는 혼자서는 탈 수 없다. 성냥이 불을 붙여주어야만 탄다.
김영란 : 그리스도인의 삶이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는데, 그것은 저 초처럼 자기를 태우는 것이다.
조혜자 : 전기불은 폭력적인 느낌이지만 촛불은 주변을 해치지 않는 느낌을 준다.
천세영 : 조용한 자리에 가면 꼭 초가 나온다. 도대체 초가 무엇일까?
정대현 : 빛이 되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난다. 불교에도 그런 말이 있나?
길희성 : 빛은 불교에서도 중요한 의미이다. 하지만 '빛이 되라'는 개념은 없다.
정대현 : 동양적 정서는 이미지로 보면 안개, 소나무, 사군자 같은 것이다. 빛이 되라는 은유는 성서에만 있는 것 같다.
명노균 : '불 같은' 성령의 이미지는 무척 큰 불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저 초처럼 은은하고 꾸준히 타는 것이 진정 성령의 이미지가 아닐까?
주선경 : 불을 다 끄고 저 작은 초 만으로도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김용덕 : 소근소근 말하고 듣기와 초가 잘 어울린다.
박성준 : 작은 초 하나를 켬으로써 그 시간과 공간이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황민 :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강기철 : 초등학교 때 유리에 그을음 만드는 실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초의 '그을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상화 :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 쑥뜸 떠 드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 뜸을 뜨기 위해 초를 켜놓았지.
성원용 : 중학교때 전기불이 안들어와 초를 사용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30촉만 되어도 밝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100촉 이상이어도 그리 밝다는 생각을 못한다. 내게 초는 긍정적 기억이 아니다.
김주예 :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모든 이에게 축복을 전하는 느낌도 든다. 어린 시절 낮에 뛰어 놀다 어둠이 내린 후에야 초를 켜고 숙제하다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했다. 지금도 초를 좋아한다.
박재수 : 다소곳하고 소근소근하지만 바깥의 시끄러움 때문에 분위기가 없다. 일정때의 등잔불 기억을 일부러 끄집어내기도 했지만 시끄러워서 분위기가 좋지 않다.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민계진 : 희망, 빛, 그런 상투적 생각이 떠오른다. 나의 희망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앞으로도 그림공부를 하고 싶다. 한 작품이라도 맘에 드는 그림을 남기고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강조웅 : 내 사주팔자는 모든 사람을 비출 팔자는 아니지만, 저 가운데의 작은 촛불 정도는 되지 않을까? 나머지 켜지지 않은 초와 균형감을 느낀다. 켜 있지 않는 초가 새길 교우이고, 그 불꽃이 전해져 전체가 다 켜진다면 얼마나 밝아질까?
정경일 : 나는 초가 아니라 불을 본다. 쓰레기를 태우든 초를 태우든 '같은' 불을 본다.
이명섭 : 저런 작은 초는 처음 본다. 어린 시절 초는 고래기름으로 만든다고 들었다. 그래서 고래 배에서 초가 탄다는 생각에 불쌍해했던 기억이 난다.
길희성 : 불은 불인데 은은하고, 가물거리고, 연약하고, 작은 메시지를 준다. 초는 겸손하다. 이 넓은 홀에서 주목받으며 가물거리는 것이 이해인의 "몽당연필"을 생각나게 한다.
김성종 :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초를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전기불보다 조용하면서도 정적을 느끼게 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초도 인위적 빛이지만 질박하고 작으면서도 차분하다. 작은 불빛에서 계속 타오르는 생명력... 전기불을 다 끄니까 작은 불이 어둠을 밝혀준다.
명정옥 : 초가 만드는 분위기가 있다. 언젠가 성당에서 보았던 촛불... 초를 켜놓고 기도할 때는 마음이 더 깨끗해지고 진실해지는 느낌이다.
노정실 : 어릴 때 생각이 난다. 초를 켜놓고 모임을 했는데 눈물이 났지...
김영란 : 김문음 자매 생각이 난다. 그녀는 기도할 때 초를 켜놓는다고 했지.
유인경 : 참 좋다. 집에 있는 초 아끼지 말고 열심히 켜야겠다.
윤현순 : 처음엔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니 생각이 많아진다. 초만 보고 있으니 여러 생각이 난다. 초 하나 켜 있을 때는 불쌍하다는 느낌이었다. 외국 친구들 집에 초대받아가면 화려하고 멋있는 촛대가 많다. 그래서 초는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켜 있는 초 하나만 보니 불쌍하다. 그리고 위암으로 고생하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정희영 : 바깥의 소리가 힘들다.
최현섭 : 아무리 생각해도 초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려 애를 쓰고 있지만 마음에 전해오지 않아 고통스럽다. 내 느낌은 초보다도 책상에 비친 그림자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정대현 : 초 하나 있을 때 서양과 동양을 대조했다. 하지만 더 켜니까 東西의 대조가 사라진다. '하나', '유일한 candle'은 서양 모더니즘에 대한 내 마음의 저항을 불러냈다. 하나의 초와 여러개의 초의 차이, 그것은 서와 동의 메타포이다.
성영숙 :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명노균 : 맥베스의 대사가 생각난다.
주선경 : 처음 하나일 때는 몰랐는데 여러 초를 켜니 은은한 향이 느껴진다. 그리스도인의 향기라는 말이 떠오른다.
김용덕 : 티벳의 사원에 갔을 때 기억이 난다. 양기름 초여서 냄새는 고약했지만, 컴컴한 어둠 가운데 번지는 빛이 아름다웠다.
박성준 박사는 누가복음서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새길 교우 한 명 한 명 안에 빛이 내재해 있다고 이야기했다. 마치 불교의 '佛性'과도 같은 의미인 '내 안의 빛', 내 안의 작은 촛불 하나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내 안의 빛'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 '촛불 명상법'을 소개했다.
하루 일을 마친후 피곤한 상태에서도 조금 참고 '성냥으로' 초를 켜십시오. 그리고 5분이든 10분이든 가만히 앉아 있으십시오. 의식도 멈추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대로 놔두세요. 억지로 생각을 지우려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서 주무세요.
물론 초를 켠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지만, 그런 '어리석음', 쉽게 갈수 있는 길을 에둘러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소꿉장난 같은 짓을 하려면 어리석어져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이 의미입니다.
이것은 쉬울 수도 있고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명상을 하는 생활과 하지 않는 생활의 차이는 큽니다. 1주일에 한,두번이라도 초를 켜보십시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언젠가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좀 더 시간을 낼 수 있으면 5분 정도 초를 보고 있다가, 혼자서, 혹은 가족과 함께 그날, 혹은 그 주에 있었던 일중에서 '감사한 일'과 '덜 감사한 일'을 떠올리는 것을 해보십시오.
명상에는 호흡도 중요하다. 박성준 박사는 '경쇠' 소리를 들려주며, 그 울림에 맞춰 각자의 숨이 들고 나는 것을 점검해보도록 안내했다.
우리는 지금 '숨을 헐떡이며' 살고 있습니다. 여유있게 숨쉬며 살기 위해서는 숨의 길이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숨의 길이를 두 배로 해보세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내쉬고... 조금 힘들겠지만 생활속에 훈련하다 보면 호흡이 길어지고 모든 일에 서둘지 않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계속해서 그는 침묵에 대해 이야기했다.
퀘이커에게는 침묵이 곧 예배입니다. 음악도, 기도도, 말도 없고, 성직자도 없습니다. 물론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말보다는 침묵을 더 즐깁니다. 침묵은 '소란의 부재'(absence of noise)가 아니라 고요함입니다. 즉 시끄럽고 현란한 세상'속에서' 고요함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깊은 침묵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순간...
"잘가세요~ 잘있어요~"
마당에 있는 사람들의 흥겨운 노래소리가 잦아들줄 모르고 끝없이 명상을 방해했다. 일상속의 고요를 위한 '현실적응훈련'(?)의 효과는 있겠지만 대화와 명상을 심각하게 방해하였기 때문에 더 위쪽에 위치한 직원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음... '움직이는 학교'...
생각 나눔 둘 - 감사한 일과 덜 감사한 일
직원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테이블을 옮기느라 분위기가 다소 산만했는데, 박성준 박사가 경쇠를 다시 울리니 금새 고요함이 번진다. 아, 경쇠의 '카리스마'... 이제 오늘 하룻동안의 '덜 감사한' 일과 '감사한'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성원용 : 밑에서도 수양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김주예 : 오늘 이곳에 오면서 박재수 집사에게 이런 저런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그만 않좋은 말을 전한 셈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의 언어와 별반 다를게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그것이 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아까 노래하며 휴식을 취하는 이들과 달리 명상하며 쉼을 누리고 있어 감사하다.
박재수 : 아래에서도 분위기는 깊어갔다. 초가 더 켜지면서 우리를 찾을 수 있었다. 새길의 대안교회로서의 정립에 대한 희망...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감사하다. 경쇠의 소리가 잦아들 때 마치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는 느낌이다.
민계진 : 무사히 도착한 것이 감사하다. 덜 감사한 것은 남편과 함께 못온 것이다.
명정옥 : 남편이 불참했다는 것이 서운하다.
강조웅 : 바쁜 아내의 불참이 덜 감사한 일이고, 박재수 같은 형제가 오셔서 함께 함이 감사한 일이다.
이혜숙 : 앞으로는 초를 자주 켜며 살아야겠다. 목소리를 낮춰 자식과 대화해야겠다. 그것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
노정실 : 새길 교우가 되고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 감사하다. 하지만 아까의 시끄러운 분위기는 덜 감사하다.
이명섭 : 조용히 해달라고 했더니 영업방해 하지 말라고 했다. 화가 날려고 했지만 긴호흡으로 참을 수 있으니 감사했다. 덜 감사한 것은 아내가 다리를 다쳐 고생하는 것이다.
천세영 : 오게 해 주심을 감사한다. 누가 내게 "선생님은 기독교인이 아닌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그것을 곰곰이 생각한다.
조혜자 : 너무 시끄러웠던 것이 덜 감사하다. 하지만 바깥의 소음은 울림이 없다. 울림이 있는 소리를 들으니 기쁘고 감사하다.
김영란 : 혜원이가 돌아온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수련회 인원이 40명을 넘으니 감사하다. 덜 감사한 것은 분위기를 해치는 바깥 사람들의 소음이었다.
송영숙 : 집에 있는 초를 안켰는데 이제부터는 켜야겠다. 힘들 때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감사할 따름이다.
성영숙 : 올 형편이 못되었는데 올 수 있어서 감사하다.
김용덕 : 감사한 일은 초를 켜는 것에서 깨우침을 얻은 것이다. 덜 감사한 것은 역시 바깥의 소음이었다.
강기철 : 초를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앞으로 그런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 아까 그을음을 생각했다. 지금 생각은 그을음은 불완전 연소의 결과라는 것이다. 내 삶이 완전연소되되록 해야겠다. 감사한 일은 자리를 옮겨 풀소리, 벌레소리 들으며 생각할 수 있어 감사하다.
황 민 : 덜 감사한 것은 골프장에서 수련회를 한다길래 불만이었다. 하지만 와보니 편견이었다. 감사한 일은 내 선택, 판단에 따라 조용한 분위기를 얻게 된 것이다.
정경일 : 덜 감사한 것은 기록을 맡아 자유로이 깊게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감사한 것은 대신 다른 이들의 생각을 주의깊게 들을 수 있었던 것, 경청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대현 : 경쇠소리 들으며 '나도 저런 소리를 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저런 소리를 못낸 것이 아쉽다. 감사한 것은 새길교우들의 삶이 떠오르고 마음을 비울 수 있는 모범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박성준 : 경쇠를 울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덜 감사한 것은 새길 같은 교회가 이 땅에 너무 적다는 것이다.
박성준 선생은 '경청'을 강조하면서 마이크를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시 설명했다.
삶의 지혜를 나누는 자리에 문명의 이기는 불필요합니다. 또한 마이크는 '한 쪽'에 정보와 진리가 집중되어 있고 그것을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구조, 즉, 한쪽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구조를 의미하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각 사람마다 그 안에 불씨가 타고 있습니다. 마치 없는 것 같아보여도 불씨는 존재합니다. 이렇게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각 사람이 빛을 깜박이며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바로 빛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입장의 사람들은 그것에 길들게 됩니다. 교회, 사회를 생각할 때 자기를 가장 많이 돌아봐야 하는 이는 목사들입니다. 지도층 사람들은 귀는 없고 구멍도 거의 보이지 않고, '주둥이'만 대형 스피커처럼 비대해진 이미지로 연상됩니다. 입과 귀의 균형, 말할 때 말하고 들을 때 듣는 능력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휴식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쉰다...' 명상도 '쉼'인데 그 '쉼'을 '쉰다'... 그러고 보면 쉼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를 멈추고 대신 다른 행위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쉼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 '행위'를 쉼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에...
선선한 어둠속으로 나가니 하늘에 수놓아진 별빛이 쏟아졌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하늘의 별처럼...' 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요즘같은 대기오염의 시대에도 '하늘의 별처럼'이라는 은유로 축복하실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도시에서 1시간 남짓 떨어져 땅의 빛이 흐릿한 교외에 오니 비로소 '별처럼...'의 본 뜻을 알 것 같다.
퀘이커와 명상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퀘이커 멤버들을 공동체로 묶어주는 끈은 무엇인가요?
퀘이커는 각 사람안의 '그 무엇(본질)'을 각 사람 안의 '내적 빛(inner light, the light within)'이라고 표현합니다. 각 사람의 빛이 공동체로 모여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개인적으로 그 빛의 인도를 받아 삶의 주체로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동시에 이 '주체로서의' 개인이 모여 예배드리고 사귐을 나누는 가운데 여럿을 공동체로 묶어주는 영의 흐름이 있습니다. 퀘이커는 공동체의 빛, 영의 흐름을 중시합니다. 한 사람이 예배드릴 수도 여럿이 예배드릴 수도 있지만, 같이 예배드리는 가운데 개인이 갖지 못했던 깨달음이 오기 때문에 공동예배(gathering)를 중시합니다.
개인의 어려움에 대해 '함께 있는 것'이 공동체로서의 지원이라고 여깁니다. 6,7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때 퀘이커들은 양심적 징집 거부를 했고, 미 정부는 그들을 탄압해 감옥에 보내 집단노역을 시켰습니다. 퀘이커는 동료들의 어려움에 대해 공동체적 책임을 지고 지원했고, 결국 이 운동은 퀘이커 외부로 확산되어 미 정부도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퀘이커는 혼자 드리는 예배의 깊이와 힘을 아는 동시에, 모여서 드리는 에배의 깊이와 힘도 잘 압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만나도 "우리 예배드립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배는 조용히 있으면서 눈을 바라보고 영의 흐름을 느끼고 끌어안습니다. 영적인 '끈'이 이와 같습니다. 이런 공동체성으로 세계사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 가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몰몬교도처럼 복무기간, 유니폼을 입지 않고, 일을 할 때도 퀘이커의 이름으로 하지 않습니다. 퀘이커는 퀘이커를 선교하지 않으며, 타자의 신앙을 존중합니다. 그들 내면의 빛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 사상, 문화의 사람들을 만날 때 입은 삼가고 귀는 열어놓는 것입니다.
퀘이커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는데, 어떤 이유였나요?
노벨 평화상은 미국친우봉사회라는 퀘이커 단체와 영국의 퀘이커 단체가 1947년에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 전,후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사는 것'으로써 그들을 보호하고 봉사했습니다.
움직이는 학교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전망은 어떻게 세우고 계십니까?
한국의 그리스도교에 식상해 있던 나는 일본에서 교회를 섬기는 소수자들을 만나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 함석헌 선생님도 6개월 정도 계셨던 Candle Hill에서 우연히 퀘이커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후 2년 동안 퀘이커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퀘이커 집회는 1시간 동안 침묵 예배를 드립니다. 가끔 평신도들중 'Spoken Ministry'를 하기도 합니다. 또한 작은 소그룹 모임에서 각 주제에 맞게 강사를 초빙하여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지난해 7월 돌아오면서 내가 퀘이커에서 경험한 것을 한국에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움직이는 학교, 퀘이커는 수입품이다. 하지만 이런 모임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가며 '신토불이' 모임으로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움직이는 학교는 고정적인 조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여러 가지를 실험중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상적인 명상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나는 일상에서 주로 촛불 명상을 합니다. 육신적으로 지치고 마음이 뒤죽박죽일 때 성냥을 그어 초를 켜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난 명상에 대해 많이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60을 넘기면서 인생이 조금은 정비되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제 조금 알게 된 것은, 명상법, 복잡한 방법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지극히 '단순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저 턱 맡겨놓고 한 순간 앉아 있는 것이 명상의 진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부처(깨달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은 복잡한 길이 아닙니다. 초를 켜고 편안히 쉬십시오. 잡념이 떠오르면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시냇물에 종이배 띄워놓고 무심히 보듯 쉬십시오. 이런 명상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물론 공동체적 나눔을 가지면 더욱 좋습니다.
나는 주일마다 이화여대 후문에 있는 퀘이커 미팅 하우스인 대신교회에 갑니다. 그곳에서 11시에 예배를 드리는데, 고요히 앉아 바람소리를 듣고, 나뭇잎 춤추는 것을 보면서 교감합니다. 되도록 편안하게 있으면서 명상이 잘 안되는 것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명상, 깨달음의 방법에서 '문답' 형식을 취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늘 해보니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답하는 사람이 특정인으로 고정되는 것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호흡의 조절은 명상 때만 합니까?
아닙니다. 베트남 출신의 팃낫한 스님은 "숨을 쉬는 것을 통해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매사에 자기 숨을 길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퀘이커라는 말은 종교적 경험을 하면 몸이 '떨린다', '진동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지어진 것인데, 이런 경험은 지금도 여전합니까?
전 세계에 23만명(미국에 10만, 영국에 8만 정도) 정도의 퀘이커가 있습니다. 이들은 보통 10-20여명 단위로 모여 모임을 갖습니다. 내가 캔들 힐에 있을 때 매일 아침 30분씩 침묵예배를 드렸는데, 어쩌다 늦어, 먼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갈 때는 마치 쇠붙이가 자장(Magnetic zone)에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임 중에 누군가 짤막하게 spoken ministry를 하면, 그 말씀의 진동이 함께한 이들에게 '공명'을 일으킵니다. 영적 진동, 마음의 진동입니다.
촛불명상
박성준 박사는 명상을 위한 글을 잠시 읽도록 한 후 촛불명상으로 안내했다.
12각의 크리스탈 초받침에 새끼 손가락만한 붉은 초가 빛을 내며 타들어간다.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쉼없이 제 몸을 태워 빛을 낸다. 조용한 흔들림... 다양한 빛그림자를 그리며 '움직이는데도' 저렇게 고요할 수 있구나...
명상의 처음 단계에는 초만 보였고, 그래서 초와 '나'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문득 그 빛이 닿은 곳을 보니 교우들이 모두 '나처럼' 그렇게 초를 보고 있었다. 하나의 빛을 360도의 전방향에서 각각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메타포...
명상의 깊이가 더해지고 있을 때, 빛에 이끌려온 날벌레들이 상 위를 기어다니며 경박한 움직임으로 명상을 방해했다. 거룩한 공간에 '벌레'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그 꿈틀거리는 벌레들이야말로 깨달음의 빛을 더하게 하는 은총의 전령임을 느꼈다. 혹 성스러움과 경건의 외양만을 취하는데 분주했던 것은 아닐까? 聖과 俗을 구분하는데 급급하여 바리새파들처럼 타자를 정죄하는데 열중하지 않았나?자신만의 독선적 기준으로 淨과 不淨을 나누고 그것을 신의 판단으로 포장하지 않았나?
빛 둘레로 벌레들이 모임은 각성의 은총이다. 성속의 피상적 구분을 타파하고 오직 사랑으로 합일하도록 안내하는 은총은 마침내 불꽃이 사그러드는 '거룩한' 최후의 순간에 매미가 풀쩍 뛰어들어 빛을 삼켜버림으로써 완성되었다.
깊은 밤의 어울림
명상을 마친 후 많은 교우들이 걸어서 숙소로 내려왔다. '소근소근' 대화하며, 그리고 별과 바람을 느끼며... 숙소에 돌아와서는 그냥 잠에 들기 아쉬워 한 방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고요한 명상과 흥겨운 잔치 사이에 벽이 없어 자유롭다.
아침기도회
아침 5시 50분, 소강당 문을 열기 위해 내려가니, 어느 새 정대현 형제가 기도회를 준비하며 묵상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하나, 둘 교우들이 모였고, 정대현 형제의 인도로 아침기도회를 시작했다.
나도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육성은 대화적, 인격적, 인간적입니다. 오늘 주의 기도를 경청함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그는 주기도문에는 네 가지 주제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 하느님의 뜻
둘째, 일용할 양식
셋째, 용서
넷째, 시험과 악
이 네 주제를 가지고 정대현 형제가 찬송 483장(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에 가사를 붙인 '주님의 기도 우리의 기도'를 한 절 씩 부르면서 주님의 기도를 묵상했다.
이 세상을 만드신 주님 이름이 거룩 하소서
그 창조가 보존되면서 또 완성을 이룰지니
주의 자녀 형제자매들 역사 세워 나아갈 때
늘 은밀한 하나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리.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예수의 기도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자녀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의 뜻과 권력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시대 교회와 공동체의 의미, 역할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명상합시다.
일용할 육과 영의 양식 양에 따라 주시옵고
나 나타난 모습 이대로 참 의미를 나리소서
내 가족의 간구와 기도 귀기울여 주시옵고
온 이웃과 함께 나누어 존엄을 찾게 하소서.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확대해서 경청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개인적 기도가 아닙니다. 주기도문에 '나'라는 단어는 없는 대신 '우리'라는 단어가 6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공동체적입니다.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할 일용할 양식은 무엇인가? 나의 육의 양식은 절절한가? 영의 양식은 잘 공급되고 있는가?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이웃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가족, 교회, 나라와 지구촌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힘쓰고 있는가? 영육의 양식의 빈곤으로 인해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존엄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합시다.
나 형제 자매 용서할 때 주 나도 용서하시네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셨네
사랑으로 서로 사귀고 약한 자의 이웃 될 때
우리 모두 하나님 가족 큰 은혜를 베푸시리
용서의 간구를 개인적 차원에서 드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 죄를...."에서 나타나듯이 용서의 간구 또한 공동체적입니다. 하느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원리는 용서입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를 용서하고 있나? 용서를 개인적 차원의 구체적 잘못에만 한정하고 있지 않았나? 다른 형제, 자매와 다를 수도 있다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용서의 전제이지 않을까? 다른 의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열려 있으며 포용적인가? 다른 형제, 교파, 종교, 문화, 삶의 방식에 대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
하느님의 가족은 '용서'와 '열림'에 기반합니다. 용서의 화두를 통해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을 경청하며 명상합시다.
시험에 빠져들지 않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땅의 구조 투명하고 새 희망과 능력 일 때
큰 정의와 온전한 평화 온 누리에 충만하고
모두 표현 다 같이 성취 하나님 나라 이루리.
표면적으로 시험과 악의 화두는 용서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의 간구는 공동체의 '구성적' 원리인 반면, 시험과 악의 화두는 공동체의 '구조적' 간구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간구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시험과 악에 대한 간구 역시 공동체적 성격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시험과 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자본주의 구조에서 우리는 시험을 받지 않고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지상의 구조를 그대로 놓아둔 채 홀로 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느님나라의 구조에 맞서 있는 악의 구조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의와 평화는 개인적이기보다 구조적입니다. 시험과 악의 화두는 정의 평화에 대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무엇을 표현하려 할 때 갖게 되는 죄악이 있습니다. 구조와의 관계에서 개인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구조의 투명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또한 나 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성취를 간구해야 합니다. 정의 평화의 질서는 하느님나라의 질서입니다. 주의 세미한 음성을 경청합시다.
아침 산책과 대화
대화모임
조찬과 아침 산책을 마친 후 소강당에서 김용덕 형제 진행으로 수련회 평가 및 대화 모임을 가졌다.
김용덕 : 내게는 자극이 된 수련회였다. 어제 배운 명상법은 쉽고,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리고 대화에 있어 경청의 의미도 생각할 수 있었다.
임동건 : 짧은 이야기여서 경청이 가능했다. 명상과 대화에도 기법이 있을 것이다. 낮은 목소리, 길지 않은 이야기의 훈련이 필요하다.
강조웅 : 크리스탈 초받침이 그리는 무늬가 아름다웠다.
강기철 : 생일케잌 초를 버리곤 했는데, 앞으로는 버리지 말고 명상을 위해 사용해야겠다.
김용덕 : 구역예배때도 촛불 명상을 하면 좋을 것 같다.
박성준 : '짧게 말하기'가 중요하다. 목사들도 10분정도면 충분히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나머지 20분 정도는 청자와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퀘이커는 짧게 말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 시를 자주 읽고, 영적 일기를 쓰며, 일본의 하이쿠 공부도 한다.
임동건 : 꼭 초 만이 명상의 도구는 아니다. 자연의 소리, 도심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명상할 수 있다. 교회에서도 명상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또 천지의 여백을 살린 동양의 음악도 좋은 명상 수단이다.
박성준 : 다양한 방법을 열어두고, 자기에게 맞는 명상법을 찾아야 한다.
김용덕 : 생활 전체가 수행이 된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명상이다.
이명섭 : 퀘이커 예배의 형식이 궁금하다.
박성준 : 11시에 예배를 드리는데, 약 5분 전부터 침묵을 시작한다. 12시가 되기 5분 전 정도에 누가 말을 마쳤을 경우 그 말에 대한 음미를 위해 침묵 시간을 더 갖는다. 서기는 12시가 되면 옆 사람의 손을 잡고, 모두 손을 꼭 잡음으로 예배를 마친가. 퀘이커에는 두 흐름이 있다. 하나는 예배 의식이 있는 퀘이커(programmed)이고, 다른 하나는 예배의식이 없는(unprogrammed) 퀘이커이다. 최근에는 semi-programmed 퀘이커가 중심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추세다. 나는 일반 교회에 가면 침묵을 경험해볼 것을 권하는데, 어떤 목사는 자기가 1분이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불안해한다고 말했다. 그럴수록 훈련으로 극복해야 한다.
김용덕 : 예배시 주기도 전에 명상기도를 하면 좋을 것 같다.
박성준 : 아무리 좋은 메시지, 달변이라 해도 긴 설교는 필요없다. 오히려 마음이 오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임동건 : 강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게 된다.(웃음) 그런 것 아닐까?
천세영 : 수련회 시기를 봄이나 가을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임동건 : 동의한다. 참여율 제고 방안도 고민해보자.
강기철 : 교우들의 노령화로 인해 참여율 제고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최현섭 : 토요일, 일요일에 걸쳐 수련회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수련회 온 교우들은 예배 때문에 시간과 마음이 쫓긴다. 그러므로 주일을 끼지 않는 다른 날로 옮기는 것은 어떻겠는가?
김용덕 :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하는 것은 계속되어야 한다.
박재수 : 참여의식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 어제 뒷풀이의 경우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의 괴리가 없는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해 좋았다. 일단 참여시키자. 그래야 공동체가 구축된다.
강조웅 : 대화에서 '듣는' 것은 상대방에게 시간을 허용하는 것이다.
조혜자 : 수련회에 대한 교우 의견을 모아보자.
다시 일상 속으로
"이 곳이 좋사오니" 산에 머물러 있자는 제자들의 취한 감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는 큰 걸음 휘휘 내저으며 고난의 마을로 내려갔다. 십자가를 지려고... 죽으려고...
수련회가 끝나 일상으로 돌아와보니, 떠날 때 던져놓았던 삶의 짐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그 일상은 이전의 일상과 같지 않았다. 적어도 초 하나 켤 줄 아는 마음으로, 참된 안식을 위해 온유와 겸손의 마음으로 멍에를 달게 지려고 돌아와 만난 일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