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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문집(松亭文集)’을 통해 본 사림기문(士林記文)의 고찰(考察)
鄕土史學者 鄭壽炳
1. 들어가며
올 해 유난히 긴 장마 끝에 찾아 온 가을정취를 느껴보고자 철봉산(鐵峰山)에 올랐다.
해발 고도 449.5m 철봉산의 원래 이름은 ‘달우리산’인데, 임진전쟁(任辰戰爭) 때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의 이여송이 지리참모(地理參謀)의 조언을 듣고 명산의 기(氣)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데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어느 풍수지리가(風水地理家)의 말을 빌리면 철봉산은 서기(瑞氣) 충만한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더욱 돋보이는 것일까? 마침 가을 하늘은 한껏 드높고 파란데, 멀리 대전과 영호남의 산맥들이 철봉산을 향해 줄서오듯 행룡(行龍)하고 있다.
철봉산맥을 중심으로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줄기가 산하를 굽이쳐 옥천 지역의 적등진(赤登津) 하류를 감입곡류한 후 대청댐에 잠긴다.
인류사(人類史)를 살펴보면 사람과 문화는 늘 물가를 중심으로 모이고 형성되어 왔다.
우리 옥천 땅도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내와 강가에서 주로 마을과 문명이 발달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부족 또는 나라 간 전쟁과 흥망을 거쳐 찬란한 문화(文化)를 꽃피워 낼 수 있었다.
철봉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가을 들녘은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는 속에 양지바른 곳마다 평화로운 마을들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금강 변으로는 국가의 기간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수많은 차량들이 분주히 오가고, 강가엔 강태공들의 머리 위로 우아한 백로들이 날개 짓을 하며 먹잇감의 시계(時界)를 재는 중이다.
그 때 강가 낮은 언덕배기 송림(松林) 사이로 오래된 정자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니 바로 양신정(養神亭)이로구나!
이내 참배 차 양신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작년만 해도 낡고 허름했던 누정이 어느새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된 것을 보고 문화재 관리부서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야은(冶隱) 선생은 회고가(懷古歌)에서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고 한탄했던가?
그러나 금강줄기인 적등강가에도 유사 이래 명망 높은 많은 선비, 학자들이 낙향하여 학문에 매진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지방 문화의 꽃을 피워 왔다.
또한 그들이 이렇게 남긴 문화재와 유산은 지금까지 후세들의 자산이 되어 오늘은 사는 우리들에게 큰 삶의 지침과 교훈을 주면서, 여전히 인걸은 이어지는 역사와 함께 우리 곁에 남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2. 송정선생문집(松亭先生文集)에 수록된 기문문학(記文文學)의 통람(通覽)
가. 송정 전팽령(全彭齡) 선생(1480~1560)은 옥천이 배출한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의 거두(巨頭)로서 조선조 청백리에 선정된 인물이며, 밀양부사를 퇴임한 후 낙향하여 금강 변 목담호숫가에 양신정(養神亭 : 1545년 建)立)을 짓고 학문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는 데 일생을 바친 분이다.
그뿐 만 아니라, 선생은 취원정(聚遠停) 등 몇 개의 정자를 더 짓고 전국의 사림(士林)들과 교류는 물론 지방 풍속(風俗)과 향약(鄕藥)의 실천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후일 선생의 제자들이 높은 뜻과 유지를 받들고자 양신정 옆에 목담서원(鶩潭書院 : 1765년 建立)을 지어 선생 등 3인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는데, 훗날 서원이 일제히 철폐된 후 지금은 목담영당(鶩潭影堂)으로 존속시켜 매년 춘향제를 올리고 있다.
긴 역사와 세월의 굴곡으로 귀중한 문화재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지금 동이면 금강 변엔 양신정(養神亭)과 목담영당(鶩潭影堂)만이 외롭게 남아있다.
나. 송정선생문집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사항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송정 선생이 활동하였던 당시 조선 중기의 기문(記文) 문학에 관한 고찰이다.
동 문집에는 당대 유명 문인 다섯 분의 한시(漢詩)와 한 분(陽谷 蘇世讓)의 기문(養神精記)이 수록되어 있다.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의 취원정시(聚遠亭詩), 약포(藥圃) 이해수시(李海壽詩), 호음(湖陰) 정사룡시(鄭思龍詩),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의 양신정시(養神亭詩) 두 수(二首), 동천(東川) 이충범시(李忠範詩) 등이다.
그만큼 송정 선생은 당대 중앙 정치무대와 학문적 영역에서 차지한 비중이 크고 사림(士林)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는데, 양곡 선생이 송정과 동시대인이긴 하나 익산(益山) 사람인 그가 서신(書信)을 통하여 양신정기(養神亭記)와 한시(漢詩) 두 수를 보내 준 기록이 있다.
다. 송정문집에 수록된 동천(東川) 이충범(李忠範) 선생의 한시(漢詩)
동천(東川) 선생(1520~1598)은 옥천군 양내면(현 영동군 양산면)에서 태어난 우리고장 출신의 당대 문신이자 유학자로서, 관직을 물러나고 낙향한 후 고향의 자풍서당(資風書堂)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매진한 분이다.
선생의 나이 73세 되던 해 임진전쟁이 발발하자 그 아들 이시립(李時立)과 함께 왜군과 용감히 맞서 싸워 7전7승을 거두는 등 혁혁한 공로를 세워, 옥천의 조헌(趙憲) 의병장에 이어 제2의병장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추앙받는 인물이다.
여기서 송정 선생과 동시대를 살던 동천 선생이 양신정(養神亭)의 축정(築亭) 시 보낸 오언율시(五言律詩)의 한시(漢詩) 기문(記文)을 소개한다.
魂靑梅雨後(혼청매우후) 愁歇自規餘(수헐자규여)
봄비가 그치니 영혼마저 매실처럼 푸르고 상쾌한데,
어디서 문득 접동새의 구슬픈 울음소리 애잔하구나.
落月窺靑嶂(낙월규청장) 歸雲度碧虛(귀운도벽허)
마치 달빛은 울창한 산속을 비추어 위무하는 듯 하고,
파란 허공엔 구름 떼가 모여들어 운치를 더하네.
煙況鴸散樹(연황주산수) 江黑鷺迷魚(강흑로미어)
숲속으로 날아 간 솔개 뒤로 물안개 자욱이 피어나고,
강에는 해오라기들이 물고기 사냥에 여념이 없는데..
老病親朋斷(노병친붕단) 誰傳一字書(수전일자서)
불현듯 늙고 병든 친구가 애절하게 생각나니,
누구 편에 한 자 글로 서신 한 장 보내고 싶구나.
* 漢詩 飜譯 : 朴龍雲 · 安光愛
라.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선생의 양신정기(養神精記)
양곡 선생(1486~156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1545년 윤임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그들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낸 후 익산에 낙향하여 후학 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으며, 기생 황진이와의 사랑과 그에 얽힌 다수의 한시(漢詩)가 유명하다.
* 이하 송정문집에 수록된 양곡 선생의 양신정기(養神亭記) 전문을 옮겨서 번역해 올리는 바, 동 문집의 기록 상 양곡 선생의 기문 말미에 ‘嘉靖癸丑歲未盡九日 退休翁書’라는 문구로 볼 때, 양신정 건립(1545년)을 축하하기 위해 그 8년 후인 계축년(1553년) 12월 22일 경 양곡이 인편(人便)을 통하여 서신(書信)으로 보낸 것이다.
‘記文’
蘇退翁世讓
邑于漢之南. 據名勝者多矣. 而惟沃爲最. 山峻而水厲. 土沃而田良. 豪傑才智之士. 彬彬輩出. 爵爲世用. 而惟全氏兄弟爲之冠. 聯名金榜. 蜚英雲路. 璦枝玉樹. 輝暎朝端. 而其季叔老爲白眉之秀. 氷霜操履. 雪月襟期. 每辭榮避勢. 退托林下. 囂然有終焉之計. 家在赤登津下流. 乃於江滸斷麓之上. 搆小亭. 扁以養神. 夫人之役心志疲精神. 奔走於聲利之場者. 外慕誘之也. 君遭遇淸時. 早紆籫紱. 可謂顯矣. 而猶謙然不自以爲慊. 視爵祿如浮雲. 家徒四壁. 猶畏人知. 余嘗恨朝家用之不盡其才也. 晩牧尙邑. 考以最聞. 特垈堂上以寵之. 余方賀見知於世. 將大其所施. 而旋又棄歸. 高臥亭上. 噫. 君子之出處非一. 若値盛際躋膴仕. 猶眷眷丘壑者. 余僅見於君矣. 方外交衍熙. 亦沃人也. 往來彼此. 時通聞訊. 君曾囑亭記於余. 余以懶廢. 今因熙歸. 書此以爲簡. 幷投短律二首. 其江山之勝. 登覽之賞. 余未嘗一㝢目焉. 倘有從君遊者. 尙能爲君賦之. 休退翁書
(飜譯 : 漢나라의 남쪽 고을처럼 큰 인물을 많이 낸 지역을 든다면, 단연 옥천이 최고로 꼽힐 것입니다. 산세가 빼어나고 물이 맑으며 토양이 비옥하여 밭이 아주 좋습니다. 걸출한 인재와 선비들을 화려하게 배출하였고, 벼슬을 받아 나라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특히 전씨 형제들이 관직에 나아간 이래, 과거급제한 인물들이 잇따라 나옵니다. 명성과 인품에 걸맞게 입신출세하고 번성하는 집안의 귀한 자손으로서 종묘사직을 밝게 빛내게 되는데, 그 중에 뒤를 이은 송정선생(叔老)이 단연 뛰어났습니다. 평소 선생은 지조와 행실을 살얼음판 걷듯 하고, 달빛 머금은 흰 눈 같은 마음 속 다짐으로 늘 영예를 사양하고 권세를 멀리 하신 분입니다. 퇴임 후 초야에 묻혀 살고자 번잡한 세상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금강 상류(赤登津 下流)의 본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강물이 휘돌아가는 아름다운 절경으로서 위쪽에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정신수양과 학문연마를 위해 ‘養神’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동안 내조해 준 부인의 수고로운 마음과 피로한 정신도 살펴주고, 명성과 이익만을 쫒는 데서 벗어나고자함이지만, 외부의 만류와 유혹 요인도 만만치 않았겠지요. 선생은 청년 시절에 임금을 만나 일찍이 단단한 ‘우잠불’(紆簪紱: 인끈으로 동여 만든 도구)의 관계라고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가히 겸손이 몸에 배어 있는데도 더욱 몸을 낮추시고, 벼슬 보기를 뜬구름 같이 여기셨으며, 집안 살림이 어려워 벽면만 보일지라도 오로지 나라 일과 학문연구에 매진하신 분입니다. 그러면서 늘 종묘사직에 충분히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고 한탄하셨습니다. 뒤늦게 상주목사로 나가 계실 때 소문을 들어보니, 특별히 당상관으로 오르시어 칭송이 자자하고 각계의 경하와 세상에 널리 퍼지어, 장차 더 큰 뜻을 품어도 되련만, 어찌하여 또 미련 없이 포기하고 돌아 선 것입니까? 벼슬도 초개같이 버리고 정자 위에서 한가롭게 지내시렵니까? 아! 군자는 아무데서나 한 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로구나! 어쩌면 벼슬길도 번창할 때 발전을 도모해야 하거늘, 오히려 속세를 떠난 산골에 가서 남을 돌보며 사시려 하다니요? 그리되면 뜸하게 전하를 뵐 수 있을 텐데, 다방면의 덕망 높은 교제로 빛이 넘친다면 역시 옥천인 답겠지요. 우리 서로 간에 다녀가고, 때때로 문안 나눕시다. 임금께서 이미 다른 정기(亭記)를 부탁하여 갖고 있는데 게을러서 아직 못 썼습니다만, 지금 양신정기는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쓰는 것입니다. 이 글은 편지로 보내는데, 한시(漢詩) 두 수를 더 지어 동봉합니다. 이미 옥천의 강산을 두루 살피고 올라 보았더니 참 아름답더군요. 나머지 경험하지 않은 곳은 나중에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로지 임금을 섬겼던 자로서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군을 위하여 그 능력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소세양 글
* 註 : 原文 중 ‘叔老’는 선생의 字이다. 선생은 밀양부사를 물러나고 養神亭(1545년)을 지었는데, 그 후 명종 5년인 1550년에 상주목사(1552년 解組)로 나가 廉謹吏(後에 靑白吏)로 선발된다. 原文 중에는 四書五經에서 차용한 문구나 中國의 名文, 古事成語를 인용한 구절이 散見되나 그 자세한 註解는 생략한다.
飜譯 : 朴龍雲 · 安光愛
3. 송정선생문집(松亭先生文集)을 통해 본 기문문학(記文文學) 소고(小考)
가. 조선조 기문(記文) 문학의 전성기는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던 16세기 전후의 시대라 할 것이다.
사림기문이 성행하게 된 배경은 당대 잦은 사화(士禍)로 인해 선비들의 귀거향리(歸去鄕里)와 은둔(隱遁), 좌천과 낙향 등의 과정에서 창작활동이 왕성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또 국가의 우문흥학정책(右文興學政策)과 사림에 의한 사학(私學)인 서원(書院)이 발흥했던 시기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나. 기문 저작(著作)의 동기로는 대부분 청탁의 글로서 작문인(作文人)으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당대 산문(散文) 대가의 명예 게시용 글이라는 목적의식과 부합해서 명문가의 기문이 활발히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사람들 간에 산수유람 풍조가 만연하면서 뜻을 같이 한 동지 간에 유람의 기록을 남겼고, 누정과 서원의 증가로 많은 작문자의 현시용 기록과 노년(老年)의 와유목적(臥遊目的)을 위한 기문도 성행하게 된다.
다. 기문의 유형은 산수기(山水記), 산수유기류(山水遊記類), 누정기류(樓亭記類), 관해(官廨), 공청기류(公廳記類), 향교(鄕鄕), 서원기류(書院記類) 등이 대부분이다.
우리 옥천지역의 문화재들과 사림의 기문(記文)에 대하여 필자는 아직 사료(史料) 등을 제대로 살펴보거나 체계적인 연구를 하지 못하여 감히 평론할 입장에 있지 못하다.
다만 이미 적시한대로 송정문집에 당대의 명문가 몇 분이 한시(漢詩)와 정기(亭記) 등의 기문을 남겨 두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취원정(聚遠亭)만해도 고암(顧菴) 문집에 정사룡(鄭思龍)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고, 또 송정문집에도 취원정 관련 소세양(蘇世養)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문화재도 자료들을 충분히 찾아보면 더 많은 기록들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4. 나오며
가. 조선 중기 사림의 기문(記文)이 재도문학(載道文學)이라는 이유로 일단의 현대문학비평가들에 의해 순수문학이 아니라는 비판에 대해 전혀 일리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재도문학은 글(文)에 도(道)를 실어 전한다는 문학이론으로서, 여기서 도란 곧 ‘유교적(儒敎的)’ 도를 말하며, 즉 자신을 수양하는데 필요한 것이나 세상을 다스리는데 요구되는 가치를 위한 사상(思想)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재도문학의 실상과 양상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경전(經典) 차용(借用)과 권위의식의 강화, 인위적인 정감(情感)의 절제문제(節制問題)로 드러난다.
예컨대 ‘시경(詩經)’은 자연물의 아름다움을, ‘주역(周易)’은 사계(四季)의 변혁과 우주에 대한 순환이치의 체득, ‘서경(書經)’은 공용문에 의한 작문자(作文者)의 자부심, ‘논어(論語)’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따른 실천철학의 촉구, ‘춘추(春秋)’는 건물의 흥작(興作)을 통한 역사적 감계(鑑戒)로써 그 차용(借用)의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다.
예컨대, 이번 송정문집에 수록된 양곡 소세양의 양신정기(養神亭記) 원문(原文) 중 ‘빙상조리(氷霜操履)’ 역시 시경(詩經)의 ‘소아(小雅)’편에 풍자시로 나온 구절에서 차용(借用)한 것을 들 수 있다.
나. 그러나 당대의 시대상황에서 정치, 사회, 학문 등의 철학적 한계를 배경으로 한 기문문학이 지금도 주옥같은 작품으로 후세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히려 당대의 그러한 기문문학이 면면히 한민족 특유의 충절과 효 사상, 상부상조 정신과 애국혼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싶다.
뿐 아니라, 조선중기 재도문학은 그 사상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체적 문학형태에서 산문(散文)양상을 띤 기문문학의 경우 중국 고서(古書)의 무분별한 차용(借用)보다 순수한 창작성 작품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굳이 고대 중국 고서(古書)나 옛 남의 작품 중의 일부를 ‘차용(借用)’했다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면, 당대 선진학문의 명문(名文)이나 고사성어를 적절히 활용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다. 대저(大抵), 나라 전체의 역사를 톺아보기 이전에 우리 옥천 땅에도 수많은 향토사적 성지와 역사적 인물, 그리고 귀중한 문화재들이 널려있다.
그동안 문화부서 당국과 관련 단체, 그리고 뜻있는 분들께서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시지만, 특히 아직도 먼지가 쌓인 채로 선현들이 남긴 문집이나 기록물, 유적들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있는 발굴과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 역시 늘 우리 후세들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2011. 가을. 錦江 邊 ‘草家’에서, 鄭壽炳
參考文獻 : 松亭先生文集, 顧菴先生文集, 仁峰全承業先生遺稿集, 朝鮮寰與勝 覽, 朝鮮中期士林의記文硏究(金貞仁), 朝鮮中期의遊山記文學(이혜 순),韓國의書院(최완기),擇里地(李重煥),東國與地勝 覽, 朝鮮王朝實錄(박영규), 四書五經新完譯全13券(秦漢哲)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