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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프랑스 해군을 박살내버린 초유의 사건
작성자:Royal Navy
1. 한배를 탄 영국과 프랑스
1904년 4월 8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외교 협상이 타결되었다. 14세기에 벌어진 백년전쟁 이래로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한배를 타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바로 20세기 전반기에 존재했던 가장 강력한 동맹이라 할 수 있는 영불협상(Entente Cordiale)이다. 처음에는 식민지에 대한 이해관계를 원만히 정리하기로 한 외교적인 타협이었으나 곧바로 군사 동맹으로까지 발전했다.
1898년, 수단 남부의 파쇼다(Fashoda)에서 아프리카 분할을 놓고 군사 대치를 벌였을 만큼 팽팽했던 양국이 불과 6년 만에 한편이 되기로 합의한 이유는 독일이라는 공통의 적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프랑스를 돕기 위해 4년 동안 영연방군을 포함해 무려 900만명을 참전시켜 120만의 전사자를 포함한 330만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는 영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참화였다.
이 정도로 피를 흘려 함께 싸웠으니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후 질서 재편을 함께 주도했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한 후 30만의 원정군을 프랑스에 즉각 파견했을 정도였다. 현재도 그런 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서로를 적대시할 정도로 관계가 험악해진 적이 있었다. 바로 "캐터펄트 작전" 때문이었다.
2. 프랑스의 항복
1940년 5월 10일, 마침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다. 팽팽할 것이라던 기존의 예상을 깨고 독일군이 공군의 엄호를 받는 집단화된 기갑부대를 앞세워 연합군 배후를 강타하자 상황은 급속도로 변해갔다. 불과 열흘도 안 되어 프랑스 수상 레노(Paul Reynaud)가 파리까지 날아온 영국 수상 처칠에게 “우리는 패했다”는 넋두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6월 4일, 영국군이 됭케르크(Dunkirk)에서 철군을 완료하자 전쟁의 승패는 결정난 것과 다름없었다. 프랑스인들은 믿었던 영국이 배신하고 도망갔다고 분노했지만 이런 참사를 당하게 된 근본 원인은 사실 프랑스 자신에게 있었다. 결국 프랑스 정계는 스페인 대사로 있다가 긴급 소환된 1차 세계대전의 영웅 페탱을 6월 16일, 수상으로 임명하고 위기를 타개하도록 조치했다.
(1940년 5월 25일 회합한 프랑스의 전쟁 지휘부. 총사령관 웨이강(좌1), 수상 레노(좌3), 페탱(좌4). 하지만 위기를 타개할 묘책은 없었다.)
모두가 페탱이 전세를 반전시켜 주기를 원했으나 정작 그는 항복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치욕스럽지만 그래도 국권을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었다. 결국 협상이 개시되어 6월 22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페탱이 "적어도 나라의 명예만은 지켰다"고 말했을 만큼 형식상으로는 국가 대 국가로서 이루어진 휴전(Armistice)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협정 장소와 형식부터가 프랑스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이벤트로 진행되었을 만큼 독일의 의사가 고스란히 반영된 일방적인 항복이었다. 그렇게 해서 6월 25일, 프랑스 전역의 총성은 멈추었다.
3. 형식상의 독립국
곧바로 프랑스가 중립을 선언하면서 영불동맹은 폐기되고 드골이 런던에 망명 정부를 수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여전히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패했어도 프랑스라는 실체나 정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해외에 산재한 수많은 식민지를 여전히 거느리고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6개월 전에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고 지구상에서 사라진 폴란드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모습과 달리 프랑스가 생존하려면 철저하게 독일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군의 라인란트 진주처럼 그 전에도 영토의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사례는 흔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페탱도 당황했을 만큼 차원이 달랐다. 프랑스 정부가 통치할 수 있는 지역은 휴전 당시 독일이 점령하지 못한 남프랑스 일대로, 국토의 4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는 명분으로 하루에 4억 프랑의 점령군 유지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휴전 조건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정전위원회는 무조건 독일 점령군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따르도록 했다. 한마디로 프랑스는 형식상의 독립국이었을 뿐이다.
(독일은 프랑스가 항복했음에도 60퍼센트만 점령 통치했다. 나머지는 프랑스의 통치 구역으로 남겨 놓았으나 7월에 성립된 비시 정권은 독일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래도 겉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정치, 외교, 경제 행위도 이루어졌고 군대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휴전 당시 생포한 200여만명의 포로를 수용소로 보내고 대부분의 장비를 노획했을 만큼 프랑스군을 해체에 준하는 수준까지 몰락시켰으나, 마치 베르사유 조약하의 바이마르 공화국군처럼 10만 정도의 정전협정군(Armée de l'Armistice)을 보유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일부 묘한 부분이 있었다.
4. 프랑스 전역의 미스터리
무슨 이유에서인지 히틀러가 프랑스 해군의 함정들을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휴전 협정을 맺을 당시에 독일은 엄청난 규모의 프랑스 군함을 확보하지 않고 단지 무장만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거두어갔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육군, 공군의 무기를 노획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의외였다.
이는 당시의 상황은 물론 이후 전쟁의 진행 과정을 상기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독일은 세계 2위의 강력한 해군을 보유했지만 패전 후 연안 해군으로 축소되며 철저히 몰락했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전력 증강에 나섰지만 아직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그나마 구축한 전력도 바로 직전의 노르웨이 침공전에서 영국군에 의해 많은 손실을 본 상황이었다.
반면 당시 프랑스는 세계 4위의 해군 강국이었다. 전함 쿠르베(Courbet) 같은 일부 함정들이 패전 직후 영국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억류되었으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2년 후 이들을 차지하려 작전을 펼쳤던 점을 고려한다면 독일도 분명히 탐을 냈었다. 그런데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 다를랑(François Darlan)이 중립의지가 확고한데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강력히 반발하자 독일은 애초의 요구를 거두어들이고 그냥 놔두기로 결정했다.
(항복 직전 영국으로 대피해 억류되었고 이후 자유 프랑스군 소속으로 활약한 전함 쿠르베)
가뜩이나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그것도 곧바로 바다를 건너가 영국을 공격해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랬는지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그래서 됭케르크 해안가에 연합군을 몰아넣고 3일 동안 공격을 중지시켰던 것과 맞먹는 프랑스 전역의 미스터리로 취급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함정들의 존재는 영국과 프랑스를 갈라놓는 원인이 된다.
5. 영국의 선택
프랑스가 항복한 후 독일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영국이었다. 육지에서 전선을 맞대고 싸운다면 영국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지만 다행히도 섬나라였고 세계 최강의 해군이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독일 공군의 엄호 하에 상륙부대가 영불해협을 건너올 것이 확실하므로 결코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또 아무리 독일 해군이 약하더라도 무시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고스란히 살아남은 프랑스의 함정들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만일 이들을 독일이 확보해 영국 침공전에 사용한다면 영국으로선 곤혹스러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독일이 놀랍게도 프랑스 해군의 함정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사실을 영국은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설령 알았어도 당시 상황을 놓고 본다면 독일이 그냥 놔두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휴전 후 프랑스는 대외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영국과의 동맹관계를 끊겠다는 것이었지 독일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일단 독일이 영국을 공격하는 데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항구를 포기한 상태였고 육군, 공군의 장비들은 즉시 노획되었다. 이럴 정도였으니 여차하면 독일이 알토란 같은 프랑스의 함정들을 노획해 사용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영국은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막아야만 했다.
최선책은 바로 직전까지 함께 피를 흘린 혈맹답게 프랑스 함정들이 영국 해군에 합류하거나 아니면 통제를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항복한 것이지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나마 보장받은 군사력을 순순히 내줄 의향이 없었다. 차선은 프랑스가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는 것인데, 독일의 강압이 있을 시에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격멸시키는 것이었다.
6. 캐터펄트 작전
사실 영국의 움직임은 프랑스의 패전이 가시화된 6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다. 처칠이 레노에게 함정의 인도를 요구했고 여의치 않을 경우 제3국으로의 망명을 대안으로 제시했었다. 이는 영국 혼자 살겠다는 행위라며 프랑스의 반발을 부르긴 했지만 동맹으로서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 다를랑은 처칠에게, 만일 독일이 프랑스 함정을 빼앗으려 한다면 자침시켜 버릴 테니 안심해도 좋다고 답변했다.
(비시 정부 당시의 프랑수아 다를랑(앞줄 가운데). 영국과 독일의 압력으로부터 해군력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변절을 일삼는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힌다.)
결국 영국은 최선에서 최악의 상황을 모두 염두에 두고 캐터펄트 작전(Operation Catapult)을 수립했다. 프랑스가 알아서 영국의 의도에 따라 행동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는 가야 했다. 적지로 변한 프랑스 본토의 툴롱, 브레스트 등의 항구에 위치한 함정들은 설령 영국에 합류하려 해도 독일의 감시를 벗어나기 어려우니 포기하고 일단 해외에 주둔한 함정들을 대상으로 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보유한 프랑스는 많은 해외 기지를 운용 중이었다. 이 중 영국의 우선 목표가 된 것은 지중해 일대를 작전권으로 삼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일대에 배치된 함정들이었다. 이들은 배수량으로 따져 프랑스 해군의 40퍼센트에 해당되는 거대한 전력으로, 여차하면 대서양으로 신속히 전개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이 휴전 협상을 개시하자 처칠은 지브롤터에 주둔하고 있던 H기동함대(Force H)를 출동시켰다.
당대 최대의 전투함인 순양전함 후드(HMS Hood)를 기함으로 하여 전함 2척, 항공모함 1척, 경순양함 2척, 그리고 구축함 11척으로 구성된 H기동함대를 이끈 이는 소머빌(James Somerville) 제독이었다. 이들이 향한 곳은 알제리 북부에 위치한 메르스엘케비르(Mers-el-Kébir)였다. 100년이 넘게 지배한 알제리는 어느덧 프랑스인들에게는 본토의 일부처럼 여겨질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지브롤터를 출발하는 H기동함대)
메르스엘케비르와 10여 km 동쪽에 위치한 오랑(Oran)에는 장술(Marcel-Bruno Gensoul)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제1함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기함인 됭케르크(Dunkerque)를 포함한 전함 4척과 수상기모함 1척, 그리고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전력은 H기동함대와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 소머빌이 제1함대 사령부를 방문하여 장술과 협상에 들어간 것은 휴전이 성립된 지 이틀 후인 6월 27일이었다.
소머빌은 장술에게 함대를 이끌고 영국에 오면 안전하게 함정을 보관하고 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돌려줄 것이고, 수병들은 원하면 즉시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조치하겠다고 설득했다. 만일 힘들다면 제3국이라 할 수 있는 서인도 제도나 미국으로 함대를 옮기는 대안도 제시했다. 하지만 영국은 최선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제안을 장술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소머빌도 처칠로부터 지시받은 사항을 그대로 전한 것처럼, 이 정도로 중요한 문제를 일개 제독인 장술 혼자 결정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프랑스라는 국가나 정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본국의 지시 없이 영국의 의도에 동조하는 것은 반역이라 할 수도 있었다. 독일 점령기 동안 프랑스를 지배한 비시 정권은 종전 후 척결의 대상이 되지만 당시에는 명백한 합법 정부였다.
그래서 장술이 영국의 의견에 동조한다면 프랑스와 독일이 맺은 휴전 조약을 정면 위반하는 것이어서 어떤 보복이 떨어질지 몰랐다. 바다 건너 알제리는 독일군의 간섭이 직접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서 독단적으로 행동할 여지는 있었지만, 영국의 요구를 따르면 온갖 굴욕을 감내하고 간신히 전쟁을 끝낸 본국에 고통을 줄 가능성이 컸다.
7. 선택의 시간
하지만 여전히 독일과 전쟁 중인 영국은 프랑스의 입장을 고려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일군의 손에 프랑스 군함들이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던 소머빌은 만일 영국 편이 되거나 제3국으로 갈 생각이 없으면 차라리 자침하라고 요구했다. 장술은 본국에 의견을 물어보려 했지만 정부가 비시로 이전 중이어서 다를랑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자 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7월 2일이 되도록 답변이 없자 다음 날 아침 소머빌의 명령을 받은 홀랜드(Cedric Holland) 대령이 장술을 방문하여 6시간 내에 확답을 주지 않는다면 부득이 공격에 나서겠다는 최후통첩을 전했다. 바로 엊그제까지 독일을 상대로 같이 싸우던 동맹이었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소머빌은 압박을 가하기 위해 항구 주변에 H기동함대를 공격 대형으로 배치했다.
사실 영국으로서도 어지간해서는 피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였지만 장술의 태도는 몹시 우유부단했다. 그는 홀랜드에게 "프랑스의 함정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장하겠다."고 답변했는데, 이는 영국의 요구 조건에도 확답을 주지 못하는 그가 장담할 수 있는 수준의 약속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영국이 공격하면 즉시 반격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했다.
(알제리에 주둔한 프랑스 제1함대 사령관 장술 제독(좌). 우유부단한 성격의 그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한 영국의 요구는 어쩌면 너무 가혹했다.)
우유부단한 장술은 이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고자 했다. 다급한 영국은 항복과 자침 외에는 다른 제안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객관식 문제처럼 자신들이 제시한 내용 중에서만 택일하라고 다그치다 보니 장술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이는 같은 날 알렉산드리아에서 성공적으로 프랑스 함정을 무장 해제시킨 영국 지중해 함대 사령관 커닝햄(Andrew Cunningham)의 대응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8. 마침내 시작된 공격
7월 3일, H기동함대 사령관 소머빌이 최후통첩과 함께 공격 준비 명령을 하달하자 모든 함정들이 각각 할당된 목표를 향해 포신을 돌렸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이 흘러 6시간이 지나도 프랑스의 대답이 없자 17시 55분, 마침내 영국 함대의 함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장술은 1분 전에 무장을 해제하겠다는 답변을 보냈지만 소머빌은 받지 못했다. 그의 행동이 불과 5분만 빨랐어도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를 캐터펄트 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H기동함대에서 관측된 포격 모습. 엄밀히 말해 예고된 공격이므로 기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대응 준비는 상당히 부족했다.)
충분히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을 시작했기에 초탄부터 정확히 목표물을 강타했다. 이로써 엊그제까지 어깨동무하고 함께 독일과 싸웠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교전 상대가 되었다. 특히 해군 간의 교전은 트라팔가 해전 이래 133년 만이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며 동맹은 폐기되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협상을 진행했을 만큼 대화로 문제를 풀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기에 아쉬움이 많은 순간이었다.
공격 명령을 내린 소머빌뿐 아니라 포탑에서 사격을 가하는 말단의 수병들도 이런 상황이 가슴 아팠지만 전투가 시작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했다. 후속탄이 군항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정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날아왔다.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공격까지 하겠냐며 낙관하고 있던 프랑스의 충격은 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장을 해제하려던 장술은 곧바로 응전 명령을 내렸다.
(메르스엘케비르 항에 떨어지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 기동 중인 프랑스 함정들)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해도 제1함대 사령관 장술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함대를 항구에서 빼내 전투 대형으로 배치하는 최소한의 대책은 마련해 놓았어야 했다. 영국의 공격이 있다면 즉시 반격에 나서겠다고 말로는 호기 있게 답변했지만 정작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진주만 공습처럼 기습이 아니라 영국 함대가 어디에 있고 언제 공격할 것인지를 미리 통보해 준 상황이었다.
반면 H기동함대는 목표 지점을 향해 횡대로 늘어서서 화력을 일거에 집중시켰다. 전력상으로는 양측이 얼추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이처럼 영국이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기에 상대를 향해 날릴 수 있는 포탄의 양은 3~4배 이상이었다.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영국 해군답게 침착하게 공격에 나선 것이다. 항구 안에 갇혀 있던 프랑스 함정들은 머리 위로 포탄의 비가 쏟아지자 그때서야 시동을 걸고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러자 영국의 구축함들이 전진하여 출입구 봉쇄에 들어갔다. 교전이 시작된 이상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매섭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제1함대는 독 안에 갇힌 쥐처럼 내항에서 포탄을 피해 우왕좌왕하다가 얻어맞았다. 가장 큰 비극은 전함 브르타뉴(Bretagne)에서 발생했다. 후드가 발사한 15인치 포탄에 탄약고가 직격당해 대폭발을 일으키고 격침되면서 977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012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결정타를 맞고 유폭이 발생한 전함 브르타뉴. 1,000여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짧고 굵게 벌어졌던 해전의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프랑스는 전함 1척 침몰을 비롯해 5척의 전함과 구축함이 대대적인 수리를 받아야 하는 손실을 입고 1,5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당했다. 반면 영국은 6기의 함재기를 격추당하고 2명이 전사하는 데 그쳤다. 두말할 필요 없이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전투의 전개 과정을 본다면 영국이 잘했다기보다는 프랑스의 준비가 안일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항복하기 전까지 독일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치더라도 군대는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프랑스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1904년 이래로 40여 년 가까이 함께 발을 맞추어 왔지만 프랑스가 중립을 선언하고 동맹을 파기한 이상, 더구나 독일의 지배하에 있다면 영국과의 관계 정립도 고려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런 점은 무시했다.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했던 것이다.
실제로 회복 불능의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브르타뉴 한 척이었고 나머지 함들은 수리해서 사용이 가능했지만 일단 지중해에서 추축국이 프랑스의 해군력을 동원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영국은 목적을 달성했다. 다를랑이나 장술은 영국에게 반드시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장담했고 실제로 2년 후에 독일에 맞서 주력함을 자침시키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영국이 이를 믿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9.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역사
반면 됭케르크 철수 후 가뜩이나 영국에 대한 실망감이 컸던 프랑스의 반응은 격앙에 가까웠다. 곧바로 영국과 국교를 단절했고, 민심이 독일 쪽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믿었던 도끼에 또다시 발등을 찍혔다면서 반영 정서가 강해졌다. 런던에 망명해 항독 전선을 준비 중이던 드골도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식민지 주둔군을 포섭해 자유 프랑스군의 주력으로 삼고자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
비시 프랑스는 말로는 중립이라 외쳤지만 얼마 후에 벌어진 다카르 해전이나 1942년 연합군의 횃불 작전 당시에 극렬하게 저항했을 만큼 영국에 적대적으로 행동했다. 사실 영국이 캐터펄트 작전을 펼쳤을 때는 이런 상황까지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 독일의 지배를 받는 순간부터 프랑스는 결국 영국과 함께 갈 수 없는 사이였다.
또한 프랑스의 항복을 받고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던 독일은 이제 영국과 프랑스가 완전히 갈라섰다고 판단하고 7월 10일 제정된 새로운 헌법에 의해 본격 출범한 비시 정권을 적극 후원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추축국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종전 후 단죄를 받을 만큼 친독 괴뢰 정부에 의해 통치받는 나라가 되었다. 독일은 비록 프랑스의 함정은 포기했지만 대신 배후를 안심하고 영국의 공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혹자의 시각에서 보면 영국의 행동은 프랑스에게 배신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다른 시각에서 보면 생존을 걸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의리나 명분은 단지 허울 좋은 명제에 불과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의 생존과 관계된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야 그 다음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1940년 7월 3일에 있었던 캐터펄트 작전은 그런 냉정한 역학 관계를 되새길 수 있게 해준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출처 다음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