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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정조는 한참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세상을 등진다. 참으로 아까운 나이었다. 정조는 말년에 스스로 孤危하다 하였다. 늘 쓸쓸하고 위태롭게 살았다는 뜻이다.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에 독백은 그의 일생에 대하여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권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절대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정조는 이 세상에서 유래없고 상상할 수 없는 방법에 의하여 아버지를 잃는다. 그것을 목격한 아들로서 극심한 정신적 공황과 모든 것을 극복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극단의 결심을 스스로에게 심는다. 사도세자에 대한 뒤주속 죽음에 대한 동기에 대한 각종 설이 난무하는 실정이다.그러나 그곳에 대한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영조38년 1761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이 한 달간격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당시 영의정 이천보는 죽기 직전 올린 상소에 이런 글을 남긴다. " 임금님, 제발 화좀 그만 내십시오. 그렇게 화를 내면 당신에게도 해롭고 나라에도 좋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성질을 부리고 불같은 화를 내기를 좋와했던 영조에 성격에 대한 증거 인 것이다. 며느리인 혜경궁이 보는 시아버지 영조에 대한 성질과 행동에 대하여 상찰민속이라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면에 세세하고 행동이 재빠르다 하였다.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대하여 엄격하게 구분하였고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을 병적으로 구분하였으며 불길한 이야기를 들으면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고 침전에 들었다. 또한 영조는 출신 성분에 대핝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각심 출신으로 종의 신분이나 마찬가지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의 출신을 살펴 보면 이외로 궁녀를 어머니를 둔 왕들이 태반이다. 그러나 영조는 몸종 출신이라는 꼬리표와 영조가 태어났을 때 이미 이복형 경종이 세자를 차지하고 있어 연잉군에 불과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왕자의 신세 등등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영조는 다방면에 모진 사람화 되어 버렸던 것이다. 모든면에서 뼈를 깍는 각고의 노력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했던 영조로서는 공부는 게을리하고 먹기만 좋아하고 놀기만 탐했던 세자가 늘 마땅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라 세 살에 세자로 책봉하고 공부를 가르치던 영조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부왕을 대할 적마다 울렁증이 심화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세자는 병들어 간다. 병은 광증으로 발전되어 여럿을 죽인다. 이러던 중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의 상소문이 불을 지른다.
사도세자 친모 선희궁 영빈 이씨는 며느리 혜경궁에게 한 통의 서찰을 보낸다. " 어제밤 소문이 더더욱 무서우니 일이 이왕 이리된 바에는 내가 죽어 모르거나 살면 종사를 붙들어야 옳고 세손을 구하는 일이 옳으나, 내 살아 빈궁을 다시 볼줄 모르겠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이른 아침 경희궁으로 영조를 찾아 간 선희궁은 다음과 같이 아뢴다. "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업사오니 소인이 참아 이 말씀을 정리에 못 하올 일이오대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평안이 하옵는 일이 올사오니 대처분 하소서" 대처분은 죽이라는 말이다. 선희궁이 말을 들은 후 영조는 거동령을 내린 후 부친 숙종의 혼전을 찾아 아뢴다. 그리고
왕비 혼전을 찾아 사도세자를 부른 후 "변란이 호홉지간에 있다하면서" 자결을 재촉 한다.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영조는 재촉을 멈출 줄 모른다. 신하들이 칼을 빼앗자 옷고름을 끊어 목을 메라 한다. 이 역시 신하들의 만류로 성사가 어렵자 영조의 지시로 뒤주가 들어오자 가두지만 뒤주를 부서버리고 대궐을 활보하는 세자를 막을 자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다시 돌아와 군병영에서 사용하는 크고 튼튼한 뒤주를 가져오게 한 후 누구도 거들지 않자 손수 세자를 가두고 못질을 한다. 영조의 지독한 편집중이 세자를 죽인 원인으로 기여한 것이다. 또한 세자 역시 부왕을 죽이겠다고 말을 공공연이 하고 다녔다. 선휘궁이 들었다는 소문도 바로 그런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승정원일기와 한증록에도 나온다. 추후 영조는 후회하며 아들의 시호를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직접 내리지만 아들 정조에게는 커다란 슬픔이었다. 아들을 죽인 영조는 손자 정조를 죽은 큰 아들에 양자로 입적해 버린다.
아버지의 출상도 관여할 수 없었던 정조는 훗날 영조의 허락을 받고 동대문 밖 배봉산 기슭에 있었던 선친의 묘를 찾아 그 허술함에 놀라 통곡만 하다가 돌아 온다. 이후 왕으로 등극한 후 정조는 수원 평지와 다름 없는 지형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성곽을 세울 결심을 한다. 그 성이 바로 화성(華城)이다.
세상사람들이 말하기에 정조대왕을 효의 상징이라 말 한다. 과연 그럴까? 그것은 의문이다. 정조가 즉위한 후 처음으로 한 일은
외할아버지의 이복동생인 홍인한을 별일 아니라하며 여주로 가 있으라한 후 이어서 고금도로 귀양 보내어 사약을 내려 죽인다.
이어서 외삼촌 홍낙임 마저 친국하기 시작한다. 첫 대면하며 친국을 하기 시작한 정조는 첫마디로 참혹하다는 표현을 쓴다.
사실 그대로 밝히라 다그치며 친국 후 죄가 없다 하면서 방면하지만 절대왕권 사회에서는 혐의는 증거고 심문은 바로 유죄다. 앞으로 사람으로서의 행실을 할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린 것이다. 일년 후 외손자가 가문을 몰락시켜가는 모습을 본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결국 울화병으로 죽어 나간다. 어렵사리 왕으로 등극한 아들의 모습에 기쁨을 표현할 사이도 없이 가문이 몰락해
가는 모습에 혜경궁은 기가 막힌다. 혜경궁은 당시 마음을 다음과 같은 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집안이 엎어진 일을 생각하여 화가 치밀적이면 등이 뜨거워 자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앉아 벽을 두드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며 지내기를
몇몇 해를 하였는지 모르니라.
참으로 한여인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시아버님은 남편을 죽이고 아들은 가문을 척살했으니.... 한 많은 인고의 일생이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효는 모르겠으나 살아 계신 어머니에게는 너무 가혹했다. 그럼 정조는 왜 ! 그토록 외가에 가혹하게 굴었을까? 의문이 든다. 원인은 삼불필지 사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영조 말년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더 알 필요가 없으니, 대리청정을 거두어 달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등극을 막아다 하여 사사한 것이다. 또한 1769년에 있었던 기축별감 사건이 발단으로 보인다. 정조 나이 18세때 자신의 매부 정재화와 별감을 앞세워 기생놀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혜경궁은 기겁을 한다. 기생방을 다니다 죽었던 사도세자 생각에 아들의 운명도 그렇게 될까봐 놀란 것이다. 혜경궁은 아버지 홍봉한에게 이 일을 전하고 해결을 부탁한다. 홍봉한은 정조와 같이 놀던 별감들을 전부 유배조치 한다. 이를 안 정조는 격노한다. 아무리 외할아버지라도 왕의 승계자인 자신에게 대적한다고 격분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정조는 외가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승정원 일기와 한중록, 명의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군과 막후정치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정조에게도 이러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위한 화성을 신축하기 위하여 그 책임자를 다산 정약용을 정조는 선택한다. 다산의 아버지는 사도세자가 부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본 후 공직을 떠나 마재로 낙향 한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1개월만에 태어난 정약용의 아명을 귀농(歸農)이라 짓고 평생을 농부가 되라 했지만 그 역시 다시 진주목사로 발령을 받아 임지로 떠난 후 근무하다. 그곳에서 운명을 맞이 한다.
장례를 치룬 후 칩거하고 있던 다산에게 왕명이 떨어 진 것이다. 다산은 이미 천주학과 인연을 맺고 있었던 관계로 서학에 대하여 모든 것을 궤뚫고 있었다. 다산은 참으로 모든면에 유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울어 갈 조짐이 있었던 조선의 장래에 대하여 많은 우려를 한 위대한 실학자였다. 조선의 모든 것을 개혁해야 한다며 저술한 경세유표( 죄인의 신분에서 저술한 책이라 발표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유표란 꼬리를 달았다) 서문에서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신하입장에서 임금께 국가경영의 정책을 조목조목 아뢰어 바친 내용이 바로 경세유표다. 국가를 개혁하기 위하여 저술한 책이다. 또한 법과 제도가 제대로 집행되려면 관리들이 청렴한 도덕성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목민심서를 저술하였으며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억울한 옥살이 막기위하여 흠흠신서를 저술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의 정신과 철학을 근본 뿌리부터 바꿔주기 위하여 백성교과서였던 주자학의 사서육경을 재해석하여 실학으로 전환시킨 232권의 경학연구서를 완성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러한 다산의 능력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1784년경부터 이벽과 어울리며 천주학 교리와 서양책을 섭렵할 기회를 갖어었다.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다산은 마음을 넓게 크게 열고 많은 지식을 받아드렸다. 그러던중 외사촌형인 윤지충이 어머니 권씨가 돌아가시자 윤지충은 문상을 받고 장례를 치렀지만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에 체제공의 청에 의하여 참수를 당한다. 천주교도로 최초 순교사건이 다산의 집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때 다산은 배교를 하게되지만 그것은 배교가 아니었다. 멸문을 막기위한 고육책이었다.
18년의 유배에서 풀려나 회갑을 맞아 다산이 적어 놓은 자찬묘지명을 보면 천주교 교인으로서 영성적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네가 내 선행을 기록하되 책을 포개는데 이르렀으니
네 숨은 사특함을 기록하면 책에다 다 적을 수 없으리
너는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四書六經)을 안다 하지만
그 행실 상고하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랴
너는 명예를 구하나 찬양은 없도다
몸으로 증명하여 나타내고 빚내지 아니하랴
너의 어지러운 것을 거두고 너의 미친 짓을 중지하여
힘써 밝게 하느님 섬겨야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 이러한 다산의 고해성사격인 자찬묘지명을 읽고 어떻게 그를 배교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서학의 영향으로 서양과학사상이나 기술에 대한 책을 가까이했던 다산에게 정조는 성의 설계에 참고할 서적이라하며 도서집성(圖書集成) 기기도설(奇器圖說)를 내려 준다. 이 책은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집필한 과학서적들이었다. 이런 책을 참고하여 다산은 기중기, 거중기, 등등을 만들어 정조가 원했던 화려한 화성을 쌓은 것이다. 중국 고전및 조선의 고전에 대하여 해박했던 다산은 서양 과학사상을 접목시켜 실학사상의 뿌리인 실용주의적 논리가 굳건하게 형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화성 건물 곳곳에 자신의 십자가를 세워 놓았던 것이다. 화홍문 천정과 방화수류정 서쪽벽면 등등에 그 증표가 고스란히 지금도 남아 있다. 야고바 순례자들은 걸으며 그 모습들을 확인하였다. 화성은 생태적으로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속에서 축성된 것이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수원성지 참례와 더불어 화성성곽을 트레킹 계획을 세웠으나 여러가지 형편상 성지성당에서 미사참례 후 성지측에서 제공해 주시는 성지전반에 대한 자료 동영상을 시청, 그리고 점심식사를 나누고 십자가의 길을 갖으려하였으나 봄맞이 준비관계로 현장이 어수선하여 볼리 기념관 사진전을 보았다. 그리고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끝내고 다시 성지성당 제대에 안치된 최경환 성인과 김대건 신부님 유해를 친구하였다. 그리고 행궁을 탐방한 후 도보로 방회수류정으로 자리를 옮겨 방화수류정 수원지에서 잠시 행동식을 나눈 후 방화수류정에 올라 서쪽 벽면에 설치된 십자가와 천정 들보 양쪽에 선명하게 만들어 놓은 다산의 의중이 있는 십자가를 살폈다. 모두들 감탄이다. 화홍문 아래에 설치된 7개의 수구 칠성사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화홍문 들보에도 십자가과 뚜렸하게
들어나 있었다. 다산은 가문의 몰락을 우려하여 잠시 뒤로 물러섰던 것이다. 서양과학학문과 서학과 천주학에 관대했던 정조는 스스로도 많은 책을 구하고 섭력하곤 했었다. 이런 연유가 있어 정조는 서학과 천주학에 관대하였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기다렸다는 듯 정순왕후는 천주교 탄압령을 내린다. 이것을 우린 신유박해라 한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이 흑산도와 강진으로 길고 긴 유배를 떠나게 된다.
1931년 5월에 제 4대 수원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신 심응영(뽈리데시레다도)신부님은 1884년에 불란서 남부지방 비비에 교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1907년 한국에 입국하시어 서산 등 여러 곳에서 사목하시다 1931년 5월 수원성당에 부임하시게 되셨습니다. 당시 본당교우는 고작 70여명이었습니다.
수원성당에서 무려 18년동안 재직하신 뽈리 신부님은 수원화성이 수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처형당하여 순교자들의 피가 물든 거룩한 땅이며, 처절한 박해의 영향으로 전교사업이 너무나 어려운 것을 아셨습니다. 수원화성에 우후죽순처럼 밀집되어 있는 무당집, 만신 집, 도사 집, 보살 집 등 각종 우상숭배와 미신행위가 성업을 이루고 그와 더불어 기생집 등 유흥업소가 성행하고 있는 수원화성에 주님의 복음이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셨습니다.
심뽈리 신부님은 전교사업의 전위대인 명도 회를 설립하시는 한편, 수원 성당 가를 직접 작사 작곡하시고 첫 주님 사업으로 성 미카엘 대 천사를 주보로 거룩한 수원순교를 기념하고 미신타파를 위한 기념성당으로 수원성전건립사업에 착수하셨습니다.
심신부님은 충청 아산 공세리 성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면서 성당을 신축한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드비즈 신부에게 설계, 감리를
맡겨 성전공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자신이 근검 절약하여 모은 돈과 파리외방전교회 지원금 외에도 프랑스 고향에 계신 홀어머니께서 삯바느질 품삯을 보내주신 돈으로 공사를 시행하였습니다. 본당 설립 9년만인 1932년 완공되어 그해 11월13일 서울 원형근 라리보 보좌주교 집전으로 축성되었습니다.
75평규모의 연와조 건물로 수원최초 고딕식 성당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면서 심하게 파손되어
수 차례 보수를 거듭하였지만 안전성에 문제가 있어 1978년3월 김남수 주교의 고별미사를 끝으로 헐리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건축 구조물들은 추후 신축 시 참고하기 위하여 현재 수원성지 화단 곳곳에 묻어 두었습니다.
헐린 수원성당, 복원할 계획임.
제 8대 조선교구장 뮈텔주교가 자신이 교구장으로 임명된 소식을 들은 1890년 8월 4일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933년 1월 14일까지 거의 매일같이 쓴 치명일기에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치명일기 가운데 병인박해때 수원순교자 78위 명단이 기록되어 있고 수원성지에서는 그 중 8분의 순교자를 선발하여 2008년 1월에 수원교구장 주교를 거쳐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 복자후보로 추천하였다. 수원 8위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1. 원방지거
원방지거( ? -1871.3.25)는 수원성지의 대표 순교자라 할 수 있다. 내포출신으로 이미 오래전에 치명한 원베드로의 손자요, 원바울로의 셋째 아들이다. 원방지거는 특히 눈먼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고 첨례일을 교우들에게 밝혀주는 등 모범의 생활로 교우들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천주십계와 칠죄종, 성교사규, 조만과, 사본요리 등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며 삼구(三仇:영혼의 세 가지 원수로서의 마귀와 세속과 육신.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존재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석.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세가지 걸림돌)와 영신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독려했다. 병인년에 체포되었지만 가산만 몰수당하고 석방되었는데 그로부터 5년후 신미년(1871년)에 체포되어서는 한사코 피신을 하지 않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는 고문과 고통 속에게도 신앙을 증거하였다. 수원옥 형옥에 투옥이 되었는데 함께 갇힌 배교하여 밀고한 한 모라는 자를 오히려 극진히 사랑하고 자식에게 그를 원수로 삼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밀고자들과 박해자들을 오히려 주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은인이라고 고맙게 여겼다. 먹을 것이 혹시라도 생기면 매번 한 모라고하는 밀고자를 비롯한 형옥의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교리를 가르쳐 옥중에서 두 교우가 통회하고 열심한 신자가 되기도 하였다.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1871년 신미년 3월 25일에 수원화성 토포청에서 미루나무에 교수형으로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2. 박의서 사바스
8위 순교자 중에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말구), 박익서는 3형제이다.
박의서(사바스 1808-1867.8.8)는 수원유수부 가사면 걸매리 출신으로서 병인박해 때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걸매 교우촌의 전교회장을 지냈다.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고 마을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신 분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집안의 대를 이을 맏이로서 종가집안을 이어가야 했으므로 일시에 배교의 유혹이 들었지만, 3형제 중의 막내 박익서의 순교원의를 듣고는 마음을 돌이켜 함께 순교하자고 다짐하며 삼형제가 수원화성에 와서 함께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걸매 교우촌은 당시 수원유수부 내의 수원고을 안에서 단일 교우촌으로는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으로 20여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현재 걸매리는 대전교구에 속한다. 옛날에는 수원유수부 가사면 걸매리였는데, 현재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이다.
3. 박원서 마르코
박원서(마르코 1817- 1867.8.8)는 3형제 중 둘째이다. 형 박의서(사바스)와 동생 박익서 사이에서 3헝제가 변치않는 형제애로 의롭게 지낼 수 있는 가교의 역할하였다. 특히 박원서(마르코)는 착실한 수계생활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신 분으로 알려져 있고, 수원화성으로 끌려갈 때 형, 동생과함께 순교할 것을 다짐하고 서로 격려를 해 줌으로써 삼형제가 배교없이 영광스러이 순교할 수 있었다. 삼형제 가족의 깊은 우애는 참으로 모범적이었고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없이 깨끗하게 주님을 증거하였다. 또한 박원서(마르코)의 처인 박마리아도 함께 수원화성으로 체포되어 1867년 8월 8일 모두 함께 순교하였다.
4. 박익서
박익서(1823-1867.8.8) 3형제 중 막내. 천성이 곱고 순결하였지만, 평소 신앙생활은 순탄치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큰형 박의서(사바스) 작은형 박원서(마르코)와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후에는 그동안의 모든 자신의 잘못을 상등통회하고 순교의 원의를 고백하여 형들의 순교의지를 북돋아주었다. 그리하여 3형제가 함께 수원화성에서 배교없이 용감히 순교하였다. 박익서는 세례를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큰 형이 잠시 맏이로서 갈등을 느꼈을 때 굳은 순교의 원의를 보여주어 맏형 박의서(사바스)가 막내동생의 그런 흔들림없는 모습을 보고 함께 순교를 결심하도록 깊은 영향을 주었다.
3형제의 시신은 그 당질 웅진(바오로)씨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5.김사범
김사범( ? -1866) 은 청주출생으로 수원 방아새골의 전교회장직을 맡았고 다블뤼 안주교님을 도와 3년동안 복사활동을 통해 봉사하였다.
특히 여러해동안 병고에 시달린 부친을 극진히 섬겼는데 외인들까지도 “효자 하면 김사범이지”라고 말할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부모사후, 동생이 진 빚을 아무 조건없이 대신 갚아주고 형제간의 화목에 좋은 모범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66년 병인년에 처음 체포되었을 때에는 1차 배교하여 풀려났지만 이내 천주신앙을 준행하였고 다시 체포되었을 때는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형옥에 갇혀 교우들을 권면하다가 태장 수백도를 맞아 장살형으로 용감히 순교하였다.
6.박말구
박말구(1836-1868)는 당시 수원유수부 관할에 있던 충청도 홍주 원머리 출신이다. 홍주는 구한말 홍주성 전투에서 의병대장 민종식을 중심으로 당시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항거해 1906년 홍주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장렬히 산화한 곳이다. 박말구(마르코) 모친은 천주를 굳게 믿었지만, 부친은 천주학은 절대 안된다고 엄하게 꾸짖었고, 금지령을 내렸지만, 모친을 따라 끝까지 신앙생활에 충실하였으며 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이곳 수원화성으로 압송되었다. 박말구가 잡혀올 때 슬퍼하는 부모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치명원의를 발하였다. 수원화성 토포청에 갇힌 사촌형제의 나약함을 깨우쳐 주었고 토포청의 미루나무에 매달려 교수형으로 순교영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7.윤자호 바오로
윤자호(바오로, 1809-1868.7.18)는 충청도 강경, 충주 계롱산, 공주 유기 지역 출신이다. 파평윤씨 후손으로써 노성 땅에서 생장하여 강경, 충주 등을 거쳐 공주 유기의 전교회장이 되었다. 윤바오로는 외간 여성의 유혹을 물리쳐 부부간의 정결의 덕을 잘 지켰다고 전해진다. 다블뤼 주교님을 도와드리며 전교회장직을 맡아 열성을 다했으며, 명강의로 한양과 지방에 두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가난하게 사는 중에서도 설교를 들으려 찾아온 교우들에게 대추를 사서 대접을 했고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애긍전(전교기금)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자신을 약탈하려는 도적들을 용서하고 잡으러 온 포졸들로부터 구출하여 주어 감동시켰다고 하는데, 포장과 포졸들로부터도 그의 인품을 인정받을만큼 성덕이 깊으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수원 형옥에 수감되어서는 함께 갇힌 교우들을 입교권면하고 자신의 의매인 김마리아가 구해다준 밥을 자신이 먹지 않고 동료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삿자리를 구해다가 자신은 맨바닥에 앉고 동료에게 앉히는 등 자선을 베풀다가 토포청 미루나무에 교수형으로 치명한 것을 보인다.
8.지다두 다테오
지다두(1819-1869.5.23) 수원 양간 용수말 태생으로 수원 서남 안중공소 인광리의 만석군의 사위로 재산을 관리하였다. 넉넉한 생활을 하였지만 세상재물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주님을 증거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 1866년에 체포되었는데 그 때는 ‘나는 하느님을 모르오’라고 하며 풀려났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순교를 다짐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뒤인 1869년에 ‘피신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진위감옥에 수감되었고 아들에게 자신을 따라 위주 치명할 것은 준비하라고 당부하였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였다. 수원화성으로 이송되어 장안문밖 장터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두둘겨 맞아 장살형으로 순교하였다.
성지측에서 제공해 주신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는 야고바 트레커들~~~
뽈리 기념관의 전시물 관람한 후
수원성당 복원터 가림막 앞에서 단체사진을~~~
성 최경환, 성 김대건 신부님 유해를 친구하고 있는 야고바 트레커들~~
그리고 제대 앞에서 기념사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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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과 방화수류정 용지에서 봄빛과 함께 사진을~~
방화수류정 서쪽 벽면에 설치된 십자가 앞에서~~ 석영가루가 혼제된 석회석 조형물은 해질녁에 빛이 난다. 다산의 신암심이 묻어나는 건축기법이다. 그리고 서양문물에 힘입어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돌과 벽돌을 혼합하여 축성한 것이 바로 화성이다.
역사란 반복된다 하였다. 개혁없이는 발전을 모색하거나 그 방향을 나갈 수 없음을 우리가 살아 온 발자취를 통하여도 확인할 수 있다. 금융대란이 대표적인 일이다. 고인물이 썩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과 행위도 의식이 정체되어 있다면 타성이란 성격이 모든 것을 병들게 한다. 우리들의 종교적 삶 속에서도 타성에 물든 습관적 관습만으로는 복음적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 숙명처럼 다가오고 쌓이는 많은 삶의 찌꺼기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순환의 숨통을 터 주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회개의 시간을 자주 갖는 방법이다. 회개를 통하여 용서를 청한 후 보속을 통하여 양심의 자유로운 상태에서 새신앙적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마침 우리의 믿음 안에 있는 전례력에 그 길을 모색해 주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길고 긴 잿빛 동토의 시간이 지나고 새생명이 싹트는 시기에 있는 40일간의 고행의 시간과 곧이어 맞이 할 수 있는 부활의 의미,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 주신 은총이며
축복인 것이다. 긴장되고 숨막히는 처절한 암투와 왕명이란 이유로 피를 뿌려야 했던 역사속에서 아들의 효심으로 축성되었다는
화성! 우리들은 걸으며 그 속에서 다산을 통한 천주께서 우리들에게 내려 주신 은총과 축복을 성곽 곳곳에 있는 건축물과 성곽의 아름다운 둘레를 통하여 깨닫고 싶어 이곳을 3월에 찾은 것이다. 우린 늘 회개의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으며 기도를 통하여 새로운 영성의 길로 나서야 한다. 자유롭고 열혈하고 단순하게 프란치스코처럼 겸손과 가난의 의지를 놓지 말고 걷고 걸어 하늘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신앙의 역사, 발자취를 따라 걷는 평화의 길! 그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평화의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하기 때문이다. 우린 언제나 시작처럼 그 마음으로 그 길을 신앙심을 재촉하며 끝없이 걸어 갈 것이다. 주님 항상 우라를 평화의 길에 머물게 하소서~~~ 아멘. 야고바 트레커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