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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조선 민중들. 19세기말, 20세기초.
고전에는 피지배자들의 이야기도 다수 다룬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임진왜란때도 이름없는 영웅들이 목숨을 바쳐 적을 맞아 싸웠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내로라하는 장수들도 겁을 먹고 도주했지만 이들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 던졌다.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에 따르면, 김제군수 정담과 해남현감 변응정은 전주로 밀려오는 왜군을 맞아 웅치고개에서 결사항전했다.
무기가 떨어지자 이들은 온몸으로 싸웠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정담과 변응정, 그리고 많은 조선군 병사들이 몰살했다. 그들의 용맹함은 적도 감동시켰다. 왜장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두 한데 모아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를 세워 주었다.
승장 곽진경도 왜적에 맞서 '의엄'이라는 법명으로 큰 공을 세웠다. 조선시대 승려는 천대 받았지만 임금은 그를 아꼈다. 인조는 일개 승려였던 그에게 시까지 지어주면서 곁에 두려고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가 쓴 <앙엽기>는
"의병장 곽진경은 본시 중이었다가 환속한 사람이다. 인조대왕이 도총섭(북한산성을 지키는 승군 우두머리) 의엄에게 내린 시에 '제발 충의를 다하여 임금을 돕고, 안개 낀 산속에만 있지 마오' 하였다"고 썼다. 의엄은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이르렀다.
조선 전기의 어진은 조선 중기 때부터 일찌감치 전란과 잦은 화재로 사라져 버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국보 제317호)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이 또한 개국시조의 어진을 지키려는 여러 사람들의 각고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임하필기>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주 경기전에 봉안돼 있던 태조어진을 경기전 하인이 접어 품속에 간직해 옮겼다. 이유원은 태조어진을 보면서 그 접은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달려드는 호랑이를 죽여 임금을 구했면 상을 받을까, 처벌을 받을까. 조선 말기 문신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 의하면, 태종 때 대궐 안에 호랑이가 침범해 임금을 덮칠 뻔했다. 호위무사 김덕생이 100보 밖에서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호랑이를 즉사시켰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좌명공신 3등을 하사했다. 그런데 이튿날 조정의 여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간들이 임금을 향해 활을 쏜 것이라며 죄를 물어야 한다고 소동을 피웠다.
김덕생은 "솜씨가 완벽해 감히 활을 쏜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호랑이 그림에 백 발의 화살을 쏘아 모두 명중시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벌을 받고 만다. 세월이 많이 흘러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김덕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했다.
사진3. 전(傳) 박동량 작 화집 중 <말 길들이는 마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박동량이 쓴 <기재잡기>는 황해도 도적 임꺽정 사건을 상세히 서술한다. 책은 "임꺽정이 잔인해 항거하는 사람의 살을 발라내고 사지를 찢어 죽였으며 죽은 양민이 한도 없다"고 소개한다.
고전에서는 '의적' 임꺽정의 다른 면모도 소개한다. 임꺽정 일화는 벽초 홍명희의 소설로 잘 알려졌지만 선조 때 문신 박동량(1569~1635)이 쓴 <기재잡기>에서 상세히 다뤄진다. 소설 덕분에 '의적' 이미지가 고착화됐지만 <기재잡기>는 민가에 피해를 주고 백성을 잔인하게 죽였다고 고발한다.
박동량은 황해도 봉산군의 군수로 재직했던 백부 박응천에게서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했던 임꺽정에 대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꺽정은 의적이미지와는 달리 협조하지 않는 백성들은 잔혹무도하게 살해했다. 다음은 <기재잡기>의 내용이다.
"강포한 도적 임꺽정은 양주 백정으로서 성격이 교활한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웠다. 그의 도당도 모두 지극히 날래고 민첩했다. 민가를 불사르고 마소를 닥치는 대로 약탈했으며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살을 발라내고 사지를 찢어 죽여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임꺽정은 신출귀몰했다. <기재잡기>는 "경기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그와 비밀리에 결탁해 관에서 잡으려고 하면 벌써 내통해 도망쳤다. 이 때문에 거리낌 없이 날뛰었으나 관에서 금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홍명희 소설에는 임꺽정의 모사 서림이 임꺽정의 처를 구하려다가 관군에 붙잡혀 임꺽정을 토벌하는 데 참여하는 것으로 기술된다. <기재잡기>는 서림이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스스로 투항했다고 소개한다.
"토포사 남치근이 수많은 군마를 모아 점점 산 밑으로 좁혀 들어가 한 놈의 도적도 감히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니 서림이 결국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하였다. 서림은 도적들의 허한 데와 실한 데의 상황을 모두 말해 주었다."
결국 관군에게 쫓기다가 빗발치는 화살을 맞고 쓰러진 임꺽정은 죽어가면서 "서림아, 서림아 끝내 투항할 수가 있느냐"고 원통해 했다.
<기재잡기>는 "도적들이 활동한 3년 동안에 다섯 고을이 피폐 해지고 관군이 패하여 흩어졌다. 여러 도의 병력을 동원하여 겨우 한 명의 도적을 잡았다. 죽은 양민은 한이 없었으니 당시 군정의 해이함이 참으로 개탄스러울 따름이다"라고 했다. -계속-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24.백성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의적 임꺽정 [조선의 아웃사이더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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