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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孟思誠)]
맹사성(孟思誠)은 1360년(공민왕 9년) 7월 17일 수문전제학 맹희도의 맏아들로 온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창,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혹은 동포(東浦)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했는데, 그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렸다.
그의 탄생과 어린 시절은 두 가지의 야담으로 전해진다. 아버지 맹희도는 어린 시절부터 정몽주와 절친한 친구였다. 1359년 정몽주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자신은 낙방하자 절간에 들어가 절치부심하고 과거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 맹유는 며느리 조씨로부터 뜨거운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고 아들을 급히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 결과 조씨는 맹사성을 잉태했고, 그가 태어나자마자 맹희도는 과거에 급제하는 겹경사를 안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한 마을에 살던 최영이 낮잠을 자다가 짙은 안개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배나무에서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깨어 밖으로 나가보니 어린 맹사성이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최영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맹유에게 찾아가 자신의 손녀딸과 혼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맹사성은 고려 말의 명장이자 충신 최영을 처조부로 모시게 되었다.
그 무렵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과 세제의 문란, 권신들의 전횡으로 인해 국운이 날로 쇠약해져 갔다. 공민왕이 중용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조정에 일대 개혁의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할아버지 맹유는 이부상서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아버지 맹희도는 정치와 거리가 먼 수문관 제학의 직위에 있었으므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권근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몰두하고 있던 맹사성은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나고 10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정신적으로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뒤늦게 마음을 다잡은 그는 25세의 늦은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단 1년 만에 전 과목 합격증서인 조흘첩(照訖帖)을 받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1386년(우왕 12년)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는 정8품 춘추관 검열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쳤지만 1392년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이 연합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사수하려던 최영의 사돈이었던 그의 집안에 모진 풍파가 몰려왔다.
할아버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일원으로 은거하다 불타 죽었고, 함께 두문동에 머물던 아버지 맹희도는 충청도 한산으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고 아산에 있는 최영의 집에 금곡서원을 세워 유학 전파에 몰두하는 한편 아들 맹사성에게 출사를 종용했다.
[맹사성과 무명선사의 선문답]
맹사성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열아홉에 장원급제해
스무 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되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장이 되었으니
자만심이 생겼고
자신도 모르게 방자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변해걌다.
그러던 어느 날,
맹사성은
학문과 덕망이 높기로 소문난
무명선사를 찾아갔다.
그런 분에게
인정을 받고 싶기도 하고
또
혈기 왕성하던 때라
그의 학문을 시험해 보고 싶은
객기도 있었음 직하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 수장으로서
내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보오?"
무명선사가 대답했다.
"그건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러자
맹사성이 거만하게 되물었다.
"그런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이거늘,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 내게
해줄 말이 고작 그것뿐이오?'하며
화를 내고 일어서려 하자
무명선사는
녹차나 한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맹사성은
못 이기는 척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스님은
그의 찻잔이 넘치도록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게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이 다 젖습니다!"
스님은 계속해서
태연하게 차를 따랐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 적시는 것을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맹사성은
얼굴이
화끈거려 정신없이 일어났다.
도망치듯 나가려다
그만
문틀에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다.
머리가 아파
쩔쩔매고 있는데
등 뒤에서
스님이 나지막이 말을 거넸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지요.
우리가
돌덩이에 불과한 불상에
몸을 숙이는 것도
세상을
겸손하게 살아가기 위함이라오."
맹사성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호를
'고불(古佛)'이라고 고치고
그 이후로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로써 대하며
청렴한 삶을 살았다 한다.
[맹사성과 무명선사 | 카툰버스]
https://www.youtube.com/watch?v=I2tvFF7JLOs
[맹사성 - 세종의 청렴한 정승, 맹사성의 일화와 황희정승과의 비교]
조선 초 세종의 놀라운 업적에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서 모범을 보이는 삼정승이 있었습니다. 황희, 맹사성, 윤회는 세종의 측근으로 재상을 맡아 조선의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맹사성은 예의가 바르고 소박하면서도 업무에는 강직하여 공직자의 모범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청렴한 세종의 정승, 맹사성의 생애와 업적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맹사성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는 최영 장군을 본받아 살고자 했다고 합니다. 재능이 있고 성품이 올바르기 때문에 최영의 숙적인 이성계도 맹사성을 조선 건국 후에도 중용하였습니다.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와 좌의정에 오르기까지 맹사성은 세종의 여진정벌을 돕고 조선 초의 음악을 정비하였으며, 과거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농사개량에 힘썼습니다. 특히 여진정벌은 다른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맹사성이 세종의 뜻을 받아 영토를 확장할 수 있도록 공헌한 것입니다.
(부드러운 리더쉽, 청렴하고 효성스러운 인간성의 맹사성)
맹사성은 세종의 태평성대를 보필하면서 여러 차례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려고 했었으나, 한 번도 윤허하지 않을 정도로 세종은 맹사성을 믿었었습니다. 나이가 많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세종은 맹사성의 자문을 구하곤 했었습니다.
태종실록과 팔도지리지 편찬에 공헌하였고 특히 조선 전기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맹사성은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았기 때문에 향악 정리와 악기 개발에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세종의 충신인 김종서를 천거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신라 말 ~ 조선 초까지의 국경 변천도 / 출처: 교과서)
어질고 부드러운 학자 맹사성과 강직하고 명확한 학자 황희
세종의 재상으로 유명한 황희정승과 맹사성은, 세종의 믿음을 받으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황희정승도 맹사성처럼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으로 황희와 맹사성을 반드시 뽑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희정승은 강직하고 명확한 성격이었고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래서 세종이 외교, 국방, 행정 등에는 황희가 나서게 하였고, 교육, 제도, 문화 등에는 맹사성이 나서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맹사성과 함께 세종의 재상이었던 황희정승)
세종 말년, 유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근간을 어기고 세종이 대궐에 내불당을 지으려고 하자 황희와 맹사성은 또 다른 모습도 보였습니다. 처음엔 반대했던 황희는 세종의 마음에 동화되어 대신들을 회유하기도 했지만, 맹사성은 오히려 유학자로서 강직하게 반대하며 집현전 학자들에게 반대의 뜻을 넓히고자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다른 기록을 보면 황희가 뇌물을 받고 간통을 했다는 기록도 나오지만, 황희와 맹사성에 대한 세종의 신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맹사성의 부드럽고 소탈한 인간성
맹사성은 특히나 효성이 지극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도 수록되었습니다. 맹사성은 벼슬 중에도 부모의 봉양을 위해 여러 번 스스로 벼슬을 그만 두려고 했었습니다.
또한 맹사성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대하며 예를 차릴 줄 알았으나, 업무에 있어서는 엄격하여 사리분별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맹사성은 벼슬이 낮은 사람이 오더라도 예의를 갖추어 배웅까지 했었으며, 하인의 잘 못에도 항상 너그럽게 대응했다고 합니다.
자식의 술버릇이 나빠지자 맹사성은 자식에게 절을 하며 술버릇을 고쳐주었을 정도로 엄하지 않고 부드러운 소통을 했었습니다.
(맹사성이 살았다던 검소한 고택 / 출처: visitkorea.or.kr)
공직자 청렴의 귀감으로 여길만한 맹사성의 검소함도 유명합니다. 공무를 볼 경우가 아니라면 맹사성은 걸어 다니거나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고위관료는 역마나 가마를 이용했는데, 맹사성의 이런 검소함 때문에 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 모를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맹사성의 일화 중에는 고향인 온양의 지명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세종이 질병으로 고생할 때 온천치료에 수행하곤 했는데, 이때 세종은 "온양"이라는 지명을 하사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온양 온천"의 지명입니다. 지금은 행정구역 정비로 충남 아산시가 되었습니다.
아랫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윗사람에게는 충직하며, 재물에는 소탈하고 가족에게는 따스한 인물이 바로 맹사성이었습니다.
출처: https://kiss7.tistory.com/616 [키스세븐]
[맹사성의 특이한 혼인 이야기]
- 맹사성의 특이한 혼인 이야기 -
조선 초기의 공신인 하나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고려의 신하인 맹희도 아들로,
맹희도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데 반대해 온양으로 귀향을 오게 됐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젊은 맹사성은 재능은 있지만 그 재능을 쓸 수 없었고 출세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학문을 하는 걸 금했기 때문에 그는 가출하여 한양을 헤메고 다니다 한 봉사 점쟁이의 제자가 됐습니다.
그 점쟁이는 앞은 못보지만 굉장히 점을 잘보는 신기가 있었는데,그는 맹사성이 벼슬복이 있다면서 자신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맹사성이 그를 잘 모시자 어느날 점쟁이가 맹사성에게 이상한 일을 시켰습니다.
그는 오늘 밤 마을 공동묘지로 가면 누군가가 장례를 치르고 있을테니 기다리다가 장례가 끝나면 시신을 업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담이 쎈 맹사성은 스승의 말을 따랐고 밤에 공동묘지에 가서 머리를 묘속에 숙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밤이 이슥해진 후에 한 대여섯이서 묘지로 오더니만 상여에서 관을 들어내서 조용히 장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그들이 사라지자 봉사가 시키는 대로 묘를 파고는 관을 하지도 않고 비단에 뚤뚤 말아 싼 시신이 있길래 그대로 몰래 업고 왔습니다.
그가 시신을 업고 오자 봉사가 이 시신을 안아 품고서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맹사성이 시신을 안고서 아랫목에 가만 있었는데
그후 몇 시간이 지나자 점쟁이는 맹사성에게 비단을 헤치고 시신의 가슴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맹사성이 비단을 치우자 뜻밖에도 시신은 아리따운 처녀 였습니다.
처음엔 망설임이 있었지만 시신의 가슴에 손을 대니 조금씩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후 며칠이 지나 처녀는 소생했는데 그녀는 이웃마을 염부자의 집의 딸로
열병에 걸려 의식을 잃었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쟁이는 어느날 점을 쳐보니 그 처녀가 죽지도 않았는데 생매장당해 죽을 것을 알고는
제자를 시켜 그녀에게 음양이기를 조화시켜 소생시킨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처녀는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자신을 안은 남자인 맹사성에게 자연스럽게 정이 갔습니다.
이후 며칠간 맹사성이 그녀를 계속 보살피다 보니 서로에게 정이 가는 건 당연한 이치였죠.
결국 이 일은 쳐녀의 집안에서도 알게 됐고
맹사성이 묘를 파서 아이를 살렸지만 몸을 다 베려 놨으니 어쩔 수 없이 맹사성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부자 집인 시댁의 도움으로 맹사성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고 27세의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 했습니다.
아버지 맹희도는 고려를 망하게 한 조선에 의탁한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지만
며느리가 직접 찾아가 지극 정성으로 모시자 그제서야 아들을 용서하긴 했지만 그리 사이가 좋진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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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1360-1438)은 청렴한 재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고려말의 혼란기에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고,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태종, 세종 3대 임금에게 신임을 얻어 고위 관직을 두루 지냈다. 그러나 재물에 욕심이 없었고 외출할 때에는 소를 타고 다녀 누구도 그가 재상인지 몰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맹사성의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신창은 현재의 아산시 서쪽 지역으로 맹씨는 조선시대 ‘신창현(新昌縣)’ 고을의 토착성씨였다.
맹사성은 1427년 우의정으로 있을 때에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감수를 맡게 되었는데 세종이 아버지의 실록을 보고 싶어하자 “왕이 실록을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반대하여 세종이 이를 따랐다.
이 일을 선례로 하여 조선왕조 5백년간 사관의 객관적인 서술로 실록이 편찬되니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데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고, 조선의 음악을 정립하는데 기초를 다지기도 하였다. 1432년에 좌의정에 올랐지만 3년 만에 노령의 나이를 들어 벼슬을 물러났다.
이렇게 평생이 명예로운 듯 보이는 맹사성에게도 인생의 고비가 있었으니, 태종 때에 왕의 사위를 고문하였다가 처형될 뻔 한 위기에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또 황희 정승의 사위가 신창에서 아전을 죽인 사건으로 형벌을 받게 되자 맹사성이 나서서 사건을 무마하려다 발각되어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와 혼인하여 최영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는데 최영은 자신의 소유였던 집 한 채를 손녀사위에게 물려주었다고 전한다.
이 집이 바로 아산시 배방면 원중리 마을 설화산 자락에 위치한 맹사성고택 ‘맹씨행단’이다. 이 집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살림집으로 사적 109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맹사성이 죽은 후 세종실록에는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벼슬이 낮은 이가 찾아와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라 기록하고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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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공님과 울 ~회원님들 ..평안하셨는지요^^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인정할 줄 알며
자신을 변화시켜 갈 줄 안다는 것 ..
자체만으로로 인품의 깊이를 알 수 있을 ...()
지혜로운 행동력, 지혜로운 침묵, 지혜로운 겸손함
유연히 행동할 수 있는 지혜로움 , 침묵안에 담긴 강건한 중심력의 무한신뢰
겸손한 이행의 수행을 묵묵히 ....
(우리 모두에게 여유로운 축복의 섭리가 함께 하시길 바라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