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9일 신라 왕릉 정리
선덕여왕릉 (신라27대, 632 ~ 647)
위치 : 경주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산)의 남쪽 산등성이 중턱
크기 : 둘레 73m, 높이 6.5m, 지름 23m
능의 아래부분에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2 ~ 3 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 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芬皇寺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또한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을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에는 "내가 아무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 지내도록 하라" 하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 날에 이르니 왕이 정말로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를 지냈다. 30녀년이 지난 문무왕 19년(679)에 왕의 무덤아래 四天王寺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四天王天 위에 忉利天이 있다고 하므로 그 제야 선덕여왕의 신명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라고 한다.
四天王寺址
낭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천왕사는 삼국통일을 한 신라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사찰로 문무왕 19년 (679)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발원하여 세웠다.
태종무열왕릉 정문
태종무열왕릉 (太宗武烈王陵 29대, 654 ~ 661)
위치 : 경주 서쪽 선도산(仙棹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 끝에 위치한다.
크기 : 둘레 112m, 높이 8.5m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과 머릿돌이 자리하고 있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썼다는 太宗武烈王之碑라고 글씨기 돋을 새김되어 있다.
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로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진골(眞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당과 연합하여 660년 백제를 아울렀으나 삼국통일은 완수하지 못하고 이듬애에 세상을 따났다. 諡號는 武烈이며, 신라왕중에서는 유일하게 太宗이라는 廟號를 받았다.
태종무열왕릉비
비의 몸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받침종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았다.
태종무열왕 귀부(국보제25호) 이 사진은 내려받은 것이다.
서악동 고분군
선도산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능선에 위치하며 모두 4기의 봉분이 있다.
높이 12 ~ 8m, 둘레 146 ~ 188m 정도로 비교적 큰 편으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추정된다. 무열왕릉의 뒤편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 무열왕의 직계 조상이 모셔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인문 墓
무열왕릉 앞 동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크기 : 둘레 85m, 지금 27m, 높이 7m
김인문(629 ~ 694)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동생으로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당나라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사후에 신라에서 태대각간이라는 관직을 추증하여 서라벌의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근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 모양의 받침돌이 있다.
서악동 귀부(龜趺) 김인문의 비석 받침돌
김양(金陽 808 ~ 857) 墓
김인문 묘와 나란히 위치한다. 김춘추의 9世孫으로 사후에 대각간을 추증하고 무열왕릉 곁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무왕릉(제30대, 재위 : 661 ~ 681),
고구려를 통합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였다. 특이하게 해상 무덤으로 되어 있으며, 이바위는 동서남북 +자로 물이 나들며 중앙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물에 잠겨 있는데 이 곳에 유골이 안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신문왕릉 입구
신문왕릉 (31대, 681 ~ 692)
위치 : 경주 동남쪽 狼山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크기 : 둘레 92m, 지름 30m, 높이 8m
봉분의 아래쪽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아 護石을 구성하였으며, 그 위에 甲石을 얹었다. 호석 주변으로 사다리꼴로 다듬은 44개의 받침석을 받쳐 놓았으며, 봉분의 동쪽에는 크고 긴 床石을 두었다.
문무왕의 맏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으며 국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한 녹읍을 폐지하여 관료전을 지급하고 지방 통치를 위하여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전제 왕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효소왕릉 (32대, 692 ~ 702)
토함산 서쪽에 있는 형제봉의 동남쪽 구릉 끝자락에 있다.
크기 : 둘레 67m, 지름 20m, 높이 4.5m
봉분 둘레에 護石이 있었으나 지금은 몇개만 드러나 있다.
재위 기간 중 지장에 대한 일을 맡아 보는 관아인 西市典과 南市典을 두어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 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 등 국력을 키우는데 힘썼다.
성덕왕릉(33대, 702 ~ 737)
토함산 서쪽에 있는 형제봉의 동남쪽 구릉 끝자락에 있다. 서쪽에 효소왕릉이 있다.
크기 : 둘레 46m, 지름 14.5m, 높이 4.5m
연석 사이에는 기둥 역활을 하는 탱석(撑石)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을 받쳐 놓았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는 네모난 돌위에 감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十二支神像이 입체로 배치되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머리 부분은 모두 잘려있으며 앞쪽에는 床石이 배치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와 武人石 등이 있고 조금 떨어진 앞쪽에 비석을 세웠던 귀부(龜趺)가 남아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었으며,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과의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성덕왕릉 귀부(龜趺)
원성왕릉(38대)
경주에서 울산 방향으로 약 12km 위치에 있으며 일명 掛陵이라고 한다.
크기 : 둘레 69m, 지름 22m, 높이 7.4m
능의 둘레에 있는 護石에는 12支神像이 돋을 새김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문인석, 무인석과 돌사자상이 좌우에 마주 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의 모습이다. 신라의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원래 이 곳에는 곡사(鵠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현재의 송복사터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만들었다. 별칭으로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때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 묻었다는 민간 시앙이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인다.
원성왕은 讀書三品科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壁骨堤)를 고치기도 하였다.
첫댓글 조카님 참 멋지십니다.
좋은 곳 관광하여 많은 것을 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