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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08. [역경의 열매] 정의승 (1-18) 20년간 농어촌교회 목회자들 돌봐온 까닭은?
지금 나는 농어촌 교회에서 목사님을 도와 사역하는 사모님 100여분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 중이다. 지난해 100여명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성지를 다니면서 나는 벅찬 느낌을 가졌다. 우양재단에서는 오래전부터 시골 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사역을 펼쳐왔다. 나는 십수년 동안 이들 목회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성지 순례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성지 순례의 기회를 갖지 못한 목회자와 사모들에게 성지를 밟을 기회를 제공해 드리고 있다.
개인적으론 그동안 여러 차례 성지 순례를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목사님들, 특히 시골교회 목회자들과 함께한 성지 순례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성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목사님들과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갈릴리 호수에서 선상예배를 드렸을 때, 우리는 12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주위를 다니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느꼈다. 그 선상 예배의 경험이 앞으로 그들 목회에서 귀중한 자산이 되리라 믿는다.
농어촌 목회자들을 후원한 지도 올해로 20년이 됐다. 1993년부터 100명의 농어촌 목회자들에게 매달 선교비를 후원하면서부터 농어촌 목회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하늘 아래에서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돈과 일꾼을 주셨다. 나에게 주어진 그 자원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사용할까를 생각했다. 그 생각 자체도 그분이 주신 것이다. 나는 오직 그분의 뜻이 흐르는 ‘통로’ 역할을 했을 뿐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일 뿐이다.
평생 한 번 성지순례 기회를 갖지 못한 목회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난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것이 참으로 보람된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농어촌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담당하면서 묵묵히 목회하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큰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작은 교회’나 ‘시골 교회’란 단어를 접할 때마다 아련한 느낌을 갖는다. 그 단어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노스탤지어가 있다. 나에겐 그 향수가 더 짙게 배어 있다. 그것은 내 평생 삶의 자양분이 된 것이 시골의 작디작은 교회에서 체득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강릉시 학산리 375번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당시 아버님은 삼척(현 태백시)의 장성 광업소 내 한 병원의 스태프로 취업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유년기를 탄광촌인 삼척에서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임지를 옮긴 아버님을 따라 동해시 묵호로 갔다. 거기서 6·25전쟁을 맞았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6·25가 발생하자 할아버지가 나를 태백시 금천리로 옮겼다. 정감록 신봉자셨던 할아버지가 금천리에는 무두귀(無頭鬼·칼로 목이 베어져 머리가 없는 귀신)나 아사귀(餓死鬼·굶어죽은 귀신)가 없다면서 전쟁이 끝날 때가지 나를 거기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6학년 2학기까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렵사리 초등학교는 졸업할 수 있었다.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의승 (1) 20년간 농어촌교회 목회자들 돌봐온 까닭은?
* [역경의 열매] 정의승 (2) 젊은 날의 친구 가난이 가르쳐준 '땀의 神學'
* [역경의 열매] 정의승 (3) 삼척 탄광촌 촌놈, 서울대 생물학과에 합격하다
* [역경의 열매] 정의승 (4) 서울대생, 36대 1 경쟁률 뚫고 해군사관학교로
* [역경의 열매] 정의승 (5) 초등 6년때 교회 첫 출석… ‘변화산 이야기’에 매료
* [역경의 열매] 정의승 (6)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던 북평高 시절의 믿음]
* [역경의 열매] 정의승 (7) 내 인생 나침반은 ‘주님의 부르심’과 ‘그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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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정의승 (14) '하나님·나라·평화 위해' 해양전략연구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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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정의승 (18·끝)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길' 그대로 따르는 것
◇약력 △1939년 강원도 강릉 학산 출생 △강원도 동해시 북평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생물학과 입학 △해군사관학교 17기 △월남전 참전 △1977년 중령으로 전역 △MTU한국지사장 △학산실업주식회사 사장 △유비엠텍 창업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이사장 △우양재단 이사장 △서울 성산동 열림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정의승 (2) 젊은 날의 친구 가난이 가르쳐준 ‘땀의 神學’
태백에서 묵호로 임지를 옮긴 이후 아버님은 몸이 급격히 나빠져 일을 하지 못하셨다. 가장의 건강이 흔들리니 자연스레 가정 살림이 어려워졌다. 이후로 가난은 나의 벗이 되었다. 누님이 생계를 꾸려야 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4년 반 동안 신문 배달을 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평화신문을 한꺼번에 돌렸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장성지국에서 신문을 받아 배달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는 것이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같다. 땀의 의미, 노동의 중요성을 어린나이에 체득했다. 일종의 ‘땀의 신학’을 체험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는 성경 말씀이 삶에 박혔다. 귀한 경험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성적은 좋았다. 그러나 현실은 잿빛이었다. 태백중학교를 졸업한 내가 갈 수 있었던 곳은 태백공업고등학교 뿐이었다. 거기에는 광산과와 전기과 두 개의 과밖에 없었다. 비록 어렸지만 이 같은 환경을 극복하고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형님과 누님이 대학을 가지 못했으니 나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공고에 진학하면 현실적으로 대학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당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는 동해시의 북평고등학교였다. 대학을 꼭 가겠다는 결심에 북평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쳤다. 수석을 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얼마 되지 않은 돈이었지만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 동해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2학년에 올라가자 하루는 당시 상업을 가르치시던 김형준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의승아, 요즘 어떻게 지내니. 하숙하고 있니?” “자취합니다.” “힘들지?” 선생님은 내게 북평 출신으로 당시 자유당 재정위원장을 하던 김진만 의원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라고 권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김 의원의 집에서 두 아들을 가르쳤다. 3학년 1학기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김 의원의 큰아들이 김준기 현 동부그룹 회장이다. 1년 남짓 김 의원 댁 자가용을 타고 등하교를 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던 내가 자가용을 타고 학교를 가게 된 것이었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다. 먹고 사는 일이 공부보다 더 중요했다. 학생들에게 꿈을 던져주는 분들도 적었다. 수업 시간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운동장 풀을 뽑는 등 각종 잡일을 많이 했다. 교과서를 다 끝내고 진학하거나 졸업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의식 있는 선생님 한 분이 학생들에게 제대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학교 측을 설득했다. 서울대 문리대를 갓 졸업한 영어와 수학, 국어 선생님을 모셔와 진학반을 만들었다. 학교 수업과 상관없이 진학반 학생들은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지금은 모두 나았지만 나는 어릴 때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래서 말더듬이가 살아가기 쉬운 직업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의사가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점차 자신감이 생겨 시험을 치기만 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 3때 담임 선생님은 내게 서울대 의대가 아닌 다른 과를 지원하라고 권유했다. 그때까지 북평고에서는 서울대에 1명도 진학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1호 서울대 입학생’을 만들고 싶었으나 내 성적이 ‘의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합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하며 고집을 부려 서울대 의대 원서를 냈다. 2지망은 생물학과였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3) 삼척 탄광촌 촌놈, 서울대 생물학과에 합격하다
당시 진학반 학생 중 8명이 서울대에 도전했다.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갈 때 영주에서 중앙선 열차를 탔다. 내가 살던 탄광촌에서 늘 보던 열차는 석탄을 실은 여러 칸의 화차 뒤에 한 개의 객차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영주에서 본 열차들은 화차는 없고 객차만 있었다. ‘세상에 이런 기차도 있나’라는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깊숙한 촌에서 나는 자랐던 것이다. 서울에 도착해 효창동의 친척 집에 머물며 서울대 시험을 쳤다.
당시 서울대 의대는 동숭동에 있었다. 일본시대의 구식 건물 그대로였다.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밴드의 연주 소리가 울리면서 10여대의 버스가 동숭동 캠퍼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울고와 경복고 등 당시 명문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시험을 치러 온 것이었다. 이들은 밴드의 연주에 맞춰 함께 교가를 부르면서 보무당당하게 캠퍼스에 들어왔다. 나는 그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됐다. 새삼 내가 ‘촌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시간에 수학 시험을 쳤다. 마치고 구내식당에서 자장면을 먹으면서 뭔가 내 생각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가졌다. 호기 있게 시험을 치러 왔지만 생각만큼 잘 보지는 못했다.
결국 의예과는 떨어졌다. 대신 2지망인 생물학과는 합격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해 수험생 성적이 아주 높아서 생물학과에 들어온 30명 가운데 29명이 의예과에 불합격돼서 온 학생들이었다. 생물학과에 들어온 학생들도 나름대로는 각 학교에서 수석을 한 수재들이었다.
나는 결과에 실망했지만 ‘일단 생물학과에 간 뒤 의예과로 전과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 영어수업을 받는데 학생들의 실력이 대단했다.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영어 교과서를 소설처럼 읽어냈다. 독일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떻게 생물학과에 붙을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소지자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 의대로 전과하기란 결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당국에서도 너무 많은 학생들이 의대 전과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예 전과는 어렵다는 발표를 했다. 학교 당국의 발표에 생물학과 학생 몇 명은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재수를 결심하기도 했다.
나는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에 재수도 쉽게 결심할 수 없었다. 당시 김진만 의원의 서울 집이 인사동에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들어가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김 의원 부인이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셨다. 모교에서는 내가 서울대에 처음 들어갔다면서 아주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서울대 생물학과를 마치면 대개 고등학교 교사로 갔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더 큰 꿈이 있었다. 한번 이 세상에서 나의 능력을 확 펼쳐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사관학교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에는 돈 없는 학생이 공부하기 가장 좋은 곳이 사관학교였다. 그만큼 인기가 높아 경쟁이 심했다. 나는 왠지 해군에 가고 싶었다. 강원도 묵호에서 살 때 늘 바다를 보며 갈매기 그림을 그렸었다. 그래서 해양과 배는 친숙하게 다가왔다.
지금 인생을 되돌아보니 내 스스로 인생길을 개척한 것 같았지만 모든 길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가끔 ‘내가 서울대에 계속 다녔으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해본다. 인생길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분명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여겨질지라도.
***[역경의 열매] 정의승 (4) 서울대생, 36대 1 경쟁률 뚫고 해군사관학교로
지난 인생길에서 하나님은 늘 나를 세미하게 인도해주셨다.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 즉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셨다. 해사 시험을 칠 때에도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느꼈다. 당시 나는 서울대 시험을 칠 때와 마찬가지로 효창동 친척집에 머물렀다. 시험은 경쟁률이 36대 1에 이를 정도로 치열했지만 합격했다.
해사에 들어가기 위해선 신체검사에 통과해야 했다. 청량리의 해군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청파동에서 답십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내 옆 좌석에 마침 해군대위가 앉아 있었다. ‘시골 촌놈’이었던 내가 서울 생활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차에서 내릴 곳을 정확히 찾는 것이었다. 버스 차장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한 두 정거장 지나치기 일쑤였다.
나는 옆의 해군 대위에게 “저, 청량리의 해군병원에 가는데 혹 내리는 곳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부탁했다. 당시 나는 서울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 대위가 나에게 물었다. “서울대생이 왜 해군병원에 가지요?” “해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신체검사를 하러 갑니다.” 이후 그분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서울대가 더 좋은데 왜 굳이 해사를 가려 하나요?” “사실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의예과에 떨어지고 생물학과에 붙었습니다. 그래서 사관학교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거기서 제 꿈을 펼쳐 보이고 싶습니다.”
그분은 나를 기특하게 보셨고 이후 20∼30분간 더 이야기했다. 자신도 해군병원에 간다면서 함께 내리면 된다고 했다. 청량리 해군병원 정거장에서 내린 이후 헤어졌다. 그해 해사는 응시자가 너무 많아서 일단 신체검사에서 가능한 한 많은 지원자를 떨어뜨리는 정책을 썼다. 신체검사 당일에 함께 해사 시험을 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시력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검사에서 시력 저하로 바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내가 보기에 시력이 멀쩡했던 그 친구가 불합격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인생이 저렇게 결정될 수도 있구나’라면서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시력 검사에는 합격이 됐다. 문제는 피부 검사할 때 나타났다. 내 등에 몇 개의 여드름이 났던 모양이었다. 의무중사가 “피부염은 전염성이 있으니 불합격”이라고 말했다. 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그저 단순한 여드름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 중사는 피부염이라면서 “이제 가보라”고 했다. 그때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까 버스에서 만난 해군 대위였다. 그 대위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어, 학생이 여기 있네…”라고 활짝 웃었다. 그 대위는 청량리 해군병원 피부과 과장이었다. 그는 내 등을 보더니 “이거, 전형적인 여드름이네. 건강의 상징이야”라고 웃으면서 의무중사에게 “아무런 전염성이 없다”고 말했다. 의무중사는 합격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검사 대기자들이 너무나 많아 그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나와야 했다. 이후 평생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 대위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그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다시 서울대로 돌아와 생물학과를 졸업했을 터이고,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은퇴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내게 “도대체 어떤 ‘물주’가 있기에 그렇게 탄탄대로를 달려왔습니까?”라고 묻는다.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물주가 있긴 있습니다. 아주 신실하고 정확한 물주지요. 바로 ‘조물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신 분이셨다. 나는 1959년에 해사 17기로 입교했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5) 초등 6년때 교회 첫 출석… ‘변화산 이야기’에 매료
누가 내게 “가장 신나는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는다면 “하나님 이야기 할 때”라고 답하고 싶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우리 집안은 영일 정가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예다. 주자가 유가의 예법의장(禮法儀章)에 관해 상술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신봉했다. 고향인 강릉 학산에서는 10여년 전까지도 상투 튼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집안 모두가 제사를 드리는 데 목숨을 걸었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다. 당연히 교회는 배척했다.
교회와는 한번도 접촉하지 못한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에 한번 가보았다. 장성의 언덕배기에 있던 장성장로교회였다. 북한에서 월남한 같은 반 친구 오창학이 교회에 가보자고 권했다. 창학이는 이후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되었다. 영락교회 수석 부목사로 지내다 신촌장로교회에서 20년간 목회한 뒤 은퇴했다. 우리 우양재단에서는 매주 월요일 오전 8시30분 한 주를 시작하는 예배를 드린다. 그 예배를 오창학 목사가 인도하고 있다.
처음 교회에 가니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주일학교 선생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 선생님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변화산 이야기를 해주셨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산에 가서 엘리야와 모세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이야기가 참 재미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변화산 이야기를 해준 분은 내가 초등학교 마치고 진학한 태백중학교 교장선생님의 아드님인 김영수 선생님이셨다. 교장선생님 댁은 아주 개화된 집안으로 김 선생님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도중 한국에 돌아와 잠시 있는 동안 주일학교 교사를 하신 것이었다. 이후 교회에 가지는 않았다. 어린나이였지만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하면서 땔감도 마련했다. 집안 가계의 3분의 1은 담당했다. 새벽 4시면 일어나서 갈탄을 가져왔다. 신문 배달을 하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해왔다. 그리고 학교에 가다 보니 교회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성과 신문사 지국이 있던 금천과는 4㎞ 정도 떨어져 있다. 당시 밤길이 험해 호랑이가 나온다는 소문까지 돌던 구역이었다. 매일 그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신문을 배달했다. 신문 배달할 때 몇 가정에서 아주머니들이 나를 대견하게도, 딱하게도 보면서 앙금 떡과 따뜻한 국을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동정 받는다는 생각에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사랑으로 생각하며 감사히 받아먹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라서 지국에서는 배달료를 주지 못해 대신 신문을 50여부 주면서 팔아 쓰라고 하기도 했다.
아무튼 곤고한 나날이었지만 나름대로 낭만이 있었다. 당시에는 내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비슷하게 일하면서 공부했다. 지금 학생들을 보면 정말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요즘 학생들에게 ‘고생의 철학’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말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크는 것 같다. 고생을 모르면 인생을 알 수 없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는 말은 어느 시대에도 통용되는 진리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한다”는 말이 있다. 고생하지 않으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그 철학적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성경 속 인물 가운데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믿음의 선배들은 대부분 고난이라는 광야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는 욥의 고백과 같이 고난을 통한 단련이야말로 정금과 같은 인생이 되는 비결이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6)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던 북평高 시절의 믿음]
김영수 선생님은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만났다. 태백중학교에서 영어 특별교육반을 만들었는데 김 선생님이 방학 때면 오셔서 두 달 동안 지도를 해 주셨다. 선생님에게 영어를 착실하게 배웠다. 되돌아보니 내 인생에서 중요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영어 실력이었다. 영어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김 선생님은 IT 전문가가 되었고 미주 삼성의 사장으로도 재직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정말 앞을 내다보는 분이셨다. 유선 전화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그 시절 김 선생님은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있는 동안 손목시계와 같이 손목전화기가 나와 그 전화기를 보면서 전 세계 사람들과 얼굴을 보며 통화할 수 있는 놀라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의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 능력이 있지 않았는가 싶다.
중학교 때 교회에 나가지 못했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크리스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다. 당시 북평고등학교에서는 ‘하이(Hi) 와이(YMCA)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지도자 없이 학생들끼리 모여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읽는 모임에 인도를 받았다. 사실상 북평고등학교에 ‘유학’을 간 것 같았던 내게 토박이들의 텃세가 심했다. 더구나 내가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해 시샘을 더욱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심성이 고운 학생들이 감싸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생들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내게 다가왔다.
과거에 세상은 크리스천들을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들이 교회는 나가지 않더라도 자식들은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선한 크리스천’의 이미지는 많이 퇴색된 것 같다. 과거에는 교회가 사회를 인도하는 향도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그 선하신 분을 따르는 크리스천들은 선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변할 수 없다. 이제라도 교회는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선함을 전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은 다시 바뀔 것이다.
크리스천 학생들은 계속 친절하게 대해줬다. 그 친구들과 함께 ‘하이 와이운동’을 펼쳤다. 밴드부 활동도 함께 했다. 당시에 혼자 자취했던 나는 무척 외로웠다. 사람이 그리웠다. 그래서 ‘선한 친구들’이 다니는 북평고등학교 옆의 송정감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동해안 바닷가의 작은 시골 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도 열심히 했다. 당시에 나는 피아노를 곧잘 쳤다. 교회에서 피아노를 즐겨 치면서 점차 교회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교회가 아니라 성가대에 다녔다”고 할 정도로 성가대 활동에 심취했다. 믿음의 본질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타고난 성실함을 바탕으로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갔다. 예배당에 나가 열심히 성가대 활동을 했을 뿐이지만 점차 신앙이 자라갔다. 마치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어느 날 보니 내가 정말 크리스천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서울대 다니다 해군사관학교 시험 준비를 하러 장성에 갔을 때 장성감리교회에서 조그만 성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해사 시험 보기 전 1주일간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목사님이 교회 강단 옆에 아예 내 자리를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주일학교의 추억은 평생 간다. 그 추억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변치 않는 크리스천으로 남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7) 내 인생 나침반은 ‘주님의 부르심’과 ‘그 응답’
나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의 응답’이라고 본다. 우리는 결코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새들백교회 릭 워런 목사님이 ‘목적이 이끄는 삶’에 쓴 것과 같이 우리는 모두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나 역시 그저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의승’이란 당신의 자녀를 통해서 반드시 이뤄야 할 일이 있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나를 동참시키기 위해서 지금, 이 시대에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을 확실히 믿는다. 인생은 부르심에 따라 오며, 부르심에 따라 살며, 내 손에 쥔 것을 갖고 그 부르심을 이루는 것이다. 손에 쥔 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크건, 작건, 부르심에 맞는 삶을 살면 된다. 가장 비극적인 인생은 그 부르심을 인식하지 못하고, 한번도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인생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한 우양재단의 모토와 같은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3년간 따랐던 예수님이 허망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허탈해 하는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버리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 제자들의 마음을 치유시켰다. 다시 갈릴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회복이 일어났다.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지난 시절 ‘정의승’이라는 한 인간을 통로 삼아 행해진 일은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돈이 생겨도 나는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가능하면 단순하고 검소하게 살려 노력했다. 사치를 경계했다. 비행기를 탈 때에도 가능한 한 등급이 낮은 좌석을 이용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그분이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맞게 사용하려 했다. 주님은 베드로뿐 아니라 나에게도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그 일을 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부르심이다.
주님 앞에서 인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프로이드가 말한 대로 진정한 자아(트루 에고·True Ego)와 겉으로 비친 자아(슈퍼 에고·Super Ego)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세상이 알아주는 나와 진실된 나 사이의 간극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 비쳐지고 각색된 ‘멋진 나’가 아니라 발가벗겨진 ‘진정한 나’로서 하나님 앞에 선다. 그 주님 앞에서 모든 인생들은 겸손해야 한다. 이 ‘역경의 열매’도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만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가졌던 믿음 때문이었다. 순수했던 그 시절에 간직한 믿음이 평생 가는 것을 느낀다. 고등학교 시절 김진만 의원 집의 입주 가정교사로 있던 나는 고3 때에 그 집에서 나와 북평고등학교 근처의 감리교 목사님 댁에서 졸업 때까지 머물렀다. 성도 수 100여명의 조그만 교회였다. 함께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목사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매일 새벽 기도시간에 교회 종을 울렸다. 자주 교회 오르간을 치기도 했다. 지금도 믿음생활에 타성이 생기면 새벽에 교회 종을 치던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셨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부르심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그저 살기 위해 살지 말고 사명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8) 월남전 참전의 교훈 “생명의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나는 최선을 다해 훈련을 받았다. 교회에서 콩나물 자라듯 크리스천이 돼 갔듯이 점차 군인이 돼 갔다. 4년간의 사관학교 시절은 고됐지만 보람이 있었다. 이 땅의 남아로서 조국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는 생각에 피곤한 줄 몰랐다.
그러나 나는 해군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영어를 잘했던 나는 해군에서 주로 미국과의 군사 원조일에 투입됐다. 당시 한국군의 상황은 아주 열악했다. 대부분이 미국 원조에 의해 꾸려졌다. 따라서 한국군에게 미군과의 원조 협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그 일에 집중했다. 당시 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한때 그 일에 종사하게 된 것이 지금생각해도 자랑스럽다. 그러나 그 일 자체가 해군의 주력은 아니었다. 육군의 주류는 보병이고 해군은 항해를 하는 사람들이 주류가 된다. 군인이라면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살아나야 주역이 될 수 있다. 나는 베트남에도 파견됐고, 군에서 보내주는 유학도 다녀왔다. 동기생들이 부러워할 만한 커리어였지만 해군참모총장이 되는 주류 코스를 밟지는 않았다.
1969년 해군 백구부대의 군수장교로 월남(지금의 베트남)에 파견됐다. 백구부대 본부는 사이공에 있었다. 가끔 다낭이나 나트랑 지역으로 출장갔지만 대부분 사이공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이공 탄손루트 공항에 주월 미군사령부가 있었다. 나는 늘 미군과의 협조를 위해 미군사령부에 들락거렸다. 그러나 사이공에 있어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시 월남에는 뚜렷한 전선이 없었다. 일선과 후방의 경계가 모호했다. 후방에서도 베트콩이 자주 출몰했다.
어느 날 아침 식사 후 출근하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총알이 ‘핑’ 하고 바로 옆으로 날아갔다. 나는 도처에서 출몰하는 베트콩들을 보면서 ‘이 전쟁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구나’란 생각을 했다. 연합군은 베트남 대중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미국과 한국, 호주 등 연합군들이 월남 정부를 도왔지만 정작 월남 사람들은 정부를 돕지 않았다. 베트콩이 군중 속에서 총을 쏘면 월남인들은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숨겨줬다. 그래서 베트콩 입장에서 장기적인 게릴라전이 가능했다. 그때 베트콩 지도자였던 호찌민이 탁월한 리더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비록 정부 입장에서는 반군 리더였지만 국민 통합을 이뤘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통합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도자는 대중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된다. 대중의 마음을 얻게 되면 그 힘으로 자신 있게 국정을 추진해 나갈 수 있다.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지도자의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대중들은 진정으로 헌신하는 지도자를 마음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월남에서 나는 생명의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신했다.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이 정말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도처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며칠 전에 함께 이야기 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주검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면 살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떠나야 한다. 그래서 누구도 인생을 자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사는 것이다. 그 보호하심 아래 무사히 월남 근무를 마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은혜였다. 나는 월남에서 1년반 근무했다. 현지 월남한인교회도 정성껏 섬겼다. 월남에서의 시절은 나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절실히 느끼게 해줬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9) 사이공서 만난 미군 대위 “저 철모가 날 두번 살려”
월남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이 존스라는 이름의 미 육군대위였다. 그는 최전방 수색대에서 근무하던 중 미군 정책에 따라 며칠간 사이공에 와서 휴식을 취하다 같은 호텔 룸메이트였던 나와 만났다. 당시 월남전에서 최전방 수색대원들은 그야말로 목숨이 휴지와 같은 처지였다. 언제, 어디서 죽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월남전에서 미군은 ‘R&R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R&R’은 ‘Rest and Relaxation’의 약어로 전방 수색대원들에게 쉼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존스 대위는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이공에 온 것이다.
어느 날 퇴근 후에 사이공의 호텔 방에 들어가니 미군 한 명이 자고 있었다. 존스 대위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존스 대위는 자고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일 째 저녁에 들어가 보니 깨어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배로 미국의 명문 컬럼비아 대학 역사학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나와 이야기하던 도중 존스 대위는 책상 위에 철모를 ‘신주단지 모시듯’ 정성스레 올려놓았다.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며칠 후에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사연이 있었다. “저 철모가 내 생명을 지켜 줬습니다. 두 번이나 총알을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철모가 나를 살려줬습니다. 두 번 다 총알이 철모에 맞았습니다.”
그는 수색대원 중 절반은 죽어서 나온다고 말했다. “정말로 생명은 소모품 정도로밖에 취급되지 않습니다. 전쟁이란 게 그렇습니다. 그래서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도 없다’는 말이 실감이 됩니다.” 존스 대위의 말을 통해서 전쟁의 참상이 더 실감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존스 대위의 아버지가 미 육군 중장으로 당시 미 CIA의 부국장이란 사실이었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그렇게 실력자 아버지를 두었지만 그는 월남에 와서, 더구나 수색대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잠시 쉬지만 다시 수색대로 전방에 가야 한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아버지가 그렇게 유력한 분이라면 순환 보직 규정에 따라 후방에서 근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존스 대위는 웃으면서 “아버지를 잘 못 둬서 그렇게 못합니다. 아버지는 저더러 계속 수색대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사실 저도 완전히 아버지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게 올바른 자세이니까요.”
정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를 존스 대위와 그 아버지는 확실히 보여줬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우리나라는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나도 아직 멀었다’란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란 나라가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다. ‘존스 대위와 철모’는 그렇게 내 마음 속에 강하게 각인됐다. 지금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지도자들의 문제를 접할 때마다 핏발 선 눈으로 내게 이야기하던 존스 대위가 눈에 선하다. 아무튼 월남에서의 경험이 나의 사고와 삶의 지평을 넓혀줬다.
크리스천들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는 맡겨진 임무가 있다. 군대로 비유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보스다.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생의 보스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그 인생 상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분이 시킨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의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는 순종을 하고, 거기에 걸맞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이 시킨 일을 그대로 하는 것, 그것이 성공이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10) 귀국후 중령 예편… 해군 등에 獨 디젤엔진 공급
월남 파병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진해 해군 기지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72년에 1년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해군기지로 유학을 갔다. 미 해군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다. 나와 인도네시아 군인 등 2명의 외국인이 미군과 함께 공부했다. 70년대 초반 군인이 미국 유학을 가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 공부를 했던 것이 얼마나 내게 유익한 일이 됐던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미국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부러웠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 목적지로 가기까지 10차선이 넘는 길을 달렸다. 나를 태워준 미군이 “너희 나라에도 이런 길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세종로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다. 미군들의 생활도 우리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나는 ‘우리나라는 언제 이렇게 되나’고 생각하며 한탄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70년대 초반이었는데 30년 만에 우리나라도 미국과 견줘 전혀 뒤처지지 않는 생활환경이 됐다. 우리 민족은 정말 대단한 민족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이룬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간 머물면서도 나는 최대한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했다. 동시에 장소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의 전심을 쏟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일관된 나의 모토였다.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그분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실 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소령에서 중령이 될 때까지 ‘FMS(foreign military sales)’의 한국 측 담당관으로 일했다. 여전히 미군의 군사 원조가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지원이 삭감됐다. 점차 우리 돈으로 군대를 운영해야 했다. 나는 외국서 장비나 부품을 도입하는 일에 관여하다보니 점차 무역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독일의 세계적 엔진 업체인 ‘MTU’와 접촉이 많았다. 중령에 진급할 즈음 MTU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당시 우리나라는 급속하게 산업화되는 시기였고 거기에 따른 인력이 필요했다. 외항선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해군 출신들이 그 외항선의 선장과 기관장이 되었다. 외국의 선주들이 파격적 고임을 주면서 스카우트를 했다. 해군 내에서 “이러다 우리가 국제 선원양성소가 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전역 붐이 일어 동기생들은 대부분 제대했다. 나도 고민하다 MTU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했던 군 생활을 마친 것이다. 그 시절을 회상해보니 전혀 후회함이 없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 행복한 기간이었다.
나는 77년에 MTU 한국 지사장을 맡았다. 일반 기업에 오니 일단 수입이 많았다. 지사장을 맡자마자 군에서보다 4배나 더 많은 연봉을 받았다. 나는 해군과 각종 해양 업체에 MTU의 디젤 엔진을 공급했다. 시점이 잘 맞았는지, 하나님이 나를 축복의 그릇으로 쓰셨는지, 아무튼 사업은 눈부시게 성장해갔다. MTU 본사가 보기에 엄청난 실적을 올렸다. 83년부터는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MTU 본사는 회사 역사상 기록적인 실적을 올린 내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어느날 MTU 관계자가 “미스터 정이 그 탁월한 실력으로 독일 잠수함을 한국에 팔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제의했다. 사실 MTU는 잠수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나를 좋게 보고 내게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11) ‘잠수함 중개업’ 승승장구… 그곳에도 주님 섭리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태복음 10장 8절 말씀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다. 크리스천들에게 거저 받지 않은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은 청지기에 불과하다. 나는 평생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살고 있다. 거저 받았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MTU 한국지사장으로 승승장구하던 나는 “독일 잠수함 파는 일을 하면 어떻겠소”라는 MTU 관계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일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세계 잠수함 업계의 톱은 단연 독일의 하데베(HDW)사였다. MTU사에서는 아무 조건 없이 내가 잠수함도 팔 수 있게 회사를 설립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1983년 6월 내 고향 강원도 학산의 이름을 딴 ‘학산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에는 MTU사 지사장을 맡고 있었기에 존경하는 해군 선배를 사장으로 영입해서 회사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독일 하데베사와 한국 대리점 계약을 맺고 잠수함을 팔기 시작했다. 사업은 계속 커져갔다. 내 능력 이상으로 무언가가 부어지고 있었을 때 나는 자연스레 생각해 본다. ‘아,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일이다.’
86년 MTU 한국지사장 일을 그만두고 학산실업주식회사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이후 MTU의 디젤엔진과 하데베의 잠수함을 팔았다. 당시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척의 잠수함을 팔았다. 하데베에서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라고 말했다.
당시 MTU의 엔진이나 하데베의 잠수함 성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느 나라든 이들 회사의 제품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직하고 정확하게 제품을 소개만 하면 됐다. 평생을 코람데오(하나님의 마음 앞에서)의 심정으로 살아왔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온 지난 인생이다. 긴 세월 동안 사업을 전개하면서 부침을 경험할 수 있을 텐데도 이렇게 성공적으로 끌어온 것 자체가 내게는 은혜 위의 은혜다.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에게는 확고한 물질관이 있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라.” 웨슬리 목사님은 부를 얻는 자체를 문제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장 돈을 선하게 쓸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 물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선하게 유통을 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웨슬리 목사님의 말을 내 삶에 적용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 땅에서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지 않은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잠시 왔다 가는 인생길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선한 통로로 사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
이 지면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셨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사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 못할 것이다. 나는 지난 시절의 경험을 통해서 성공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춰 풀이한다. 성공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에서 하나님이 하라고 한 일을, 하나님이 하라고 한 방법대로, 하나님이 하라고 한 바로 그 시간에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과 성공과의 함수관계, 일종의 믿음 요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우리 회사의 성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 전반에서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린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12) 기도로 소명 물었더니 “미자립교회를 도와라”
지난 시절 가장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농어촌 목회자들을 조금이나마 도운 것이다. 물론 내가 한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통로로 해서 행하신 일이다. 1993년 1월부터 100개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매달 지원해 왔다. 매달 한 번도 빠짐없이 마음과 물질, 기도로 그들을 섬겼다.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나는 이 땅의 큰 교회는 모두 농어촌의 작은 교회에 강한 부담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 큰 교회의 모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농어촌의 작은 교회들이다. 시골 작은 교회의 희생을 통해서 도시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제 단위도 커지다보니 교회도 큰 기업과 같아지고 있다. 큰 교회에서는 익명성이 강하다. 목자가 양의 음성을 도저히 다 들을 수 없다. 나는 초대교회의 원형이 오늘날의 농어촌 작은 교회와 같다고 생각한다. 빌립보교회 등 성경 속 교회들은 몇 명의 신자들이 가정집에 모이면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농어촌 작은 교회를 ‘미완성 교회’ 혹은 미래의 더 큰 교회를 위해 준비 중인 교회로 여기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은 교회 자체가 바로 완성된 하나님의 교회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시 처가가 춘천에 있어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으로 몇 천평의 땅을 샀었다. 그래서 거기에 은퇴 목사님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살펴보니 병원이 멀었다. 병원이 있는 다른 곳에 부지를 마련하려 하니 돈이 너무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차에 잘 알고 지내던 감리교 선교부 총무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총무님은 “지금 한국 교회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미자립교회 문제입니다. 장로님이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미자립교회의 현황을 알려 달라”고 했다. 당시 전국 감리교 소속 교회 가운데 월 소득 30만원이 안 되는 교회가 1300개가 넘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 목회를 하는 줄 몰랐다. 거기에 내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2년 말 감리교 본부에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교회 100개를 선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교단 본부에서 100교회를 알려왔다. 1993년 1월부터 매달 지원을 시작했다. 금전적 지원뿐 아니라 각종 세미나도 열었다. 100개 교회 목회자 부부를 수안보파크호텔에 초청해 쉼을 갖게 했다. 곽선희 소망교회 원로 등 유명 목사님들의 강연도 듣게 해줬다.
나는 그들을 도우면서 미자립교회가 자립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했다. 물질로 그들을 돕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립이 중요했다. 당시 도움을 받던 미자립교회 목회자 가운데는 의식 있는 목사님들도 많았다. 그들은 자립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심사를 벌여 프로젝트당 300만원씩 지원하며 자립을 유도했다.
나는 사업상 독일을 자주 다녔다. 독일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면 도시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시골로 가면 사정이 달라졌다. 독일과 한국의 농어촌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도시와 시골의 삶의 질이 비슷하다. 대학들도 전국에 산재해 있고 마을마다 잔디구장이 깔려 있다. 시골에도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의 시골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나라가 참다운 선진국이 되려면 농어촌에서 도시로 온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13) “박 대통령님, 농어촌이 살아야 한국이 삽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되면 “농어촌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농어촌이 선진화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 된다. 한쪽만 성장하면 안 된다. 참된 선진국은 도시와 농어촌이 균형 있게 발전된 국가다.
지금 우리의 농어촌에 아기 우는 소리가 끊어진 지 오래 되었다. 젊은 층이 도시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 목욕시켜 드리고, 그들의 땀을 닦아 주는 분들은 아들과 손자가 아니라 현지의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다. 어쩔 수 없이 경쟁에 밀려 시골로 온 분들도 계시지만 많은 목사님들이 시골을 지키기 위한 사명감으로 농어촌에서 정주(定住) 목회를 펼치고 있다. 그런 목회자들은 자존감이 높다. 비록 삶은 열악하지만 신학적·신앙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분들이다. 감리교회에서 담임을 하기 위해서는 개척 목회를 해야 한다. 그래서 안수 받기 위해서 시골 교회에서 사역하다 사명을 발견하고 머무르는 분들도 많다. 우리가 돕고 있는 100교회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그런 목회자들이 계시는 교회들이다.
매년 미자립 상태에서 자립으로 성장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태생적으로 평생 미자립일 수밖에 없는 교회들도 있다. 도저히 성장할 수 없는 지역이지만 교회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지역일수록 교회 역할은 크다. 농어촌 어르신들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주는 분들이 바로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다. 열악한 농어촌지역에서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나는 우리의 시골이 독일과 같이 도시와 큰 차이 없이 윤택해져서 수많은 도시로 간 청년들이 다시 고향으로 유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시점이 되면 시골의 작은 교회들도 자립과 성장의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도시의 큰 교회들이 농어촌 착은 교회들을 도와야 한다. 그들이 마을 주민들의 영적·육적인 소망으로서 끝까지 자리할 수 있도록 힘을 줘야 한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다. 나는 이 공동체란 말을 좋아한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는 빈부귀천이 없었다. 모든 것을 유무상통했다. 아름다운 연대가 이뤄졌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에서는 빈익빈 부익부현상이 사회보다 더 크다. 굳이 사회학적 통계를 들이 대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도시의 대형교회와 시골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삶을 보면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같은 하나님의 종인데도 현실에서 그들 삶의 차이는 현격하다. 전 세계 10대 대형 교회 가운데 7개가 대한민국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농어촌교회는 왜 피폐되어 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실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이런 불균형을 해소시켜 농어촌교회에 날개를 달아줘야 한다.
나는 부족하지만 농어촌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사업은 어떤 경우에도 지속할 생각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묵묵히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농어촌교회를 지키는 목회자들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다. 그분들과의 개인적 교제가 나를 성장시켰다. 얼마나 가슴 뿌듯한지 모른다. 작은교회 목회자, 사모님들과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많이도 울었다. 갈릴리 선상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이 땅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에게 회복의 영이 임하기를 기도했다. 베드로수위권 교회를 방문할 때에는 낙망해 있는 제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의 말씀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한국 교회가 사랑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길 바란다. 나는 꿈꾼다. 도시와 농어촌교회들이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사랑이 깃든 한국 교회를.
***[역경의 열매] 정의승 (14) ‘하나님·나라·평화 위해’ 해양전략연구소 설립
내가 관심을 쏟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해양이다. 바다는 늘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향한 열망은 드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소망과 연결된다. 1997년 2월 1일, 바다를 아는 지식 함양과 바다를 경영하는 능력 배양, 그리고 바다를 지키는 힘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재단법인 ‘한국해양전략연구소(Korea Institute for Maritime Strategy)’를 설립했다. ‘하나님을 위하여(For God), 나라를 위하여(For Nation), 평화를 위하여(For Peace)’가 법인의 설립 모토다.
바다는 과학이 아직까지 그 신비를 다 파헤치지 못한 지구상의 유일한 대상이자 지금은 이해당사국 간 대륙붕 경계획정 문제, 영유권 문제, 어로구역 조정 문제, 이어도와 같은 관할권 문제 등으로 국가의 사활이 걸린 치열한 다툼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그동안 폐지됐던 해양수산부가 부활한 것만 봐도 바다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내가 해양전략을 연구하기 위해 순수한 민간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독일의 한 비행기 안에서 비롯됐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초, 사업차 유럽 출장 중 독일 함부르크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탑승, 기내에서 헤럴드 트리뷴(Herald Tribune)지를 보게 됐다, 신문에는 휴렛팩커드사의 공동창업자인 데이비드 팩커드(David Packard)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팩커드는 부인과 자녀들의 동의 아래 자신의 막대한 전 재산을 팩커드재단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미래 인류의 번영이나 멸망, 그리고 운명까지 바다에 달려 있기 때문에 바다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바다를 연구하는 일에 기여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기사를 읽고 충격에 가까운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아, 이 사람은 바다와 어떤 인연이 있기에 바다를 연구하는 일에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었는가. 에너지를 위시한 육상 자원이 심각하게 고갈되어 가고 있는 현실 때문에 우리나라는 물론 인류의 미래도 바다에 달려 있다고 공감하고 있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인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을 찾으려 하자 갑자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구소 설립의 구상은 그때 이래로 그 질문을 곱씹는 과정에서 조금씩 다듬어져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연구소 설립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 이후 이성호 김영관 함명수와 같은 역대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의 원로들과 이상우(서강대) 박춘호(고려대) 김달중(연세대) 이서항(외교연구원) 교수 등 학계인사, 윤혁기 SBS방송사장, 안병훈 조선일보 전무, 현소환 YTN 사장 등 언론계 인사 및 정부·정계인사 등 50여명에 달하는 많은 인사와 면담을 통해 연구소에 대한 밑그림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연구소 개소까지는 여러 절차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원만하게 진행됐다. 드디어 1997년 2월 1일 나를 이사장으로, 정준호 전 국방부 차관이자 국방대학교 교수를 초대소장으로, 차흥균 사무국장과 이춘근 박사를 연구실장으로 하는 한국해양전략연구소가 이 땅에 태어났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탄생한 연구소였다. 하나님의 크신 뜻이 이 연구소의 앞길에도 넘치게 임할 것을 믿는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15) ‘바다’ 향한 평생의 기도에 늘 응답해주신 주님
1997년 7월 4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연구소 개소를 기념한 첫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해양수산부장관이 격려사를 해주셨고 10명의 전문가들이 발표했다. 22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한국의 해양문제’라는 주제 하에 ‘한국의 해운문제’ ‘신해양법시대 한반도 주변의 해양문제’ ‘주변국의 해양전략과 한국 해양력의 발전방향’ 등을 구체적으로 다뤘다. 국내 언론들이 집중적으로 조명, 일반 대중들에게 연구소의 존재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후 연구소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체계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지금은 20여명의 비상근 선임연구위원들이 해양전략, 해군전력, 국가안보, 해양법, 해양역사 등 5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연구소는 국제 및 국내 학술대회, 전문가 워크숍, 손원일 포럼, KIMS 모닝포럼, 학술지 및 학술총서 발행, 해양사상을 고취시키고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전국 대학생 및 대학원생 대상 해양학술논문 공모 행사,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소식지 발간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서울에서 미국 해군분석센터(CNA)와 공동으로 ‘안보환경 변화와 북한의 군사위협’이라는 제목으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지난 3월에는 천안함 폭침 3주기를 맞이해 해병대전략연구소 및 한국군사문제연구원과 공동으로 국내안보세미나를 개최했다.
역대상 4장 10절은 ‘야베스의 기도’로 잘 알려져 있다. 야베스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기도 그대로 야베스의 지경을 넓히셨다. 참으로 위로 올라간 기도는 반드시 응답으로 땅으로 내려온다. 돌이켜보니 내 인생은 그런 경험의 연속이었다. 이와 같이 연구소의 지경은 갈수록 넓어갔다. 이제 활동영역을 전 세계로 넓혀가기 위해 세계 유수의 기관들과 각종 학술활동을 공동으로 주최하고,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협력을 강화해가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해양정책연구소인 콜벳센터, 미국의 해군분석센터(CNA), 호주의 해양력센터(SPC)와는 MOU를 체결, 활발하게 협력하고 있고,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와 헤리티지재단의 학자들을 초빙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재산을 연구소 발전을 위해 기부해왔다. 여기에는 내가 살던 집터도 포함돼 있다. 지금 연구소 건물은 우리 집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20여년 전 독일의 비행기 안에서 꿈꿨던 소망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 다시 한번 좋으신 하나님께서 손을 꼭 잡고 인도해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3면이 바다이고 북으로는 휴전선에 가로막혀 실질적으로는 섬나라와 같은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국운이 융성해 자자손손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바다를 잘 활용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한국해양전략연구소가 다방면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치기를 기도하고 있다. 장차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을 넘어서는 세계 최고의 연구소가 되기를 매일 아침 좋으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연구소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분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 감사를 드리고 싶다. 초창기 고문으로 위촉된 이맹기 전 해군참모총장, 김영관 전 해군참모총장,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 민병천 서경대학 총장, 그리고 정진태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사회생활 및 인생의 경험이 많았던 그분들의 도움 덕분에 연구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되돌아보니 감사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16) “인재를 키우자” 창업과 동시에 장학재단 설립
나는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인재를 키우는 일이라고 믿는다. 사실 사람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업은 없을 것이다. 특히 소외된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사업은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실 일이다. 나 스스로가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분투,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이 간다.
1983년 창업과 동시에 장학사업을 실시했다. 당시 인쇄소를 경영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금박으로 된 장학증서를 갖고 모교의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우양장학재단의 장학금 배정 비율은 일반 학생 20%, 시설출신 학생 40%, 탈북 청소년 및 청년 40%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장학재단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탈북 청년들을 대상으로 가장 활발한 장학사업을 펼치는 곳이 우양재단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시대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 탈북 청소년과 청년 문제라고 본다.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넘어 한국에 왔지만 막상 이곳에서도 평안한 낙원의 삶이 전개되지 않는다. 냉혹한 생존의 현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극동방송 운영위원을 하면서 철의 장막(구소련)과 죽의 장막(중국)을 향한 방송 선교 사역을 펼쳤다. 당시 우리의 관심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쏘는 선교 방송을 청취하고 있는가’였다.
1980년대 중반에 중국의 심양 등지에 있는 조선족 동포 가운데 20여명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 연수를 떠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어렵사리 그 정보를 미리 알게 되어 그중 두 명을 비공식적으로 한국에 초청했다. 그들은 한국에 와서 “남한이 이렇게 잘살 줄 몰랐다”면서 천국과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매 주일 라디오를 켜서 극동방송이 송출한 선교 방송을 듣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의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감격해했다.
마지막 날, 저녁식사를 하면서 나는 천국과 같은 남한을 떠나야 하는 그들을 보며 가슴이 아파 한마디 했다. “모두들 가족들과 여기 오셔서 함께 사시면 좋을 텐데요….”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정색하며 “우리는 여기 안 살 겁네다. 여기 내려와도 못 삽네다”라고 말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들은 남한이 분명 천국 같은 곳이지만 이미 공산 체제에 익숙한 자신들은 내려와 살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었다.
“남한에 와도 못 삽네다”라는 그 말이 평생 가슴에 남았다. ‘아, 북한이나 중국 동포들에게는 남한에 와서 몸 붙이고 사는 것 자체가 엄청난 난관이겠구나.’
사업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북한에서 온 청년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 이미 많은 도움의 사업을 펼치고 있었지만 탈북 청년들을 돕는 일만은 꼭 하기 원했다. 남한의 시설 출신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탈북 청년들에 비하면 생활력이 있었다. 북한에서 온 청년들은 열등의식이 강하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재단에서는 1990년대부터 그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매년 세미나를 통해서 남한에 정착한 탈북 청년들의 애로점도 파악하고 책도 내기 시작했다. 지금 국내에서 청년 실업이 심각한 문제인 가운데 탈북 청년들의 취업전선이 어떠한지도 계속 추적하고 있다. 또한 대한축구협회의 도움을 받아 탈북 청년들끼리 대항하는 통일축구대회를 열고 있다. 마침 해군사관학교 후배였던 이갑진 전 해병대사령관이 축구협회 부회장이었다. 이 부회장은 10명의 정식 심판을 파견해 주었다. 일년 내내 예선을 거처 결승 토너먼트에는 10팀이 올라온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탈북 청년들끼리 강한 연대의식이 형성된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17) 우양재단, 탈북청년들 ‘3苦’ 해결에 올인하다
통일축구대회 이외에도 ‘라운드 테이블 토크(RTT·Round Table Talk)’라는 이름으로 탈북 청년 대표자들을 초청, 대화하는 모임도 갖고 있다. 남한에 내려온 탈북 청년들은 처음 1, 2년 동안은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한참 시간이 지나야 심리적인 측면에서 북한 체제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듯하다.
RTT를 하다보면 탈북 청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줘야 할지 알게 된다. 탈북 청년들은 주로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먼저 컴퓨터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가 영어 습득이다. 세 번째는 결혼 문제다. 남한에선 결혼 비용이 너무나 높게 든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우양재단에서는 통일원 및 대형 컴퓨터 회사와 접촉, 컴퓨터 문제를 해결해 줬다. 또한 재단은 2010년 12월 파고다어학원과 탈북 청년들의 어학교육 지원을 위한 MOU를 체결해서 탈북 청년들이 원활하게 영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지난 2년여 동안 약 1500명의 탈북청년들이 도움을 받았다. 탈북 청년들은 학습 의지가 강해 조금 교육을 받으면 영어도 곧잘 하게 된다. 재단은 ‘탈북청년 영어 말하기 대회’ 등도 열어서 영어 습득 동기를 유발해 주기도 했다.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다. 파고다어학원의 박경실 대표도 “이런 일이야말로 교육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의미 있는 사업”이라면서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나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을 늘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성공은 이 땅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면 ‘우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도시의 화려함 속에서도 어둠의 그늘이 없는 곳이 없다. 나는 늘 그 어둠 속 그늘을 생각해 보았다. 그늘을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그 그늘을 제거해 주고 싶었다. 신자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을 찾아 가야 한다. 나는 이 시대에 주님의 마음은 늘 소외된 자들에게 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난 우리 주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잃어버린 영혼. 빈들에서 서성거리는 초라한 사람들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도 그 주님의 마음을 따르기로 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로 했다. 비록 부족하지만 나의 재능과 재산, 명예 등 지닌 모든 것을 갖고 주님의 마음을 좇기로 했다. 그 마음을 좇을 때에 마음의 평강이 온다.
우양재단은 그동안 농어촌교회 지원, 시설 및 탈북 청년 후원, 장학사업, 독거노인 지원 등 다양한 돌봄 사역을 펼쳤다. 그 모든 사업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비록 나에겐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았지만 후회함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했고 그 사랑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해서 살아온 지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성경 요엘서 2장 2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 나는 지금도 꿈꾼다. 하나님의 영이 사랑하는 조국 땅에 넘치게 흘러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이상을 볼 수 있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잡고 나눔의 대열에 합세, 이 땅에 사랑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날이 오기를.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부둥켜안고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만방에 알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 꿈이 나를 오늘도 달리게 한다.
***[역경의 열매] 정의승 (18·끝)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길’ 그대로 따르는 것
누군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재단 건물 근처에 내비게이토 선교회가 있다. 선교회 입구에 ‘그를 알고, 그를 알게 한다(to know him and to make him known)’는 캐치프레이즈가 적혀 있다. 나는 매일 출근하면서 그 말을 생각해 본다. 정말 생명의 주님을 알고, 그 주님을 알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생에서 어디 있을까 싶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바울의 삶을 바꾼 것 같이 고등학교 시절에 예수님을 만나고 이후 해군 중위 시절 김판봉이란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하나님 임재에 대한 체험을 한 것이 내 인생을 바꿨다. 그 이후 나의 인생은 그분의 길(The Way)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가뭄을 끝내주셨다. 그분 안에서 결핍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항상 겸손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누릴 수 있지만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비행기도 늘 이코노미석을 탔다. 비즈니스석을 타기 시작한 것도 척추에 무리가 간 뒤부터였다. 남들로부터 ‘돈 가지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하나님 보기에 더 유용한 일에 쓰고 싶었다.
아내(유정자 권사)와 네 명의 딸들도 모두 나와 비슷하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온 아내는 가정적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 절대로 사치를 하지 않는다. 버스와 전철을 즐겨 탄다. 내가 불편할 정도로 검소하다. 때론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을 정도다. 호텔에서 식사하는 것보다 청국장 한 그릇 먹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에게도 그런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다. 나름대로 모두 좋은 대학을 나오고 능력도 있어 한없이 누릴 수 있지만, 절제할 수 있는 그 마음가짐이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이들에게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라”고 말했다. 인생에는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하나님의 엄청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나의 교육 방법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시리로다”는 시편 23편 말씀은 내 인생의 구절이다. 또한 “주를 믿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장 28절도 좋아하는 요절이다. 정말 그랬다. 내 인생 여정 길을 뒤돌아볼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나의 목자셨다. 나는 그 목자의 지침대로만 살면 됐다. 그 목자 되시는 여호와 안에서 우리는 결코 부족함을 느낄 수 없다. 물론 인생길은 결코 간단치 않다. 고난의 바다와 같다. 까닭 모를 환난에 괴로워하기 쉽다. 그러나 그분 앞에 설 때에 인생의 모든 아이러니는 해결될 것이다. 우리를 맞아 주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생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해설해 주시리라.
내가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가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란 곡이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르틴 루터가 작사한 곡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우리 주님은 강한 성과 같다. 그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우리는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내 인생을 되돌아본다. 감사밖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지난날이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한 가지는 오직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통과되는 통로로서 살아가고 싶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그분만이 우리 소망의 원천이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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